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경제 개발의 선구자??

쿠라라네 작성일 09.10.27 18: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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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우롱한 독재자 또는 경제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며 아직도 논란이 많은 박정희(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입니다.

 

그는 문경보통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사직을 지내다 칼을 차고 싶다는 이유로 일본 사관사교에 입소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전체 3등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거두고,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란 글을 혈서로 써 만주 신문에 오르며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 되어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8단에 근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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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학교 시절 교사직으로 지낼때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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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다카키 마사오 (사관학교 졸업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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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육사 시절 후배들과(가운데) - 그는 반민특위에서 내건 친일파 처단 기준에 포함 되진 않았다.

 

 

하지만 1년뒤 조선이 독립을 하자 박정희는 당황했고, 소련군을 피해 선배인 신현준, 이주일등과 베이징을 거쳐 고국에 가기로 합니다.

 

이때 충칭 임시정부는 일본군 소속이였던 10만명에 달하는 조선 청년을 한국광복군에 편입 시키려는 계획을 짰고 이 가망성 없는 계획에 박정희는 보신책으로 광복군에 들어가 몇 달간 생활을 하다 1946년 5월6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 합니다. 그 뒤 남로당의 간부였던 형 박상희가 친일 죄를 씻으라며 권유 해 서른살의 늦은 나이로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으나 열흘도 되지 않아 대구를 중심으로 10월인민항쟁이 일어났고 그때 박상희가 구미지역에서 봉기를 주도 하다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생깁니다. 그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가보니 그곳에는 형의 절친한 친구인 이재복이 유족을 돌봐주고 있었고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주며 남로당에 들어 올 것을 권유해 입당하게 됩니다. 그후 1948년 10월 19일 남로당과 좌익 군인들에 의해 여순사건이 터지자 박정희는 토벌사령부 작전장교로 차출되었으나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 됩니다. 여기서 그는 또 한번의 변신을 보여주는데 군부내에 있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모두 발설하고 김창룡은 배신한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의 좌익들을 색출하는데 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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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 일본군 출신으로 소련군에게 잡혀 죽을뻔 한걸 남한으로 탈출해

그 뒤 이승만의 신임을 얻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다.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이자 당시 현직 군인을 빨갱이로 몰아 대부분 처형시킨 인물,

현재 재향군인들이 김창룡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정도였으나

박정희는 그런 김창룡에게 잡혀 살아난 몇 안되는 사람이 된다.

 

 

 

그때 당시 박정희를 수사한 육사 동기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란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줘도 안심할 수 있었다"라고 회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49년 2월 8일 사형 구형을 받았으나 당시 군부의 주류였던 일본군 출신인 선배 백선엽과 원용덕의 후광으로 형을 면제받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그 뒤 비공식문관으로 들어가 재직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까지 하게 됩니다. 그 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허정 과도정부가 세워졌고 내각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3차 개헌이 이뤄졌으며, 총선에선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장면 내각이 들어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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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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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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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내각의 기자회견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장면내각이 들어서면서 3.15 부정선거자 처벌을 위한 4차 개헌이 이뤄졌고 각종 시위(학생, 노동운동, 전교조 창설)와 언론(경향신문 창간)이 활성화 되었으며, 장면 내각은 소극적이였으나 중립화 통일론이 대두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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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학생대표회담 -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회는 점점 안정화 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려는 찰라에 박정희와 김종필이 1961년 5월 16일 조국 재건론을 내걸며 군사 정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쿠데타전 육사 5기생과 육사 8기생이 주축이 되어 혁명 기회를 엿보며 국정방향과 공약정책 등을 다듬어 나가고 있었고 계획전반에 각기 역할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좌익 경력은 있지만 그나마 깨끗한 박정희를 내세웠고 1961년 4. 19혁명 1주년이 되는 날 민중봉기가 일어나 장면 내각에서 군대를 투입하는걸 예상하여 그날을 D-day로 잡습니다.

 

하지만 예상했던 폭동은 없었고 당황한 김종필과 박종규, 차지철등은 5월 15일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작전명 비둘기를 실행하게 됩니다. 이때 박정희는 9시에 집에서 나설 계획이였지만 육영수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라며 숙제를 도와 줄 것을 간청해 50분 정도 사령부에 늦게 가담하게 됩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대통령 윤보선은 가족을 피신시킨 뒤 자신은 청와대에 있었고 모든 권한을 가졌던 총리 장면은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숨고 연락을 끊어 버리는 바람에 모든 지휘체계가 엉망이 되 쿠데타 성공에 빌미를 제공합니다. 이후 정변세력은 육군 본부와, KBS를 장악하고 오전 5시 라디오 방송으로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박정희는 청와대에 들어가 윤보선과 대담 뒤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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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정변 당시 박종규(왼쪽), 박정희(가운데), 차지철(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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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은 국민들에게 군인을 믿어 달라며 육사생들을 가두행진 시킨다. 이때 일과

 

술자리에서 박정희에게 대머리를 보이며 분위기를 띄워 엄청난 신임을 받는다.

 

 

 

이에 시민들과 정계에서는 반발 하였지만 대세는 기울어 졌고 박정희 군정이 시작 됩니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직선제를 골자로 한 4차 개헌으로 자신의 대통령 출마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좌익 경력 때문에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반공을 강화했고 구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 시켰으며 화폐 개혁을 단행(환->원) 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경제가 마비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장면 내각에서 수립했던 경제 개발 5개년을 출발(1962년)시켰고 자유당 독재 권력에 붙은 깡패들 소탕과 농가부채를 탕감해 주기도 합니다.

 

한일수교, 베트남 파병, 유신 헌법, 인혁당, 부마항쟁, 경제와 전태일등등은 글이 길어 다음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펌) 다음 이종격투기카페 孔子

 

 

 

 

박정희평가 토론회에서 진중권 교수

 

 

 

 

동영상은 글과 관련된거 같아 같이 올립니다.

 

혹시 몰라서 동영상 주소를 적어둡니다.

 

http://video.nate.com/20790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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