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시리즈 <스펙터>, 전작 <스카이폴>과 마찬가지로 샘 멘데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 그리고 이번 007 <스펙터>를 마지막으로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막을 내린다. 이 네 편의 007 시리즈는 모두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인 만큼, 스토리가 이어진다. 전작들을 안보고 봐도 스토리 이해에 엄청난 지장은 없지만, 이전 스토리 배경이나 캐릭터가 등장하기에 전작을 보고 보는 편이 이번 <스펙터>를 즐기기에 더 좋다.
이번 007의 본드걸은 레아 세이두 (매들린 스완 역)라는 배우다. <미녀와 야수, 2014>, <미드나잇 인 파리>,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등의 영화에서 등장했던 프랑스 배우이다. 개인적으로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을 때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스카이폴>에는 이렇다할 본드걸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본드게이가 있었다고 해야하나..) 이번엔 좋아하는 배우가 본드걸로 등장해서 반가웠다. 이번 시리즈에도 <스카이폴>에서 기존 캐릭터의 부활을 알린 나오미 해리스 (이브 머니페니 역), 벤 위쇼 (Q 역), 랄프 파인즈 (말로리 / M 역)이 모두 등장한다.
또 모니카 벨루치 (루시아 시아라 역), 크리스토프 왈츠 (오버하우저 역), 앤드류 스캇 (댄비 역), 데이브 바티스타 (미스터 힝크스 역) 등의 배우가 등장하여 캐스팅에 화려함을 더했다. 덕분에 화려한 액션에 화려한 배우들의 연기까지 보는 맛이 있다. 이번 007도 고전적인 본드와 현대적인 본드가 조화롭게 연출된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기존 007 시리즈의 진부한 레퍼토리를 깨기 위해 많은 시도를 보였다. 이번 <스펙터>도 그 시도의 흔적과 고민이 보이는데, <스카이폴>만큼 파격적이지는 않다. 더 파격적인 시도를 하다가는 007 시리즈의 근간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 건지, 아니면 보수적인(?) 007 팬들의 입맛까지 잡기 위해서 였을지는 모르겠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있음.
하지만 이번 <스펙터>의 시도는 좀 애매했다는 생각이 든다. 클래식 본드와 현대적 본드의 조화가 자연스럽기 보다는 정말 인위적이라고 느껴졌다. 최첨단 장비를 개발하는 Q와 이를 사용하는 본드, 이런 첨단 기술은 007 시리즈의 매력이자 포인트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이언맨> 같은 영화가 즐비하면서, 007 만의 매력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인지한 007이 <카지노 로얄>부터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본드가 아닌, 육탄전 액션을 보여주는 본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는 본 시리즈 같은 영화에도 있으니 기존 007의 요소도 적절히 섞는 조화가 필요했다. 이런 시도가 <스펙터>까지 이어졌는데, 이번 <스펙터>에서는 너무 의식해서 였을까. 아니면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어서 였을까. 최첨단 장비를 보여줄 법도 한데, 단순한 폭탄 시계에 개조된 자동차 정도가 전부다. 옛날 007의 향수는 충분히 즐겼기에, 다른 시도가 필요했는데 이번엔 색다른 시도가 없었다.
또 수동적이고 그저 본드의 여자에 불과했던 본드걸 캐릭터를 바꾸기 위한 시도가 이번에도 계속되었다. 전작 <스카이폴>에는 본드걸 자체가 없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는데, 이번에는 다시 본드걸을 등장시키면서 변화를 주려했다. 이번 본드걸은 본드처럼 적극적이면서도 무뚝뚝한 캐릭터다. 하지만 이 점이 내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물론 뚱한 표정의 레아 세이두는 예뻤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본드이니, 이번 본드걸이 마지막 연인으로 끝나는 만큼 좀 더 아름답게 어울리는 커플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흔히 말하는 '케미'가 부족했다.
또 모니카 벨루치는 거의 카메오 수준으로 등장하는데, 여성편력적인 본드를 다시 보여주기 위해 소모한 캐릭터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또 악역으로 등장한 크리스토프 왈츠 (오버하우저 역)은 거대한 배후조직의 수장이라는 역할에 비해 너무 빈약한 캐릭터였다. <카지노 로얄>의 르쉬프, <퀀텀 오브 솔러스>의 그린, <스카이폴>의 실바, 이 모든 악역의 배후가 '스펙터'라는 거대조직의 수하였고, 이 조직의 보스가 바로 오버하우저인데, 왜 이리 볼품없게 등장했을까. 최종 보스보다 중간 보스가 더 강하고 악하고 무서웠던 것 같다. <스펙터>의 악역은 마치 기존 시리즈들을 억지로 연결해 짜맞춰 가져다 놓은 캐릭터라는 느낌이 강했다. 여기저기 분산된 퍼즐 조각을, 단순히 '배후'라는 키워드로 이어 붙일 생각을 한 건 많이 아쉬웠던 부분이다.
사실 '스펙터'라는 조직은 예전 007 시리즈에서부터 등장했던 국제 범죄 조직이다. 스펙터(Spectre)의 뜻은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tion] 의 약자로, '첩보, 테러, 복수, 강탈 특수집행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또 Spectre 스펠링이 영국식이니, 미국식 스펠링으로 하면 Specter 이고, 이는 유령(Ghos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범죄 조직이 유령같이 활동하니, 중의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펙터'는 '퀀텀' 같은 하위 조직을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거느리고 있다. 다시 말해 '문어발'스럽게 퍼져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스펙터의 문양이 문어 모양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위에 사진을 잘 보면 스펙터 타이틀 뒤에 있는 총알 구멍 모양이 문어 모양이고,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반지의 문양 역시 문어 모양이다.
뭐 어쨌든 여러 아쉬움이 남는 007이었지만, 그래도 볼 거리는 많았던 것 같다. 웅장한 스케일, 화려한 오프닝 액션, 본드걸, 클래식 본드 아이템, 클래식한 결말까지 갖출 건 다 갖췄다. 특히 또 정말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오프닝 음악이었다. 이번 <스펙터>의 주제곡은 샘 스미스의 Writing`s On The Wall 이다. <스카이폴>의 OST인 아델의 Skyfall 과 견줄만한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