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일이 많아 라듣보의 놀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했다. 때문에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글을 쓴다. 굉장한 학술적 논의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편하게 읽었으면 한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피터 싱어는 칸트가 깠다.’ 하는데서 출발한다. 설마 아직까지도 라듣보가 100년 뒤에 나타난 피터 싱어를 칸트가 무덤에서 되살아나 깠다고 파악하는 지는 모르겠다. 이는 바투칸 형과 둘이서 대화를 통해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잠이 와서 다 읽어보지 못했는데 삭제가 되고 없기 때문이다. 그날 이 글을 다 써서 올렸으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일단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시작하자. 칸트가 생명윤리에 대해 무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생물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1800년의 독일이었다. 이후 꽁트(1798-1857)가 생물학을 실증철학으로 구분지었다. 이후 종의 기원과 해부학등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자료가 모여졌다. 칸트가 살아있을 무렵도 활발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던듯 하다. 2000년대 들어와 게놈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신기원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젖어있던 시절도 있었다. 오히려 요즘은 게놈 프로젝트 이후 창조론이 힘을 더 얻고 있는듯 하다. 인간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지만. 결국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그 배열 뿐이니 말이다. 그 속에 신의 신비함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도 완전 구라같진 않아보인다. 생명윤리는 윤리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은 생명윤리도 인간으로 귀결되며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인간짓을 해야한다는 칸트의 이야기는 계속 살아 있다.
이 법은 생명과학기술에 있어서의 생명윤리 및 안전을 확보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거나 인체에 위해를 주는 것을 방지하고, 생명과학기술이 인간의 질병 예방 및 치료 등을 위하여 개발·이용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국민의 건강과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 1조)
여튼. 지금도 라듣보에게 하는 나의 외침이 아주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가 한 약속은 지키는 편이다. 그러니 피터 싱어를 칸트로 까보임으로써 내 말을 증명하고 라듣보와 그에 동의하는 인간들의 답을 들어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너무 이야기가 길어서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피터 싱어는 새로운 윤리적 기원을 연 듯 하지만 실은 엄청난 모순들을 안고있다. 감응력의 기준은 여전히 인간의 동정심에 기인하고 이익평등고려의 원칙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생명의 불가침성의 마지막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그럼 시작해 본다.
피터싱어의 실천윤리학에 대한 칸트적 비판
감응력의 함정
감응력이란?
왠만하면 짧게 쓰고 싶지만 기왕 내 능력을 자랑해 보이려면 주석도 좀 달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글이 길어지게 되는점 양해바란다. 피터 싱어가 누군지부터 설명을 해줘야 읽기가 편할테다.
실천윤리학 분야의 거장이자 동물 해방론자인 피터 싱어는 1946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태어나 멜버른 대학,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중략) 2005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오른 바 있으며 동물권익옹호단체인 동물해방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단연 동물해방을 통해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전 세계적인 동물해방운동을 촉발했으며 그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생략)
이건 피터싱어의 책 앞에 나온 피터 싱어의 소개다. 참 어느 책이던지 지은이 소개는 화려하다. 동물 해방을 위해 앞장서서 나서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만 기억해 두면 편할거 같다. 피터 싱어가 동물 해방을 외치는 과정은 실천윤리학 전체를 이해하기 편리할 것이다. 그 핵심이 되는 내용이 감응력이라 생각하면 된다. 감응력(Sentience)은 도덕성을 가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 말한다.
싱어는 생명의 범주를 자의식과 의식의 유무에 따라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눈다 의식이 있으면서 동시에 자의식을 갖는 존재의 생명, 의식은 있지만 자의식은 없는 존재의 생명, 의식도 없는 존재의 생명이 그것이다. 각각을 편의상 ‘자의식적 존재’, ‘의식적 존재’, ‘무의식적 존재’라고 불러보자. 여기서 자의식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과거와 미래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의식이 있다는 것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곧 감응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의식적 존재에는 대부분의 사람과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유인원, 고래 돌고래, 개와 고양이나 돼지 등이 속한다. (최훈, 감응력 이론 다시보기, 철학탐구, 2010)
재미있는 이야기다. 싱어도 본인도 개와 고양이 돼지에게서 자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변적이라고 한다. 이런 감응력이라는 존재가 기준이 되어 과연 그가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에서 이런 이야기도 한다.
연체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다. 게다가 굴이나 홍합이 혹시라도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들을 먹을 경우 상당한 고통이 초래될 것이다. 그들을 먹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먹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싱어, 1999, 동물해방)
감응력이란 것은 대상이 느끼는 고통과 쾌락이다. 피터 싱어의 소개와 하는 말을 대충 들었으면 감이 잡히겠지만 이 아저씨는 채식주의자다. 웃긴건 연체동물은 먹는 채식주의자란다. 즉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냥 먹어도 된단다. 그것은 의식이 없으니까. 여기에 공리주의적 판단이 들어가서 연체 동물을 먹어야 하는 긴급한 이유가 없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자의식과 의식적 존재는 도덕적 고려 대상인 셈이다.
유사성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아주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언젠가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소가 흘리는 눈물을 한 다큐에서 본 적이 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캡쳐해서 올린 한 예능에서 지상렬씨가 자신은 개를 먹지 않는다며 자신이 키우던 개의 일화를 본적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동물 신경학의 연구의 성과로 인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감응력이 아주 대단하고 놀라운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1871년 다윈이 인간의 계보와 성 선택‘에서 이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감각과 직관, 그리고 인간이 자랑하는 사랑, 기억, 주의, 호기심, 모방, 이성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이 저급한 동물에서도 발견된다고 주장과 아주 똑같다. 나보다 어그로를 좋아하는 듯 하시는 중앙대 맹주만 교수는 피터 싱어의 감응력 이론을 놓고 ’식물도 먹지마!‘ 라고 이야기한다.
동물처럼 인간과 유사한 “어떤 특정한” 속성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그 존재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만일 식물처럼 인간과 유사한 “또 다른 어떤”속성을 갖고 있는 존재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한다면, 이는 온전한 의미에서 종차별주의의 종식이 아니다. (맹주만, 톰 레간과 윤리적 채식주의, 근대철학, 2009)
그러니까 식물이 동물처럼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식물이 생명체로서 의식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마저 배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우리가 인간과 동물이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점들은 다양한 연구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제인 구달의 침펜지 연구와 DNA연구를 통해 우리는 침펜지가 인간과 아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유사성이 도덕적 고려를 당연시 한다는 의견은 배제되어야 한다. 유사성은 결국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도덕적 고려의 당위성을 말한 피터 싱어는 한계가 있다.
고통은 뭐?
많은 실험으로 우리는 동물과 인간의 고통을 발견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고통으로 인한 반응일 뿐이다. 싱어는 고통이란 의식의 상태이며 그 자체로 관찰 불가능 하며 외부적 징후들로 추론할 뿐이라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아무도 고통을 볼 수 없다. 고통으로 인한 반응을 발견하는데서 그치며 고통 자체를 관찰하지는 못했다. 웃기다. 결국 고통은 알 수 없는 정신인데 이게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뭔가.
그렇다면 감응력과 관계하면서도 동시에 의식의 사태이기도 한 고통은 어떤 차원의 현상인가? 그것은 어떤 감각 혹은 지각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현상 아니면 실체적 사건인가? 그러나 어떤 경우든 고통은 감응력을 조건으로 하므로 그것이 감각 내지는 지각에 의존적 현상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감각과 지각은 그 각각이 갖는 의식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 해석에 따라 상호 호환가능한 개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메를로 퐁티의 신체의 현상학이 보여주는 지각의 철학처럼 한 존재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기능과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맹주만, 동물의 고통과 좋은 삶, 철학탐구, 2010)
이 교수님도 물타기 쩌는거 같다. 하지만 맞다. 고통이 뭔데? 메를로 퐁티를 데리고 와서 설명하면 그건 선험적인 관점인 신체에서 출발한 지각의 가능성이다. 아니면 다른식으로 설명해도 되겠다. 옆집 할아버지 데리고 와서 까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다양할 수 있는 감정 내지는 감정 상태들을 한 존재의 신체 지각 또는 의식적 지각 일반으로부터 분리된 단 한종류의 감응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대표감정 한 두 개로 모두 묶어둘 수 있는가? 또한 외연을 넓혀서 싱어와 공리주의에서처럼 행복과 관계하는 포괄적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러한 감정을 갖는 관련 생명체들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가? (맹주만, 동물의 고통과 좋은 삶, 철학탐구, 2010)
이처럼 피터싱어가 가지고 온 감응력이란 것은 확실한 도덕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모든 생명체가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파악하는 것 부터가 문제다. 선천적으로 고통을 못느끼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아니.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던거 같다. 자기 손가락을 씹어 먹어도 고통을 못느끼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먹어도 된다. 공리주의적으로 아주 필요한 긴급한 상황에서 말이다.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다. 피터 싱어 말대로.
결국 감응력 판단은 인간의 몫
피터 싱어가 말한 감응력은 개별 주체가 느끼는 계량화된 고통의 평가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개와 고양이가 느끼는 고통의 치수가 있고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치수가 있으며 말이 느끼는 고통의 치수가 있다.
만약 내가 손바닥으로 말의 엉덩이를 세게 친다면 아마 말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말은 짐작건대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말의 피부는 단순히 치는 것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두텁다. 그러나 내가 똑같은 방식으로 아기를 친다면 아기는 울 것이며, 아마도 고통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의 피부는 훨씬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똑같은 힘으로 친다고 해도 아기를 치는 것이 말을 치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 (피터싱어 실천윤리학)
하지만 앞서 밝힌 듯 개별 주체의 고통은 반응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때려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게 당연하다.
자연의 경과는 필연의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당위는 필연의 인과법칙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필연의 인과법칙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것으로서의 당위는 자유를 전제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도덕법칙은 자유의 전제 위에서 가능한 법칙이기에, 도덕법칙은 곧 자유의 법칙이다. (문성학, 칸트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본 현행 인성교육의 문제점, 세한철학회 논문집, 2001)
동물이든 인간이든 감응력을 판단하는 기준의 설정은 인간이다. 인간이 주장하고 인간이 말하는 윤리성은 인간이 스스로 정한 자유법칙에 의한 행동이다. 따라서 피터 싱어가 이야기 하는 객관적 고통의 인식은 인간이 판단의 자유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자연의 기계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