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숲 5화

깡과힘 작성일 12.02.03 23: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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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아! 악몽 꾼 거야?”

다급한 진아의 목소리에 불안으로 빨라진 심장 박동을 느끼며 정신을 차린다. 어떤 자세로 깨웠는지 얼굴을 감싸 안은 팔과 가슴에서 미미한 마른 먼지 냄새가 느껴지자 나는 몹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물 좀 줄래?”

생수를 가지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나무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무척 더운 여름 날, 만원 버스에서 겨우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창문을 열고자 했더니 술 취한 아저씨가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악취를 풍기며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때가 생각났다.

이따금씩 꾸는 꿈, 평소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마음에 다시 눈을 붙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진아에게서 나는 마른 먼지 냄새 때문에 다시 잠드는 걸 포기했다. 그 때 버스에서 피곤함에 지쳐 더위와 악취에 익숙해지며 그대로 잠들었던 내가 떠올라 얼마 자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품에서 다시 잠들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5년 전 겨울. 아니 초봄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3월 말 정도였을 것이다.

“벌써 봄인데 날씨가 왜 이리 춥지? 이래서 벚꽃이나 피려나?”

“에이 오빠는 제대 하고 벚꽃 첨보는 거잖아요?”

신입생인 동기들과는 다른 단정한 모습. 대부분 아저씨나 삼촌 같다고 느껴지는 복학생 선배들과는 다른 느낌이 난다. 재민은 스물 네 살의 복학생으로 그 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조장을 맡았었다. 재킷 안에는 항상 단색의 남방에 니트, 카디건등을 걸치는 정도의 깔끔한 옷차림을 즐겨 입었는데, 중저가 브랜드를 주로 이용했음에도 큰 키와 마른 체형 덕택에 멋스럽게 폼이 나는 게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검정색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무척 지적인 이미지여서 오리엔테이션에 온 재학생이나 신입생 여 학우들에게 꾀 인기가 있었다.

전역한지 1개월 좀 더 지났다는 재민을 신입생인 내가 놀리자 넌 작년에 고3이었잖아? 고3이나 군인 아저씨나 슬프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라며 입을 삐죽거린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남자에게 어쩌면 난 호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2월의 마지막 주말이 지나자마자 3월의 학교는 쉴 틈도 없이 개강을 했고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진아 자취 한다며. 너희 집 가서 한 잔 더 하자“

과나 동아리가 아닌 사적인 만남. 처음 보는 몇 몇 선배들(전원 남성)과 동기들(대부분 여성)이 엉키듯 모여서는 술족파라는 무서운 이름의 허름한 족발 파전 전문점에서 막걸리에 사이다와 소주를 섞은 혼합주를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셔댄다. 뭔가 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능한 주는 대로 마셔보려 했지만 (원 샷~을 외쳐대는 자리임에도) 막걸리 그릇에 담긴 많은 양의 혼합주는 도저히 한 번에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큰 사이즈라고는 하지만 파전 한 장에 여덟 명이나 되는 인원이 기이한 폭탄주를 먹어대고 있는 상황, 안주를 권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술병은 바둑판의 돌처럼 쌓여만 갔다. 선배들은 한 명 뿐인 남자 신입생에게는 원 샷~을 하지 못하면 잔을 다 비우고 다음 잔을 받게 했지만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자 신입생(심하게 빼지 않는)들에게만큼은 넉살좋아 보일만큼 관대했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이 비워낸 술은 막걸리 일곱 주전자에 소주 네 병이었다. 인심 좋은 주인 이모가 두 병의 사이다는 서비스라고 말씀 하셨지만 난 그걸 제대로 듣지 못할 만큼 취해 있었고 2차로 간다는 노래방에 도저히 따라갈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속은 메스꺼운데 오바이트는 나오지 않는다. 눈이 빙글빙글 도는 건지 세상이 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돌아버린 건지 캔버스화를 신고 있던 발은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 내 몸을 제대로 지탱해주지 못했고 보다 못한 선배 한 명이 너희들 먼저 가 있어 라고 말한 후 겨울나무처럼 가느다란 팔을 잡아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것은 오후였다.


진아 자취 한다며. 너희 집 가서 한 잔 더 하자. 라는 말에 더 이상 술은 못 먹겠다거나 힘들다는 등의 부정어 대신 내 입에서 신음처럼 튀어나온 말은 오빠 저 어떻게 생각해요였다. 그게 마지막, 이후의 기억은 없지만 오전 수업을 전부 제치고 12시가 넘어 잠에서 깬 아침의 내 방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었으리라. 아마 재민이 술에 취한 나에게 한 잔 더 하자고 말했던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었을 것이고, 거기에 어리고 멍청했던 나의 실수가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겠지만 무언가를 탓으로 돌려버리기에는 너무도 큰 것을 잃었다. 침대도 없는 조그만 방에 깔려있던 시트 이불은 어린 아이가 지도를 그린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화장실에는 빤지 얼마 안 되어 눅눅한 수건이 걸려 있었다. 난 알1몸인 것이 싫어 얼른 옷을 주어 입고는 증오스러운 지난 몇 시간을 기억해내고자 머릿속을 더듬으면서도, 무언가 생각이 나는 것을 겁내하면서 한참을 울었다. 무언가 차 있는 것 같은 통증, 무엇보다 스스로가 더럽다고 느껴지는 마음에 소리 내어 오랜 시간동안 눈에서 눈물만 났다.

 5년 전, 스무 살 처음으로 시작한 대학 생활의 학점은 학사경고. 그 후 난 2년간 나는 스스로에게 강요받듯이 휴학을 선택했다.


 

 “너 그 개1새끼 졸업할 때까지 학교도 못 다녔잖아... 이런 말 함부로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용환이 랑도 벌써 잔거야?”

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 준다. 걱정 해줘서 고마워. 근데 나 괜찮아 정말. 철은 괜찮다는 대답에도 깊은 한숨을 쉰다. 이성이지만 진짜 친구구나 싶은 마음에 미안함과 안타까운 감정을 감출 수가 없다. 감출 수 없는 눈물이 별처럼 흘러내린다. 사실은 나 괜찮지 않아 라는 한숨과 함께 괜찮아 라는 거짓말로.


 대형마트나 백화점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라기 보다 없는 것이 없다. 특히 식품 코너에는 육류, 어패류, 곡류, 주류 등은 물론이고 다양한 이벤트 코너에 지역 특산물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먹을거리를 판매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시식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어 원하는 음식의 맛을 볼 수가 있다. 마음만 먹으면, 10원 한 푼 가지지 않고서도 배가 부를 만큼 맛있게, 여러 종류의 음식들을 먹어 볼 수 있다.

그렇게 시식을 하고 돌아다닌다. 내 것은 무엇 하나 없는데 원하는 건 뭐든지 먹을 수 있는 악몽을 꾼다. 불안하게 높아지는 심장 박동 수에 놀라 잠에서 깨면 어김없이 괴물이 나를 비웃는다. 악몽을 꾼 후에는 특히 소리까지 내어가면서. 거울이 깨지듯 비웃음을 속삭이곤 한다. 넌 세상의 떨거지야 라며.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떨거지는 진아에게 이별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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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업데이트네요

4화까지 상황의 마무리입니다

 

노르웨이숲은 장편이고 내용과 결말을 정리 해 놨습니다

6화까지 써놓고 2년 동안 안 썼네요.. 죄송합니다

6화부터는 시점이 바뀌는데 꼭 다 써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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