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씨. 방금 그 차 뭐에요? 비싼 외제차 아니에요? 지후씨가 거기서 왜 내려요? 운전하고 온 여자는 뭐에요? 무슨 이야기 했어요? 네? 네? 네?”
내가 군대에서 쏴본 M60 기관총의 발사속도도 그 여자의 말 속도를 따라오진 못할 거라고 지금도 자신한다.
무슨 음절 하나가 초당 0.5초 정도는 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와다다다 쏴붙이는 통에 안 그래도 정신없는 와중인데 내 신경줄을 잡고 남사당패 줄타기라도 할 기세더라. 대강 건성으로 얻어 탔다고 말하고 그냥 회사 사무실로 향했어. 뭐 눈치는 있는지 내 피곤하고 말이 아닌 몰골을 보고서는 그 여자도 더 이상은 물어보지 않더라고.
거기서 안심하진 말았어야 하는데 말이지. 좀 강하게, 이거 가지고 입방정 떨면 내 인생 걸고 당신 매장시키겠다, 뭐 이런 식으로도 말해봤어야 했었어.
밤새도록 그런 일들을 겪고 잠 한 숨 못잔 채로 회사에서 브리핑 하는데 잘 될 리가 있나. 머릿속은 완전 빅뱅 직전 카오스 꼴처럼 되어서 혀는 꼬이고 서류는 그녀가 보고 아버님이 보고 그래서 찢겨지거나 차례 뒤집혀 있고, 프레젠테이션용 파일을 담은, 가방에 있던 USB는 이미 내 가방에서 안녕을 고했고, 아침에 급하게 오느라 머리 세팅 엉망인 꼴도 완전히 통제가 안 되고.
부장님의 눈초리가 완전 싸늘해지더군. 부장님도 여자분이신데, 서른여덟 살 노처녀야. 말이 38세지 몸매나 생긴 거나 거의 2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로 한 맵시 하시지. 머리를 위로 틀어올려 묶은 모습이 때론 고혹적이기까지 하다고. 하지만, 이미 나이가 알려진 순간은 끝장나는 거지.
가끔씩 그런 인생의 히스테리가 좀 나오는 부분이 있어서, 불쾌한 때도 있기는 하지만, 말단이 뭔 힘이 있누. 개인적으로는 동정심도 들어서, 그저 그런 배경이 좀 사람을 힘들게 하는구나 내가 더 잘해야지 하면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고. 물론 그 때마다 좀 어깃장이 나긴 했지만.
흑.
하여간 어떻게 브리핑을 끝냈는지도 모르고 브리핑실을 나오니, 이번엔 사무실 안에서 다른 팀 사람들이 숙덕대다가 내가 오니까 입을 싹 닫는 모습이 보이는 거야.
뭐 더 있겠어? 윤미선 고뇬이지.....아침 회의 들어가기 전 그 짧은 시간에 잘도 방송을 해놨군.......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며 와이셔츠 단추 하나를 풀어헤치기가 무섭게 부장님 호출.
“지후씨, 그렇게 안 봤는데 별로 프로답지 못하네?”
하여간 그 때까지 여자들이랑은 일진이 별로 안 좋은 상황이었나 봐.
쭈그러들다 못해서 이젠 완전히 될대로 되라 싶은 심경으로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깔고 완전 잘못했습니다 모드로 서있었지.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백업해놨기에 망정이지,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거기다 행색은 그게 뭐야? 이번 프로젝트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다른 일체의 말도 없이 죄송하다는 말만 나는 연신 되뇌었어. 최대한 측은하게 보이도록. 뭐 그게 먹혔던 건지 부장님도 조금 흘러내린 앞머리를 한 번 손으로 넘기면서 심경을 정리하더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 나가봐.”
나는 꼬리말은 개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왔어.
오전 시간 한 시간 정도를 업무에 집중하면서 나한테 생겼던 일들을 잊으려 했어. 달빛 속에서 뽀얗던 그녀의 나신이 떠오를 때마다 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이번 프로젝트 행사에서의 동선이나 안전규칙, 행사 주목적이나 참가단체가 해야 할 일 등을 떠올리면서 잊으려고 했지. 그 사이에 내가 나이트클럽에서 놀다가 어떤 돈많은 여자를 꼬셔서 원나잇 후 횡재 일보직전까지 가고 있는 캐릭터가 되어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모든 일들은 쉽게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적어도 그렇게 집중하다가 시계가 11시 20분 정도가 되었을 무렵까지는.
“지후씨, 손님 오셨는데?”
이번엔 또 뭐임? 하면서 거의 사무용의자에 눕다시피 해서 있던 몸을 일으켜서 문 쪽을 바라보다가 난 또 숨을 잠깐 멈췄어.
‘날 고문하시려던’ 수영씨 아버님이 서 계시는 거야.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