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따가운 통증을 느끼며 남자는 눈을 떴다. 아마도 해변에 한참동안 쓰러져 있던 모양인지 뺨에 하얗게 소금기가 말라붙어 있었고, 한여름의 태양에 발갛게 익어 불쾌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아아...아아...”
마치 마이크 테스트라도 하는 냥 목소리를 내 뱉어 보았다.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나오는걸 보니 몸에 큰 이상은 없는 듯 하다. 남자는 그제서야 발갛게 익은 뺨을 바닷물로 적신 손으로 어루만지며 자신이 서 있는 해변을 둘러보았다. 일단의 생활 쓰레기들이 바닷물의 파고에 맞추어 해변가에 너울거리고 있었지만 대체적인 인상은 ‘평화’스러웠다.
“아, 평화라고? 아니 그건 아니지. 그보다는 뭐랄까. 음....티피컬. 그래 그냥 전형적이야. 이런 풍경은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을걸? 이렇게 호의적인 풍경과 날씨로 관객을 방심시키는 동시에 뒤따라올 고난에 대한 반전의 효과를 더하는거지.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같은 고된 생존기를 암시하거나, 아니면 ‘식스 데이 세븐 나잇’이나 ‘보물섬’처럼 총이나 칼든 악당들이 들이닥치는 거야.”
남자는 말을 마치고 잠시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제스춰를 취하더니 이내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는 해변에서 몇 미터 떨어진 나무 밑 그늘가로 가서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자 온 몸 여기저기가 쑤셔왔다. 남자는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답답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내렸다.
“아아....흠”
무언가를 소리내 말할 듯 했던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멍하니 바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야에 다른 생명체는 고사하고 다른 섬이나 육지의 작은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 갈매기. 갈매기 없다. 새우깡 파는데랑은 한참 떨어진 곳인가 보네.”
이런 농담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아쉬운건지 다행인건지...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킬킬거리다 남자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정색을 했다.
“지금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얼굴이 잔뜩 구겨질 만큼 강하게 눈을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해 내는 모양이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지 가끔씩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얼굴을 더욱 구겼다.
“아. 씨발 진짜...”
남자는 눈을 뜨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욕을 내뱉었지만 그리 실망한 듯 한 모습은 아니었다.
“좋아.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인생이지만, 이제 어쩔까? 어릴때도 별 흥미 없던 보이스카웃 흉내를 내며 탐험을 해볼까? 아니면 오소독스한 조난자의 고독과 절망을 음미하며 이대로 앉아 죽음을 도모해 볼까?”
남자는 잠시 실없이 웃다가 말을 이었다.
“푸하, 고독과 절망이라니. 현실에서는 아마 이런 말은 오그라들어서 입밖에도 못 내었을 거야. 신. 난. 다. 신. 난. 다.....”
혼자서 떠드는 것도 한심해 보이는데 이렇게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 보니 남자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가만히 나무에 머리를 기대었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다 하지만 바람 한점 불지 않아 얼굴에서 연신 땀이 흘러 내리며 발갛게 익은 뺨을 따끔따끔 자극했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벌써 반쯤은 말라버린 자신의 정장을 벗기 시작했다. 사각 트렁크만 남기고 모두 벗어버린 남자는 옷가지들에 모래가 뭍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뭇가지에 가지런히 걸었다.
“마치 내일이 다시 있을 것처럼....그리고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거지.”
남자는 다시 해변으로 내려가 쓰레기 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운이 좋다면 통조림 같은 거라도 건지겠지만, 대박이라도 난다면 톰 행크스처럼 윌슨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어슬렁 거리던 남자의 눈에 흥미로운 것이 들어왔다. 코르크 마개로 닫힌 편지가 든 병이었다.
“우와. 이거 진짜 티피컬.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거 몰카라면 저 이미 충분히 놀랐거든요?”
고함을 지르듯 큰 목소리로 내뱉은 남자의 말이 찰싹거리는 해변의 잔물결 소리 밑으로 사그라 들자 남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병을 들고 다시 나무 밑 그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글이기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최소한 영어로라도 쓰여 있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마개를 뽑았다.
너무도 친숙한 단어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지면서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는 현상을 괴슈탈트 붕괴라고 하던가? 마개를 뽑던 남자도 자기가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현실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잠시 멍하게 앉아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류가방에 정장을 한 중년의 신사가 서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처음뵙겠습니다.”
중년의 신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아...네. 네.”
남자는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명함을 받아들었다. 불의의 순간에 창피스런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 냥 남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나무에 걸어놓은 자신의 옷가지를 가리키며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겠거니 생각하던 남자는 명함을 확인하는 순간 맥이 빠져버렸다.
“아....그러니까 지니 시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