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깨질 듯하다, 필시 두개골속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는 게다. 혹시 종양일까? 암? 아니면 다른 그 어떤 것? 하지만 병원에는 가기가 싫다. 말쑥한 얼굴에 흰 가운의 그들은 왠지 모르게 비위가 상한다. 혹시라도 내게 암입니다. 이런 말을 해버린다면 그 자동 응답기 같은 표정에 코드를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넥타이가 목을 조여 온다. 벌써 몇 번이나 고쳐 맨 것인데, 비싼 것도 별수 없나보다. 모두와 상관없이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는 별개의 생명체로 맞지 않는 비싼 넥타이나 깨질 것 같은 두통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처음엔 왼손잡이었던 것 같다. 밥을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왼손을 썼었다. 그렇지만 커가면서 악수를 하기위해 내밀어야하는 것은 오른손이었다. 군대에서 총도 수류탄도 오른손잡이용이다. 마우스도 오른손이 편하다. 자연스레 습관이 바뀌었다. 나는 오른손잡이이다 . 그것도 아주 편중이 심하다.
‘승인하시겠습니까?’ ‘yes’ ‘클릭’ 꺾어져있는 그래프. 눈이 뻑뻑하다 아마도 눈이 붉게 충혈 됐으리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마우스를 움켜쥔 손, 모니터를 노려본다. 굵직굵직한 꺾인 선들과 글자들 숫자들 인지하지 않아도 스르륵 풀려버리는 기호들, 오른쪽 다리를 슬슬 떤다. 머리가 아프다.
-김대리, 정신 사납다고 했지. 다리 떨지 마라 복달아난다.”
-아. 예”
-거, 나이는 서른이나 먹어서 다리나 덜덜 떨고.......!, 입고 있는 옷이 아깝네!
부장의 잔소리가 ‘휙’하고 날라 온다. 벌써 5년째 부장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저놈은 입고 있는 몇 년 된 양복만큼이나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자주한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이지만 말투는 동네 이장쯤 되는 듯하다. 물론 상사들에겐 동네이장에서 주인집개 쯤으로 변해버린다. 저번 회식 때 딸랑거리던 그의 행동은 지금도 직원들 사이에 상당한 입담꺼리가 되고 있다.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려 본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스트라이프 정장이 나보다 더 인텔리답게 보이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제발 누가 이 깨어질듯 한 두통 좀 없애 줘! 이 것 때문에 정신이 산만하다. 두통이 과거 어느 점에 묶여 탈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침이 생각난다. 두통의 몸부림에 따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도 간절히 널 보내버리고 싶다.
왜, 왜 눈치 채지 못했을 까? 그때 알았어야 했다. 눈앞에 노려보는 이 어려운 기호들처럼 난 그때 그 표정을 보고 이해했어야 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해명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와 함께 할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기다리거나 아니면 기다려지거나. 그리고 지금은 끊이지 않는 두통만이 남아있다.
필연적이었을까? 최초를 기억해본다. 지나가던 여자의 흩날리는 머리를 보았다. 갑자기 지희가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었다. 나는 약혼을 했다. 집에 나의 사랑하는 지희가 있을 것이다. 기분 좋게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왼손을 들어 태양을 가리고 하늘을 보려했다.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흘러내리며 반짝거리는 반사광이 보인다. 약혼반지다. 손가락에 동그랗게 말아놓은 이 금속체는 신에게서 지희와 나의 행복을 약속받은 맹약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여겼었다. 바쁘게 발을 놀린다. 이마에 살짝 땀이 맺혔다. 지희가 보고 싶다. 평소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른생활맨으로 살던 내가 처음으로 회사를 땡땡이 치고 일찍 돌아왔다. 두 시간이나 이른 귀가다. 휴, 하고 숨을 골랐다. 오는 길 동네 어귀에 있는 낙원 화원에서 장미꽃을 좀 샀다. 꽃같이 좋아할 그녀 얼굴이 눈에 선했다.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일부러 전화도 안했다. 알지 못했다. 만약 내가 길에서 그 여자를 보지 않았다면? 평소와 같은 시간에 퇴근을 했더라면 지금과 달랐을까?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빼꼼히 열려있는 문틈 새, 그곳은 침실이었다. 그때 문 틈새로 들리던 환희에 찬 신음소리와 어색한 표정의 남자를 보지 않았다면....... 차라리 보지 말 것을 그랬다. 집에 일찍 가지 말 것을 그랬다. 아니 길에서 그녀를 닮은 긴 머리의 여자를 본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단 한번뿐인 갈림길의 선택에서 난 잘못 길을 들었다. 왜 그랬을 까? 홧김에? 왜? 사랑해 버린 거냐?
여전히 손은 움직이고 일을 하고 평상을 가장한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두통 때문인지 모르겠다.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눈알로 돌려 막는다. 삐걱삐걱 돌아가는 눈알. 손. 다시금 덜덜 떠는 다리. 부장의 잔소리, 집에 가면 좀 다를까? 다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여기는 직원화장실이다. 사무실에서 튕겨지듯 도망쳐 나왔다. 니코틴이 나를 부른다. 담배를 꼬나문다. ‘촤르르륵’ 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이 느껴진다. ‘하아’하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매만진다. 들장미소녀 캔디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 너도 내 오른손처럼 일을 해야 하지 않겠니? 가끔 오빠 밤이 외로워요 하는 문자 따위 말고는 반응이 없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왼손목의 타이맥스 시계가 피식 웃는다. 전화를 기다린다. 문자를 기다린다. 묵묵히 시위하는 핸드폰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던져버릴까? 쓸모없는 녀석하고 손을 들어 올린 찰나 ‘드르륵’ 진동이 전해진다. 너무 놀라서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얼마짜리 인데. 모르는 번호다. 누구지? 그녀이길.......
-여보세요’
-아 광고보고 전화 드렸는데요. 룸메이트 구하신다고 하셔서요.’
하.....역시 아니다
-아...예 열쇠는 관리소에 맡겨놨습니다. 보시려거든 보세요.’
-아뇨, 그냥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바로...’
-그러시죠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이름도 묻지 않는다. 무엇을 하는지 몇 살인지 얼굴도 모른다. 상관없다. 그녀가 나간 그 자릴 누군가 채워놓기만 하면 된다. 그게 누구든 그건 상관없다. 상대도 그런 것 같다.
시계가 7시를 가리켰다. 퇴근을 했다. 집에 그가 와있었다. 묘하게 정제된 공기가 흐른다.
1년여를 같이한 그녀가 나가고 남은 건 붉은 이빨마저 드러내고 있는 이방의 적막함이었다.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녀의 웃음소리, 입던 옷가지 칫솔 또 무엇이 더 있었지? 그런 것은 회상할 틈도 없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비워져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신세 지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이날부터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눈을 떴고 마우스를 잡고 다리를 떨었다. 시간당 2만원 짜리 내 인생을 차곡차곡 쌓았다. 남자는 무엇으로 얘기하는가? 길가의 구둣방에 착실하게 닦여진 구두의 광택이 눈을 찌른다, 모두가 신사화 검정색이다. 어느 남자는 저 구두를 신고 서류 뭉치들과 씨름하며 있겠지 그렇다면 번쩍거리는 검정구두는 남자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무엇으로 대변되는가, 그건 달마다 차곡하게 쌓이는 통장의 숫자일까? 내 신발은 검정색 닥터 마틴이다.
1번마 화이트, 2번마 그레이스팟 3번마.......
문득 귀에 경마소리가 들린다. 전자경마장은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 되었다. 동상이몽. 누구는 주체하지 못할 돈과 시간이 지루해서, 혹자는 한방을 노리며, 혹자는 경마의 스릴을 위해 저곳에 들어간다. 나도 홧김에 잭팟이라는 것을 노려본 적이 있다.
믿지 못 할 현장을 목격해 버렸다. 입술이 마른다. 입안이 바작거린다. 목이 마르다. 썩을 목마름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우물을 파냈다. 그 우물에선 가만가만한 흐느낌이 들려온다. 난 조용히 그 방을 나왔다. 지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던 것 인가? 상대남자도 아무 말이 없다. 물론 저 녀석은 내가 알고 있는 놈이다. 그냥 친구라고 부득부 우길 때 확실하게 잘랐어야했다. 우물에 꾸역꾸역 후회가 차오른다. 왜 하필 내게........내 약혼녀 그리고 상대남자 우린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다. 우리 셋의 모든 말들은 내 가슴의 우물이 모조리 삼켜 버렸다. 난 그냥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알고 있다. 축객령은 그가 아닌 나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지 사거리 앞 횡단보도에서 멍하니 서 있었을 때 신의 계시처럼 들리던 광고만 머리에 선명히 남았을 뿐이었다. 마라톤 러너의 승리의 화관처럼 건물위에 장대하게 얹혀진 브라운관은 내게 계시를 주었다.
-당신의 한 시간은 얼마입니까? 잃어버린 시간의 되돌려 드립니다.
지친 듯 주저앉아있는 주부와 적성에 맞지 않는 일로 고민하는 청년이 한숨을 쉬며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카피가 뜬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려 드립니다. 아마 무슨 금융 쪽의 관계된 광고였으리라. 그렇지만 난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잃어버린 내 시간을 돌려주세요.
“당신도 나라면......아니 이 세상의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스릴 있는 복수이자 연극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본질적인 진리 또는 신에게 하는 시위와도 비슷한 것이다. 이것은 불가항력의 선고적 성향을 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죄 없는 자 내게 돌을 던져라.”
시간은 흘렀다. 마치 유령이 된 것 마냥 투명해져 갈 때 쯤 두통은 계속되고 온화함을 머금은 햇빛은 나를 투과해 내 뒤의 그림자에게로 떨어졌다. 바로 그때쯤 바람이 온화해지는 겨울이 지난 봄 그때쯤. 깜짝 놀랐다. 설마 내입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어슴프레 잠이 들었을 때 무심코 들어버렸다. 존재마저 부정해버리듯 소리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고 내 밤잠은 까마귀 마냥 푸드덕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이름을 들어버렸다. 내가? 네가? 허둥대고 있는 사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은 화살같이 쏘아져 비산했다.
‘....선희야......’
튕겨지듯 일어나 그를 흔들어 깨울 참이었는데 언뜻 그의 얼굴엔 눈물이 비쳐졌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걸까? 깨우려던 손이 무색해 졌다. 담배를 꼬나문다. 도망치듯 숨어버리는 담배연기. 이름이 같은 여자일까? 그렇지만 느낌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더욱 심해진 두통만 보아도 그렇다.
혀끝을 내밀면 쓰디쓴 슬픔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우물에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커피보다 진득한 그 어떤 것이 차곡차곡 우물을 채워가고 있었다. 마치 대박을 꿈꾸는 로또의 이월금처럼 배설되지 않은 욕구들이 찰랑거렸다. 그 물결에 이지러진 내가 비쳐진다. 이 물은 내 눈물이 쌓인 것이 아니다. 난 웃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신은 또는 진리가 내게 노크할 것을 알고 있었다. 햇빛 찬란한 현대에 깊은 우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룰이 나로 하여금 진리가 노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이 기다림은 현실이 되었다. 잭팟이다!
정리를 위해 한번은 만나야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지희가 아닌 그녀의 동생이 나왔다. 쌍둥이 동생. 처음엔 아무 생각도 못했다. 이것의 룰에 의해 내게 돌아온 주사위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 눈엔 되돌아온 약혼반지만 보였다. 이 반지는 상징이었다. 결혼생활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고 받기위한 일종의 맹세나 선물상자의 열쇠였다. 내 눈 앞에 그것이 되돌아와 있다.
-저........ 설한씨.
퍼뜩 낯이 익으면서도 낯 설은 그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시계가 4시를 가리켰다. 거대한 바다위에 외딴 섬처럼 떠있는 반지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바다에서 보았다. 아니 정확히 바다에 비춰진 그녀의 눈에서 보았다. 사람의 시선은 때론 말보다 더욱 진심을 얘기할 때가 있다. 1980년대 벽에 급히 휘갈겨 쓴 민주주의 만세처럼 말이다. 말이나 글자만이 기호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녀가 날 사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눈빛이 그 시선이 동정을 말하던 것인지 사랑을 말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로부터 진리가 내게 노크한 그 순간 나는 문을 열고 사랑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사랑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누구였던 간에 말이다.
-선..희씨죠? 이 반지 껴주세요.
난 웃었다. 우린 하루가 멀다 않고 만났다. 마치 그래선 안되는 것처럼 누가 법으로 그렇게 정해놓기라도 한 모양으로 말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지 그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처음으로 룸메이트에게 관심을 가졌다. 의도적으로 친해지고 싶었다. 그날 밤의 일은 담배의 타르와 같이 간 속에 넣어두었다.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중력 했다. 그리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먼저 술을 사들고 들어왔다. 난 의례히 나와 친해지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술을 마주해도 말이 없었다. 묵묵히 주거니 받거니 하기를 몇 번. 그가 물었다.
-선희는 어떻게 알고계시는 거지요?
그녀의 이름이 또 나왔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의 입은 원래부터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소주만큼이나 깊었다.
-아, 그걸 어떻게?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는 확실하게 물어오고 있다.
-자면서 아무개의 이름이나 부르진 않습니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는 더더욱 아니지요. 그런데 그 이름이 제겐 낯선 이름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직설적인 물음. 마치 떼인 돈을 받으러온 일수 같다. 당당한 말투다. 그런데 설마, 나도 그랬단 말인가? 나도 그처럼 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붙잡았었나? 요즘 유난히 눈꼽이 많이 낀다 생각했었다만. 뭐 숨길 것도 없다. 나 역시 상당히 궁금한게 많은 터였다.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아주 최근까지.
-..........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승리자의 거만함 같은 것이 배어나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설마 승리자라니! 하!- 그의 얼굴은 짐작했었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 뿐이지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했으니까, 미치도록 질투해 마지않던 남자가 눈앞에 있다. 우린 다시 말이 없어졌다. 대신 술병이 늘어갔다. 그리고 시간당 2만원짜리 내시간도 꾸역꾸역 흘러갔다.
잠이 들었었다보다 그리고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다 4만원짜리다.
-........나갈꺼냐.......?
-그래야하나?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이집은 맘에 들고 내가 모르는 선희의 추억도 있고 또 선희를 잃어버린 너도 있다. 나갈거냐?
-그래 나가야지, 일 나가야지. 내 삶만큼이나 중요한 통장의 숫자들을 꼭꼭 매우기 위해 시간당 2만원을 벌기위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마우스를 잡고 기호들과 씨름하며 다릴 덜덜 떨어야지, 그래야지. 아참! 너도 알다시피 난 차였다. 그리고 보다시피 여기에 사랑의 주억거림이 될 것들은 깨끗하게 정리됐지.
-그래
뭐가 그래 란 것일까? 설마 내가 느끼지 못하는 그녀의 온기를 저 녀석이 느낄 리가 없지 않은가!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바로 침대를 버렸다. 그리고 새로 이층침대를 구입했다. 책장이 붙은 작은 책상이 하나있는데 원래 그곳은 그녀의 화장대 겸 사색의 장이었다. 그녀가 나가면서 깨끗이 비워졌고 문학도서 대신 경제생활, 주간 낚시 maxim 등 전혀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을 구해다가 박아놓았다. 옷장대신 커다란 가로 형 옷걸이가 하나있고 그 옆에 빨래 건조대가 있다. 아, 저 건조대는 그녀가 사온 것인데 왜 그냥 놓고 갔는지 모르겠다. 냉장고는 룸메가 새로 들어오면서 이미 깨끗이 청소 후 비워 놓았다. 약간의 식기와 컵, 아.......그녀의 입술이 닿던 컵이 남아있다. 내일 나갈 때 버려야지.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도 나도 동의 한 바이다. 목소리는 한 톤도(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었다. 묵묵하게 도마뱀이 꼬리 자르듯 아이가 나이가 차면 젖니를 빼내듯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마치 자연의 섭리인양.......어느 날 퇴근해보니 깨끗하게 정리됐었을 뿐이었다.
날이 밝았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했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원래 불편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가끔 그녀석이 술을 사들고 오는 날이면 우린 한 가지에 대해 얘기한다. 정치도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도 아닌 한 여자에 대한 얘기이다.
-넌 어떻게 헤어졌냐?
-난 말이지 그냥 문자로 딱하니 왔어 그만하자고,
-어? 나돈데.
-헤어지기 몇 일전쯤에 그녀와 쇼핑을 했었거든. 아! 빼먹을 뻔 했군. 우린 몰래 사귀는 사이였어. 거짓에 산다고나 할까? 카프카가 했던 말 알지? 아? 그래 뭐 암튼 그러다가 백화점에서 아는 남자를 만났단 말이지. 그런데 말야 아무리 관객이 몇 안되는 거짓에 사는 사이였어도 말야. 슬며시 손이 놓아지고 거리가 생기더군 그것까진 이해하겠는데. 그 표정이라니. 음...수음하다 걸린 사춘기의 남학생? 이제 이해가나? 그런 표정이더라고 그가 뚜벅뚜벅 걸어 나간 다음에 까지도 말이야 어색하게 떨리는 손하며 안절부절 안절부절 그때 그녀의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을 난 어찌 해서든 이해했어야했어.
-하..참 예 한번 적나라하군. 그래서 헤어진 거였군.......아마 11월 13이던가? 마자. 그날이야 나도 그날 헤어졌는데.......
-아! 이미 알고 있어.
난 그녀석의 얘기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난 상당히 최근까지 그녀의 남친이었고 그녀에게 집착이라 할만큼 했으니 말이다.
-아...그래.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 없어서 좋군.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시간이란건 아주 두껍게 쌓이지. 그리고 그에 대한 단상 역시도 말이야.
-세상이 다 테제이고 메타포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것에 네가 들어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군. 네 시간은 시간당 2만원?
-응, 지금은 시간당 2만원이야
이런 묘한 공존은 희극을 연상케 했다. 우연이라 하기엔 그 당위성이 너무나 명백한 작가의 농간. 주사위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 걸까? 내가 손을 내밀었던 것은, 내가 만지고 내가 키스했던 것은 선희였지만 선희를 향한 욕망과도 같은 어떤 메타포였을 것이었다. 그래서 난 그녀와 육체적인 관계를 거부했다. 아마 그때 본 불륜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그런 것 일수도 있다. 어쨌든 섹스만은 기피했다. 선희는 남친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내가 선희를 선택하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별로 그것은 쾌념치 않았다. 아니 상관없었다. 그런 장애를 가진 사랑이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만들었다.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분리해서 소유했다. 그리고 육체적인 사랑의 대상은 내방에서 묵고 있는 저 남자다. 나중에 그에게 들었던 사실이었지만 그와 사랑을 나눌 때는 키스만은 피했다고 한다.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 또 며칠이 흘렀다. 어느 만화가의 말따라 이대로 가면 내 통장은 참으로 촉촉해 지리라. 여전히 핸드폰을 매만진다. 캔디 같은 핸드폰 말이다. 봄이 점점 더 짙어진다. 사방이 꽃내음이다. 그리고 내속에선 썩은 내가 난다 곪다 못해 썩어버린 상처다. 문득 참을 수 없는 성욕이 일었다. 고양이 수염같이 늘어지게 따스한 봄날의 오후 난 미친 듯 탐닉 할 ‘꺼리’를 찾았다. 두 눈은 벌겋고 다리는 덜덜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녀의 목소릴 게걸스레 탐닉하고 싶다. 강제와 폭력성으로 매도된 에로티카 시티에 살고 있는 주민처럼 난 파괴로 진리를 잉태하고 싶다. 두통이 더욱 심해진다.
여기가 어디더라, 아! 술집이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단란주점에 왔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 나한테서 나는 것일까? 소리, 아, 그래 소리가 멎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화면조정시간의 티비처럼 띠~하는 신호음만 머리에 울린다. 아마도 술을 마신 두통이 소릴 지르나보다. 무릎위에 낯선 체중이 느껴진다. 누가 올라타 있나? 어쩐지 포근하다. 눈을 감은 저편에 태초의 유토피아가 펼쳐져있겠지. 그곳으로 가야한다. 길에서 벗어나야해. 고통과 슬픔만이 범람하는 이 동굴에서 마법의 틈바구니로 나를 보내주어. 매일같이 마주해야하는 우물 같은 동굴의 벽은 매일처럼 나를 죽이고 녹인단 말이다. 나를 둘러싼 이 어둠을 찢어내야 한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어. 손을 뻗는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여성의 비너스를 연상시키는 작은 ‘틈’만 있으면, 그것을 터뜨리면 난 그곳으로 갈 수 있어. 태초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프로방스, 오! 벌거벗은 하나의 아담이여.
슬며시 눈을 떴다. 빛이다. 여신이다. 나의 갈빗대를 취한 하와다!! 아니다.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몸에 실려 있는 체중의 주인은 나의 하와가 아닌 낯선 뱀이다. 곳곳에 웃음이 넘쳐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꽤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웃음, 저것은 ‘문’이 아니다 ‘비너스’가 아니다. 토악질이 올라온다. 눈물이 난다.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나의 촉촉한 통장은 정욕으로 가득 찬 살덩어리를 불러냈다.
-술을 마셨군. 여자도 함께. 돈 주고 샀구나?
집에 돌아오니 그가 있다. 그 한마디는 지금 나를 대변한다. 그리고 나를 쏘아보는 눈.
-더러운 새끼.
놀랐다. 아니 화가 났다.
-내가 뭘 하든 뭔 상관이야. 밤마다 변태처럼 상상하고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건 너가 아니고 누구냐. 더러운 새끼는 너다. 말로는 플라토닉, 진정한 사랑, 순수한 진리라면서 밤마다 사출되는 곰팡이 같은 허연것은 뭐란 말이다. 난 그것보단 났지 정당하게 돈을 주고 욕정을 배설했을 뿐이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닌 ㄸ...
말보다 빠르게 그의 주먹이 다가왔다. 눈에 불이 번쩍한다.
‘번쩍’ 눈이 부시다. 날이 심술궂어 보일정도로 좋다. 나를 밖으로 떠민다. 전화해서 그녀를 졸랐다. 일산으로 자전거를 타러갔다. 우리는 오천원을 주고 2인용 자전거를 탔다. 선희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한다. 예전에는 한번 심하게 넘어져 까지고 부어오른 적도 있다. 그래서 그녀를 내 뒤에 태우고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시원하다. 호수 표면에 부서지는 빛의 잔향이 시큼하다. 갑자기 커피빈의 뉴욕치즈케익이 먹고 싶다.
북적거리는 라페스타 사이를 날 듯 도망쳐 커피빈의 안락한 의자로 날아들었다. 커피를 마셨다. 케익을 먹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랑은 메타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사랑 본질은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빅뱅과도 비슷한 것이다. 작은 폭발 하나가 빅뱅을 일으켜 우주라는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폭발은 중요하지만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다시 한번 선희의 얼굴을 쳐다본다.
-선희야 사랑해.
그녀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놀라는 듯 의외가 담긴 눈빛, 약간의 침묵 그리고
- I do!
그녀의 입술에선 모카맛이 났다. 내 입술에선 치즈맛이 날까?
다시 한 번 눈앞이 번쩍 한다. 어질어질하다. 정신이 없다. 나도 힘껏 주먹을 뻗는다. 또 다시 별이 번쩍, 맞은 건지 때린 건지 모르게 주먹도 아프고 몸의 여기저기도 아프고 두통은 더 심해졌고 또........가슴이 아팠다. 서로 말이 없어졌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수 만 마디의 말보다 침묵을 경청함으로 서로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녀를 망친건 너야 (그녀의 육체를 소유한 내가 말한다)
-그래 그녀를 몰아낸 건 우리야 (그녀의 정신을 소유한 내가 말한다)
-........
-나가.
-아니 네가 나가
-아니 나가자. 어서 이곳을 나가자.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어도 이해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고 있어도 모른척했던 우리 앞에 놓여진 벽. 그것은 여기다. 태고의 낙원, 유토피아, 그녀를 우리 속에서 썩게 할 수 없다.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
-나가자
-나가자
길이 8cm 폭은 2cm정도 되는 시퍼렇게 서글픈 칼이 앞에 놓였다. 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목에서 비스듬히 쇄골 안쪽으로 가볍게 찔러 넣기만 하면 끝이다. 이 작은 틈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자
-응
영화 제목처럼 너를 나의 운명이라 여겼다. 태고의 인간 아담에게서 신은 갈빗대를 뽑아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펄떡이는 살덩이(심장)를 넣어 놓았다. 여자에게 넣은 갈빗대는 그 심장의 메타포.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이라 여겼다. 이별을 통한 성숙은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럼 차라리 퇴보하고 말리라 생각했었어. 그래서 그런 집착일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화해를 웃어넘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두 번의 이별 두개의 문자를 받았을 때. 그때마다 난 화살 맞은 새 마냥 바르르 떨며 덜컥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한손은 두통에 시달리는 머리를 쥐고 그렇게 숨을 죽였었다. 내가 도망치는 걸까? 동굴위에 던져졌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살기엔 이 봄이 너무 아름답다. 너도 이제 자유하렴. 내속에서 썩지 말고 말이야. 이젠 이곳을 나갈 때가 되었다. 지금 2cm남짓한 틈으로 집착도 파괴도 욕정도 내 생명도 빠져나가. 느낄 수 있어. 이 순간에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쳐다보며, 들을 수 없는 네 목소리를 회상하며 이 봄날에 난 죽는다. 저기 그녀가 버리고 간 대형거울에 비치는 녀석의 등 뒤에도 처연하게 붉은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다. 너는 나, 나는 너 우리의 이름은 김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