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립니다. 이때 김규식과 친일파 최린, 이광수등이
납북되고 서울에서는 북한군에 의해 인민재판이 열려 많은 우익들과 지주, 군인, 경찰, 공무원등이 재판에 회부되어
대부분 총살되거나 죽창, 꼬챙이등으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사열식하는 좌익들
인민재판 당시 시체
9월 15일 맥아더 유엔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13일 뒤 서울을 재탈환 하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가는등 통일이 눈 앞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故이은주씨가 죽는 장면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보도연맹사건 입니다. 보도연맹은 전쟁
직후인 1949년부터 좌익세력에서 회원들을 받았으며 전쟁이 전개될 당시 회원들은 30만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입자들 대부분이 북한군에게 살기 위해 가입했거나 가입만 하면 쌀이나 식량을 배급해줬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가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전쟁중에 언제라도 북한군
에게 협조 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려 대전으로 피난시에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명령을 받은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헌병과 함께 마을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합니다.
배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사형당한 아낙들
당시 학살당한 시신들
사형집행중
사형직전의 한 청년
이때 학살 당한 사람만 최소 20만명에서 최대 50~100만명 가까이 죽은것으로 추산되고 재판으로 사형을 했다지만
앞 줄 사형 뒷 줄 무기징역이라는 애들 장난과도 같은 재판이 열렸다니 전쟁 동안 법 집행이 얼마나 개판이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후 이승만 정부는 또 한번 민심을 잃는 짖을 저지르는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입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 전선에서 밀리자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 11일 국민방위군설치법 시행으로 만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들을 강제 징집했습니다. 하지만 졸속 행정과 병력수송, 훈련, 무기
국민방위군
무장 등을 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지 못했고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등 5명이 국민방위군에게 가야할 현금
23억 원과 쌀 5만 2천 섬을 착복하여 추운 겨울이였던 1.4후퇴때 9만명이나 젊은 장정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되는 어이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국민방위군들은 4명당 쌀포대기 하나로 난방을 해결했으며 막사와 텐트가 부족해 난방도 안되
는 학교 교실에 100여명씩 쑤셔넣어 버리는 바람에 이가 들끓어 장티푸스가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부산까지 피난
에 성공한 사람들은 배가고파 마을 잔치집이란 잔치집은 모두 찾아가 음식을 먹었지만 몇 달씩 굶다가 급하게 먹어 급체해
죽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중들에게 알려져 민심은 극도 나뻐졌으며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사임하고 이회영의 동생 부통령 이시영 또한 사건을 확실하게 처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부통령 자리를 사임합니다.
이에 김윤근과 윤익헌등 5명은 사형되고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이기붕은 정계에 스타로 떠오르게 됩니다.
1950년 많은 국군 장병들이 목숨을 바치고 있을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 정권 유지를 위해 11월 30일 대통령직선제
를
발췌개헌 당시 기립투표하는 국회의원들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이유는 1950년 5월 30일 총선 결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야당이 승리하자 본인의 정권 유지가 어려울
것을 예상하여 생각해 낸 치졸한 방법이 였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해 더 설명 하자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
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됐고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투표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이승
만에 반대하는 야당이 다수였던 국회를 봤을때 이승만이 낼 수 있었던 최상책이 대통령 직선제였습니다. 1952년 1월 18일 국
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이승만 정부와 국회에 알력이 생기자 5월 25일 국회 해산을 하기 위해 이승만은 부산과 경상도 지역
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김일성의 사주를 받았다며 국회의원 12명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쇄도하자
이승만은 6월 4일 국회해산을 보류한다고 표명하고, 국회의원 장택상의 중재로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
을 발췌,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합니다. 이에 7월 4일 백골단과 경찰들을 이용해 반대하는 국회의원들 가로막고 기립투표
방식으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이승만
은 자신의 독재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1년뒤 19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채결되고, 다시 년이 지나 우리나라 역사상 가
장 어이없는 개헌이 일어납니다. 5월 20일 다수당이였던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
을 없앤다는 내용을 골자로하여 9월 8일 국회에 제2차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으나,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
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
가 나왔습니다.(당시 136명이였던 자유당에서 모두 찬성만 찍으면 됐던 상황에서 자유당 의원중 한명이 투표 용지의 한자를
몰라 용지 가운데에 도장을 찍어 1표가 모자르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했지만
이틀후 자유당은 서울대교수를 앞세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를 수학 계산하면 135.33...으로 4사5입하면 135명이 된다는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코메디에서도 안나올 해괴한 짓을 저지릅니다.
당시 민주당의 대선 홍보포스터
2년뒤 민심을 잃을 대로 잃은 이승만과 자유당은 56년 대선을 치루게 됩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부통령에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은 대통령 신익희, 부통령은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또는 심장마비라고도 합니다)로 급사하자 대선은 자유당의 이승만과 무소속의 조봉암의 대결이
됩니다. 대선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70%에 가까운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하지
만 놀라운건 조봉암의 30% 득표율이였고 이승만은 이를 경계해 1957년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을 빨갱이라 모함하여 진
보당사건을 일으키고 1년뒤 1958년 조봉암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 5분전 담배 한 가치를 피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
니다.
형을 집행 받고 있는 조봉암
2년뒤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에게 떠날대로 떠났고 운명의 1960년 대선이 다가옵니다.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
기붕을 후보로 민주당은 대통령 조병옥, 부통령에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늘이 이승만을 도우는지
조병옥이 위암 수술 중 미국에서 죽자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확실시 됩니다. 이에 승계권을 쥐기 위해 이기붕은 부통령 선거
를 부정으로 조작하여 전국적으로 없는 사람을 유령유권자로 조작, 비밀이 아닌 공개투표, 임화수의 동대문상입연합회를 이
용해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을 자행해 이승만과 이기붕은 유래없는 득표율 99%~95%를 얻자 너무 높다 생각했는지
70%대로 낮춰서 발표합니다.
부정선거를 주도 했던 임화수(완쪽)와 유지광(오른쪽)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부정선거로 화가난 민중들
대선 바로 전 대구에서 1960년 2월 28일 민주당 후보의 유세가 있던 날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갈까봐 정부에서는 일요일임에
도 불구하고 등교를 강요합니다. 이에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라며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데모를 일으킵니
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서울과 대전, 부산에서 산발적으로 데모가 일어났고,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
이자, 시민들도 선거포기하며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습니다. 이에 경찰과 동대문폭력배들은 무자비한 제지를 했고 많은 사상
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후 4월 11일 마산 앞 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업 도
중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민과 함께 시위를 했고 서울에서
김주열군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시신
4월 18일 고대생들이 대학생 최초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하고 귀가 도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동대문폭배들에게 피습
을 받자 민심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됩니다.(고대생 피습사건)
피습당한 고대생들과 민간인들
다음날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자 오후 1시를 기해 서
울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4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 오후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
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습니다.
발포 명령을 내린 경무대 서장 곽영주 그는 이승만의 신임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다.
경찰이 세운 철조망을 넘어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명이 학생 4.19에 쓰러져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시가지에서 평화적 시위
를 하였습니다. 이는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며 성명을 발표해
12년 이승만, 자유당 독재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후 이기붕과 박마리아 부부, 둘째 아들 이강욱은 이강석이 쏜 총에 맞아 죽
고 이강석 자신도 자살하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4월 30일 9시 50분 육군수도병원에서 장례가 치뤄지고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장례식에 참가해 눈물을
이기붕 부부와 두 아들의 관이 나란히 서있다.
흘리며 5월 2일 하와이로 망명을가 5년뒤인 1965년 그곳에서 7월 19일 오후 7시 35분 9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
니다. 그의 영구는 7월 23일 서울로 돌아와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룹니다. 그는 독립활동부터 권력욕과 자신의 이득만을 챙겼
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승만의 영결식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친일파 처단을 막았으며 헌법을 농단, 12년 장기 집권을 하며 그가 집권하는 동안 100만명이 넘는 사람
을 죽였지만 아직도 국회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를 도왔던 자유당은 현재 한나라당이 되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며 국민을 우롱하고 아직까지 건국의 아버지라며 이승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출처 : I Love Soccer- 孔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