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기로는 박정희의 경제쟁책들.. 그니까 5개년 경제개발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전부 박정희가 갈아엎은 장면정부가 구상해놓고 실행 준비하던 것들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거기서 외자를 도입하려고 어떠한 사과도 받지 않으며 졸속으로 일본과 수교를 맺고
베트남전에 국군을 보냈다고..
물론 저는 새마을 운동은 꽤나 효과를 봤다고 생각합니다만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의 원인이 어떤 훌룡한 정책
그니까 정책의 성공이라기보다 하루 18시간 동안의 노동을 강요하던 노동착취와
국군과 역사를 팔아서 벌어온 외자 덕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장면정부 당시에는 북한과 평화적인 통일 교섭을 시도했고
상당히 희망적인 모습이였다고 알고있습니다
당시에 북한 지도부는 김일성 독재체제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분권적인 형태였고
북한에서도 평화통일을 원하는 세력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집권하고, 그 명분으로 반공을 내세웠기 떄문에
그래서 무조건 적인 반공 정신을 세뇌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맹목적이면서도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생겼다고 봅니다
어찌보면 배운거 하나 없는 이분들은 이승만으로부터 내려오는 한민당의 계보
(이승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이명박)
의 집권을 위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는거죠
게다가 쿠데타로 인해 정통성이 결여된 상황에서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만들기위해
교묘하게 지역감정을 유발시켰고, 아직까지 내려오는 지역간의 분쟁과 그에 따라는 폐단은 여기에 기인한다봅니다
다음은 박정희 시대의 여러가지 자료들입니다
1970년 노동착취에 항거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그린 영화의 한장면입니다
대선에서 박정희 630만표, 김대중 540만표
박정희가 휘하의 대략 100만명 가까이의 군인 밑 한민당 추종세력을 동원한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김대중의 승리였습니다 여기서 위협을 느낀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시작하는 한편,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고
사형을 언도합니다
유신체제에서 박정희는 초법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구로서 설치되었습니다
위의 일들보다 조금 먼저 1965년에 있었던 베트남 파병입니다
가수 남진씨도 말했듯이, 겉으로는 의용의 모습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요된 것이였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발단이 된 YH무역 여공들의 농성사건입니다
이때 박정희 정부는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합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이를 비난하자
박정희는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해버립니다
그러자 부산-마산에서 부마시민항쟁이 터졌고 박정희가 이에 대한 진압을 시작하려하던 시기에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피살합니다
민중이 현재의 주체가 되려면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부인할 수 없고, 거기에 박정희의 업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경제성장의 모습을 자세히 훑어보면 노동착취와 일부 재벌중심 기업구조 등등의 여러가지 폐단이 발견됩니다
모든 것이 명확히 밝혀질 수는 없겠지만, 보수계열의 언론이 제공하는 단편적인 정보만 보고
박정희를 평가하는 과오를 범해선 안될거같습니다
출처 : 다음 - 이종격투기 카페 : 베르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