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가 나를 보며 우뚝 멈춰섬과 동시에 나는 안나 쪽으로 달려갔어. 그리고는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었지. 핏방울이 스프링클러의 물과 섞여 투두둑 하고 안나의 입으로 들어갔어.
진윤과 초롱이는 내 이런 행동에 놀라버렸어.
“성소! 뭐하는 거지? 그건 드래곤볼이라는 만화로 치자면 프리더에게 선두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저씨! 하지 마세요!”
뭐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는 미호였어. 이런 내 행동을 보고도 전혀 놀랍다는 기미는 없었거든. 이로써 난 또다시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어. 그러나 잠깐 그것은 제쳐놓고, 나는 안나의 상태를 보았어. 꽤 적은 양의 피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안나는 재생을 시작하고 있었어. 순식간에 재생을 마친 안나는 누운 채로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어.
“왜, 날 살려준거지?”
“곧 인간들이 올 거야. 그 꼴이면 아마도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어서 재생을 하겠지. 그러느니 지금 재생해서 여기서 일단 나가는 게 내게도 네게도 훨씬 나을 거고. 안그래?”
“......”
“너도 인간들에게 정체를 들키긴 싫을 거 아냐. 나도 우리 애들이 정체를 들키는 꼴은 원치 않아.”
“왜 그런 걸 마음에 두는 거지? 왜 이계의 존재들을 감싸려 하는거야?”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런걸. 내 삶에 마음대로 들어온 애들이지만, 그렇다고 내보내는 것도 함부로 할 순 없으니까.”
안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천천히 일어났어. 아직도 미호의 존재가 수상하고 두렵다는 투로 미호를 계속 노려보면서. 하지만, 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라는 건 꽤나 오래 살아온 안나도 알고 있는 사실.
“지금은, 돌아가겠지만, 꼭 다시 돌아오겠어.”
“그 땐 느닷없이 이러지 말고 말로 좀 풀자고.”
쓴웃음으로 안나 쪽을 마무리지어 놓고, 나는 등을 돌려 미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일단은 여길 나가야겠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 넌 누구야?”
미호는 내 질문에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다물고 있었어.
등 뒤에서는 소방차의 사이렌들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고, 우리가 구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소방관들이 들이닥치는 도서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어. 분명히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도서관에서 나와 있고 도서관은 난리법석인 상황이라면 나라도 그렇긴 하겠다. 안나는 스스로 빠져나가겠다며 먼저 모습을 감췄어.
미호와 진윤, 초롱이와 함께 그런 상황들이 보이지 않을만한 모퉁이까지 도착해서야, 나는 모두를 세워둔 후, 미호와 함께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잇기 시작했어.
“물었잖아. 누구냐고.”
“........”
“대답하기 싫은 거야?”
“........”
“그럼 당장 내게서 떠나. 꺼지라고.”
생쥐만한 심장으로 초강수를 두고 나자, 미호 안의 다른 존재는 입을 열기 시작했어.
“난, 아직 자네에게 정체를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어째서지?”
“자네가 감당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지. 부림이 청년.”
싸늘한 말을 내뱉는 미호의 눈빛은 예전의 어린애같은 천진난만함이 사라진 채 너무나 깊고 투명하여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굴할 수는 없었어. 얼렁뚱땅, 만나서 같이 살아왔던 사이지만, 이대로 둔다면 미호를 놓칠 수도 있다는 그 왠지 작은 불안감, 그것을 내버려둔 채로 이 시간들을 흘러가게 내버려둘 순 없었어. 그게 내게 쥐뿔같으나마 대들어 볼 수 있는 용기를 주었어.
“어차피 감당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미리 알아두는 것도 손해는 아니겠지. 달라질 건 없어.”
“.......”
여전히 미호 속의 존재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어. 그 때 진윤도 동참했어.
“당신은 매우 강한 존재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미호의 인격을 억누르고 나와 있어요. 성소는 미호의 인격을 돌려받길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당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나도 성소와 같이 싸워줄 수 있어요.”
“초롱이도요!”
진윤과 초롱이가 내 추궁에 가세하자, 미호 속의 존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어.
“후우......만물을 다스리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 호녀의 피가 내려준 그 바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인가.....좋아, 그렇다면 말해주겠다. 그 이후는 알아서 감당하도록.”
미호 속의 존재는 결심을 굳힌 듯 했어.
“나는 호녀가 만들어낸 신수(神獸)이자, 자고로 내려왔던 9부족의 제사장인, 구미호의 정신체이다. 나라는 정신체는 자고로 구미호라는 육체 속에 내제되어 대대로 전승되어 오고 있지. 나는 9부족이 생겨났던 그 때부터 이 영겁의 세월동안 전승을 계속해 오고 있다.”
“그 말은.......”
“나는 이 구미호가 간직한 또 하나의 인격이며, 신성함 그 자체이다.”
초롱이의 아버지, 천보가 미호를 특별하게 바라봤던 건 그걸 알고 있어서였겠지. 왜 천보는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걸까.
“왜 천보가 그런 말을 미리 해주지 않았을까 궁금해 하고 있나?”
“내 생각까지 읽는 건가?”
“나는 신성함 그 자체이자 제사장. 너의 생각 정도 읽는 건 힘들지 않다.”
미호 속의 존재, 그 신성한 존재 앞에서는 더 뭘 숨길 것도 없을 듯 싶었어.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와버렸지.
“그럼, 부탁할 테니까 말 좀 해줘. 왜 천보가 말하지 않았는지.”
“그 도깨비가 현명한 자였기 때문이다. 너에게 말하지 않아야 네가 안전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내 정체가 누군가에게 인식된 이상, 그것은 미묘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이 인간세상의 이치로 따지면 마치 전파를 발신하는 안테나 꼴이 되지. 그 결과, 결코 내 존재를 알려서는 안 되는 자들에게까지 그 파동이 전달되게 된다.”
“그런 자들이, 대체 누구지?”
“삼신의 가호를 따르는 자들.”
“삼신?”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 보통 삼신이라 하면 삼신할매 같은, 아기를 점지해주는 그런 존재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그 가호를 받는 자들에게 미호가 알려지면 안 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신성한 존재는 또 내 생각을 읽었어.
“무릇 삼신이라 함은 환인, 환웅, 단군을 일컫는다. 9부족이 갈려나온 이후에도 호녀의 설득으로 9부족은 삼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지. 웅녀가 이간질했던 세상의 바른 이치와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갈려나온 9부족은 서쪽의 대륙으로부터 일어나는 기운들에 대항하기 위해 단합했다. 그 9부족이 양과 음의 기운으로 한 해의 단위가 지나는 날, 우리들은 제사를 지냈지. 하지만 웅녀의 뒤를 따라 환인이 왔던 세계로 돌아갔던 무리들은 어느 날 우리에게서 가호를 빼앗고 단죄의 명목을 씌우기 시작했다. 다시 9부족은 반목을 시작했고, 그 결과 대륙으로부터의 기운에 밀려나기 시작했지. 그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게.......어떤 거지?”
“우리가 호녀의 뜻에 감복하여 따랐다는 것.”
부조리.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었어. 말이 안 되잖아. 인간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던 말을 물리는 존재가 어디 있어. 그게 무슨 신이야.
“이해가 안가도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난 그런 상황의 제사장이었고.”
미호 속의 존재는 말을 이었어.
“가호가 끊긴 후, 내게 신수로서의 자격을 계속적으로 부여해준 건 호녀였지. 호녀는 어떻게든 그 가호를 되돌리려고 했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져만 갔다. 빛만 있는 세상에 그림자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써, 우리들은 유배되었다. 인간과 친했던 영계는 이계이며 잡신계로 명명되었고, 우리는 하루 아침에 불가축천민의 신세가 되어야 했지.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어.
“우리는 반드시 절멸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건 자네를 포함한 운명이기도 하지.”
멍하니 그 말들을 곱씹는 동안, 미호 속의 존재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말했어.
“이제는, 모든 것이 네게 달려있다. 이계의 모든 존재들은 내 존재를 깨닫고 내게 끌리겠지. 그러나 그들은 내게 복종하러 모여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분노와 절망을 가지고 이 땅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모여들었을 때, 이 별 자체를 전부 뒤엎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전쟁?”
“그렇다. 유대인들이 써놓은 요한계시록이라는 기록상에서는, 아마게돈이라고 불리더군.”
뭐야. 이거 뭐야. 왜 갑자기 쥐뿔 정도는 행복해지려던 내 인생이 전 지구적인 스케일의 불행으로 확대되는 거야. 내 이해를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들에 연산능력이 못 따라가고 있거나 말거나 미호 속의 존재는 질문을 던졌어.
“그럼 이제 묻겠는데, 넌 이런 모든 것을 알면서도 미호를 버릴 건가?”
“뭐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어. 그래, 확실하게 미호만 곁에 두지 않으면, 나는 안전할 수 있어. 내 말 한 마디면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지. 미호가 어떤 존재들을 끌어들이건 간에, 나는 상관없을 수 있는 거야. 진윤도 있고, 초롱이도 있어. 뭐가 부족하겠어. 하지만. 하지만.
“미호는, 내 곁에 둘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어.
“뭐, 따지고 보면 만난 지도 얼마 안됐고, 잘 표현은 할 수 없어. 내 생각을 그대로 읽고 있으니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겠지. 그런데 말이야. 난 미호가 두려워 하는 눈빛을 봤거든.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미호가 얼마나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그런 걸 알고도, 버리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게 되거든. 난 그럴 수 없어. 절대로.”
미호 속의 존재는 내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어. 그리고는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지.
“현세에서 미호가 만난 존재가 자네라서 무척 다행이군. 그러나 자네의 존재의 무게는 무겁다네. 부림이 청년. 자넨 부림이이면서도 승천혈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 승천혈의 임무는 그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거다. 호녀가 준 바탕을 기억하게. 이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 도서관에서 사람들을 대피시켰던 그 마음. 그 마음을 잃는 순간, 그 마지막 전쟁은 걸음을 훨씬 빨리 해 다가올 것이네......”
그 말을 끝으로, 미호는 쓰러졌어.
“우....웅? 성소? 왜 그래? 모두들? 여기가 어디야?”
내 품에서 깨어나면서 뭔가 어리둥절하던 미호는 이내 전투태세를 하면서 외쳤어.
“그 애는? 흡혈귀 여자는?”
“괜찮아. 다 끝났어.”
“정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 방 맞고 날아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그 다음은 어떻게 된 거지?”
캐묻는 미호의 질문을 나는 대강 얼버무렸어. 진윤과 초롱이가 도와줘서 겨우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고. 미호는 왼손바닥에 오른 주먹을 치면서 말했어.
“그 녀석, 다음에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어!”
분통해 하고 있는 미호를 다독여서 집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내가 가진 정체에 대한 무게감이 새삼 어깨를 짓눌렀어. 나라는 존재가 대체 무슨 수로 그런 신화적인 전쟁을 막아. 난 그저, 교육도 못 받고 가난하게 혼자 살았던 생각 없는 놈에 지나지 않은 한낱 인간일 뿐인데,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지.
두통이 일어날 것 같았던 머리는 조금씩 진정되었어. 옆에서 초롱이가 내 팔을 붙잡고 같이 걷고 있었거든. 초롱이는 내게 고마운 말도 속삭였어.
“뭐가, 어떻게 되든, 난 아저씨 옆에 있기로 결정했어요.왜냐면, 아저씨는.....아저씨는.....”
뭔가 더 말하려고 하는 순간, 미호가 끼어들어서 난장.
“에에, 치사해! 초롱이만 성소랑 팔짱끼고! 나도!”
그런 난장에도 아랑곳없이 진윤도 나와 같은 생각에 복잡해진 것 같았어. 그런 진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진윤도 눈치를 채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성소도 느끼고 있겠지?”
“그래.”
“왜? 그 흡혈귀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내가 해치운다고 말했잖아! 나만 믿으라고!”
또 몰랑한 가슴을 탁탁 두들기며 자신있어 하는 미호를 제쳐두고, 진윤은 말을 이었어.
“아무래도, 우린 좀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아.”
“동감이야.”
“하지만.......”
진윤은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수줍게 말했어.
“나도 초롱이와 마찬가지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난 너와 함께 마지막을 보고 싶어, 성소.”
진윤의 말에도 위로를 받은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어.
“정말....고마워.”
모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석양으로 인해 그림자가 길게 끌리는 저녁. 겨울의 추운 기운도 옆에 있는 모두들로 인해 사라져 버렸어. 나는 내 옆에 있는 아이들의 무게를 새삼 느꼈어. 지금까지 뭔가 정신없이 휘둘려 왔던 느낌에 비하면, 한층 더 살가운 느낌이 되었어.
무겁겠지. 힘들기도 할 거야. 지금의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일들도 벌어지겠지만, 미호, 진윤, 초롱이와 함께라면,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