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도 그리고 일본 외무성 3-4

mugan 작성일 14.03.15 15:36:36
댓글 3조회 2,299추천 7

역사적 문헌자료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국제법, 문화,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온라인 상에 난립해 있는 자료들을 참고하고 자료를 첨부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스압이 심해서 반복적이고 세부적인 자료는 생략했습니다.

여러 자료를 편집하다 보니 글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신용하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국사편찬 위원회 위원 독도학회 회장 역임)의 인터뷰

독도에 관한 100 100답을 참고하였습니다

인터뷰 원문을 보고 싶으시면 http://blog.naver.com/ilong4u/140002070705

#시간되시면 읽어보십시오. 독도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터뷰입니다

-----------------------------------------------------------------------


 139486468537905.jpg

139486469349368.jpg

)

Q 일본정부는 최근에 ‘역사적’으로도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1600년 전후부터 약 80년간 일본이 면허장을 민간인에게 주어 ‘독도(竹島)’를 실효적으로 지배 점유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일본정부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라고 드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일본 어업가 오오다니(大谷甚吉)와 무라가와(村川市兵衛) 두 가문에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다. 이 두 개의 ‘도해면허(渡海免許)’는 얼핏 보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의 점유권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가졌던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보면 도리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는 자료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도해면허’는 ‘외국’에 건너갈 때 허가해 주는 ‘면허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쟁점이므로 그 자초지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159298) 전후에 울릉도는 일본군(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 즉 울릉도를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백성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직후 일본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라는 사람이 월후(越後)라는 곳을 다녀오다가 태풍을 만나 조난하여 ‘울릉도’에 표류해 닿았다. 오오다니가 울릉도(죽도)를 답사해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지만 수산 자원이 풍부한 보배로운 섬임을 알았다. 이에 오오다니는 이 섬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울릉도는 당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울릉도(죽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幕府)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외국(外國)의 영토이므로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건너가 고기잡이를 해도 월경죄로 처벌받지 않으려면 막부의 공식 허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오다니는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당시 백기주(白耆州) 태수(太守) 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Q 그러면 당시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일본인이나 ‘도해면허’에 관련된 자들은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임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물론이다. 오오다니(大谷) 가문과 무라가와(村川) 가문이 1661년 ‘송도도해면허’를 신청하기 직전에 그 신청을 논의하는 과정에 1660 95일자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九山庄左衛門)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大屋九右衛門)에게 보낸 편지에 “장차 또 내년(1661년…인용자)부터 竹島之內 松島(울릉도 안의 독도)에 귀하의 배가 건너가게 되면”이라고 하여, ‘송도도해면허’를 막부에 신청한 근거가 이미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1618년에 받았으므로 “울릉도 안의 독도(竹島之內松島)”에 월경하여 건너가는 ‘송도(독도)도해면허’는 송도(독도)가 죽도(울릉도) 안에 속한 섬이므로 신청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또한 이 무렵 621일자로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에게 보낸 편지에 “竹島近邊松島(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에 도해(渡海)의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받은 두 가문은 ‘송도(독도)도해면허’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구산장좌위문이 1660 98일자로 필사해서 무라가와 가문에 보낸 편지에는 독도(송도)를 “竹島近所之小島(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에 소선(小船)으로 도해(渡海)하는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 즉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지하였다.


139486486077236.jpg

139486491990947.jpg

139486493229147.jpg
139486494867919.jpg
139486495841540.jpg

139486497081658.jpg
139486498482715.jpg

)

139486502818910.jpg

도해면허를 받은 당사자인 오오다니 문서를 보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오오다니 가문의 문서 원본을 찾지 못했습니다.


139486510150622.jpg
 139486511293809.jpg

# 1833~1836년까지 일본 어부인 하치 우에몽은 죽도(울릉도) 도해는 금지 된 것 알고 있었기에 울릉도에는 일본 말대로 울릉도 근처까지 오진 않았다.

하치우에몽의 죽도해안일건기에 울릉도 독도 송도 한반도는 빨강색 일본은 노란색으로 표시하여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였고 애초부터 독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알면서 불법으로 독도에서 어로 하다 처벌 받고 죽었다.


139486517815353.jpg
139486520243315.jpg


# 외국도항면허는 주인조(朱印狀)이고 본토이어도 통행어음이 필요한 시대였으므로 죽도도해면허는 통행어음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송도(울릉도)도해금지를 한 것이지 죽도는 일본령이기 때문에 도해금지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은 ‘죽도도해면허’를 왜 받았겠는가?

독도에 가서 농사를 지을려고? 아니면 별장을 만들려고? 당연히 어업이 목적이었다.

독도를 기준으로 일본쪽 해역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울릉도 쪽과 겹치게 되어 있다.

울릉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하고 그 주변 해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단순 통행어음이 아니라 별도의 죽도도해면허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오오다니와 무라가와가문은 1661년 ‘송도도해면허’를 받는데 일본의 주장 대로라면 울릉도도 자국영토로 주장해야 한다. 독도를 먼저 침탈하고 울릉도의 소유권까지 주장하려고 하는 지는 모르겠다.

 

)

왜구(倭寇)의 침략과 노략질 때문에 조선 태종(太宗) 1417(태종 17)에 울릉도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을 확정하여 채택하였다.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는 왜구가 창궐하여 중국해안과 조선해안을 침노해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들이 깊숙이 내륙 오지에까지 침입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여 새로이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반이 된 업적 중 하나가 전라도 지리산 아래 오지까지 침입한 왜구를 쳐부순 공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울릉도의 경우를 들면, 1379(고려 우왕 5) 7월에 왜구가 울릉도에 침입하여 주민을 살육하고 노략질을 자행한 후 약 15일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에 태종은 등극한 직후인 1403(태종 3) 811일에 강원도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들어가 살고 있는 백성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태종이 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불러와 섬이 빈 것을 알고, 대마도 도주 종정무(宗貞茂) 1407 316일 토산물과 그간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이사하여 거주하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은 비록 섬이 비었다 할지라도 다른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 살게 하여 분쟁의 씨앗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태종은 1417(태종 17) 정월에 김인우(金麟雨)를 안무사(按撫使)에 임명하여 울릉도에 들여보내서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데리고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김인우가 1417 25일 귀환하여 올린 보고에 따르면 울릉도에 남녀 86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계속 울릉도에 살기를 청원하므로 대표격인 3명만 데려왔으며, 울릉도 부근에 부속도서로 우산도(于山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에 1417 28일 우의정으로 하여금 정부 대신들을 모두 소집하여 대전회의를 개최해서 울릉도와 우산도의 관리정책을 논의하였다. 절대 다수의 대신들은 울릉도에 군사 진()을 설치하여 방어하면서 백성들을 계속 농사와 어업을 하며 거주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조판서 황희(黃喜)는 이에 반대하면서 울릉도 거주민을 속히 육지로 쇄출(刷出: 데리고 나오는 것)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제안한쇄출정책이 좋다고 채택하였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쇄출해오면 울릉도는 비게 되므로 이것을공도(空島)정책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태종이 울릉도에 대해쇄출정책’, ‘공도정책을 결정한 것은 1417 28일이고, 독도에 대해 공식적으로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이 무렵(1417 25∼8)이었다. 태종은 1417 28쇄출·공도정책을 채택함과 동시에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 于山·武陵等處按撫使 독도·울릉도 등 지역 안무사)에 임명하여 다시 울릉도에 들어가서 울릉도 주민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도록 하였다. 우산·무릉등처 안무사 김인우가 다시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거주민을 모두 쇄출해 나온 6개월 후, 1417 86일 왜구가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에 또 침입하였다고태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 출신 백성들과 유민들은 조정의 감시를 피하여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거주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우산도(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울릉도(무릉도)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왜구들은 또 울릉도를 침노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때 울릉도 거주민은 거의 살육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는 동해안 어민들은 울릉도에 상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절적으로 고기잡이를 나가거나 배를 만들 나무를 베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1696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 조치 직후에, 조선 조정은 울릉도에 대한쇄출·공도정책은 그대로 지속하되, 1697(숙종 23) 413일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의 건의에 따라순시(巡視)제도’ ‘수토(授討)제도를 채택하였다. ‘순시·수토제도 2년 간격( 3년째에 1)으로 동해안의 변방 무장(武將)으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순시선단을 편성하여 울릉도에 들어가서 순시·수토하고 돌아오는 제도다.

 

)

# 우리의 외교적 실수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공도 정책에 대해

최근의 일본 주장 중 ICJ의 판례를 들어 실제적으로 일본이 점유 한 것이다 라는 주장도 한다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1928)

선점에 따라 국가영역을 취득하는 경우 실질적 점유가 있어야 함을 밝힌 판례로 주인이 없는 곳을 선점하였다 할지라도 이에 대한 권한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실효적인 지배가 필요하다는 판례

 

 [출처] 독도가 한국땅인 확실한 이유 일본 외무성 10포인트 반박 비판 1|작성자 nohsg

국제법은 주권을 행사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기 때문에 한국의 고문헌자료들에는 주권을 행사한 자료가 없으며,  1618년 에도막부는 도해면허를 발행한 것이 국제법상 영유권을 확립한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구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던 해적이다. 왜구의 해적행위에 대한 방책으로 실시한 공도정책을 악용하여 국제법 운운하는 것은 일본 정부 스스로 불법적인 집단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 이제라도 실효지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독도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독도 문제는 언젠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영토 문제일 뿐 아니라 해양 주권에 관한 문제 이기 때문이다. ICJ 판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분쟁지역화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일본은 끊임없이 도발할 것이고 우리를 자극할 것이다.

 

)

Q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정부가독도역사적으로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 오늘날의 일본정부가역사적으로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에 토대를 둔 발언이나 주장이 아니다. 한국측이 진실에 근거하여독도는 역사적으로 서기 512년부터 한국의 고유영토라고 지적하니까 이에 맞대응하기 위한 억지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측 고문헌들까지도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측 고문헌에도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증명하는 자료는 아직까지 단 1건도 없다.


----------

3-4 끝  이어서 5-6 

mugan의 최근 게시물

정치·경제·사회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