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길지 않다. 그렇다고 짧지도 않다. 3

hyundc 작성일 23.08.22 23: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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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녀와 만난 건 독서 모임이었다.  

나는 온라인 문학 동호회 가입해 있었는데 가입만 해 놓은 상태지 활동을 열심히 했던 건 아니었다.  

그 날 오프 모임을 나가게 된건 까뮈 때문이었다.  

'이방인'에 대한 합평회를 한다고 했다.  

이방인에 대해서 라면 일주일 내내 혼자 떠들 수도 있다.  

이방인 속 문장들은 쇳덩어리보다 무거운데 불구하고 달콤하고 시큼했다.  

동호회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 한다는 게 꺼려지긴 하지만 마침 모임 장소도 회사와 가까워 그 날 모임만은 참석하기로 했다.  

그 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모임은 나를 포함한 남자 다섯 명과 여자 두 명이 참석했다.  

까뮈의 달콤하고 시큼한 문장들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란 기대는 십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멀끔하게 멋을 내고 나온 남자들 신경은 참석한 두 명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아니, 사실 두 여자라고 하기보다 한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여자 한 명은 덩치가 까뮈가 쓴 글 질량 보다 더 커 보였다.  

그녀는 이방인을 읽지 않았노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비슷한 덩치 남자 하나가 오오~ 사실 나도 안 읽었는데라고 말했다)

사실 까뮈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요즘 나온 아이돌 이름인지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술은 언제 먹으러 가냐고 물었고, 오늘은 꼭 황소곱창으로 가자고 했다.

회색 스트라이프 양복을 멀끔하게 입은 남자가 곱창은 비싸다고 말하자 어머, 대기업 다니는 엘리트 오빠가 째째 하기는 이라고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까뮈와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그 대화에 합평회 라는 말을 써야할지는 모르겠다.  

남자들이 이방인 속 문장에 대해 이야기 하면 막바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왔던 그녀에게 난타 당했는데

그녀는 발표에 잘못된 곳을 찾아 거침없이 남자들을 면박줬다.  

나 이외 다른 사람들은 사전에 자주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그 모임에 여왕이자 폭군이었다.  

어쩐 일인지 남자들은 그녀의 면박 한마디, 한마디에 황송해 했다.  

뿔테 안경을 낀 남자는 그녀가 가시 돋힌 면박을 줄때 마다 뒤통수를 긁으며 헤헤 거렸다.  

나중에 얼굴까지 벌개지며 헤헤 거렸는데 자존감이 짓밟혀 수치스럽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했다.  

그녀는 심플하게 몸에 딱 붙는 A라인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하얀 머리띠까지 흰색이여서 인상 깊었으며 쌍꺼풀이진 큰 눈을 하고 있었다.

 

합평회는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마무리 됐다.  

나는 모임에서 별다른 말을 한 기억이 없다.  

일단 이런 형태 모임에 참여한 것 자체가 실수 였다고 생각 했던 것이 컸고

여왕벌 행세를 하던 그녀가 내 발언에 조그마한 반박이라도 했을때 내가 폭주할 것 같아서였다.  

모임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하고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러 갑시다" 라고 했을때 나는 피곤을 방패 삼아 일찍 안녕을 고했다.  

     

혼자 너털거리며 삼성역을 향해 걸어 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회사 사람이라도 마주친걸까?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생글 거리는 얼굴로 서 있었다.  

"아저씨 오늘 모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봐요?" 라고,

그녀가 내게 건넨 첫 대화였다.  

"아니요. 그런건 아닌데 아, 저기, 요즘 많이 피곤하네요." 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오늘 이후 마주할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적당히 좋은 말로 사라지는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거짓말 못 하죠? 얼굴에 아니라고 써 있는데?" 그녀는 내 얼굴을 가까이 쳐다보며 말했다.  

"네? 아니 저, 그게, 진짜 피곤하기도 한데."

"오늘 가뜩이나 분위기도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만회할 기회는 줘야지. 아저씨 나 배고픈데 먹을것 좀 사줘요."

그렇게 그녀와 삼성역 인근 호프 집을 향했다.  

 

첫 날 알게된 정보는 나보다 8살 어리다고 했다.

생각보다 많이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S대를 다니고 있었고 집은 서초동 이라고 했다.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던 그녀는 이미 모든 이들이 우러러 보는 자격증을 취득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 부친은,

그녀 부친은 이름이 제법 알려진 중형 병원에 병원장 이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그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속으로 아,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이 정말 존재 하기는 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나는 모임에서 그녀 말에 아무 반항 하지 못하고 헤헤거리며 조아리던 남자들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녀 말을 들으며 대한민국에 가장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뽑으라면 그녀가 당당히 일등을 할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미모와 학벌과 지능, 집안까지 도대체 어느 것 하나 빠지는게 없다.  

 

그래서,  

뭐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것 없는 나와 교집합을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 오빠들이 좀 투박해서 그렇지 알고보면 다 좋은 사람이에요." 라고 말했다.  

아! 물론.

그럴것이다.  

사정을 알게된 나는 난쟁이 무리 같던 그들 심리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아니 실제 난쟁이 되어 앉아 있는듯한 기분까지 들기도 했다.  

물론 스스로 난쟁이 무리에 합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기에 의미 없는 자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어쩐 일인지 우리는 술자리에서 이방인에 대한 문장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고

그 화제는 앙드레 지드로 옮겼다 징검다리를 건너 헤르만 헤세로 이어졌다.  

그녀가 기른다는 고양이 감자의 식습관에 관해 수다를 떨었고, 완고하시다는 그녀 어머니와 자라면서 웃음 한번 본적 없다는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브루흐로 건너뛰기도 했고 막 스피커로 흘러 나오던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년에 대한 감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7.

 

그녀는 종종 연락을 해왔다.  

당연히 연락 후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심심하다는 핑계로, 날이 좋다는 핑계로, 배고프다는 핑계로 그녀는 내게 연락하거나 회사 로비로 찾아왔다.  

그렇게 하루와 하루, 가을과 겨울. 차곡차곡 부지런히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시간의 여백을 메웠다.  

 

나는 공주님을 모시는 난쟁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녀와 만남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적당한 날 연락이 오면 적당히 밥을 샀고 날이 좋은 날이면 그녀와 삼청동 길을 산책하기도 했다.  

마주한 철길이 길게 이어지듯 나는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녀와 술을 마실때 마다 내 자격지심이 들통나지 않기 바랬다.  

심장이 돌인듯 무심하게 보이기 바랬고, 그녀가 무슨 상황에 놓이던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것 처럼 느껴지길 원했다.  

의도적으로 실없는 말을 자주 던졌고 아무렇지 않은척 음담패설을 지껄였다.  

그녀는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냐는둥 쓸데 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묻지 않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비루하고 남루한 인간이라는걸 알게됐다.  

 

언젠가 가을 저녁 그녀와 한강 변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오빠는 결혼 언제 하려구?" 라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무슨 대화를 하다 어떤 맥락에서 저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왠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 나 결혼 안해. 나 비혼주의잔데 몰랐어?"  

라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비혼주의자라니 살면서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게 뾰루퉁해진 나는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유를 알 수 없게 심장이 쿵쾅 거렸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한강을 바라봤다.  

나도 별일 아닌척 다시 묻지 않기 바라며 맥주를 벌컥 마셔댔다.  

"있잖아. 내 친구가 그러는데 지금도 강원도쪽으로 가면 별이 엄청 잘보인대."

난데 없이 그녀가 별에 대한 말을 했다.  

"그럼. 강원도 쪽으로 가면 훨씬 잘 보이지. 서울은 광공해가 심해서 보이지 않는거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오빠는 봤어?"

"그럼 나야 봤지."

"그럼 나 언제 별 보여줘라. 나 은하수 보고 싶거든."

그녀는 내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순간 저릿, 하고 팔이 울렸지만 나는 빠르게 팔을 빼냈다.  

"그래, 언제고 기회가 되면. 그런데 사실 나도 은하수는 본적 없는데"

"그럼 잘됐네. 같이 처음으로 은하수 보러가면 되겠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는데,  

차마 그녀 얼굴을 마주 보지는 못했다.  

강물은 찰랑 찰랑,  

건너편 올림픽 대로에서 썡쌩 질주해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허공에 뿌려댔다.  

"언젠가 때가 되면 보여줘. 그런데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여전히 강을 보며 말했다.  

어쩐일 인지 그 말이 공허한 울림이 되어 다가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녀가 혼잣말 처럼 뇌까린 말은 광풍처럼 내 가슴으로 다가와 갑자기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다.  

"그래 뭐. 적당한 때 가면 가면 되지. 날 더 추워지면 가자. 겨울에 더 잘 보여." 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얼굴만 빤히 바라본체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보지 못한척, 아무 감정 없는척, 그저 맥주를 마셨다.  

 

"아빠가 선을 보라시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때 못 들은척했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아 버리는 바람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의 시간이 지나 나는 말했다.  

"그...그래, 선 좋지. 선. 그런데 너 벌써 선 볼 나이인가? 하긴 뭐, 집 안마다 다르니까.

내 친구 얘기들어 보니까 선자리 가면 난 참 잘 놀 수 있을것 같던데. 재밌겠다.  추...축하해."

그리고 다시 그녀는 한참 말 없이 한강을 바라보다 웃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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