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의 마지막 챕터 '과거를 돌아보며' 안에서 일부 발췌. 1996년 9월 29일 '뉴욕 타임스 매거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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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누구나 교육이 개인과 국가를 막론하고 경제적 성공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학사 학위가, 경우에 따라서는 석박사 학위가 저 "기호분석가들"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기호의 분석에 정말 탁월한 것은 컴퓨터로서, 컴퓨터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은 현실 세계의 어지러움일 뿐이다. 더욱이 기호는 아프리카의 아스마라나 남미의 라파스 등지로 간단히 전송될수 있고, 그곳에서는 보스턴에서 들어가는 비용의 몇 분의 1만으로도 작업이 수행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세기 동안에 학사 학위를 필요로 했던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지게 된 반면, 나머지 많은 일자리들은 세계 문학의 전공 여부와 상관없이 한 지적인 인물에 의해 잘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96년에 이미 명백한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당시에도 미국의 최고 부자는 대학 중퇴자인 빌 게이츠였다. 그가 정식 교육을 많이 받아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 기술 기업을 세운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1996년에 미국을 휩쓴 "다운사이징"에 대한 공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시 경제 전문가들이 바로 지적하였듯이, 미국인들이 90년대에 들어 일자리를 잃고 있던 비율은 역사적으로 볼 때 특별히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운사이징이 뉴스로 떠올랐는가? 그 이유는 숙련 기술공들과 기타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고용 수요가 높았던 반면에 화이트칼라, 즉 대학 졸업 학력의 노동자들이 사상 최초로 대량 해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학력자들이 고임금 프리미엄을 즐기던 나날이 저물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였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고학력에 따른 보상이 악화되면서 교육 산업 자체가 위기에 직면한 것은 물론이다. 도대체 어떤 학생이 학력 증명서의 금전적 가치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4년과 대학원 몇년씩을 다니려고 하겠는가? 당시에는 6개월 내지 12개월 정도의 직업훈련이 필요한 일자리들-간병인, 목수, 집안 관리인(대체로 부부가 무보수로 수행하던 가사를 떠맡은 직업) 등등-이 석사 학위 소지자가 벌 수 있던 만큼 받는 것이 보통이었고, 때로는 박사 학위 소지자들보다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대학 진학률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정점에 도달한 이후 거의 2/3수준으로 하락하였다. 많은 고등 교육 기관들이 그 같은 가혹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명문 대학들은 대부분 그러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지만, 다만 학교의 특성을 달리 하여 좀더 전통적인 역할로 복귀함으로써 그럴 수 있었다. 오늘날 하버드와 같은 대학은 19세기에 그랬듯이 학문의 전당으로서보다 사회적인 기관으로서-부유층 자제들이 사회 범절을 익히고 같은 계급 출신 친구들을 사귀는 장소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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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업체 등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실무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불평이 터져 나온지 오래였고,
이번에는 반대로 학생들 입장에서 대학 졸업장이 효용에 비해 쓸대없이 비싸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인걸 보면
문제의 핵심은 그 '쓸모없는' 걸 꾸역꾸역 소비하는 행태일테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당시에는 6개월 내지 12개월 정도의 직업훈련이 필요한 일자리들-간병인, 목수, 집안 관리인(대체로 부부가 무보수로 수행하던 가사를 떠맡은 직업) 등등-이 석사 학위 소지자가 벌 수 있던 만큼 받는 것이 보통이었고, 때로는 박사 학위 소지자들보다도 많이 받았다
라는 현실과는 좀 동떨어져 있기에 문제의 핵심을 직시하기 힘든것도 사실.
승자독식이라는 신화가 사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아메리카 드림' 운운 하는 식으로 좀 낭만적으로 들리는 측면도 있고 건전한 자유경제시장을 담보하는 듯이 비추이는 측면도 있고 또 말이 승자독식이지 자본이 팽창하는 시점에서는 그 승자의 자리를 차지한다는게 꼭 비인간적인 경쟁을 의미하는 것만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세대를 건너 후기 자본주의에 접어들면, 신규 세대는 세대내 경쟁이라는 순수한 순위경쟁에 지치고 세대간 경쟁이라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게임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고.
등록금 문제로 시끄러운것은 결국 크루그먼의 예측대로 정리되어 갈 것이라 보지만, 지금 이게 이렇게까지 큰 이슈가 되는 것은 이슈에 편승하려는 정치적 함의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 함의는 역시 먹고 살만한 기득권 내에서의 사정.
등록금을 '아파트값'으로 치환하고 생각해 보아도 갈등의 양상은 동일하니, 해결책도 역적용이 가능할듯.
투기심리를 성토하긴해도 '반값아파트 공약을 실현하라'는 집단적 목소리는 없다는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