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레스는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얼음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것마저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함께 어울려 보였다. 수려하고,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
“난 자네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네.”
그의 콧수염이 위스키 방울을 지우느라 실룩거렸다.
“무한한 자네 세계의 가능성을, 아주 코털만큼이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헛수작은 내게 안 통해.”
덜레스는 위스키 잔을 아무데나 내려놓고 준을 마주보았다.
“자네는 필치부터가 달라. 물건이야. 누구도 그만한 세계를 구축한 적이 없었어. 왜 거장들이 거장이 되었는지 아는가?”
“.........”
“각자가 자기 세계를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자신의 생에서 자잘한 부분들은 내팽개쳐 버리지. 생계라든가, 가족이라든가. 빈센트 반 고흐는 그 때까지의 화풍과는 다르게 서투른 것들이 있었지만 확실히 자기 세계가 있었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줄 알았어. 모네, 폴락, 백남준. 모두가 마찬가지였지.”
덜레스는 위스키 잔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준에게 건네주었다. 준은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그에 비하면 요즘 작가들이란 놈들은 전부 자기 세계가 없어. 죄다 남의 세계에 대한 편린을 갈고 닦은 기술로 조금 더 포장하는 것에 불과해. 거장들이 100 이상을 하려 노력했다면 지금의 작가들은 지 세계의 10도 안되는 것들을 과대포장하고 돈에 환장해 거간꾼들에게 들러붙지.”
“하지만 예술이란 어차피 그런 것 아닌가요? 남의 것을 훔치고, 그것을 변형해서 뭔가를 만들고.”
“난 자네보다 훨씬 더 이 세계에 오래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있으면서 도태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그러니 어줍잖은 소리일랑 집어치워.”
격한 말투를 들으면서 준은 떠올렸다. 지미 덜레스. 미술계 딜러들 중에서는 예술가들보다도 더 괴짜에 험한 입담을 자랑하고 미술을 알아보는 실력만큼이나 거만하다는 입소문. 그건 틀리지 않았다.
“예술이란 건 나름대로 장사가 되는 부동산 시장 같은 거야. 돈이 되는 소재들은 어떻게든 포장에 포장을 거듭하지. 하지만 진짜 거장들에게서 느낀 건 말이야, 그런 포장지들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거야.”
덜레스는 한쪽 벽에 걸린 십여 개의 그림들을 가리켰다. 모두 한 때는 미술계 자체에서 꽤 이름을 날린 사람들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름을 날린 사람들의 그림치고 준의 눈에는 그것들이 대단하지 않아 보였다. 마치, 그 작품들은 그 유명한 사람들의 묘비들 같았다.
“어때 보이나? 저 작품들은.”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잘 봤네.”
이번엔 아예 위스키를 손등으로 닦아 입고 있던 가운에 문지르면서 덜레스는 말했다.
“이건 전부 작가들의 마지막 끝물 무렵들의 작품이야. 아주 망가져서 더 이상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는 자들의, 마지막 발악같은 작품들이지. 왕성했던 시절의 힘도 없고, 아이디어도 비천하고, 필치도 비실거리는. 그런데 내가 왜 이것들을 모으고 있는지 아는가?”
준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덜레스는 미소를 지었다. 덜레스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도 소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준을 보며 웃고 있었다. 황금같은 미소였다.
“잊지 않기 위해서야. 진짜배기에서 내려앉은 사람들의 상태를.”
덜레스는 그림들 앞에 서서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표정엔 일말의 감정도 나오지 않았다. 작품을 볼 때는 어떤 사람이든 집중하고 감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에게는 거기 걸린 어떤 작품도 그런 것을 주지 못하는 듯 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정말 괜찮은 새싹들을 몇 개 발굴해 냈었네. 하지만 하나같이 그걸 평생 이어가진 못했어. 왜 그랬을까 난 곰곰이 생각했었지. 그리고 내린 결론이 그거야. 자기 세계가 100이 있고, 그 100을 표현하고, 그리고도 모자란다는 듯 100 이상으로 더 나아가고. 그런 열망과 탐욕이 결국 더 생명이 긴 작가들을 만들어내는 거지. 이건 비단 미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야. 모든 예술영역에 해당되는 말이지. 그래서 더욱 너머에, 저 너머에 다다랐을 때의 기쁨을 느끼고 중독되려고 하는 그런, 마약 같은 것 말일세.”
“하지만......”
“미술품 거간꾼이 뭘 그런 걸 얘기하냐고?”
준은 흠칫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들킨 것 같아서. 준 역시 알고 있었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라고 말했던 것을 준은 동감하고 있었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사기였다. 멈춰진 부스러기 따위들에 사람들의 입방아가 더해져 가격이 정해지고 유행이 되고 유명한 작품이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시스템은 돈을 벌기 위해 말을 꾸며내고, 그 꾸며낸 말로 유행을 조작하고, 그렇게 사람들의 감상을 제멋대로 가지고 논다. 준은 그것이 맘에 들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나 역시 그런 추잡한 세상 속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겠네. 하지만 나 같은 범속들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처지이지. 때문에 내가 정말 부러워하는 것은 빌 게이츠나 자네 나라의 재벌 이건희 같은 사람들이 아니야. 부러워하는 대상은 바로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지.”
“전 아직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실력?” 덜레스가 되물었다.
“그게 자네의 문제점이야. 뭔가 완성되기 전까진 내놓으려 하지 않지. 난 그 심리들이 어떤 건지 이미 알고 있다네. 그 중 하나는 너무 완벽하려는 생각 때문에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자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벌써 아구창을 회복불가 수준으로 날려놨을거야.”
준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반감을 숨겼다. 하지만 덜레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 심리들에 대해서 더 말해줄까? 보통은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지. 이걸 내놓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상처받지 않을까. 나의 세계가 그렇게 무너지지 않을까.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았으면서 고작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은둔자나 마찬가지 신세로 전락하는 거지. 일단 한걸음만 걸으면 달라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넨 자네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단 말일세.”
“그럼......”
“자네는 자신의 세계가 이미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다는 뜻일세. 이 지미 덜레스가 보증해. 아니, 아니. 내 보증이 틀렸다고 해도, 자네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누구나 자기의 세상은 완벽하지 않아. 좌충우돌 하면서 나아가는 거지. 어쨌든,”
덜레스는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 황금 같은 미소를 준에게 두 번째로 보여주었다. 준은 그제서야, 마음 속 한 구석에 있던 반감을 풀었다. 미소를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적절히 보여줄 줄 안다는 것. 그런 사람은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준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움직이게. 그게 자네의 할 일이야.”
덜레스는 술잔을 내밀어 건배를 청했고, 준은 잔을 살짝 부딪혔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