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고백을 비추하는가 (훈애정음 저자 본좌토스)

쓰발넘들 작성일 15.07.26 15: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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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스스로 나이를 먹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요새는 제 문화적 취향이 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가 그렇더군요. 크리스 에반스나 로버트 패틴슨 같은 친구들 보다 이상하게 케빈 코스트너나 해리슨 포드 같은 아저씨들이 더 멋있게 느껴지는 제 취향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 같습니다. "취향이 클래식하다" 정도로 좋게 생각하고 싶네요. 잡설은 이만하고. 


일전에 '고백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고백하는 법'이었지만, 내용은 역설적으로 고백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내용의 권유문이었죠. 많은 분들이 이 글의 내용을 읽고서 "일리가 있다" 라고 생각하셨겠지만, 깊이 마음으로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아마 적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연한 거죠 어찌보면. 고백을 통해 로맨스가 이루어지고, 꿈같이 행복한 연인관계가 시작되고, 고백을 할까 말까 심장이 쿵쾅쿵쾅 하는 심리를 미화하는 내용의 영화/만화/소설/드라마/인터넷 잡글을 거의 20여년 이상 접하며 영향받았는 걸요. 그렇게 굳어진 사고방식이 글 하나 읽는다고 바뀔 거라고 전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사람이 대학에 입학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다"고 이성적으로 결론내리고서도 매주 교회나 성당을 가지 않으면 은근한 죄책감이나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고방식을 넘어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해 이별을 고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로 알아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훈애정음 블로그나 까페에 와서 "본좌님이 고백하지 말라고 말하셨지만, 염치 불구하고 고백을 해보려구요ㅎㅎ" 라고 말해도 전 이해를 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말의 깊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거나, 아님 영영 못깨달을 수도 있다고 보는거죠. 이건 마치 매트릭스와 같습니다. 남녀 사이가 어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 어떻게 로맨스가 시작이 되는 지 등에 대해서 사회가 알려주는 대로만 듣고 생각하고 있으면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거죠. 심지어 저같은 사람이 그 매트릭스의 존재에 대해 얘기하면서 "빨간약과 파란약"을 눈앞에 계속 들이대도 '장님'으로서의 생활이 너무 뿌리깊은 나머지 눈뜨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허나 이게 사람이 죽고 사는 정도의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저는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죠. "그래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라는 합리화를 하면서요. 
'고백하는 법'이라는 글은 위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은 아닙니다. "제발 좀 눈을 떠라, 그리고 매트릭스를 봐라"는 식의 모피어스 같은 훈계를 하기 보다는, 다소 계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설득을 위한 논거를 제시했죠. "당신이 여자를 맘에 들어한다면 아마도 A, B 혹은 C의 상황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A, B, C 모든 상황에서 고백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 그러므로 고백은 안하는 것이 낫다." 식의 논법이었습니다. 마치 주식시황을 분석하여 종목추천을 하는 애널리스트처럼 경우의 수를 따져 확률적인 최선의 방책을 제시한거죠. 
허나, 고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략'이나 '득실'의 관점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가 심어주는 "돈 잘 벌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를 해서 로맨스를 쟁취한다"는 식의 맹목적인 로맨스에의 환상을 거부하고, 남녀관계를 현실적으로 보고 그에 따라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겠다는 자기선언 같은 상징성이 있는 것이죠. 여자한테 "우리 사귀자"라고 말하는 것이 뭐가 대수라고 이렇게 진지하게 구는가 싶지만, 전 그 행동 자체보다 그 행동을 낳게 하는 어떤 오래된 고정관념과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에 대한 무비판적 맹종을 정면으로 직시하라 그 얘길 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 말고도 제가 소위 '고백'을 비추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흔히 듣는 사연은 가령 이런 식이예요. "그녀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안 남았습니다. 같은 수업을 듣는데 2주 뒤에 종강을 하거든요. 고백을 해서 확실히 하고 싶어요 ㅠㅠ"  제가 변태인지 모르겠지만 전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다소 그 동기가 불순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백을 해서 OK를 얻어내면, 그걸 일종의 '구두계약'으로 삼아서 상대의 마음에 대해 일종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심리가 읽힌다 그 얘기입니다. "네가 OK를 했으니까 우린 이제 연인이고, 난 네 연인으로서 너의 행실에 대해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라고 스스로의 지위를 인정받고, 그걸 빌미삼아서 좀 더 편하게 이 여자를 컨트롤 하겠다는 식의 욕심이 보인다는 거죠. 물론 공짜는 아니고, "구애행위"(ex. 밥사주고, 영화보여주고, 선물해주고...)를 대가로 지불하겠다는 전제를 달아서요. 그래서 저는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고백'이 "내가 너를 좋아해"라는 호감의 고백이 아닌, "우리 서로 연인의 지위를 인정해서, 권리와 의무를 서로에게 부여해보자"라는 비즈니스적 제안에 가깝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남녀가 서로를 아끼고, 좋아해서 사귀게 되는 것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반대할 이유가 없죠. 다만 그런 관계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커져서 자연스레 뜻이 모아져야 하는 것이지, "2주 뒤에 종강인데, 가만히 놔뒀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겠으니 어서 사귀기로 약속을 받아내야겠다.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통제를 할 수 있지..." 식의 전략적 판단이어선 곤란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건 고백도 아니고, 훌륭한 전략적 판단도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말리고자 하는 고백은 모든 종류의 고백이라기 보다는  1) 성급함/경솔함 2) 매스미디어가 심어준 잘못된 고정관념 3) 달리 뭘 어떻게 해야되는 지 모르는 무지/무능함 의 3박자가 맞아떨어질 때의 경우에 한정됩니다.
제 생각엔 욕심내지 말고 둘 중의 하나만 하는 게 좋은 거 같습니다. 순수하려면 순수하던가, 전략적이려면 전략적이던가. 전자라면 "나 너 좋아해. 그냥 그렇다고"식으로 마음만 전할 일이고, 후자라면 고백하는 타이밍을 가급적 뒤로 미뤄야겠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자기가 지금 불안함과 초조함 때문에 그녀를 잡아둘 고삐가 필요해서 고백을 하려는 건 아닌지. 연인이라는 미명 아래 "유사 남편"의 자격으로 배타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싶은 나머지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구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묻고 떳떳하면 얼마든지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 저는 일반론의 관점이라면 고백을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남자의 70%는 "어떡하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 아닌거 같은데, 딱히 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겟고 ㅠ 에라이 모르겠다. 머리터질꺼 같으니 이럴 바에 걍 시원하게 찔러나 보자. 아님 말고~"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테니 말이죠. 속편한 사고방식의 발로 아니겠습니까? 복잡하니까 대충 한번 질러보고 아니면 말면 되는, 속편이즘 내지 귀차니즘 같은 거죠. ㅎㅎ 
캐나다 출신의 데이트코치 오웬쿡은 이런 얘길 했습니다. "술집에서 수많은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시비가 붙었을 때, 양보하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고 주먹질을 하는 게 남자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주먹질 하는 게 병신짓임을 알고 있지만, 남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바에 차라리 남자다운 병신이 되는 게 더 명예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전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고백도 이와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대충 한번 찔러보는 게 "남자다운 용기"라고 믿는 병맛스러운 신화가 만연해 있는 이상 "본좌님의 충고에도 염치불구하고, 고백을 해보려고 합니다 ㅎㅎ" 라는 얘기하는 분들의 수는 줄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뭐  전 이해합니다. 

출처 훈애정음 본좌토스 블로그: http://blog.naver.com/terrytsts카페 http://cafe.naver.com/power2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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