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작)결핍은 나의 힘 3편.^0^

페리고냉이 작성일 06.07.31 14: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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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난 우리의 공동관심사인 ‘국어’와 ‘국문학’에 대한 보다 많은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대학 때부터 꿈꿔온 일인 교외 봉사활동을 계획했고, 그에게 함께 해줄 것을 부탁했다. 흔쾌한 승낙으로 돌아온 답신이 고마워 계획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도 할 겸해서 둘만의 회식자리를 하나 마련했다. 이곳엔 문학교사인 조선생도 함께 했다. 조선생 또한 김선생과 절친한 사이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내 계획에 대해 이선생이 가자면 가야지 하며 호탕한 그의 성품답게 응해주었다. 물론 계획을 세우느니 하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두 선생과 만나는 것이 워낙 즐거운 나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으며, 그것은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하루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리를 내 보기도 하였으며, 어떤 날은 카프카의 일생에 대해 말해보기도 하였다.
그날은, 그때는 돌아가며 애창 시조를 하나씩 읊던 중으로서, 내가 막 시조를 읊은 후의 일이었다.
「…… 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난 이 시조가 좋습니다. 부슬 부슬 내리는 봄밤에 참 어울리는 작품이죠. 잠 못 드는 밤, 고즈넉한 밤공기를 마시며 잊혀져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추억해보고, 그 사람 목소리에 한잔을, 말투에 또 이야기에 또 한잔 또 한잔……이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다보면 이야기는 장진주사로 이어지죠.」
「이선생, 그만합시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향해 짜증스런 목소리가 찾아든다.
「그만합시다, 그만해. 모두 이선생처럼 추억이 아름답지마는 않소. 이선생, 그거 알아? 추억은 지랄 같은 거요.」
평소의 김선생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애창시조를 읊었을 것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눈 주위에 결코 숙취(熟醉)로 인한 충혈이 아닌, 피로로 인한 충혈로 보였다. 그 피로는 삶에 대한 피로로, 내 이야기에 비친 세상에 대한 괴리감으로 환멸을 느끼고 역정을 내는 것 같아보였다.
「추억은 부재(不在)요.」
김선생은 도통 알다가도 모를 두루뭉술한 말들을 종종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이때 또한 그러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누군가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알다가도 모를 말을 한마디씩 한다.
우리는 말리지 않는다. 누구나 기억함에 괴롭기만 한 추억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는 한편 김선생의 추억에 있어 부재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있지 아니한 것. 그것은 없는 것이지만은 않지만 지금 있는 것이지도 않다. 난 얼마 전 그에게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을 떠올려본다.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잊어버리고 싶은 부재한 사람 또는 사랑에 대하여.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어찌 할 수 없으므로 애써 상관없는 일로 돌리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술자리가 시들해질 무렵 거나하게 취한 김선생은 우리를 어딘가로 무작정 이끈다. 주저 없이 이끄는 것으로 보아, 그가 자주 찾는 분위기 그럴싸한 술집이겠거니 하며, 녹초가 된 몸을 옮겨 그를 따랐다. 조선생 또한 몹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함께 거나하게 마셔보자는 식의 오기로 김선생을 따랐다. 조금은 먼 곳. 한참을 걸었다. 외진 길 끝에 명물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한데, 불빛이 불그스름한 것이 충혈된 눈을 순응하게 할 듯이 비춰대는 것이 여간 거북스럽지 않았다. 요정의 겉모양을 한 한낱 매음굴(賣淫窟)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길 말하는 건가?」
조선생의 표정은 거북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호기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근원적인 무언가를 갈구 하듯이. 여차하면 동료를 따라 슬그머니 출입해보고파 하는 욕정이 피로에 뒤이어 덕지덕지 찌든 얼굴로 겸연쩍게 웃었다.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그 바알간 빛이 가슴아래에 뜨겁게 용솟음치는 욕정을 부채질 했으므로 하릴없이 그를 따랐다.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깊은 곳으로 온 나머지 분위기에 도취해 버린 것이다. 김선생은 꽤 자주 이곳을 드나든 것 같았다. 잘 아는 집처럼,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이내 포주로 보이는 눈웃음이 예사롭지 않은 한 여자와 함께 우리에게 왔다. 무언가에 대해 긴히 말하는 가 싶더니, 제 파트너는 지금 일이 있다며, 우리에게 먼저 방에 들 것을 권했다. 표정으로 보아,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 계집을 무척이나 아끼는 것 같다. 안타까움과 설렘으로 점철된 그의 얼굴은 꽤나 초조해보였다. 그 일이라는 것은 다른 남자를 받고 있는 것일 게다. 제 것같이 예뻐하던 계집을 선점하지 못한 슬픔. 점령당한 제 것에 대한 상실감. 훗날에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김선생의 그러한 소유욕이 여성편력에 기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인간적이고 따스한 김선생이란 인간 내면에는 욕구불만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어쩌면 그는 겉으로는 수많은 여성을 거느리고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 같지만, 제 것 하나 가지지 못하고 어긋난 궤도의 간극을 조정할 수 없는 자. 그것은 상실의 인생이요, 결핍(缺乏)의 일생이 아닐까?
재촉하는 듯한 그 여자의 억지 웃음에 강박을 느끼며 방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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