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숲 2화

깡과힘 작성일 09.08.22 00: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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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혼자 사는 방. 쾌쾌한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의외로 특유의 홀애비같은 저렴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럭저럭 정돈도 잘 되어있다. 선반에는 여성만큼 다양하지는 않지만 스킨 로션에서부터 비비크림과 컬러 로션 등 몇 종류의 화장품과 황토 팩, 향수가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왁스, 스프레이, 헤어 젤은 물론 드라이기에 고데기까지 준비되어 있다.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힘든 사람은 언제나 맨솔을 피워‘ 한 낮이었음에도 어두컴컴한 방에 오래 있어서였는지 비가 내리고 있을 줄 알았다. ’아픈 사람은 항상 마일드세븐 팩을 피워‘ 감은지 시간이 꾀 지나서 조금 떡 져 있지만 까치집 같은 건 없는 단정한 머리, 조금 길지만 덥수룩하지는 않게 자라있는 수염, 조금 퀭해 보일 것 같은 눈을 하고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문다. ’시가 6미리에는 초콜릿 향이 나‘ 담배에 얽힌 여러 가지 생각들을 비대신 시원하게 불고 있는 바람에 날리며 조그만 라이터를 손으로 가려 불을 붙이고는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뱉는다.


 “1950원입니다. 이것만 드려요?”

편의점 여직원이 친절한 미소로 말할 때 라디오인지 직접 틀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대로 있어주면 돼- 의 장필순 버전이 흐르고 있었다. 친절하게 봉투에 담겨진 참이슬 한 병과 사이다 한 캔을 꺼내들고는 터덜터덜 편의점에서 나왔다. 2천원을 냈기에 거스름돈은 50원에 불과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냈어도 거스름돈을 받는 것은 잊었을 것이다. 그다지 덥지 않은 여름, 어느 초등학교 앞 인도에 주저앉아 방금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지나던 사람들은 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고 나 또한 그랬다. 한 잔 두 잔이 아닌 한 모금 두 모금, 구애받을 것 없이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감성적인 성격에 감정에 솔직하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도 없이 한참동안 그 초등학교 앞에 주저앉아서.

한 병의 술과 함께 가지고 있던 담배를 다 태웠다. 30~40분가량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편의점에서는 여전히 같은 노래의 김장훈 버전이 나오고 있었다. 담배를 고르며 내가 난처해하자 여직원이 뜻밖의 말을 했다.

“마일든세븐 팩으로된 거 드릴까요?”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 없이 네라고 답한 후 노래에 대해 물었다. 아일랜드 봤어요? 그대로 있어주면 돼 라는 노래는 드라마 아일랜드의 수록곡이다. 보통 서론 본론 결론이나 기승전결로 나뉘어 매 회, 혹은 마지막 화에 가까워질수록 긴박을 더해가거나 강한 클라이맥스, 반전 등이 있는 무미건조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아일랜드는 네 명의 남녀주인공들이 살아가는 한 때를 조금만 그려놓은 아주 좋은 작품이다.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자니 타이밍이 좋았었는지 여직원은 금방 교대를 한다고 했고 좀 더 얘기하고 싶다는 나의 제안에 그녀는 달리 약속이 없다며 흔쾌히 술자리를 허락해주었다.


 “아 언니 애인 없구나, 그럼 나한테도 기회는 있는 거네.”

권진아. 나이는 동갑, 잘은 몰랐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군대에 다녀온 나와 학년마저도 같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편의점에서 몇 번 마주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리 소주 한 병을 먹어둬서 그런지 몸은 조금씩 취해가는 것을 느꼈지만 멘트는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누군가가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느낄만한 느끼한 말들, 그 것을 능글맞게 구사하는 것은 나만의 작업 방식이다. 단순한 칭찬 따위가 아닌 상대방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만한 단점들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놀리면서도 결과적으로 기분 좋은 칭찬을 해준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러한 입에 발린 감언이설들이 진심이라고 느껴지고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일부러 만들어낸)에 대부분의 여자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둘이서 소주 세 병을 먹고 나서 문득 왜 마일드세븐 팩을 추천했는지 물었다. 복작복작한 술집 분위기와 쓸만한 내 입담에 시종일관 즐거워하던 진아의 표정이 아주 잠깐 우울한 듯 보였다. 마일드세븐 팩으로 된 건 아픈 사람이 피우는 담배거든~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는 원래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담배도 안 피운다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아? 게다가 왜 아픈 사람이 피우는 담배를 나한테 권했어?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변화가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보다 더 좋은 기회를 내게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작은 호기심을 접어두고 그 날 했던 말 중 가장 좋은 멘트를 쳤다.

“우울해 보였어”

우울해 보여, 슬픈 것 같아 보였어,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등의 작업 멘트. 상대방이 이에 긍정할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고민도 없이 항상 즐겁게만 사는 인간 같은 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전혀 외롭지 않은 인간이란 건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아니라며 이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에는 그냥 아닌가? 잘못 본 것 같네~ 라며 적당히 얼버무리면 된다.

“아, 틀킨건가?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진아는 그렇게 대답했고 나는 심각한 표정을 하며 속으로 냉소 짓는다. 이 질문에 어떻게 그런걸 아냐는 등의 역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럴 때에는 상황에 따라 너한테 자꾸 관심이 가서 그런게 보이더라구 라거나 원래 사람 잘 볼 줄 모르는데 이상하게 너한테서는 그런게 느껴지네 정도의 손 발 오그라드는 멘트를 하면 된다. 우울해 보인다는 말 따위에 이미 공감을 해버린 외로운 사람들은 어떠한 느끼한 멘트를 날리더라도 이를 진심처럼 받아들이며 때로는 울기까지 한다. 물론 울면서 나한테 기대주는 경우는 대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경우이고 그럴 때 듣게 되는 말들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시기적절하게 사용한다면 후에 연애를 하거나 작업을 걸 때 마치 상대방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이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알고 있다고 느끼게 하며 쉽게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진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었고 그 날의 작업에서는 성공이 아닌 그냥 그런 정도의 만족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사실 오늘 정말 우울했던 건 나였어 처음 봤지만 너라는 편한 사람과 함께여서 우울했던 게 다 나은 것 같아- 그리고 진아에게서 온 꾀 긴 답장에는 그저 푹 쉬라는 정도의 인사말만 보냈다. 아쉽다고 느낄 때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이는 그 날 완전한 작업에 성공하지 못한 분풀이가 아닌 완벽한 성공의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하나의 작업 방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저 섹,스이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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