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4+9 10+1 6+1+12 19+2
- 12+1 16+21 16+9 >
벌써 10년 째 거르지 않고 집에 우송되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아무런 글자도 없다. 단지 무의미해 보이는 숫자들의 나열일 뿐.
어떠한 내용도,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수취인이 그 편
지를 받아 보는 데에 의미 아닌 의미를 둘 뿐.
내 이름은 타츠마나 아키라.
아키라라는 이름은 남녀 모두에게 쓰이는 이름인데, 나는 남자이다.
철부지 시절 때 나는 내 이름의 특이함을 놀리는 친구들의 장난에 말대꾸 한 번 못 섞을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한 명의 히로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큰 눈망울에, 오똑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콧대의 능선을 따라 뚜렷한 인중과 작지만 아름다운 입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그 위로는 옅고 긴, 누에 같은 아미가 한 일(一) 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서구인 같은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
한 마디로 그 나이 또래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여자 아이였다.
많은 아이들이 그녀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뭇 남학생들의 상상 속 음란세계의 여주인공이었고,
나 역시 그녀를 상대로 수음의 첫 딱지를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소심했던 터라 일종의 암호문 비슷한 것을 만들어 썼다.
상대방이 알아보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보단, 내 마음이 발각되었을 때의 당혹감이 내겐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암호에 내 순정을 의지해야 했다.
무려 이틀에 걸쳐 나는 그 편지를 썼고, 탈진한 스프린터의 심정으로 그녀의 책상 서랍 밑에 그 편지를 넣어두었다.
당연하게도(?) 응답은 없었다. 며칠이, 몇 주가, 몇 달이 지나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장난질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읽어보지조차 않았는지도.
그렇게 나의 첫 사랑은 싹이 돋기도 전에 매말랐고,
바쁜 현실 속에서 내 기억의 서랍 속에선 그 애틋한 기억 한 토막이 천천히 증발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쓰디쓴 미소만 지어질 뿐이다.
이제 그녀는 내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곳에 있다.
그녀는 나의 첫 사랑이고 영원한 첫 사랑이다.
물론,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5년 전에 암사슴 같은 여자와 결혼했다.
아내는 혼인신고를 마친 지 불과 6개월 만에 나를 남편이자 아빠로 승진시켜 주었다.
부족함이 많은 내겐 참으로 복덩어리 같은, 참 고마운 여자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툰 단점을 글과 문장으로 극복해 나간 경험을 바탕으로
꽤 잘 나가는 소설가로서 입지를 서서히 다져가고 있는 중이다.
한 마디로 자식 한 명 쯤 더 나아도 세 명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모든 교육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을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길었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나는 말했다시피 이 발신인불명의 편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편지는 매번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누군가의 허무한 장난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장난질은 사악한 음모로 차차 변모해 갔다.
어느 날 여지껏 봐왔던 그 편지 봉투가 우편함에 꽂혀 있는 걸 목격했다.
습관처럼 봉투를 뜯은 나는, 그러나 깜짝 놀랐다.
편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 3+5 7+14 19+2!
- 12+1 16+21 16+9 >
편지지에는 잔뜩 꾸긴 듯한 흔적이 이곳저곳에 역력했다.
마치 발신인의 보이지 않는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한 듯.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니,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편지는 계속되었다.
<3+1 9+19+3 3+9+7!>이라든가, <12+13+12 10+5 7+9+10 19+4!> 같은 내용의 편지는 주구장창 계속되었다.
그와 짝을 맞춘, 나의 침묵도 계속되었다.
음모는 드디어, 불행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모처럼 지인과 술을 진탕 마시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울고 있었다.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다쳤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오른쪽 팔꿈치 밑이 멍이 들어 있었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흔적도 보였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8+9+1 10+14 10+21 13+1+1>의 편지가 우송된 날이기도 했다.
다음 날은 둘째 딸이 봉변을 당했다. 내리막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일이다.
다행이도 사고는 면했지만 장딴지에 한 일 자로 자국이 남았다.
<4+1 12+19+7 12+19+3 12+1 3+2>
그 날의 편지 내용이었다.
<8+14+3 3+9 6+19+6 7+5+7 15+14 6+7 7+7+3 XX 10+1+3 12+19 6+9...>
나는 미친듯이 XX 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암호였다.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던 나는 언제나 남들이 쉬이 알아보지 못하는 암호에 내 마음을 숨겨야 했다.
암호는 나의 위장복이었으며 나의 투명 망토였다.
나의 암호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황하거나 머리를 싸맸고, 나는 나의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의 마음이 들통나는 것을 더 신경썼던 아이였다.
그녀 역시 그랬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암호를 푼 것이다.
그리고 매년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것은 암호였다.
하지만 매우 간단한, 암호였다.
다음은 국어사전에 올릴 적의 자모 순서이다.
자음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모음 ㅏ ㅒ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한편,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 중에는 알파벳 A부터 Z까지에 숫자 1부터 26까지를 순서대로 대응시켜 만든 암호문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응용하여 자음 ㄱ부터 ㅎ까지를 숫자 1부터 19, 모음 ㅏ부터 ㅣ까지를 숫자 1부터 21에 각각 대응시키면 된다.
즉, 맨 위의 편지 내용을 해석하면,
< 3(ㄴ)+1(ㅏ) 4(ㄷ)+9(ㅗ) 10(ㅅ)+1(ㅏ) 6(ㄹ)+1(ㅏ)+12(ㅇ) 19(ㅎ)+2(ㅐ)
- 12(ㅇ)+1(ㅏ) 16(ㅋ)+21(ㅣ) 16(ㅋ)+9(ㅗ) >
= 나 도 사 랑 해 - 아 키 코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내용들도 해석하면,
< 3+5 7+14 19+2!
- 12+1 16+21 16+9 >
= 너 무 해! - 아 키 코
<3+1 9+19+3 3+9+7!>
= 나 쁜 놈!
<12+13+12 10+5 7+9+10 19+4!>
= 용 서 못 해!
<8+9+1 10+14 10+21 13+1+1>
= 복 수 시 작
<4+1 12+19+7 12+19+3 12+1 3+2>
= 다 음 은 아 내
<8+14+3 3+9 6+19+6 7+5+7 15+14 6+7 7+7+3 XX 10+1+3 12+19 6+9...>
= 분 노 를 멈 추 려 면 XX 산 으 로...
숨이 턱끝까지 찼다.
저 멀리 가드레일이 보였다.
그녀는 그 가드레일 바깥쪽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흘깃 노려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었고, 화상자국까지 있었다.
나는 울부짖었다.
<제발 그만해! 넌 이미 10년 전에 죽었잖아! 대체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