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가디언 - 2화 왜들 이러세요 정말 (4)

NEOKIDS 작성일 10.06.16 23: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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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라 다른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는데, 어째 오늘따라 유독 나하고는 밥 먹자고 권하는 사람이 없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메신저를 보니 이미 내가 그런 비도덕적이고 불건전한 사람이 되어 있는 상태인 게 딱 보인 거야.

 

윤미선 이뇬........내 언젠가 제대로 복수해 주리라.........남자동료 자식들은 뭐가 좋은지 지들이 더 흥분해서 요 김지후 나이쓰 나도 다리 좀 놔주라 이런 쪽지나 보내고 있고.

 

뭐 그렇게 불끈불끈 맘을 먹어봤자, 배는 고파오고 몸은 힘들고. 그래서 다들 나간 김에 나 혼자 조용히 먹어볼까 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왔어.

 

점심시간 때 편의점에서 궁상맞게 먹는 건 좀 그래서 사무실로 가져왔지. 뭐 다른 회사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린 사무실에서 먹는 게 허용되거든. 워낙에 일이란 게 대중이 없다보니. 그래도 궁상맞은 건 변함이 없더라. 젠장. 군대 훈련소에서 첫 아침밥 먹었던 것 만큼의 우울함이 몰려오더라고.

 

물을 붓고 천천히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난 그 우울함의 뒤편으로 다가오는 수영씨의 집안생각을 집어올렸어. 산속에 있는 집, 비싼 외제차, 외국인 아버지. 착한 어머님. 도대체가 뭐 하나도 이빨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들만 잔뜩인 거야. 내 특기인 맘대로 상상하기조차도 이 해괴망칙한 것들의 조합에 이르면 전혀 발동이 안 되더라.

 

라면이 다 익었고, 난 같이 사온 볶음김치를 뜯고는 라면 을 한 젓가락 떠서 입에 넣었어. 수영씨 어머님이 해준 그 ‘지구멸망모름’ 음식의 맛을 생각하면 이딴 조미료와 튀긴 밀가루, 나트륨 덩어리 따윈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귤 까먹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위장이 아까부터 또 갈굼을 시작한 탓에 그런 거 따질 정신도 없었고.

 

그렇게 한 젓가락 떴을까?

 

갑자기 사무실의 문이 쾅 하고 부서질 듯이 열렸어. 놀라서 미처 입 속에서 컨트롤이 안 된 볶음김치 조각이 너클볼 변화구 구질로 모니터로 격돌해버리고 말았고. 여전히 라면과 볶음김치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모니터에서 사고 잔해물을 제거하고 나니 얼룩이 심하게 남아서 난 화가 단단히 났지.

 

떼어낸 볶음김치를 바닥에 내던지면서 대체 어떤 개자손임? 이런 메시지의 얼굴로 사무실의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빼꼼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서 완전히 책상에 포복자세 후 복지부동을 유지했어.


수영씨가 입구에서 씩씩대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거야.


아니, 쟨 또 왜 여기 온 거야. 설마 날 보러 온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면상 다시 안 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일단 쟤는 여기 있잖아. 그럼 나 보러 온 거네. 도대체 뭐야!

어쨌든 화가 단단히 나있는 것 같았어. 난 그 오밤중에 그녀가 시전했던 수도치기를 다시 떠올렸지. 목이 아직도 시큰거리는 듯 했어.

되도록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줄 알겠지. 그럼 그냥 갈 거고, 상황은 러브앤드피스, 끝나는 거야. 난 대강 떠오른 그 전술을 밀고 나가기로 맘먹고 조용히 입에 있던 내용물도 안삼키고 있었는데......


하아.......

이 죽일 놈의 볶음김치.......


다물린 입에서 배어나온 침과 함께 그 김치조각의 양념이 엿먹어봐라 하면서 내 목젖을 튕기고 가는 바람에 난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내야 했어.

크흐음, 정말 더도 덜도 아니고 크흐음, 이 정도 소리만 냈다고.


소리를 내고 나서 화들짝 놀랐지만 경거망동을 할 순 없었어. 그녀가 못 들었을 수도 있잖아? 이대로만 있으면 그냥 가버릴 수도 있고. 정말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그냥 가기를. 젭알, 젭알 쫌. 응? 쫌.

 

잠시의 고요함. 난 그녀가 이제는 갔겠지 싶어 살며시 고개를 파티션 위로 들어봤어.

 

그리고는 에베레스트 산 높이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 같은 심장의 느낌을 만끽해야 했지.

 

그녀의 눈과 딱 마주쳤거든.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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