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는 불 꺼진 사무실 한 켠에 서 있었다.
눈물을 보일 것 같이 글썽거리며 작별인사를 전했던 직원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흔들며 울부짖고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 아무리 힘드셔도 목을 매시면 어떡해요."
시계를 보니 여덞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이었다.
아,
녀석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간 후 난 목을 맸지.
시간은 그때부터 단 삼십 분이 지난 후 였다.
그럼 여태까지 단 삼십 분이 흘렀을 뿐이란 말인가?
잊혀졌던 기억이 떠 올랐다.
천정 텍스 타일에 목을 매려고 생각해 보니 몸무게를 지탱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벽에 걸려 있던 옷 걸이에 넥타이를 매고 목을 걸었다.
옷걸이는 콘크리트 벽에 아주 튼튼히 고정 돼 있었다.
퇴근하다 다시 돌아온 녀석은 벽에서 목을 맨 나를 다시 내린듯 하다.
녀석은 심폐 소생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도 내 옆에 있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히히힉, 죽어 빨리 죽어. 오빠 나랑 같이 손잡고 빨리 가자.
나를 살리려는 녀석도 필사적이고 내 남은 명을 끊으려는 그녀도 필사적 이었다.
한 명은 나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고 다른 한 명은 나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이구나.
두 사람은 내 몸을 두고 동상이몽에 꿈을 꾸며 필사적 이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내고 있는 모양새는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내 몸으로 걸어가 내 목을 조이고 있던 그녀 팔을 잡았다.
그녀는 내 존재를 알아 차렸는지 나를 올려다 보고 웃음 지었다.
오빠, 오빠. 이제 완전히 갈 수 있는거야? 빨리 가자.
나는 그녀 팔목을 잡은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나는 조금 있다 갈게. 조금만 있다가.
그녀 얼굴이 괴이하게 변했다.
뭐라는 거야. 지금 같이 가야지. 나 혼자 무서운데 내버려 둘거야?
이상하게 그녀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수도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그녀를 달랬다.
조금만 참아. 내가 아직 여기서 정리할게 있거든. 금방 따라갈게.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
그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말 없이 안았다.
심폐 소생을 시도 하던 직원 녀석은 어디론가 전화 했다.
"네, 네 여기 사람이.....위급 합니다. 네. 아니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긴 하구요..........."
나는 한 켠에 쓰러져 있는 내 몸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 그녀 얼굴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같이 손 잡고 가자.
좋아 그럼. 그런데 오빠 살아있는 동안 내가 옆에서 계속 머물면서 맴돌거야. 괜찮지?
나는 그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14
회사 투자자는 결국 발을 뻇다.
그런데.
인수자가 나타났다.
대기업 이었고 대기업다운 통큰 금액을 제시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러가지 계약사항들을 마무리하고 최종 계약하기까지 여러 작은 문제들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어찌됐건 나는 평생 직장 생활을 해도 꿈 꿀 수 없는 금액을 손에 쥔 채 회사를 넘겼다.
나는 내 목숨을 살려준 직원을 데리고 다시 회사를 차렸다.
아파트도 몇 채 샀고 오피스텔 몇 채도 내이름으로 생겼으며, 누가봐도 좋은 독일 차를 지니게 됐다.
진산 거사를 만나러 원주로 향하던 그 날은 날이 유독 좋았다.
진산 거사가 좋아하는 한우 세트를 샀고 유독 좋아 한다는 증류주도 박스로 챙겼다.
"허허 이 놈. 문턱에 걸쳐 있던 놈이 아주 신수가 훤해져 찾아왔네?"
진산 거사는 그렇게 말했다.
"거사님 덕분 입니다."
나는 들고 온 선물을 전했고 진산 거사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래, 그래. 그래도 네가 싸가지 없긴 해도 예의가 뭔지는 아는 놈이구나."
방으로 들어가 진산 거사 앞에 마주 앉은 나는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거사님 이거 매번 신세만 져서 제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진산 거사는 봉투 속 내용물을 짐작한듯 껄껄 웃었다.
"어라? 이 놈봐라? 이 놈 이거 오늘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감사 인사 전하러 온게 아닌것 같네?"
진산 거사는 봉투를 들고 대충 두께를 재 보는듯 했다.
"이거 봐라. 이거. 세상 인사에는 정도 라는게 있는데 이정도 두께면 나한테 바라는게 따로 있을 것 같은데?"
진산 거사는 대충 짐작 하고 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아, 저 그게 거사님. 하하. 저도 이제 대충 먹고 살만하고. 뭐랄까.
아무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기왕 살려면 잘 살아야죠.
이게 뭐, 제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 주위로 귀신이 왔다갔다 하는게 좋은 일도 아니고.....뭐.
이걸 해결 해줄 사람으로 아무래도 진산 거사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짐작 하셨겠지만 여자 영가 하나가 제 주위를 맴도는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어울리는건 아닌것 같고.
지금 제 골치아픈 문제 하나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아주 섭섭하지 않게 후사해 드릴 생각 입니다."
말을 하다 겸연쩍어진 나는 시선을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으로 봄 고운 햇살들이 촘촘히 부서져 내려 앉고 있었다.
15.
인생은 길지 않다.
그렇다고 짧지도 않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쥐지 못 했을 때 삶의 길이와
무언가를 잔뜩 손에 쥐게 됐을 때 체감하는 삶의 길이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길고 길어 지난 할 것 같던 내 삶은 아주 짧게 마감될 수도 있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이 아주 길어지길 원한다.
아주 짧을수도 있었던 내 인생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게 되긴 했지만
언제 또 무슨 이상한 일이 내게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어 오자.
가끔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내가 원했던 게 아니다.
마주친 그들은 공통적으로 내게 한심하고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온다.
사실 나는 아직도 삶과 죽음 그 어딘가 경계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그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