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박인영 기자 = 법원이 28일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의 존엄사를 허용하는 첫 판결을 내리면서 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으로 가열될 전망이다.
이번 소송은 현재 살아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를 중단해달라며 환자의 대리인과 가족들이 법원의 판단을 구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받아 왔다.
법원은 그동안 환자의 생명권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보다 우위에 두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1997년 의식불명 환자로부터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사망에 이르게 한 '보라매병원' 사건에서도 가족과 의사에게 각각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로 유죄를 선고했었다.
병원 역시 법원의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연명 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들어 거절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기존 법원의 입장을 뒤집고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우위에 두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준 의미있는 사례로 풀이된다.
특히 유서 등을 통해 명시적으로 존엄사와 관련해 아무런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환자가 존엄사를 원할 것이라는 의사를 추정해 허용했다는 점에서 향후 유사한 사례에서 환자의 의사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존엄사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치료가 계속되더라도 회복 가능성이 없어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하고 환자가 사전에 한 의사표시, 성격, 가치관, 종교관, 기대생존기간, 환자의 상태 등을 고려해 환자의 의사가 추정되는 경우 등을 들었다.
환자의 의사와 관련해서는 원칙적으로는 치료 중단 당시 질병과 치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음을 전제로 명시적으로 표시돼야 유효하다면서도 의식불명 환자의 경우 현재 자신의 상태 및 치료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았더라면 표시했을 진정한 의사를 추정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했다.
그러나 법원은 "소위 적극적 안락사 및 모든 유형의 치료중단에 관해 다룬 것이 아니다"라고 밝혀 선을 그었다.
법원은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없어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하고 환자의 치료중단의 의사가 추정되는 경우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기한 인공호흡기 제거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원은 대리인을 통한 김씨 본인의 치료중단 청구는 받아들였지만 자녀들의 치료중단 요구는 모두 기각해 환자 본인의 자기결정권만을 인정하는 등 존엄사의 허용 한계를 명확하게 표시했다.
김씨와 함께 소송을 제기한 가족들에 대해서는 "치료의 중단청구가 타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가족들의 독자적 청구권을 인정하는 입법이 없는 한 치료중단 청구권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각해 존엄사가 남용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법원의 이번 판결로 의사의 치료중단 의무가 인정될 수 있는 요건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함께 존엄사를 판단하는 기준이나 구체적인 입법 마련에 대한 요구도 높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