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짬밥신고

유로니모스 작성일 13.05.03 02: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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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최홍만발리슛 님의 게시글에 있던 것을 옮겼습니다.

 

800짜 해병 출신입니다.

게시판에 있는 글을 보다가 사진에 문득 놀라 살짝 남겨봅니다.

제가 실무에 있을때 중대 60여명 중에 저를 포함하여 딱 두명이 안경잽이 였었죠.

처음에 배치받아 꽂봉 풀 때 안경케이스를 발견한 선임들이

"씨~발 글씨 볼 때만 안경써라 뒈진다"

상병 6호봉 짬밥신고 하고 나서야 그나마 편하게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700짜 선임들 계실 때는 안경 쓴 해병이 1% 정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후배 해병들을 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안경쓴 해병들이 참 많아졌네요.

물론 그놈의 컴퓨터 때문에 시력이 안좋아진 젊은이들이 요즘 더 많아졌겠지만요.

휴가 나갈때 휴가복에 안경쓰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재미삼아 짬밥신고 에 대해 조금 적어보겠습니다. (원래 글 제목을 "안경쓴 해병"이라고 했는데 바꿉니다.)

김포, 강화 주둔인 2사단에 주로 행해지던 대표적인 악습 중의 하나였죠.

몇년 전 이슈가 되었던 기수열외 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저는 처음에 기수열외 라는 것이 짬밥신고의 다른 명칭인줄 알았습니다.

기수열외 뜻을 알고나서 참 어이가 없었죠. 어디서 그런 거지같은......

제가 있을 때는 정말 아무리 좆같고 병신같은 선임이라도 기수 대우는 철저하게 해줬습니다.

이야기가 잠깐 샜네요...

아무튼 짬밥신고란 참으로 괴로운 과정인 동시에 하염없이 그 신고날만 기다리기도 하는 악습입니다.

대부분 상병 6호봉을 달고 신고를 하지만, 중대에 그 구간의 기수가 빽빽할 수록 뒤로 많이 밀리기도 합니다.

중대 일수 선임 (포항에선 킹이라고도 하고, 어디선 이찌라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사단마다 틀립니다.)

그러니까 가장 최고참 선임이 신고를 할때가 된 해당 기수 해병들에게 어느 시점에 인계를 내립니다.

별다른 것은 없고, "신고하러 와라." 뭐 이정도지요.

해당 해병들은 그 즈음에 준비해 두었던 A급 전투복과 A급 워카를 신고 일수선임에게 찾아갑니다.

전투복은 아이롱 (열다리미) 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다려놓습니다.

(3대 해병 아이롱 : 백일휴가복, 신고복, 전역복)

신고는 순검보다 백배는 더한 최대의 긴장감 속에 진행됩니다.

신고를 받는 선임은 신고자의 전투복 다림질 상태, 목소리, 기합 등을 면밀히 체크하지요.

설령 잘 보이지 않는 전투복 단추 밑이 잘 다려지지 않았거나, 희미하게 두줄이라도 잡혀있는 경우에는

여지없이 빠꾸를 시킵니다. 일단 빠꾸를 당하면 그 선임이 다시 오라고 할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구두로 하는 신고가 끝나면 그때부터 진정한 짬밥신고가 시작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 담배 먹이기 (살면서 담배를 먹을 일이 있겠습니까만은, 씹어삼켜보면 식도 끝까지 쫙쫙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팔각모 눌러쓰고 담배 20개피 피우기 (한번에 태웁니다. 끝까지 태울때까지 연기를 참아내야 합니다.)

비눗물 그라스잔으로 원샷

강중유 (병기 등을 수입할 때 쓰는 기름) 에 밥 비벼먹기

변기물에 녹차 타먹기

구두약 듬뿍 바른 칫솔로 양치 1분간

고추가루 30cm 코로 흡입 (영화 등에서 나오는 마약 흡입 장면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때까지 눈 감지 말기

지렁이 아폴로 (쉽게 연상이 되실 듯 합니다. 아폴로 빨아먹듯이 지렁이를 쪽~)

기타 등등등......

주로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먹이거나 신체적인 괴롭힘이 위주입니다.

물론 도중에 실패하면 신고는 빠꾸를 당합니다.

그렇게

일수 선임부터 자기 바로 윗기수 선임까지, 중대에 있는 선임들에게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신고를 돕니다.

그 과정이 끝나야만 짬밥신고가 접수됩니다.

아, 선임에게 신고가 접수되면 선임들이 일일이 신고를 받고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줍니다.

선물이라 해봤자 사제비누나 사제수건, 사제양말, 티셔츠 정도지만 받을 때는 눈물납니다. ㅎ

밑에 신고 대기하는 후임들이 빽빽하게 많을수록 선임은 그만큼 많은 선물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전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 12명 정도 돌고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후임들 신고 받을때는 엄청나게 많았었죠.

선물만 주다가 끝났던 것 같습니다. ㅎ

짬밥신고를 마치면 그때부터 사제수건, 흰색 런닝, 다림장에 옷 맡기기, 후임 데리고 흡연, 자유로운 PX 출입,

자유로운 전화통화, 누워서 TV 시청, 식사 시 젓가락 사용 등등

수많은 혜택이 주어집니다. 물론 신고를 마친 직후에는 선임들 눈치도 알아서 봐가면서 했었죠.

멋모르고 신고 끝났다고 일수 이수 선임들처럼 퍼지면 여지없이 귓방망이 날라가곤 했습니다.

 

지금에는 상상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악습이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짬밥신고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물론 짬밥신고 외에도 여러 단계가 있었습니다.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는데,

일병 5호봉을 달면 특별한 신고 절차 없이

앉아서 워커를 신을 수 있었고 (그 전에는 무조건 서서 신어야 했습니다.)

혼자서 짱박혀 담배를 태울 수 있었으며

"예!" 를 쓸 수가 있었습니다. (선임이 부를때 관등성명이 아닌 예 를 쓸수가 있었죠. 하지만 아주 크게 소리내야 합니다.)

그 다음이 위에 언급한 짬밥신고,

그 후에는 물병장 신고라고 해서 보통 병장달고 보름 정도 후에 하는 신고입니다.

물병장 신고는 짬밥신고만큼 힘들진 않습니다.

A급 전투복을 입고 선임들에게 일일이 찾아가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때는 그냥 같이 담배를 태우거나

커피 한잔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음 나오는 추억이지만, 동시에 아련하기도 합니다.

살면서 언제 그런 경험을 해보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분명 없어져야 할 악습이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겐 재미있던 추억임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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