그 형은 정혼자가 있었습니다.
그 형보다 네살 어렸던,
물론 거대한 재벌간의 사전 정혼이나 그런건 아니고
그저 어릴때부터 친했던 집안 어른끼리 술자리에서 “야 니네 딸 크면 우리 아들이랑 결혼 시키자” 라는 둥의
농담이 시간이 흐르며 진담 비슷하게 분위기가 바뀌고,
결국 농반진반으로 응고되어 인연의 고리로 고착화 되어 버리는 그런 수준 이었죠.
어릴 때부터 자주 보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가끔 일년에 한두번 정도 가족 끼리 같이 놀러 갈 때 마주 친다거나.
그나마 부모님들이 정혼자 라는 타이틀을 붙여 짖꿏게 놀려 대는 바람에 정작 마주치면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게 되는 그런 정도의 데면한 사이 였지만,
그런 어린시절 부터의 인연 때문인지 형에게 그 여자는 ‘순수함’의 정표로 계속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본인의 방탕한 생활은……..
그저 ‘다른 생활의 일부’로 치부 하더군요.
‘결혼은 꼭 그 여자와 할거다’ 라거나,
‘결혼하게 되면 그 여자에게만 충실 할거다’ 라는 말도 자주 했었지요.
저는 ‘개가 똥을 끊지’ 라는 말로 콧방귀도 안뀌었지만
그 형의 그때 그 말 자체에는 순수한 결기 같은 것이 제법 뚝뚝 베어 나왔습니다.
물론, 제 버릇 개 주겠냐 마는…………..
이 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취직을 하게 되자
본격적인 결혼 얘기가 나왔습니다.
싫지 않았던 두 사람은 적당히 수줍은 척 했고, 적당히 놀라는 척 하다가,
결국 본인들의 마뜩찮은 의견과는 부합하지 않으나 부모들의 굳은 의지 때문에 등 떠밀려
어쩔수 없이 ‘효도심’의 발로로 만난다는 요식 행위를 거친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 둘이 데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일요일 오후 적당한 시간에 만나
첫 데이트, 첫 식사로 손색이 없는 어느 특급 호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은후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 형의 일상적인 패턴이었다면 ‘밥’ 을 먹고 ‘술’ 로 취하고 ‘숙박’을 하고, 바로 그 한 건물에서 모든
걸 해결 할수 있었을 텐데……..
각설하고,
일요일 오후 계획없이 영화를 보려니 당시 인기 있었던 영화들은 대부분 자리가 없었고 그냥 재미는 없지만
좌석이 남아 있던 영화를 끊어 들어 갔다고 하더군요.
그 형이 두번째 열에 그 여자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바로 앞자리에 남자 때문에 계속 신경이 거슬 리더
랍니다.
그 앞자리 남자는 분명 혼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다 대고 뭐라 뭐라 말을 하는 시늉을 하더래요.
처음에는 틱 장애 같은게 있으려나? 싶어 그냥 넘어 갔는데 나중에 너무 이상해서 혹시 앞자리에 쪼그만
얘가 앉았나 싶어 고개를 빼서 앞자리를 들여다 보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는군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남자는 계속 옆자리에 마치 사람한테 속삭이는 것마냥 귓속말 하듯 중얼 거리고
영화가 진행 되는 내내 그런 상황이 펼쳐지자 점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옆자리 여자 에게 말하기도 좀 껄끄럽고 해서 그냥 재미 없는 영화를 보다가 어쩌다 문득 앞자리를 흘끔
봤는데………..
그 형의 표현을 빌자면 진짜 너무 놀라서 “똥 쌀뻔 했다” 고 하더군요.
앞 좌석 등받이 공간 사이로 얼굴이 새하얀 여자가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자기를 쳐다보고 웃고 있더
랍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순간 자기 앞자리 남자도 자기에게 고개를 스윽 돌려서 쳐다 보더니 ‘피식’ 하고 웃더 래요
너무 섬찟한 기분에 극장에서 ‘어헉’ 하고 소리를 냈다는 군요.
그리곤 너무 불쾌해서 정혼자에게 나가자고 말 한후 극장을 빠져 나왔답니다.
정혼자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오고 말이죠.
극장을 나오고 나서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되더랍니다.
자기가 혹 무슨 착각을 했나 싶어 되짚어 봐도 그 여자 얼굴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 무슨 착각이나
착시를 보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말이죠.
그 날은 너무 어수선한 정신에 그 여자를 집에 보내고 그냥 들어 갔답니다.
그 얘기를 듣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게 무서운 얘기야? 별거 아니네”
그러자 그 형이 그러더군요.
“아니, 무서운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