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으나, 어둑어둑해지는 하늘너머로 빨간 구름이 아직 밤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광장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디..디아나?’
딜런은 눈앞에 있어야할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앞에 큰 개한마리가 자신을 보고 짖고 있을 뿐이었다.
‘칫…방심했어… 아무리 힘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잠이 들줄은…’
등뒤에 식은 땀이 흘렀다.
자신의 나태가 이런 결과가 불렀다는 후회가 밀려올 때 뒤에서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 먹어요.”
튕기듯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자리에 디아나가 서 있었다.
“칼은 집어넣구요…”
디아나는 딜런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막 잠에서 깬 부시시한 머리에 양손에 칼을 쥔 딜런의 모습은 날카로운 눈에 비하여 우스꽝스러웠다.
“아?…아!”
딜런은 멋적은 듯 칼을 거둔 뒤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지켜준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았는데, 어느세 그녀는 잠에서 깨어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방해않고 저녁을 준비한 것이니 쑥스러움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어색하지만 결고 싫지 않은 침묵이 흐를 때쯤…
“야! 배고파 죽겠어! 어서 들어와!!!”
여관 이층에서 손을 흔들며 긴머리의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조..조용히 좀 해요!”
디아나는 창피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르키며 총총 걸음으로 여관을 뛰었다. 그보다 더 창피한 듯 딜런은 빠른 속도로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보기보다 제법인데…”
딜런과 디아나가 사라진 광장에 두 사내가 나타났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망토를 쓴 체격이 우람한 사람들이다. 가슴에는 큰 원과 교차된 X자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순식간에 저 긴 칼을 뽑았어… 더구나 안정적인 자세야… 그냥 패잔병들은 아닌가 보군. 저 친구 상대할려면 조금 까다롭겠는 걸”
“난 저 긴머리의 사내가 마음에 걸려…” “응? 저런 떠벌이가?” “칼보다 혀가 더 무서운 법이거든.” 두 사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다른 망토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역시 망토로 가려져 얼굴은 볼 수 없으나, 앞의 두 사내를 내려다 볼 만큼 큰 키에 그의 가슴에 원과 X자 표시는 금으로 세긴 듯 반짝거렸다. “오셨습니까?” 두 사내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키 큰 남자는 고개를 여관으로 향했다.
평소에 훈련이 되어있는 듯 묻지도 않았는데 두 사내는 공손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저녁을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신도의 이야기로는 현상금이 붙어 있다고도 합니다.” “패잔병인 것으로 보이나, 인원구성 및 용모를 보면 일반 군인은 아닌듯 합니다.”
“기다리시던 그분들은 아닌 듯 싶습니다…” 두 사내는 동시에 굽신거리며 말했다.
큰 키의 남자는 주변을 살펴본 후 여관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 신도들의 신앙을 보겠다.”
“!!!!” 두 사내는 숙인채로 잠시 움찔했다. “서…설마 저 사람들이?”
“질문은 허락치 않겠다. 놓치지 말아라… 모든 신앙을 동원해서라도.”
“쾅! 쾅! 쾅!”
‘으음~’ 디아나는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몸이 물에 젖은 빵처럼 일어나는게 힘이 들었다.
“쉿!” 겨우 뜬 눈으로 보니 딜런이 입에 손을 대고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디아나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포위당했어…” 바깥을 가르키는 긴머리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가르키는 창문 넘어로 횃불들이 춤추듯 울렁거렸다.
“로… 론군(軍)이 왔구나?” 기쁨인지 놀람인지 모를 눈으로 디아나는 흥분하며 말했다. “훗~ 그랬다면 이미 네 입을 막고 있을걸?” “아…” 디아나는 이유모를 한 숨을 쉬었다. “그럼 도대체??”
“마을 사람들이야…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건 낮에 만났던 그 상인이구.” “그들이 왜?”
“글쎄 현상금 때문이건, 뭐든지 간에 위험하다는 거지… 지금 상황은.” 긴머리의 남자도 일어난지 얼마 안되는 듯 헝크러진 머리를 묶어 뒤로 늘어뜨리며 말했다.
딜런은 문 앞에 서서 독특한 자세로 서 있었다. 팽팽히 긴장된 그의 시선과 근육들이 곧 발사될 화살처럼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온다!!!” “쾅!”
딜런의 외침과 동시에 문이 반으로 부서지며 주먹이 튀어나왔다. 비록 나무문이었지만 제법 튼튼한 문을 맨손으로 부순 건 다름아닌 낮에 만난 상인이었다.
“크윽…크윽… 너…너희들 때문에 난… 나는!!!” 그는 무서운 기세로 나머지 문을 부수며 들어왔다.
“차앗!” 기합소리를 내며 딜런의 도가 상인의 목을 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려던 사람의 어깨를 긴 칼로 찔렀다.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꺄악!!!” 디아나는 비명을 질렀다. 상인의 뒤를 따라 들어오려던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괜찮아! 도의 뒷부분으로 기절시켰을 뿐이야.” 딜런은 본래의 자세로 돌아오며 말했다. “으음?” 턱하고 무언가 자신의 발을 잡는 것에 놀란 딜런이 아래를 보았다. 기절했어야할 상인이 충혈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크으으으… 신의 분노를… 받아라!!!”
“쿠아아아아!!” 상인의 눈과 몸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다. 문쪽의 사람들은 놀란 듯 허둥대며 물러났다.
“딜런!!!!” 긴 머리의 남자가 뛰어든 건 그때였다.
“퍼억!”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상인의 몸이 문 바깥쪽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마치 큰 나무에 부딛친 듯 튕겨나가버린 상인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벽에 부딛쳐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 잔해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촉수가 뻗어나왔다. “츄르르륵!!”
“뭐야 저건!” 상인을 날려버린 긴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검은 촉수들은 사방으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디…디…딜런 바….발…발을 봐!!” 디아나는 딜런의 발을 가르키며 외쳤다.
상인에게 잡혔던 발은 무수히 많은 촉수들로 엉켜있었다.
“으윽.” 딜런은 휘청거리며 신음했다. 이어 고통스러운 듯 소리를 질렀다. “끄으으윽…끅 뭐… 뭐지 이건” 딜런의 발에 달라붙어 있던 촉수들은 발목을 뚫고 몸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매우 고통스러운 듯 딜런은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긴 머리의 남자는 문 너머를 주시했다. 촉수들 때문인지 더 이상 마을사람들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 창밖과 딜런을 번갈아 보던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다이나에게 말했다.
“딜런을 침대에 눕히고 꽉 붙잡아.” “네??” “시간이 없어! 어서 눕히라고!!”
당황스러웠지만 지시대로 딜런을 침대에 눕혔다. 보통 사람같으면 사방팔방 뒹굴며 괴로워했을태지만 딜런은 이를 갈면서도 발버둥치지는 않았다.
“휴~” 알수없는 한 숨을 쉰 긴머리의 남자는 양 손을 허공에 들었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움켜쥐는 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휘이잉” 그의 손을 향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랑거리던 바람이 점차 빨라졌고 그가 더욱 힘을 주어 손을 오므리자 보다 강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다. 곧이어 방안에 큰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듯 천정이 들썩거리기까지 했다.
“흡!” 무언가 손에 잡힌 듯 손아귀를 웅크리더니 긴 머리의 남자는 딜런의 발을 향해 양 손을 내리쳤다.
“푸웃!!” 마치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물총처럼 딜런의 발부분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딜런은 고통에 못이겨 침대보를 움켜잡았다. “참아라!!” 긴 머리의 남자는 양 손으로 발을 훑어내려갔다. 그의 손이 닿는 부위는 마치 큰 압력을 받은 듯 살이 홀쭉해졌다.
“쉬이이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검은 촉수들이 상처를 통해 나오기 시작했고, 긴머리의 남자가 발목까지 손을 내리자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끄윽…” 딜런은 기절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때맞춰 밖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신의 분노를! “신의 분노를!” 점점 높아져가는 소리. “신의 분노를! 신의 부운노를!!!” 이어 던져지는 횃불과 함께 그들의 소리는 하나가 되어 외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