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살려 주세요
부장님이 대체 나한테 또 무슨 꾸짖음을 폭풍처럼 하사해주실까. 그런 생각 때문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핑계도 대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으니 밥은 먹어야겠고, 또 그녀에 관한 오해도 제대로 풀어야겠다 싶어서 퇴근 시간 후 부장님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어.
그러나 역시 직장인들이 저녁 먹는다는 게 그냥 밥만 먹는 개념이겠어. 부장님이 당연히 소주도 시키시더군.
고기가 익는 동안 부장님이 술을 권했고, 소주 한 잔 딱 들이켰는데 피곤해서 그런지 다리에 확 맥이 풀리는 느낌이 돌았어. 하지만 여기서 또 정신줄 놓으면 안 되니까, 완전긴장 모드로 술을 대하리라 결심하고 그 다음부터는 눈치 봐가면서 천천히 마시려고 했는데......
그렇게 눈치 보고 있는 새 부장님이 자작으로 원샷 쓰리 콤보를 하시네?
그 모습을 보고 난 잔을 잡아준다거나 하는 예의를 챙길 새도 없이 훅 쫄았어. 난 대강 부장님의 주량을 알고 있거든. 저기서 한 잔만 더 하면 완전히 한계를 넘는 거야. 그 때서야 나의 위험감지센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거지. 이거 또 그냥은 안끝나겠구만 싶었고.
“김지후씌!"
헑. 벌써 혀끝이 살짝 돌아가 버린 부장님의 발음에 난 계속 차려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며시 대답했지.
“네.....”
“김지후씌, 그러는 게 아네에에에~”
“제.....제가 뭘.......”
“일도 글코, 여자도 글코, 좀 깔끔하쥐 못하게쎄여?”
나는 어쨌건 필사적으로 마지막 한 잔을 못 먹게 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면서 소주병을 슬금슬금 내 쪽으로 끌어오고 있었어. 그런데 부장님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내 눈 앞으로 얼굴을 들이미시는 거야!
“듣고 있냐고옥! 김지후쒸!”
“아! 네. 네.”
그러면서 날 끝까지 노려보던 부장님. 그녀의 손이 이때까지 끌어 땡겼던 소주병의 목을 감아 채더라.
날이 어째 시작부터 끝까지 이 모양이냐. 아침에 주까지 찾았건만 마무리까지 퍼펙트하게 달리는 건 뭥미. 부장님은 끝내 마지막 잔을 훅 부어서 원샷 콤보의 대미를 장식하시더라고.
갑자기 주량도 얼마 안되는 부장님이 혼자서 술을 챙겨 마시는 것도 무섭고, 하루가 완전히 뒤죽박죽된 느낌에 지치기도 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어차피 망가진 인생 몸이나 축내지 말자는 의미에서 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댔어. 부장님이 고개를 흔들흔들 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고.
“그니까~ 내가 들었단 말이지이이이~”
“뭘 들으셨는데요?”
“김지후씌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흐끕~”
날, 어떻게, 생각. 이거 도대체 무슨 의미임? 내가 부장님에게 연정을 품은 걸 알았단 의미임? 착각이 대륙간 탄도탄 급이시네. 난 누구한테도 그런 얘기 한적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부장님에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구만?
벙 쪄 있던 난 부장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
“그니까~아, 김지후쒸가, 내가, 이 내가, 부장으로서! 상사로써! 괜찮으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그르지 안았냐고오오~!”
그런 거라면 한 말이 있긴 있지만, 뭔가 와전이 된 거 같은데 그건 부장님이 노처녀라고 남자직원들이 흉보길래 그래도 일하고 자기 삶 챙기는 사람이지 않냐, 상사로써도 손색없으니 잘 도와서 일해보자고 말하던 거였는데, 그건 또 언제 들었대?
“어떻게 또, 들으셨네요.”
“나도 마랴! 다 든는 귀가 이써요오 귀가~!”
이제 어디 가져다 팔 쪽도 없어서 난 그냥 묵묵히 고기만 먹었어. 얼굴은 이미 술이 올라 막 딴 고추마냥 뻘개지고 곱게 틀어 묶었던 머리는 가닥가닥 삐져나와 헝클어진 채로 안경이 콧등에 걸려도 모르는지 열변을 뱉으시는 부장님.
저,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주변사람들 이목도 잠시 챙겨보시면 좋겠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기 시작하고 있거든요. 물론 말은 못했지만, 생각은 굴뚝.
“그른데 마리야 흐끕~”
거의 돌아보지도 않고 있는 내게 부장님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어.
“그래, 그 말 드꼬, 김지후쒸 차암 착하구나아아아,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아아아 했단 말야. 근데.”
어허. 또 한 잔 들이키신다. 난 지켜야 할 성에서 새카맣게 몰려오는 적들을 칼 한 자루 없이 바라보는 장군의 심정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환타스틱했지.
“나도 마리야아아~ 부장! 상사! 이런 거보다......여자. 여자로 인정바꼬 시펐다고오오~~~!!!”
고기를 신나게 씹던 턱이 딱 멈춰버렸어. 이거, 이거, 이거 지금......이게 뭐 고백이란 거임? 응? 정말?
“근데이쒸. 오늘 프리젠테이션도 말아먹고, 새파아아아라케 어린 애랑 바닥에 널부러져서 재미 보고 있고. 이쒸. 장난해? 지금? 어어어어!”
갖다 팔래도 없던 쪽이 다시 재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처럼 따끔거렸어.
따끔거린 건 앉은 자리만이 아니었지. 식당의 주변에서 자기들 이야기도 멈춘 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저씨들이 자기들끼리 낄낄대기 시작하거나, 젊은 여자들 무리가 어머어머어머 매직매직매직 하는 눈빛으로 흘겨보기 시작하거나, 할아버지들이 저거 아주 못된 놈이로구먼 하는 일장훈계 같은 외침에 20대 시커먼 휴가군인의 무리들이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까지. 온 사방의 시선이 고슴도치의 침마냥 찔러와 주시는 그 알싸한 느낌 있잖아?
난 술도 안먹었는데 얼굴이 벌개졌어.
“김지후! 너어어어어 이 쒸. 잘해? 아라찌? 에헤헤헤헤~”
사람을 무간지옥에 몰아넣고는 뭐가 좋다고 막 헤벌레 하는건지. 그러면서 마지막 조금 남은 한 잔 부으려고 소주병에 손을 뻗는데, 더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지. 바로 손목을 잡고는 말렸어.
“부장님. 취하셨어요. 일어나세요. 계산 제가 할께요.”
“캐산? 아냐아냐, 내가 하끄야. 흐끕~”
“아니, 제가 할 테니까 그냥 서 계시기만이라도 하세요. 아셨죠?”
“내가 하끄라니까!”
손목을 힘껏 뿌리치더니 부장님은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여 를 마지막 유언으로 상에 고개를 떨구고 사망.
하아......내가 미쳐.
카운터 아짐니의 뭔가 능글맞은 눈빛을 마주보며 많이 취하셨네요 하고 나름 변명하고는 부장님을 부축해서 나가는데 등 뒤로 다시 터지는 사람들의 이야기 보따리와 웃음보. 언뜻 군바리들이 휘파람까지 불어주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어.
내가 다행히 부장님의 오피스텔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길거리에서 이렇게 뻗어버렸으면 어쩔 뻔 했누. 택시를 잡아타고는 오피스텔까지 가는 동안 맘이 참 착잡하더라.
속으로는 이거 기억이나 할까 싶었지. 또 수영씨랑 그렇게 널부러져 있는 상황을 평소에 그런 맘을 가지고 있던 부장님이 봤다면, 그래서 그 억누르던 맘이 이런 식으로 터진 거라면,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택시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그 서른 여덟의 노처녀가 그런 말을 하려고 못 먹는 소주까지 들이키며 노력한 것은 가상했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그런 맘까지 신경써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좋았으련만.
내가 그렇게 사람을 찾으면서 외로웠다면, 아마도 이런 날을 기회로 잡았겠지. 붕가붕가도 해보고 막나가 봤을지도 몰라. 부장님이 맘을 까보여 줬는데 뭐가 더 두렵겠니. 하지만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
연애감정? 사랑? 군대 들어갈 적 그 에피소드가 아니더라도, 난 여자들이란 존재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어. (엄찍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고. 무슨 도 닦는 사람마냥. 이상하긴 해도, 그게 나니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인데, 지금은 소주냄새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참 편히도 자고 있는 부장님을 보면서, 그런 상황의 나라는 놈 때문에 참 많이 미안했어.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