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옥중서신 논란에 관해

구삼돌 작성일 11.02.06 21: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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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하 전두환)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김대중)이 이른바 '목숨을 구걸했던 편지'를 게시하면서 이것을 군사정부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는 김대중의 과거 인터뷰를 비교하며 조롱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 한가지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김대중의 정치적 정당성은 그 지지자들이 평소 생각했던 만큼 그리 견고하지 못하다는 증거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통해 김대중을 '타협왕 핵펭귄'으로 묘사하는 건 그야말로 치졸한 짓이며, 마치 일본 2ch에서 기생하는 '넷우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근, 현대사의 여러 정치적 사건은 고대사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며 여러가지 팩트가 혼재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저 단순히 하나의 사실만을 두고 이를 전체인양 왜곡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혐오하는 일본 넷우익의 비열함과 닮아 있다. 자기 구미에 맞는 사실의 한 조각을 찾아내어 그동안 숨겨져왔던 역사의 비화를 찾아서 일반 대중들에게 진실을 알렸다고 자위하는 꼴이 정말 닮지 않았는가?


 우선 논란이 된 김대중의 옥중서신의 실체와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 인사 20여명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5.18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특히 김대중에게는 국가보안법에의한 반국가단체결성혐의(1973년 한민통 결성관련)를 두어 '반란의 수괴'로서 기소하였다. 결국 대법원은 1981년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는 국내외에서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당시 미국은 전두환의 등장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고, 심지어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과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는 12.12사태와 그이어 등장한 신군부 세력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함께 공공연한 혐오감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특히 12.12사태 당시 군사쿠데타를 위해 수도권과 전방의 주요부대를 함부러 빼돌리는 행태 자체가 국가와 정부에 충성하는 보통 미국 군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파렴치한 행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군사정부가 과연 북한과의 군사적 대결 속에서 남한을 지키고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보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문화일보 2007.2.22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전 미국무부 한국과장과의 인터뷰 기사 참조)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은 그야말로 미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당시 김대중이 내란음모죄로 수감되고 사형이 확실시 되자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전두환에게 "김대중을 처형하면 한미 협력관계도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1981년 레이건 신임 행정부도 전임 행정부와 그 뜻을 같이했다. 리처드 앨런 전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증언에 따르면 레이건 대통령은 김대중의 사형 집행에 대해 '윤리적인 범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한미관계에 있어서 재앙이 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2009.8.20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요약 참조)


 또한 미국만이 아니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또한 전두환에게 김대중의 사면을 부탁하는 등 외국 정부의 압력이 거세지자, 군사정부로서 정통성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사형에서 무기, 그리고 20년형으로 감형할 수 밖에 없었다. 점차 김대중의 처리에 대해 정권의 부담이 커지고, 김대중을 둘러싼 미국과의 관계가 난항을 겪자 군사정부 내에서는 김대중의 미국 망명을 기획하게 된다.


 당시 노신영 안기부 부장(이하 노신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두환에게 김대중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미국과의 뚜렷한 관계개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직접 전두환에게 권유하였고 결국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김대중에게 미국 망명을 권유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김대중의 옥중서신이 문제가 된다.


 인터넷과 정경사 게시판에 올라와있는 김대중의 서신은 그 자체를 놓고 본다면 민주투사라고 자청하던 사람이 독재자에게 목숨을 구걸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이 편지는 노신영이 이희호 여사(이하 이희호)를 만나 형 집행정지 후 미국 망명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들어 '각서'의 형식으로 요구한 것이다. <후광 김대중 평전>에서 발췌해보자면,

 1982년 12월 14일 안기부장 노신영의 연락으로 이희호는 프라자호텔 21층에서 그와 만났다. 안기부의 '안가'로 쓰는 방이었다. 노신영은 "내 재임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2~3년 미국에서 병 치료를 하도록 권해보라. 응답을 알려주면 대통령 각하에게 건의해 가족과 함께 떠나도록 하겠다. 단, 개인의 생각이니 비밀로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또한 김대중이 이를 거듭 거부하자, 다시 안기부의 회유가 계속되었다.

 안기부 직원이 무슨 연락을 취하더니, 자기와 함께 다시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오후 2시경 또 남편을 면회했다. 오후 4시가 넘도록 대답을 하지 않기에, 나는 미국에 가자는 것을 강력하게 권하면서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야 같이 구속됐던 분들도 나오게 된다.”고 말을 전했다.
 (이희호의 증언-후광 김대중 평전에서 재인용)

  정부 당국자가 김대중의 ‘친필각서’를 요구하고, 김대중이 각서 쓰기를 거듭 거부하자 “각하에게 건의하려면 문건이 필요합니다. ‘병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활동 안 하겠다’는 한 장이면 됩니다. 내부용이니까 외부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안기부 국장의 다짐이었다.
 (후광 김대중 평전 참고)

 결국에는 내란음모로 같이 수감된 동료들의 문제 해결과 스스로도 무릎 관절에서 비롯된 신체적 고통도 견디기 힘들었다는 점이 그 굴욕적인 각서를 제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각서를 신군부 정권은 악용하여, 김대중이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된 1982년 12월 16일 이진희 당시 문공부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김대중이 전두환에게 신병치료를 목적으로 한 방미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노신영은 박형규, 김관석, 이해동 목사 등 김대중과 가까운 종교지도자들에게 김대중이 전두환으로부터 15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후광 김대중 평전 참고)


 이에 대해 이희호는,

 미국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것이기에 나는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제부가 은행에 다니는 여동생에게 특별하게 부탁해 변통한 돈을 그들에게 환전을 부탁했던 것이다. 두 차례나 집안을 샅샅이 뒤져 현금과 약간의 외화까지 압수해 간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날 이후 남편은 안기부 지하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청주교도소 특별 감방에 갇혀 목숨 하나도 보전하기 힘들었으며 국내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연명해 온 우리였다.
 (이희호의 증언-후광 김대중 평전에서 재인용)

 라고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진실에 가까운가? 노신영은 이후 자신의 발언 -김대중에게 각서를 요구했고, 15만 달러를 주었다는 사실- 을 부인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까지 김대중의 반대파들에게 그의 부도덕성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희호를 비롯한 김대중의 주위인사들은 이는 신군부의 철저한 공작에 의한 것으로 내란음모 사건의 수감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성한 것에 불과하고, 당초 비공개였던 약속을 어기고 언론에 공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받지도 않은 15만달러를 빌미로 김대중의 정치인생을 끝내기 위한 비열한 수작이라고 주장한다.


 자발적인것인가? 아니면 강요된 것인가? 여기서 논리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전두환 정권은 레이건 행정부 출범이후 최초로 백악관에 초빙된 외국 지도자는 다른 서방 선진국을 제치고 전두환이 처음임을 들어 미국으로부터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정통성을 인정받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사실상 추방을 당한 김대중을 미국은 어떻게 대했는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비롯 미국 주요정치인들은 김대중의 미국내 정치활동을 적극 지지하였고, 케네디 상원의원과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은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 등을 보냈을 정도로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대접받았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측은 김대중의 미국내 정치활동에 대해 그가 '각서'까지 직접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을  거두지 않고 1985년 귀국을 결심하자, 최창윤 대통령 정무비서관은 85년 1월 23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씨(김대중)가 귀국을 강행한다면 투옥하겠다"고 정부입장을 공식천명했다. 또한 "우리는 김씨를 정치인으로 대우할 수 없다. 그는 국가변란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체류 중 정치활동을 하지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뿐만 아니라 정부를 시민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군사독재로 규정하고 정권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우리를 배신한 그가 귀국하면 투옥하겠다. 이는 국내에서 소요를 일으킬 수도 있으나 우리는 법과 국가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94.04.10 남산의 부장들 (182) 全씨 訪美와 바꾼 「金大中 귀국 참조)


 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그야말로 역대 한국정부가 경험하지 못한 강경한 입장이었다. '김씨의 안전귀국이 보장되지 않는한 85년 4월로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 발표를 연기하겠다'는 방침이 당장 서울에 통보됐다.
(동아일보 1994.04.10 남산의 부장들 (182) 全씨 訪美와 바꾼 「金大中 귀국 참조)


 결국 한국정부는 김대중의 귀국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국 국무부는 김대중을 강사로 초청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 등에 관해 강연을 하도록 하여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그를 미국이 보호하는 민주주의 인사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한국외교사에 길이 남을 '찌질한 짓'을 하는데, 귀국하는  김대중을 수십명의 기관원들을 동원해 공항 지하출구로 빼돌린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미국인일행들에게 (단순한 미국일행들이 아니었다. 미국 하원의원 등 37명의 저명인사와 기자단이 '신변안전'을 위해 귀국길에 동행한 것이었다.) 폭행과 위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데일리 2009.8.18 [사진으로 본 김대중]폭풍을 몰고온 귀국 참조)


 당연히 미국 국무부는 전두환 정권 출범이래 처음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 공항에서 벌어진 소동과 김대중에 대한 연금조치에 유감을 표시했다. 당시 주한 미대사 워커도 외무장관에게 합의사항 파기에 대한 사과와 해명을 요구했다.


 과연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야당 지도자에게 그것도 한국정부에 따르면 전두환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게다가 15만달러를 수수한 부도덕한 정치인에게 이처럼 최대한의 예우를 제공한 예가 있는가? 미국은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작'을 믿지 않았던 것이며, 김대중이야말로 한국의 차세대 리더 중의 하나임을 공식 천명한 것이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전두환에게 '앙망하는...'으로 시작하는 비굴한 편지로 목숨을 구걸한 비겁한 정치인을 미국은 왜 이렇게 감싸안았을까? 과연 김대중은 자의로 탄원서를 제출한 것인가? 전두환 주변 인사들과 김대중 주변 인사들의 '각서'를 둘러싼 증언에서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본 글에서 양측의 주장의 진실성을 가리기 위해 들었던 미국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바라본다면 김대중이 타의로 어쩔 수 없이 각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군사정권이 악용했다는 것이 좀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나의 사실이 전체의 진실을 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씨 정사겔에서 흘러다니는  역사의 한조각을 가지고 김대중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혐오해 마지않는 일본의 '넷우익'과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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