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간 몇몇 예술영화를 봐오면서 겪었던 고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보통 내가 영화를 보는 시간은 함께 사시는 부모님이 모두 잠자리에 드신 뒤 이른 새벽이 다 되어서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영화라는 것이 죄다 성애장면이 빠지지 않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온 가족이 깨어있을 이른 저녁에는 볼 수 없는 것들 뿐 이어서다. 새벽이라고 자유로울 수는 없어서 영화에서 그럴싸한 분위기가 풍길 때면 황급히 스피커 볼륨에 손을 가져가야만 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애먹였던 작품이 무엇이더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피아니스트’를 꼽을 것이다.
현대의 예술영화란 성(性)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수용자의 욕구를 자극함으로써 자유에의 갈망을 이끌어내는 예술의 성격과 관습적 차원에서의 억압과 개인적 욕구간의 대립이 가장 선명하게 잘 드러나는 성욕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수긍갈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에 일조하기도 쉽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양날의 검과도 같은 성이라는 키워드가 이토록 쉬이 사용되는 현대 예술영화의 실태는 한 번쯤 반성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에는 다소 거부감이 느껴질 만큼의 솔직한 성애묘사가 담겨있다. 아니, 솔직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성기에 면도날을 댄다던가 하는 자학적 성행위는 적어도 우리나 우리 주변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영화 속에서의 이러한 행위의 주체가 점잖은 40대의 음대 여교수라는 점이다. 문명의 존립기반이 자연과의 거리두기라는 통상적 견해와 사회적인 평판이나 위치가 개인의 문명화의 척도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내 개인적 견해를 모두 헤아렸을때 완고한 원칙주의자이자 제법 고상하달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그녀의 비정상적 성행위는 내게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선 설명에 대한 반전(反轉)으로써 그러한 설정에 대한 납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마도 감독은 문명의 억압으로써 비정상적으로 짓눌린 욕망,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기형적 폐해를 에리카라는 비정상적 설정을 가진 케릭터로써 그려내고 싶었으리라.
어릴 적부터 마흔이 넘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에리카는 줄곧 억압의 피해자로서 살아왔다. 어릴 적엔 완고한 부모에게서, 그리고 지금은 대학 교수라는 번듯한 직함을 가진 완고한 원칙주의자인 스스로를 가해자로 삼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의 배후에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헤게모니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한 비정상적 억압이 낳은 결과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에리카, 즉 마조히즘과 새디즘이라는 양 극단을 한 몸에 지닌 변태성욕자이다. 불현듯 청나라의 인습인 전족(纏足)이 떠오른다. 문명은 청나라 여인들의 발을 얽어 메었고 결국 남은 것은 기형화된 발의 모양, 또 그녀들의 삶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가치는 굳이 내가 아니라도 작품의 화려한 수상전력(깐느 역사상 최초의 남, 여우주연상 석권 등)이 증명한다. 분명 이 영화는 빈약한 소양의 내 관점에서도 퍽 괜찮은 작품으로 보인다. 철학적 사색에 좋은 소재를 제공해 주었음은 지금까지의 본문 내용이 증명한다. 하지만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한 번쯤은 부모님과 함께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예술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전전긍긍해야만 하는 영화는 이제 사양이다.
P.S. - 나 2학년 때 수업 레포트로서 작성했던 글. 오랜만에 보니 감개가 무량해서ㅋ, 개인 블로그에서 살짝 퍼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