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 가장 불안한 요소이자 취약점은 다름아닌 갈수록 무기력증에 빠져가는 젊은층과 분열이지 않을까 느낍니다.
메이지 이전까지 일본은 막부체제하의 봉건적 사회질서속에 확립된 인습과 관념이 강한 사회였고 그속에 내재된 갈등을 풀만한 정치적 이념과 사상적 토대가 전무한 무단통치시기를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갈등속에 외세의 등장과 무기력한 막부를 쓰러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맡은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식으로 그럴듯 포장되어온감이 없지안는것도 그의 출신을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번외로 메이지의 결정적 단초였던 삿쵸동맹의 주선자이자 근대 일본해군의 기초를 다진 이 양반은 지금의 시코쿠지방인 토사지역의 하급무사 출신입니다.
다른 번과 달리 세키카하라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쵸소카베가 몰락하고 동군에 가담한 야마우치가가 이 지역을 하사받으면서 기존의 토사번 무사들이 탄압되고 배제되면서 하급무사로 편입됩니다.
그래서 외지출신의 야마우치가의 직속가신들은 상급무사로 절대적 권위를 보장받지만 반대로 하급무사들에 대한 차별과 천대를 당하면서 오랜시간 그 불만과 갈등이 쌓이고 기존의 막부체제에 대한 반발심 큰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플러스 알파로 역시 세키카하라에서 서군에 가담한 이유로 거대다이묘에서 대폭 영지가 줄어든 중소 다이묘로 전락한 모리가와 역시 서군편에 가담해 소외되어온 그리고 중앙진출을 염원하던 시마즈가 결탁합니다.
결국 메이지 유신은 존왕양이니 일본근대화니 민중을 떠들지만 정작 봉건적 체제속에 억눌려온 갈등을 그럴듯하게 포장한것이 단지 성공했다는 이유로 아주 그럴듯하게 미화됩니다.
역시 웃긴건 정작 존왕양이를 외치면서 막부를 무너뜨리고 그 권력을 일왕에게 돌려주었느냐 하면 당연 그럴리 없습니다.
나중엔 그 권력을 독점할려고 같은 동지였던 유신삼걸이라는 주요 인사들이 전쟁까지 벌이면서 권력쟁탈전에 빠져들었고 양이를 외치면서 오히려 막부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외세의 무기와 문물에 열중한것도 유신지사들입니다.
메이지를 통해서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할수 있었지만 역시나 태생적 한계 또한 명확했습니다.
그들 나름 민중을 외쳤지만 정작 유신성공 과정과 그 이후 그 어디도에도 민중은 없었다는것입니다.
오랜시간 충성과 복종이라는 사실상 일본을 지배해온 유일한 사상 그것에 해답이 있었습니다.
순응하는것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유신과정에 흘린 수많은 피와 지킬수없는 공허한 약속을 이 두가지 슬로건을 포장해서 외부로 눈을 돌린것이 정한론이었고 그것이 훗날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역시 일본의 기득권층에도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일본이 개헌준비와 전쟁권리 획득에 중요한 가치로 두고있다 생각하시는분들이 많은걸로 압니다.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지금 일본에게 더욱 중요한것은 움직이 않으려는 무기력증에 빠진 노예들을 채찍질할수있는 거대한 몽둥이와 달콤한 사탕발림이 더 급선무로 보여집니다.
오랜시간 언제나 딱하다 쉽을정도로 이용당하면서 그 이용당하는지 모르는 일본국민들을 보면서 많은것을 느낍니다.
개헌은 즉 일본군의 재건이라는 슬로건속에 모든 일본인들의 불만과 갈등을 타오르는 용광로속에 집어넣은체 순도높은 금괴를 뽑아서 권력자와 상위계급이 독점하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성향이 강하다는 지역적 색체가 강하고 오랜시간 반목해온 관서, 관동지역의 불협화음 그 생기를 잃은체 시들어가는 젊은층의 무기력증을 한번에 일소시킬 최고의 카드가 개헌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는 일본내 유력자들의. 가상시뮬려이션이라 의심하는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내의 위기감의 강도에 따라서 다음 개헌을 위한 위기상황 연출을 조금더 디테일하게 손볼것이고 국민들을 반응을 세밀하게 조정할 소품배치를 완료할 목적이라 느낍니다.
천천히 조금씩 확실하게 오래도록 일본의 흔적을 지우는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략도 일본이 우위에 있는 시장에서 우리의 영역을 넓히는것보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국가와 기업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협력하고 키워서 일본의 영향력을 줄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