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임진왜란

짱공이시다 작성일 13.02.03 01: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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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군와 일본군의 똑같은 점은 무엇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초반 반짝, 후반 패배 입니다.

초반 광대한 영토를 집어 삼킨후 이후 수세적으로 돌아서서 방어전으로 일관, 차근차근 연합군에게 빼앗기고, 결국은 패망한 것이지오.

이것은 임진왜란도 똑같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는 했으나 겨우 보급선이나 끊어서 겨우 얻은 승리라고 생각하시지만 일부는 맞지만 전체적으론 그렇지 않답니다.

일본의 전통은 선제 기습입니다.

이것의 시초는 임진왜란이고 선제 기습으로 인해 일단 임란초에는 피해가 컸습니다.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고 초반 너무나 어이없는 패배로 인하여 민심의 이반이나 피난으로 인한 인구 소재 파악 불가등으로 세수의 감소가 일어났고 이후 상당기간 이를 복구하기에 너무나 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울산성 전투>


먼저 전쟁이 일어난 1592년. 이때 조선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에 엄청나게 타격을 입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 당시 기록으로 정확히 남아있는 전투 횟수는 총 70회. 이중 조선측의 승리 횟수는 40회 일본측의 승리횟수는 30회 입니다.

 

조선의 관군은 단독으로 19회의 승리를 얻어냈으며, 의병 단독으로는 9회, 관군과 의병의 합동작전은 12회 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이 초반 기적적인 승리를 얻어낸 요인에는 조선의 안이한 대응도 있었고 잘못된 전략으로 인한 군의 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의 패배로 상당한 지역을 잃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몇번의 승리만으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도성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전쟁이 일어나고 몇일. 그리고 몇달 사이에 일어난 것일 뿐. 즉 기습(?)당한 조선의 무력함 때문에 얻은 승리라는 것이죠.


전쟁이 일어난지 1년이 지난 1593년의 전쟁 횟수는 총 17회. 이중 조선군의 승리는 14회 일본측의 승리는 불과 3회에 불과합니다. 그 중 관군 단독은 8회 의병단독은 1회 합동작전은 5회 입니다. 전투 횟수도 적을 뿐더러 조선의 승리가 이렇게 많다니? 하는 의문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다만 조선은 초반의 피해로 인해 일본군을 압도해 한반도에서 몰아내지 못하고 있었고 일본도 국제전에 대한 무지와 전쟁 피해로 인한 전력의 약화로 버티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일본군은 이후 왜성을 쌓고 방어전 위주로 전략을 변경합니다. 이때 이순신 함대의 보급망 절단으로 일본군은 아사 직전까지도 몰리는 비참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밀려 내려온 것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북변 군대의 강력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북변의 병력은 대단히 정예로 항시 여진과 마찰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실전 감각이 풍부한 상태였습니다. 실제 일본군은 북변에서 식량 보급을 위해 쌀창고를 털다가 북변 주민 (군인아님... 뭐 조선은 민간인이나 군인이나 그게 그거지만)에게 박살나고 퇴각합니다.
 

이후로는 어떻게 되냐고요? 전투가 없습니다. 전쟁이 7년인데 어떻게 전투가 없냐고요? 없는걸 어떻게 합니까?

다음 전투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 나타납니다. 1597년 전투는 총 10회가 벌어지는데 이때 일본측은 적극적 공세를 펼치죠. 당시 일본군의 공격시도는 총 8회 조선군의 공격시도는 2회 뿐이죠.

즉 총 10회의 전투 대부분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왜란 초기와는 좀 다른 양상이죠.

허나 이때도 조선측의 승리가 5회, 일본측의 승리가 5회 입니다. 이 5회의 승리는 관군 단독전이죠.

사실 이때 선조의 의병장에 대한 토사구팽으로 인하여 의병이 상당히 위축되고 그 이전의 의병은 정규군으로 편입되어 일어난 현상이죠. 다음해 1598년의 전투도 총 8회 뿐입니다. 이때는 조선측의 공격만으로 점철됩니다. 조선은 8번 공격으로 6회를 승리하고 2회를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중 3회는 조명 연합군의 전투입니다.

그리고 이 후로 전쟁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끝나 버리게 됩니다. 7년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7년 내내 전쟁만 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간 양쪽 모두 성을 쌓고 영지를 경영하는 방어전의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조선 또한 초반 워낙에 심하게 당한터라 결정적 한방을 가지지 못해 (그래서 명군의 참전을 원한거죠 실제로 별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질질 끌어 버리는 통에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지만 사실상 전투는 초반 1년이 가장 심했죠.

결국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 전쟁이 조선의 승리라는 것 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니면 이순신 장군의 수군만의 전쟁이라든가 혹은 의병으로 인한 승리라든가 하는 정도로 오해하죠. 허나 총 105회의 전투에서 관군 단독으로도 38회의 승리를 기록할 만큼 무력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총괄

임진왜란 총 전투횟수 105회. 조선측의 승리 65회 일본측의 승리 40회. 이중 관군 단독승리 38회, 의병 단독승리 10회, 관의 합동승리 17회 입니다. 
(역사에 확실히 드러난 전투만을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조선군의 야담 형식의 카더라 승리는 아예 빼버린 수치입니다. 그래도 저런 수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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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당시 침공한 일본군이 1군부터 16군까지 총 286,000명 정유재란시 추가된 군대가 13만7천.

나고야에 토요토미의 명력을 기다리던 10만의 예비병력이 대기중이었음

그렇게 쏟아부었는데...조선군에 깨진 그 "경험" 많은 일본군은;;;

도리어 조선에 항복해서 조선편에서 싸운 항왜만 1만..

조선이야 초반러쉬에 워낙 타격을 입어서 대규모 병력동원이 힘들었지만..

일본은..본토-부산-동해의 보급로는 최대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단지 보급로가 차단되서 일본이 졋다는건 말이 안되는 소리지요

수군은 전라도로의 왜군진출을 차단함으로 서해를 방어하고 국가의 전쟁능력을 유지시킨거지

강원도,함경도,경상도로의 왜군의 진출을 막아주지는 못했음..

왜군은 그외에도 가토가 만주까지 올라갔다가 여진족에게 개털리는 치욕을 당하기도 함.,..

그 왜군을 개털던 여진족은 조선까지 왜군을 추격해왔다가 조선의병에 의해 격퇴

(의병입장에서야 이놈이건 저넘이건 다 침략자니까..)

전쟁초반 함경도까지 진출햇던 가토는 평야에서는 여진족에게 개털리고 산악전에서는 의병한테 개털리는등..

결국은 포위공격당하다 필사적으로 탈출에 성공...단숨에 쉬지 않고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내뺌;;

이후 가토는 어디다닐때 자기먹을 도시락을 꼭싸서다니고(도망칠때를 대비해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함경도에서 포위공격당하던 공포를 못잊어서

자신의 성에 우물을 수십개를 파고 식량을 무지 비축해둿다는 이야기가 실제 역사에 기록되 있음..

 

임진왜란의 식량난 헤프닝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들이닥쳐 식량을 그다지 털어먹지도 못한게...전쟁기간 일본군의 공격에 관원들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무기나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센스를 발휘해서 정작 일본군이 접수한건 얼마 없었다죠..예를들어 남원성전투에서는 전투막판 성이 함락될것같자 화약고와 식량고(남원성은 조창이있던 도시라 엄청난 식량이 쌓여 있엇습니다)에 불을질러버렸습니다.. 또 왜군이 본거지로 삼은 영남지역 농민들이 상당수가 이반해버려서..땅이 있어도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져(이건 조선입장도 마찮가지) 7년전쟁기간중 3년이 풍년이었는데도 항상 왜군은 본영에 식량부족을 호소했습니다..하지만 조선은 "전라도"라는 쌀창고가 있어서 상황이 그나마 좋았죠..게다가 3년간의 풍년덕에 전라도가 전조선을 먹여살리는게 보다 수월했구요. 그리고 양쪽다 식량이 모자라다 보니..별별헤프닝이 많았습니다..특히 조선보다 훨씬더 굶주림에 시달리던 왜군은 "밥만주면 항복하겠다"라는 병사들이 많았고 그래서 웃기는 이야기들도 내려옵니다..어느 지역에서 조선,일본군이 대치하고 있던중 일본군이 사자을 보내 "밥만주면 항복한다"라고 조건을 제시했더랍니다..거기에 대한 조선군의 답은..."우리 먹을 밥도 없다 그냥 싸우자"라고 답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하죠;;당시 항왜가 1만에 달했다는데 물론 김충선공처럼 뜻을 품은 바가 있어 항복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굶주림, 추위등 전투외적인 부분을 못이겨 항복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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