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M기기마저 거부한 여자

온리원럽 작성일 13.06.06 10: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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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월급을 받지만 통장을 스쳐 지나갈 뿐, 손 안에 남는 돈은 없다.

핑크 하이힐이 가져간 내 월급

‘인출 불가, 잔액 부족.’

헉! 현금지급기는 아까부터 계속 나를 거부한다. 어떻게 된 놈의 기계가 내놓으라는 현금은 안 내놓고, 명세서만 토해내는 거냐. 10만 원도 5만 원도 인출불가란다. 이런. 일단 내일 김 대리 결혼 축의금은 미뤄두고, 오늘밤 홍대 클럽에서 쓸 비상금 3만 원이라도 찾아야겠다. 다시 금액을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누른다.

‘인출 불가, 잔액 부족.’

헉! 통장에 3만 원도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누가 몰래 내 돈을 다 빼간 거 아니야? 보이스피싱, 해킹, 뭐 이런 거? 떨리는 손으로 잔액조회를 누른다.

“1,670원? 11만 1,670원도 아니고, 1만 1,670원도 아니고, 1,670원?”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얼른 입을 막았다. 황급히 입출금내역조회를 누른다. 내 통장에서 돈을 빼간 자들의 목록이 주르륵 떴다. 어디 보자. 감히 허락도 없이 내 돈을 꿀꺽하다니, 잡히면 니들은 죽었어!

“야, 윤다인! 뭐하냐? 점심시간 끝난 지가 언젠데?”
입사동기 소연이다.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말에도 마비된 정신은 돌아올 줄 모른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디 좀 봐봐,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렸어 너!”
그래, 그렇겠지. 은행에서 회사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겨우 휴게실로 와서 냉수 한 잔 들이켜고 주저앉아 있던 참이었다.

“괜찮아? 차가운 물 좀 줄까?”
이미 마셨거든? 나 좀 그냥 내버려둘래? 아, 참, 일해야지! 일을 해야 월급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통장 잔액이 1,670원인 여자. 나이 스물여섯에, 이게 무슨 꼴인지. 내 통장에서 천금 같은 월급을 강탈해간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지지난 달에 ‘샤랄라 핑크 하이힐’ 산다고 백화점에서 호기롭게 긁은 신용카드가 내 목을 조를 줄이야.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아 남을까

월급날까지 1,670원으로 버텨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소연아, 오늘이 며칠이지?”
“엥? 너 진짜 왜 그래? 한참 멍하게 있다가 한다는 말이 며칠이냐니?”

“딴소리 말고! 며칠이냐고?”
“오늘 17일이지. 그건 왜?”

“17일이면, 월급날까지 며칠 남은 거냐?”
“참나! 회사 다닌 지 1년이 넘은 애가……. 월급날이 25일이니까 대충 일주일 남았네!”

일주일! 출퇴근은 교통카드로 찍고 다닌다 치고, 밥은 사원증으로 구내식당서 먹고, 숨만 쉬고 살면 버틸 수 있으려나. 불타는 금요일을 홍대에서 보내려는 계획도 물 건너갔구먼. 아, 참! 내일 김 대리 결혼식인데! 어쩌지? 축의금을 후불로 할 수도 없고…….

“소연아, 나에 대한 너의 애정은 얼마짜리냐?” “뭐, 뭐야? 그 수상한 말투는?”

“토 달지 말고 얘기해주면 안되냐? 나 지금 상태가 엉망이거든?”
“너야말로 말 돌리지 말고 대놓고 말해. 나 빨리 자리로 가봐야 하거든?”

“매정한 것! 도, 돈 좀 빌려줘!”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소연의 몸이 먼저 반응한다. 쌩하게 일어나는 그녀. 엉겁결에 팔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래, 너는 BJ그룹 42기 사원 최고의 짠순이 이소연이지. 그런 너에게 돈을 빌리려 하다니, 나도 참 급하긴 급한가 보다.

“야, 소연아! 내일 김 대리 결혼식이잖아. 축의금 안내면 나 어떻게 될지 알지? 5만 원만 빌리자. 딱 5만 원만! 응?”

소연이 멈칫 한다. 우리 기수의 사수인 김 대리에게 찍히면 사무실이 군대 내무반 되는 건 순간이다. 그래,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영화 [슈렉]에 나온 고양이 표정 저리가라일 거야. 이쯤 되면 제아무리 소문난 짠순이의 마음도 녹아내리겠지.

“넌 어떻게 된 애가, 돈 5만 원이 없어서…….”
그래 그래, 나도 내가 한심하다. 돈만 빌려준다면 이 정도 모욕쯤이야 못 참겠냐! 그러나 정작 나를 녹다운 시킨 건, 뒤이은 소연이의 말이었다.

“알았어, 빌려줄게! 너 오늘 계 탄 줄 알아라! 나 적금 만기되어서 1,500만 원 찾은 기념으로 빌려주는 거야. 다음엔 국물도 없다!”

같은 월급 받고 재산은 만 배 차이

같이 입사해 같은 월급을 받고 일했는데 손 안에 쥔 돈은 천지 차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670원 vs 1,500만 원.

오후 근무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소연이에게 5만 원을 받아들고 자리에 온 이후로 계속 두 개의 숫자가 동동 떠다녔다. 같은 입사 1년 2개월 차. ‘회사님’이 똑같은 월급을 주셨는데 차이가 나도 이렇게 많이 나다니!

내 통장 잔액보다 소연이의 저축액이 더 충격이다. 2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으로 어떻게 1년 만에 1,500만 원을 저축할 수가 있지? 밥만 먹고 숨만 쉬고 모은 거야? 짠순이라고 뒤에서 흉보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윤다인, 퇴근 안 해? 너 오늘 진짜 이상해! 네가 좋아하는 ‘불금’이잖아! 홍대든 이태원이든 가서 금요일 밤을 불태워야지!”

소연이의 재촉에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불금’은 무슨, 돈도 없는데 집에나 가야지. 이건 뭐 아침에 그렇게 공들여 화장한 보람이 없구먼. 그때만 해도, 퇴근길이 이렇게 ‘좌절모드’일 줄 알았나?

“근데 1,670원은 뭐냐?”
1,670원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소연이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핀다. 아, 자존심 상해! 정말 대답하기 싫다.

“아, 아까 내가 낙서한 거 봤구나? 1,670원이 아니고 1,670만 원이야. 너 1,500만 원 저축했다기에 나도 목표 좀 세워본 거야.”

“와, 대박! 천하의 윤다인이 저축을 한다고? 너처럼 돈 쓰기 좋아하는 애가? 그러고 보니 불타는 금요일에 지하철 타고 집에 곧장 가겠다는 것도 수상하긴 하다!”

“그럼, 나도 이제 저축 좀 하려고. 그 뭐냐, 재테크도 좀 하고!”
“재테크까지? 너 내가 아는 그 다인이 맞냐?”

이소연, 이놈의 지지배! 아까부터 아픈 곳만 골라서 찌르네. 난 1년 2개월 동안 대체 뭘 한 걸까. 급격한 후회가 밀려든다. 이러다 길 한복판에서 울겠네! 다른 얘기나 해야겠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그들만의 모임

브런치를 먹으며 받는 비밀 수업, 게다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라니. 어떤 모습일까?

“너야말로 수상하거든? 금요일마다 ‘칼퇴’해선 쪼르르 집으로 달려가고. 토요일 오전은 뭘 하기에 전화도 안 되고. 나 몰래 연애라도 하는 거야? 혹시 사내연애? 크크.”

“사내연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미쳤냐? 금요일은 학원 다니고, 토요일 오전도 중요한 ‘수업’이 있어서 그래.”

“학원? 수업? 부지런하기도 하셔라. 뭐 배우는데? 영어? 취미 강좌?”
“어, 그런 게 있어! 일종의 비밀 수업이랄까.”

“뭐야, 나도 좀 가르쳐줘. 좋은 거 있으면 같이 배우자, 응?”
소연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뭐지? 이 반응은? 그냥 장난으로 말해본 건데, 진짜 비밀 수업이었던 거야?

“허 셰프에게 허락받지 않고 데려가도 되려나…….”
이젠 혼잣말까지 한다. 뭐? 허, 허 셰프? 요리 배우는 거였어? 나, 요리는 관심 없는데.

“그래, 일단 같이 가보지 뭐. 내일 오전에 시간 돼? 11시 수업이긴 한데, 보통 10시 30분에 가서 워밍업하고 정신교육도 받고 하거든. 10시 20분에 안국역에서 만나자.”

“어, 나, 나는 보통 토요일은 늘어지게 자고 브런치 먹는데…….”
“우리도 브런치 먹어. 메뉴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엄청 맛있어!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닌데, 큰맘 먹고 데려가는 거거든? 오든 말든 맘대로 하쇼. 아, 나 내려야겠다!”

“야, 이소연! 거기가 어딘데? 뭐, 뭐 하는 데인지는 알고 가야 할 거 아냐?”
“와 보면 알아! 우리끼리는 ‘경성이브’라고 불러.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나 간다.”

소연이 인파를 헤치고 내린다. 경, 경성이브? 뭐냐, 그 고색창연한 이름은? 아 이거, 궁금해서 잠도 안 오잖아! 그게 대체 뭐냐고 문자를 보낸다. 협박 반, 읍소 반이 통했는지 소연에게서 한 줄의 답장이 도착했다.

“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브런치 모임!”
대박! 내일 꼭 가야겠다. 고맙다, 이소연!

[허 셰프의 재테크 레시피]

 

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브런치 모임, ‘경성이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양한 재료와 요리 비법으로 맛깔 나는 밥상을 차려내듯, 경성이브는 수많은 금융 상품과 투자 정보들을 모아 나만의 재테크 레시피를 만들어 보는 모임입니다. 먼저 밥상을 차려본 사람으로서 재테크 초보에게 도움이 될 레시피들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숟가락 들고 오셔서 맛있게 드실 준비되셨죠? 그럼 저는 첫 번째 수업에서 드실 요리를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어렵거나 힘들 거라는 걱정은 접고 마음 편하게 오세요! 재테크는 시작이 반이거든요, 그럼 내일 브런치 모임에서 만나요!

 

[이 글은 쉽고 재미있는 재테크를 알려주는 가상의 카페 '경성이브'를 배경으로, 이를 통해 성장하는 20대 직장인 다인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형식의 재테크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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