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크 바르크만

후장킴 작성일 09.12.10 19: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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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1919. 8. 25 ~ )은 2차 대전 당시 무장 친위대(waffen-ss) 소속으로 대활약한 전쟁 영웅이다.


바르크만은 1919년 8월 25일 독일 북부 holstein주의 kisdorf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새롭게 등장한 히틀러와 nsdap를 지지한 그는 1935년 엘리트 무장 친위대(élite waffen ss)에 가입을 신청했고, 1936년 4월 1일 ss 게르마니아 연대(ss standarte germania)로 입대한다. 수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은후 ss일등병(ss-mann)이 되어 독일 남부의 radolf*l에 기지를 둔 게르마니아 연대 제 3대대에 배속되었다. 게르마니아 연대는 동프로이센에 배치된 제 14군 - 8군단의 예하에서 폴란드 침공을 맞이한다. 바르크만은 개전시 제 3대대 9중대의 기관총수였다. 몇번의 전투에서 공적을 올린 그는 ss 상등병(rottenfhrer)으로 승진한다. 1939년 10월 게르마니아 연대는 다른 2개의 ss연대와 함께 ss 특무 사단(ss-division verfügungstruppe)에 편입된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을 개시하였고, ss 특무 사단은 전략 예비이던 제 2군 예하에 소속되어 5월 중순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바르크만은 프랑스 침공전에서 보병 돌격장(infanterie sturmabzeichen)을 수여받는다.

1940년 10월 20 일 게르마니아 연대는 ss 특무 사단에서 독립하여 새롭게 ss 게르마니아 사단(ss-division germania)으로 편성되었다. 게르마니아 사단에는 독일인 외에도 외국인 지원병이 다수 참가하였다. 1941년 1월 게르마니아 사단은 ss 비킹 사단(ss division wiking)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으로 대침공을 시작하였다.

비킹 사단은 남부군 집단 - 제 1장갑 집단 - 제 14장갑 군단의 예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7월 바르크만은 드니프르페트로프스크(dnieprpetrovksk) 인근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7월 14일에는 2급 철십자장(iron cross 2nd class)이 수여되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바르크만은 네덜란드 의용병의 훈련 교관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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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das reich의 바르크만 - 누구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음. ^^;;



1942년 3월 바르크만은 본국에서 재편중이던 제 2 ss 장갑척탄병 사단 다스 라이히(2.ss-panzergrenadier-division das reich) 제 2 장갑 연대 2중대로 배속되어 iii호 전차의 포수가 되었다. 1943년 재편된 다스 라이히는 파울 하우저 ss 대장(paul hausser's ss-panzerkorps)의 지휘하에서 동부 전선으로 배치된다. 만슈타인(manstein) 상급 대장의 지휘하에 있던 다스 라이히 사단은 하르코프(kharkov)에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싸웠다.

제3차 하르코프 전투로 불리는 대격전에서 바르크만은 다량의 적 전차를 격파하여 전공을 인정받고, ss 하사(unterscharfhrer)로 승진하여 전차장이 된다.



1943년 7월 4일 치타델레(zitadelle) 작전이 발동되어 쿠르스크의 소련군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다스 라이히 사단은 ss 제 2장갑 군단의 예하에서 남쪽 방면에서의 공격을 담당하여, 전선을 돌파하고 64km를 전진했지만 적지않은 손실을 입었다.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던중 시칠리아로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작전 중지 명령을 내린다.

다스 라이히 사단은 이후 제 3ss 장갑 척탄병 사단 토텐코프(3.ss-panzergrenadier-division totenkopf)와 함께 후퇴중인 군집단의 후방 방어를 담당하였다. 후퇴중에도 여전히 다수의 적 전차를 격파한 바르크만에게, 8월 1일자로 일급 철십자 훈장(iron cross 1st class)이 수여된다.

같은달 바르크만은 제 2장갑 연대 4중대에 전속되어 신형 전차인 판터 d형을 수령했다. 차체 번호는 221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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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 라이히 사단은 1944년 1월까지 동부 전선에 남아 전투를 벌이고, 바르크만은 ss 중사(scharfhrer)로 승진했다. 2월 다스 라이히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프랑스의 보르도로 이동하였다. g 군집단의 예하에 있던 사단은 예상되는 연합군의 상륙에 대한 귀중한 예비 전력으로서 신속한 재편이 진행되었고 신병도 9,000명 가량 충원되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17~18세 사이의 훈련받지 않은 풋내기들이었다. 바르크만은 d형의 여러 문제점이 개량된 판터 a형을 새롭게 수령했다. 차체 번호는 424호이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overload 작전을 개시하여, normandie해안으로 상륙을 시작한다. 독일군 수뇌부는 이 상륙이 교란 작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다스 라이히 사단은 신속히 투입되지 않고 보르도에서 출동 준비 상태로 대기하였다. 노르망디의 상륙이 주공임이 확실해진 후에야, 다스 라이히 사단에도 북상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조직의 방해공작으로 이동은 늦어지고 7월이 되어서야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중 레지스탕스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오라두르(oradour) 마을에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다스 라이히는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부터 줄기차게 레지스탕스에 시달렸는데, 이것이 결국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장갑 척탄병 연대 'der führer'가 벌인 짓으로, 바르크만은 관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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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부터 다스 라이히 사단은 남하하는 미군의 공세를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포병 등의 지원 화력도 절대적으로 열세했다. 때문에 독일군은 가능한 정면 전투를 피하고, 보카쥬 특유의 울타리와 좁은길을 이용하여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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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cage

7월 동안 바르크만과 제 4중대는 다수의 셔먼 전차와 스튜어트 전차, 대전차포를 격파했다.

하지만 중대의 손해는 차츰 누적되었고, 가용 전차도 계속 줄어들어갔다.

 

- barkmann's cor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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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코브라 작전(7월 25일 ~ 29일)

7월 27일 바르크만의 판터는 엔진의 고장 수리 때문에 중대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이른 아침에 수리가 완료되고 중대와 재합류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도중, 보병으로부터 르 로레이(le lorey) 인근에 미군 전차 부대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듣는다.


바르크만은 이 전차 부대의 전진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산 로(st. lô)로부터 크탄세로 이어지는 도로의 분기점을 전장으로 선택하고, 모퉁이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도로가의 나무 아래에 판터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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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한 barkmann의 판터

이윽고 미군의 전차 부대가 전진해 왔다. 선두의 셔먼 전차부터 차례로 2량이 바르크만의 공격으로 격파되었다. 부서진 셔먼에 의해서 출구가 막힌 미군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혼란을 틈타 바르크만은 맹공을 퍼붓고, 후속 수송 차량과 지프 등이 차례로 격파되었다.

그 중에는 연료 수송차도 포함되어 있어서 도로는 불길과 연기로 휩싸이게 된다. 미군 전차 부대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도로로부터 벗어나 전투 태세를 취하고, 아군 공격기에 지원을 요청했다. 바르크만이 2량의 셔먼 전차를 더 격파한 후 미군기의 공격이 시작된다. 판터는 폭격을 피하면서 2량의 셔먼을 추가로 격파했고, 남은 1대의 셔먼은 불길에 휩싸인 채로 도주했다. 그러나 적전차의 포탄에 명중당하여 판터의 로드휠 일부와 공기 정화 장치가 손상되었고, 승무원도 2명이 부상당했다.

바르크만은 1대의 셔먼을 추가로 격파후 농가의 그림자 속으로 후퇴하여 판터를 수리한다. 다행히 미군은 매복을 두려워하여 공격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판터는 무사히 수리될 수 있었다. 수리를 마친 바르크만 다시 돌격하여 셔먼 2량을 격파했다. 충분히 손해를 주었다고 판단한 바르크만은 후퇴를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1량의 셔먼을 추가적으로 격파한 후 중대의 판터 2대와 합세하여 크탄세로 이동했다.


후일 바르크만의 모퉁이(barkmann's corner)로 이름붙여진 이 전투에서 바르크만은 셔먼 전차 9량을 격파하고 1량을 대파시켰으며, 외에도 다수의 각종 지원 차량들을 부숴 미군 전체의 전진을 정지시켰다.

7월 28일 바르크만은 크탄세에 돌입하여 시가지를 점령하고 있던 미군 부대와 교전하여 29일부터 30일까지 적 전차 14량을 격파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반격은 거세졌고 28일 밤까지 바르크만의 판터를 제외한 2량이 모두 손실되었다. 또한 이날 그란빌이 함락되어 소대는 적진에 고립되었다. 31일 바르크만은 스스로 자신의 판터 424호차를 폭파하고, 소대원들과 함께 7km를 걸어 8월 5일 아브란시의 중대와 합류한다.


이후 프랑스의 독일군은 격전을 벌이나, 중과부적으로 세느강을 건너서 철수했다. 일부 부대들은 철수 도중 팔레즈에서 포위망에 갇히게 되지만, 다스 라이히와 제 9ss 장갑 사단 hohenstaufen의 분전으로 포위망 돌파에 성공한다.

8월 27일 normandie전투에서의 전공에 따라 바르크만에게 기사 철십자 훈장(knight's cross)의 수여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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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ght's cross를 수여받고 기념 촬영.

기사 철십자 훈장 수상과 함께 ss 상사(oberscharfhrer)로 승진한 바르크만은 제 2장갑 연대 4 중대의 소대장으로 발탁되었다.

새롭게 지급받은 판터의 차체 번호는 401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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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hay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마지막 대규모 반격인 라인 수비 작전(wacht am rhein, 발지전투)을 시작한다.

das reich는 1ss 기갑군단의 뒤를 따라 역시 정체 상태였던 상 비트(st.vith)-비엘살(vielsalm) 지구를 크게 남으로 우회하여 후팔리즈(houffalize)-만헤이(manhay)로 이어지는 15번 국도로 진출, 미군의 배후를 치고자 기동한다. 다스 라이히는 뮤즈강까지 37 킬로미터를 진격하여 만헤이(manhay) 인근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바르크만은 야간 전투의 혼란 와중에 적진을 깊숙히 돌파하여, 미군 전체를 큰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미군은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으로 착각하여,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의 미군 집단을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제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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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hay로 달리는 barkmann

결국 만헤이는 손쉽게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독일군의 전체적인 작전은 실패를 거듭하였고, 초반의 혼란을 극복한 연합군은 맹반격을 시작했다.


바르크만은 12월 25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 되었다.



1월 말 독일군 수뇌부는 작전 중지를 결정했고, 다스 라이히 사단도 후퇴한다.


본국에서 부족간의 보충을 받은 다스 라이히는 헝가리에 파견되어, 1945년 3월 6일부터, 동부 전선에서의 마지막 반격 작전에 참가한다. 여기서 바르크만은 4량의 t-34 전차를 격파하여, 다스 라이히 사단 통산 3,000대 전차 격파 기록을 세운다. 그렇지만 작전은 대실패로 끝나고, 다스 라이히 사단은 보충할 길 없는 귀중한 장비와 탄약을 소모했다.

작전 개시 시점에서 바르크만의 중대는 사단내에서 유일하게 완편된 9량의 판터를 장비하고 있었지만, 소련군의 스탈린 전차에 의해서 3량이 격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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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chim peiper

6량에 불과한 바르크만의 중대는 제 1 ss 장갑 사단('leibstandarte ss adolf hitler)의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대령으로부터 제 1장갑 연대에 합류하도록 명령받는다. 제 1 장갑 연대는 소련군의 추격을 막는 후퇴전을 실시했고, 4월 초에는 오스트리아의 빈 남쪽까지 밀려난다.

4월 12일 바르크만의 판터는 이동중 아군의 오인 사격을 받아 바르크만과 승무원들은 모두 부상당했고 판터 또한 부서졌다. 견인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판터는 그자리에서 자폭되고, 이후 바르크만과 승무원은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후퇴중 도로상에서 4중대와 다시 합류한 바르크만은 새롭게 판터를 받아, 독일 항복 시점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5월 8일 바르크만과 부대원들은 바이에른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된다.

6년간의 전쟁에서 바르크만은 전차 82량(+α), 각종 차량 132량, 대전차포 43문 격파라는 엄청난 전과를 남기고 군생활의 경력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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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장 barkmann

1947년 12월 18일 풀려난 바르크만은 고향 kisdorf로 돌아간다.

이후 에른스트 슈무크 바르크만(ernst schmuck barkmann)으로 이름을 바꾸고, 소방서에 근무하여 서장으로까지 승진한다. 

현재도 영웅은 고향의 유명인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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