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로타네브는 우리를 뉴 빌리지로 안내한다. 이곳은 왕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번화가중 하나다. 나머지 두 개의 번화가를 언급하자면, 하나는 왕묘가 있는 ‘이스트 민스터.’, 나머지 하나는 남쪽에 있는 ‘리버다운’이다.
천만에 육박하는 인구가 살아가는 도시의 번화가이니만큼, 이곳은 유동인구가 엄청나게 많다. 지금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휴일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는 우스개소리이지만 ‘인파에 다리가 동동 떠서 이동하는 기적’을 엿보게 되기도 한다.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진 않아서 사람의 행렬에 마줘서 걷는 형편이다. 로타네브는 우리에게 ‘1m이상 떨어지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는 인파를 뚫으며 앞장을 선다. 우리는 그의 등 뒤를 보며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른다.
드디어 그의 걸음은 ‘단델리온’이라는 식당에서 멈춘다. 그는 토라와 파티플래너에게 ‘여기에 먼저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대달라.’라고 부탁하고는 나에게 ‘잠깐 바람 좀 쐬시죠.’라고 말한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적은 편이었기에 친해지기도 할 겸 그렇겠다고 말한다.
토라와 파티플래너는 ‘이번에는 맨즈 토크야?’라고 장난스럽게 이야기 하고는 들어가 버린다. 세상에......... 이게 아까까지만 해도 변수 운운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한 사이란 말인가?
로타네브는 자신의 멋들어진 수염을 잠깐 꼬아보며 운을 뗀다.
“로키씨, 당신은 지금 당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딱히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 가슴팍엔 이게 달려있거든요.”
나는 그에게 가슴팍을 풀어 ‘비정한 마음’을 슬쩍 보여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이게 감정을 억제한다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완전한 효과가 있는건 아닙니다........... 가끔 울컥할 때가 있거든요.”
“하하, 재미있군요. 전 요즘 들어 매우 따분하답니다. 이런 말을 듣는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매사에 실패를 겪지 않으니까 모든게 너무 뻔한거에요. 자 봐요.”
그는 길거리 가판대에 가서 복권을 두 장 사와서는 내게 복권을 내민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자, 오른쪽과 왼쪽 중에 하나를 고르세요.”
“............네? 마치 이중에 당첨 된 것이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군요.”
“오해는 마시고요. 제가 얼마나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서 선택한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골라보세요.”
나는 오른쪽을 고른다. 내가 오른쪽을 고르니 자연스럽게 그의 선택은 왼쪽의 몫이 된 셈이다. 나와 그는 각자 복권을 긁어본다. 역시나 꽝이다. 나는 뻔하다 싶어 그를 본다. 그 역시 뻔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또 당첨이네요.”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삼촌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나서는 계속 이런 식이었죠. 뭐든지 성공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건 머지않아서 나의 것이 되었어요. 그 전에 저는 실패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요행을 바랬죠. 복권은 나의 오랜 취미 중 하나였습니다.”
“..............”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복권을 가판대 옆 거지의 동냥바가지에 넣어준다. 거지는 ‘웬 미친놈이지?’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아직, 그 종이쪼가리의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니, 실패에 벌벌 떨던 예전의 그 시절이 그리워지더군요. 그래서.......... 한번 터무니없어 보일 제안을 해보려고 합니다. 받아주실 수 있겠어요?”
“...........글쎄요. 어떤 이야기인지부터 듣고 판단해 보도록 하죠.”
나와 그의 시선은 거지에게로 향한다. 그가 종이 쪼가리를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의뢰를 마무리 지을 때, 제가 제공해 드릴 무기를 놓아두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지문은 남기지 않아도 좋아요. 그냥 그걸 놓아두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당신이 곤란에 처하게 될 텐데요?”
“물론 불법적으로 무기를 거래했다는 이유로 많은 고초를 겪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그렇게 하게 되었을 때 얻게 될 것에 비한다면 손에 잡히지도 않을 먼지 같이 사소한 일이 될겁니다.”
“그럼......... 질문을 달리 해보죠. 제가 그렇게 하게 되면 당신은 무엇을 얻게 되는 겁니까?”
“대륙 최고의 무기상. 나아가서는 로스차일드를 제치고 대륙 최고의 거물이 될테지요.”
Channel 2. 아이리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저는 낡아서 녹이 슨 수녀원의 철문을 나섭니다. 문 너머에는 이스트민스터를 아우르며 내려가는 긴긴 내리막길이 펼쳐집니다.
그동안은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하며 내려가느라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혼자서 이 길을 내려다보니 약간 긴장감이 든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이질감이 든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건 이 풍경이 조금은 낯설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골목길에 칠해진 낙서도, 그리고 게시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단지도 오늘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며 제게 다가오고 있답니다.
이것들 하나하나에는 사람들의 귀에는 닿지 못했을 각자의 사연들이 담겨있을 테지요. 저는 가던길을 멈추고, 게시판에 붙은 전단지 하나를 바라봅니다. 소스라니 바람이 불어 그것이 가볍게 팔랑거리네요. 그 팔랑거리는 소리 하나에 저는 귀를 기울여 봅니다. 비록, 가시적인 의미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무의미함 조차도 제게는 낯설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동안 동료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이 전단지가 제게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혼자가 되니, 전단지의 작은 목소리가 드디어 제 귀에 다다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단지의 피부에는 OO나이트 클럽 이라는 화려한 색감의 제목 아래, 유명한 연예인들의 사진이 각각의 포즈를 잡고서 하나의 구성을 이룹니다. 분명 다른 사진들에게서 짜깁기를 해왔을 터인데도 이렇게 보니 하나의 완벽한 짜임을 이루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약간은 속물적인 소재에서 생겨난 화제라 그닥 듣고싶지 않다면 귀를 막아도 좋아요. 도대체 이 전단지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전단지를 디자인 하는데 얼마나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걸까요?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전단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걸까요?
결국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을 곱씹으며, 저는 걸음을 계속해 나갑니다. 제 앞에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평소에 저는 오른쪽으로 갔었죠. 왼쪽에는 인파로 북적이는 ‘뉴 빌리지’를 거쳐야 하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르게 뉴 빌리지를 거쳐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알고있나요? 그는 갈림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의 결과 모든게 달라졌노라고 고백했었죠.
저와 그의 차이라면, 시의 화자는 나그네의 입장이라 다시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면, 저는 출근길을 나서는 입장이라 언제든지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겠죠. 그래서 저는 왼쪽길로 걸어갑니다.
왼쪽길로 약 300M를 걸어가니, 벌써부터 사람의 살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래요 여기가 바로, 뉴 빌리지입니다. 왕도에서 유동인구가 많다는 최대의 번화가라구요. 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제가 끼어들어갈 만한 곳을 찾아 흐름에 몸을 맡깁니다.
뉴 빌리지에는 금요일 저녁에 사람이 특히나 많다는데, 평일 오전인 지금도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습니다. 전단지를 보며 느꼈던 고즈넉함은 일지감치 마음속에서 사그라들어버리고, 소란스러움과 활기, 그리고 두근거림이 그 빈 자리를 대신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인걸까요? 저는 약간의 흥분 상태에 빠져서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에 빠져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갑니다.
그런 저를 퍼뜩 정신차리게 해 준 것은 길거리 한 복판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동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믿지 않는거야? 이건 진짜 내가 산 복권이 맞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든지 말든지 할거 아니야. 돈이 모였다 하면 술을 제 아가리 속에 쳐넣기에 바쁜 녀석이 복궈언? 에라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어디서 주웠는지, 훔쳤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그 복권 주인이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겠냐? 얼른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해?”
소란은 가판대의 주인과, 그에게 멱살을 잡힌 거지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저는 가만히 서서 그들의 실랑이를 지켜봅니다.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쇼. 세상에 거지는 복권 사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답디까? 당첨된 복권을 들고 왔으면 냉큼 바꿔나 줄 것이지, 왜 이렇게 생트집을 잡아?”
“오냐, 거참 말 한번 잘했다. 내가 가판대 하면서 너 새끼를 본 게 15년이다. 그동안 니가 복권 한 장이라도 산 역사가 있었나? 돈만 쥐어주면 술 쳐먹느라 분주한 녀석이 당첨된 복권을 띡하고 가져오면 누가 그 복권 주인이 너라고 생각하겠냐?”
소동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려는데 경찰이 그 소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옵니다. 가판대 주인과 거지는 경찰에게 쪼르르 달려가 서로의 행적을 일러다 바칩니다. 이럴 때 보면, 둘 다 애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어쨌든 경찰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더니, 거지에게 서까지 동행해 달라고 말을 합니다. 거지는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에이 씨팔! 어쩐지 오늘따라 운수가 좋더니만!”
channel 1. 로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게 반드시 숙지하라며 계획서를 건네 주고는 디데이가 오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홀로 응접실에 앉아서 그녀가 건네준 계획서를 찬찬이 읽어본다. 그것의 표지에는 ‘트로이의 목마’라는 제목이 깔끔한 글씨체로 쓰여있었다.
대강 계획서를 읽어보면서, 나는 로타네브가 내게 은밀하게 접근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의뢰는 내게 재량권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이 부여되어 있어서, 그의 장난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행동이 가진 이유를 알게 되면서 나는 문득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서 고찰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이 없고, 코뿔소와 같은 파워도 없으며, 그렇다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도망칠 날개도 없다. 내가 알기로는 인간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린다는 사람조차도, 개의 평균적인 달리기 속도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도 열등한 신체를 타고났기에 인간은 단독 생활 보다는 사회라는 이름의 군집 생활이라는 생활양식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생물의 종이 원숭이나 고릴라 같은 ‘영장류’의 사촌뻘이라고 생각하지마, 내가 볼 때 인간은 그들 보다는 개미에 더욱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나아가서 인간은 ‘원숭이의 탈을 쓴 개미’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개미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체로는 생존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약한 생명체다. 그래서 개미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군집을 이루면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길을 선택했다. 내가 방에 개미집을 들여놓은 것은 그것에서 비롯된다. 나는 인간을 버렸고, 감정까지 내 팽개쳤지만,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기에, 내 나름대로 그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미굴을 관찰하면서 나는 인간과 개미가 흡사한 생활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 사회에는 있지만 개미 사회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음모’였다.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저에게 부여된 사역을 모두 마친 뒤에야 비로소 제 방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오늘은 남들보다 일찍 사역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끌려가던 거지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제 귓속에서 끊임없이 웅웅거리고 있습니다. 비록 그 아저씨를 지나친지 한참이 지났지만 말이에요.
제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며 빠른 속도로 흘러갑니다. 미안함? 분노? 자괴감?.......... 모르겠습니다. 여러 개의 감정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요동을 치니 도저히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거든요.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감정들의 뒤섞임은 제게 더할 나위 없는 메스꺼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메스꺼움을 가라앉히고자, 저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눈을 감고, 숨을 고릅니다.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이라든지, 밝은 것이라든지, 아니면 성스러운 것이라든지............ 뭐든지요. 아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그런 아름다운 소재에 정신을 돌리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 같습니............
“!!!!”
순간적으로 거지아저씨의 두 눈 망울이 제 머릿속을 가득 메우면서, 저는 끓어오르는 욕지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뱃속에 담긴 모든 것을 토해냅니다. 이 토사물들을 담아낼 그릇을 찾을만한 여유조차도 없어서, 저는 그저 두 손을 그르서럼 오므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손은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담기엔 턱없이 작았고 저는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제 손에 담긴 토사물들이 넘쳐 흐르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일이 약 10여분 가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음식물 덩어리가, 그다음에는 노란색 액체가, 나중에는 눈물과 같이 투명한 액체가 제 손에 뚝뚝 떨어집니다.
마치 발작과 같은 10여분이 흐르고, 전 가끔씩 침을 뱉어가며 제 손에 고인 토사물 웅덩이를 바라봅니다. 발작은 멈췄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네요. 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흘리는지 알 도리가 없는 눈물을 계속해서 떨어뜨립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Channel 1. 로키
1623년 4월 1일
이스트 민스터는 활기가 넘친다.
이렇게 말을 하면, 리버 다운 그리고 뉴 빌리지의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나는 ‘활기’란 단어의 적용사례를 단순히 유동인구로서 판단하지 않는다. 유동인구를 활기의 척도로 설정한다면 워터 프론트까지 활기가 넘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이야기를 말 했듯이 난 혼잡스러웠던 워터프론트의 역전보다는 선요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시체를 처리하던 뒷골목에서 생기를 느꼈던 사람이다.
음.......... 막상 말을 하고 나니까, 내 취향이 고어틱 하지 않을까? 하고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으니 해명을 해둬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활기란 외적인 것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진정성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가라는 내적인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 함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교환하는 미소, 그리고 때로는 눈치싸움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스트 민스터, 그중에서도 이 도깨비 시장은 사람들의 활기로 마치 일렁이는 것 같다. 나는 일렁이는 활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런데........... 나같이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이렇게 생명으로 약동하는 이곳에는 웬일인지 궁금한 모양이군. 혹시 나란 사람조차도 알고 보면 뜨겁게 생을 사랑하며 이런 생의 약동 속에서 숨을 고르는 취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당신은 역시 나에 대해서 아주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감정을 버렸다는 것은, 고어함 죽음 숭배와 동일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난 결코 죽음을 숭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로 오해한 것처럼 시장통에서 생명의 약동 속에 푹 빠져드는 취미 또한 가지지 않았다. 난 지금 이곳에 일을 하러 온 것이다.
오늘 아침에 토라에게서 이곳에서 타깃과 접촉할 기회가 있는 생길 거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녀가 간과한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우선,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을 인식하려면 최소한 세 번은 봐야한다. 그녀는 늘 나에게 ‘오빠, 오빠같이 실력이 있는 사람이 확실하게 성공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이라는 걸 할 줄 알아야해.’라며 닥달을 했지만, 이런 내 약점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의뢰주와의 만남을 은연중에 꺼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째 약점은 난 남에게 살갑게 말함으로써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토라가 첫 번째 이유와 마찬가지의 래퍼토리로 고치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포기했다.
어쨋거나 이렇게 두 가지 핸디캡을 가진 내가 더욱 곤란에 처했으니, 이곳 이스트 민스터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로 북적거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애초에 접촉하기로 한 이와 마주치지도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억하자. 기억해............. 수녀복만 기억하자........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4월 1일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의 이스트민스터는 평소보다 더욱 더 활기가 넘칩니다. 오늘은 ‘한비아 북’에도 소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스트민스터 5일장이 서는 날이거든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이스트민스터이지만, 오늘만큼은 종교색을 버리고 인간 세계의 색채로 갈아입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편승을 해서 저도 오늘만큼은 수녀복을 벗고서 평상복 차림으로 시장에 나섭니다.
내일은 성 오바다의 축일입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 고아원에서도 거한 식사를 할 예정이에요. 어차피 할 일도 없는 마당이니, 오늘은 저도 일손을 더해야겠다는 생각에 장을 보는 것을 자원했답니다. 물론, 이스트민스터의 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평소에는 단정하게 정돈된 이스트민스터의 거리가 오늘 만큼은 상인들의 가판으로 어지럽혀집니다. 생선의 비릿한 냄새, 쑥의 톡톡한 향취가 어울려서 제 콧잔등을 간지럽힙니다. 이런 냄새를 맡으니 왠지 모르게 힘이 나면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아가씨, 이리로 와봐요. 오늘 프로하기온에서 싱싱한 과일이 잔뜩 들어왔다우.”
저를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저는 뒤를 돌아서 가판대를 살펴봅니다. 그곳에는 발그레한 노란빛을 띄고 있는 오렌지가 고개를 빠끔이 들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번 맛좀 볼라우? 오늘은 특히 오렌지가 꿀처럼 달달하다니까?”
저는 아주머니가 건넨 오렌지 조각을 받아들어 한입 베어물어봅니다. 채 씹기도 전에 달고 새콤한 과즙이 흘러나와 입안을 상큼하게 만들어 줍니다. 와! 정말로 맛있어요. 제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는지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흐릅니다.
“괜찮지? 오늘 아가씨가 운이 좋은 거야. 프로하기온에서도 이런 오렌지는 드물다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런 건 한 번에 우걱우걱 먹어버리기 보다는, 잘게 잘라서 샐러드를 해먹는 게 좋아. 맛있는 건 오래두고 아껴 먹어야 하거든.”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오렌지가 이렇게 달콤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거든요.”
“하하, 우리 영감이 싱싱한 놈이 떴다는 소문을 듣고서 첫 기차를 타고서 그대로 프로하기온으로 달려가가지고 이놈을 들여왔어. 경매장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러 상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경매장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우리 영감보다 달달한 놈을 고르진 못했을거야. 우리 영감이 그쪽 사람하고 연줄이 닿아있거든.”
“아아......... 우리 사모님은 인맥이 정말로 빵빵하신가 보네요?”
“이런것도 인맥이라면 인맥이라구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이런게 별건가? 우린 그냥 싱싱하고 좋은 녀석을 값싸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뿐이야. 그 녀석을 잘 활용하는건 산 사람의 몫인 거구.”
Channel 1. 로키
돈이 모이는 곳에는 그것을 노리고 온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재화나 용역을 가지고 등가의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는 교역의 장에서, 자신의 ‘상대적으로’ 적은 재화나 용역을 가지고 더 큰 재화와 용역을 노리는 자들을 불한당, 혹은 도둑놈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보는 경우도 그런 경우여서 이런 자들은 뭇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될 뿐 만 아니라, 법의 테두리가 허락한다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과일상 주변을 서성인다. 그의 눈길을 보니, 녀석이 노리는 건 끝물에 접어든 딸기나 창고에서 썩고 있던 땡처리 사과는 결코 아닐 것이다. 짐작컨대 과일 장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여자의 지갑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서성이며 자신의 지갑을 노리는 날파리가 있다는걸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으며 과일가게 주인이 네미는 오렌지 조각을 받아먹느라 바쁘다. 아마 저대로 가면 그녀는 자신의 지갑을 도둑맞게 되겠지. 그녀의 지갑에 들어있는 돈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지금 그녀에게 당면한 상황에 있어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라하면 ‘지키거나, 도둑맞거나.’ 일 것이다.
꼬마 소매치기는 여러 번 서성이며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마음을 굳혔는지 서서이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나는 수녀원 사람과 접근해야한다는 나의 입장을 잊어버린 채 소매치기의 심정에 동화되어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녀석은 운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는지 때마침 지나가던 행인에게 부딪쳐 그녀의 지갑을 낚아채기도 전에 나자빠져버린다. 에이그........ 쯧쯧, 어지간이 서투를 뿐 만 아니라 못먹고 살았는지 기운도 없었던 모양이다. 얼씨구? 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도 안 되는 저 여자가 승냥에게서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그녀는 엎어진 꼬맹이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본다. 꼬맹이는 그녀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럴 법 하지....... 자신이 해를 끼치려고 했던 상대에게 동정을 받는다면, 나라고 하더라도 꽤나 복잡한 심정일 것이다. 그정도는 나도 아는 사실이고.........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하건 말건 그녀는 흙투성이인 녀석의 바지를 툭툭 털어주면서 아이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장바구니에 들어있던 마를 하나 건네준다. 꼬마는 그새 눈물을 흘렸는지 코를 훌쩍이며 마 조각을 허겁지겁 씹어 먹는다.
꼬마아이를 달래고 보내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생각에 휩싸인다. 그녀는.......... 범죄자를 징벌하지 않았다. 아니, 남의 살갗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을 잡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범죄자임을 몰랐다. 아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동정이 필요없는 버러지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행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모든 사태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했을까? 아니, 이런 식의 유치한 생각은 접어두더라도 그녀의 이런 행위는 나에게 시사점을 남긴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닌, ‘오른뺨을 맞았을 때 왼뺨을 돌려 대는’이런 행위는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간관계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 같.........
“어라? 내 지갑! 내지갑!”
기는 개뿔.
Channel 2. 아이리스
과일상 아주머니가 네민 오렌지는, ‘정말 맛있다.’라는 진부한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던 맛이었습니다. 아까 아주머니가 자부심에 차서 영감님이 하신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는데요, 전 사실 그런 무용담이 결코 진부하게 느껴져서 한귀로 흘려듣거나 하지 않았답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분이에요. 정말로요.
그걸 한 입 받아먹고 오물오물 씹노라니, 시큼하면서 달달한 액체가 입한 한가득 퍼집니다. 기분도 좋아지죠.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누군가가 저를 몰래 지켜보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뭐......... 기분 탓이거나, 아니면 아직도 ‘가상의 청중’을 의식하는 그러니까......... 소위 중학생 병에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제 의식 수준이 성장하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그러려니.........하기에는 정말 뒤통수가 근질거립니다. 뭘까요? 이 찜찜하고 간지러운 기분은.........
“아얏!”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쿠당탕 하는 소리까지 등 뒤에 들려옵니다. 그쪽으로 돌아보니, 허름한 옷차림을 한 아이가 길바닥 위에 넘어져있었습니다. 아이의 볼에는 눈물로 뗏국물이 졌고, 입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습니다. 아이고 저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에요.
“괜찮니?”
제가 부축을 하려고 손을 네밀기도 전에, 아이는 화닥닥 일어나더니 그대로 뒤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한눈에 보아도 경계심이 느껴지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신 눈치를 보며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해져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포기하는 대신, 그 아이를 꼭 붙잡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는 이것 저것을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잠깐 잠깐, 이대로 가면 어떻게 하니? 바지가 온통 흙투성이잖아.”
아이는 몇 번 발버둥을 치지만, 제 손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걸 알았는지 반항을 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더욱 더 마음이 쓰이네요.
“아까 누나를 보고 있던게 너였어?”
“..........”
“에이그,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많이 배가 고팠나 보구나? 오렌지 좋아하니?”
“..........네.”
“그럼, 이 누나가 하나 사줄까?”
“아니요. 엄지는 오렌지 싫어해요. 엄지한테 그런거 가져다 줘봤자. 욕먹고 얻어맞을 뿐이에요.”
“..........”
‘아마도’라는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집니다. 이 거리의 아이는 구걸한 것을 엄지에게 바쳐야 하는 소위 ‘앵벌이’인 모양이에요. 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아이에게 오렌지 조각을 하나 건네줍니다.
“이건 엄지 말구 너 혼자만 먹으렴. 배가 고프다면 지금 먹어도 좋아. 사장님! 이건 제가 계산할 테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과도좀 빌려주시겠어요?”
사장님은 제가 거리의 아이에게 오렌지를 건네주는 것이 영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끌끌 찼지만 그래도 군소리 없이 과도를 건네주십니다. 제 손에 들린 과도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오렌지 껍질을 벗기는걸 보는 아이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해지고요. 이윽고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오렌지의 속살이 아이의 입에서 우물거리며 사라집니다.
“그럼, 엄지는 무얼 좋아하니?”
“음......... 마요. 저도 좋아하기도 하구........”
하하, 귀엽네요. 마침 아이들 간식하라고 사놓은 마뿌리가 한단 있어서, 저는 한 뿌리를 쓱 뽑아 아이에게 건네줍니다.
“이건 너 먹구, 엄지에게는 이걸 주렴.”
아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마 한웅큼을 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만약 갈곳이 없다면 이스트민스터 고아원으로 와도 좋단다. 엄지가 네게 해꼬지 못하게 도아줄 수도 있구...... 혼자오기가 미안하면 친구들을 데려와두 좋단다.”
제가 말하는걸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아이는 우걱우걱 씹어먹느라 정신이 없네요. 이윽고 아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윽 트림을 하고는, 제게 고개를 숙이며 갑니다. 저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요.
저는 왠지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끼면서, 아주머니에게 계산을 부탁합니다. 아주머니는 1개에 3파운드이지만, 좋은 심성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며 3개에 6파운드만 달라고 하십니다. 저는 돈을 드리기 위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냅니........
어라? 제 지갑이 어디간거죠?
Channel 1. 로키
아까 말했지만 난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내게 새로운 단점이 하나 더 생긴 모양이다. 나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께에 손을 얹고는 ‘누군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봐.’라고 말 하고서, 소매치기 녀석을 뒤 쫒는다.
다행이 그 녀석은 멀리 가진 못했다. 아마, 오늘 따라 유난스러울 정도로 붐비는 인파를 헤쳐 나가기엔 턱없이 약한 육체를 타고난 탓이리라. 나는 초식 동물의 뒤를 밟는 육식 동물처럼 기척을 감추고 그 녀석의 뒤를 밟는다. 여기에 또 다른 행운이 작용했으니, 순진한 건지 아니면 눈 앞의 인파 때문에 경계심을 잃어버린 것인지 소매치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간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의 미행은 빠르고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녀석의 발걸음은 이스트 민스터의 뒷골목에서 멈춘다. 축축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이곳에,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토굴이 녀석의 보금자리인 모양이다. 난 좀 더 일을 확실히 하고자 녀석이 그 거지소굴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둔다. 오 분 뒤에 그 곳을 덮칠 것이다.
내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덮칠 것을 녀석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동료들에게 자신의 전리품을 들어 올리며 다소 과장된 무용담을 늘어놓겠지. 그런 식으로 그가 비열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는 홀연이 그들을 찾아갈 것이고, 녀석들은 열에 여덟 아홉은 혼비백산 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Channel 2. 아이리스
사라진 지갑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던 저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제 어께에 손을 얹습니다. 그쪽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누군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봐.”
그 말만 남긴채, 그 남자는 휙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저는 벙찐 채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아무래도 저 사람이 아가씨의 지갑을 찾아줄 모양인가 본데요?”
제게 아무런 예고 없이 연달아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느라 과부하가 걸린 제 머릿속에, 아주머니의 말씀은 시원한 한모금의 물처럼 머릿속의 갈증을 깨끗이 닦아줍니다. 전 아주머니에게 ‘죄송하지만 저 사람을 좀 따라가면 안될까요? 잔금은 지갑을 돌려받고 나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한 뒤에 그의 뒤를 쫒아갑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의를 받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의 뒤를 밟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가 쫓는 사람이 힘겹게 인파를 헤치느라 느리게 가고있었다는 것이 첫 번 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그의 은발머리는 이곳에서 정말로 눈에 잘 띄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나를 헤치는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빨라서, 저는 아등바등 그와의 거리를 벌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답니다.
그와의 추격전은 이스트민스터의 뒷골목에서 끝이 났습니다. 은발머리의 사내는 골목에 잠시 멈춰서서 소매치기 소년이 허름한 토굴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토굴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립니다만.......... 분명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제 등 뒤에는 쫙하고 소름이 끼칩니다.
Channel 1. 로키
오분이 되었다. 단검은 꺼낼 필요도 없다. 나는 가볍게 손목과 발목을 풀고, 토굴의 입구로 다가간다.
“야 이 시팔새끼야, 어딜 그렇게 쏘다니나 했더니 고작 이런 마뿌리나 얻어와? 이거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이 개 씨팔새끼야!!!”
고함 소리와 함께 들려온 와장창 부숴지는 소리에 나는 걸음을 살짝 멈춘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토굴 안에서는 일종의 갈등 상황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내 짐작에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인지, 고함소리 뒤에는 뺨을 얻어맞는 것 같은 소리,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연달아서 내 귓속으로 열을 맞춰 들어온다.
..........정신 차리자. 내가 맡기로 한 것 외의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나는 장막을 걷고 토굴 안으로 들어간다. 토굴에는 얼굴에 길다란 상처가 난 사내가 우뚝 서서 땅바닥에 널부러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가재도구 위에 쓰러져서 쌕쌕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입가에는 피가 고여있었고, 왼쪽 뺨은 새빨개져 있었다.
이런 소년과는 대조적으로, 얼굴에 상흔이 난 사내는 거대해 보인다는 오해를 할 정도로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사내의 손에는 지갑이 들려있었다.
“그래, 내 이럴줄 알았다. 이 개새끼. 다 굶어죽어가는걸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삥땅을 쳐? 이래서 터럭이 검은 동물은 거두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그랬구만, 시팔 옛 어른들 말씀은 하나도 틀린게 없다니까.”
“........... 그건 네 것이 아니다.”
도저히 보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내뱉은 내 말에, 사내는 등 뒤를 돌아본다.
“넌 뭐야 새끼야?”
사내가 뭐라 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나는 소년에게 다가간다. 녀석은 제 뺨을 어루만지며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야, 너 잡으러 왔다. 지갑내놔.”
“.........”
음....... 아무래도, 녀석은 내 말에 대답을 할만한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최대한 소년이 무서워 할만한 표정으로 차갑게 이야기를 해봤지만, 녀석은 실눈을 간신히 뜨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뒤를 돌아 사내를 바라본다.
“넌 좋은 인간은 아닌 모양이군.”
“안 좋으면 어쩔건데? 시팔놈아. 니깟게 뭔데 남의 집에 멋대로 들이닥치는거야?”
“안 좋은 사람에게는......... 나도 안좋게 대해줘야지.”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은발머리가 토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짐을 느낍니다. 이거......... 혹시 신종 납치 수법이 아닐까요? 소매치기 꼬마를 미끼로 삼아 제게 호의를 베푸는 척 하고 자신의 아지트로 저를 끌어들이는거죠. 아지트로 끌려간 피해자는 그렇게......... 사창가로 팔려가거나, 새우잡이 배에서 평생을 노예처럼 보내는 겁니다.
아우........ 별안간 신문에서 ‘왠지 본 듯한’ 헤드라인이 제 머릿속에서 떠오릅니다. ‘20대 여성이 이스트 민스터 뒷골목에서 싸늘한 변사체로 발견, 올들어 세 번째........’
........ 정신 차립시다. 이런 기사는 본 적이 없어요. ‘왠지 본 듯한’것일 뿐이죠. 머릿속이 제멋대로 찍어대는 기사와, 그로인한 두려움에 져선 안된다고 제 자신을 다잡아 봅니다.
공포와 불안은 ‘두려움’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감정이지만, 공포는 명확한 ‘대상’이 있는 감정이라면,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에요. 일종에......... 스스로가 만든 함정에 빠져든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지금의 감정은 공포라기 보다는 불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니까, 한마디로 ‘한심한’ 생각이라는 거에요.
저는 마음을 다잡고 토굴로 다가갑니다만.......... 아, 잠깐만요. 5분만 있다가 들어갈까요? 아무리 허깨비에 놀아나선 안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보긴 했지만, 두려운건 어쩔수가 없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윽고, 5분이 지나고 전 제 두 뺨을 찰싹 때리고는 토굴을 향해 걸어들어갑니다. 이제 이 천막만 걷으면..........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돌려드리겠습니다. 돌려드릴 테니까 제발 그만좀!!”
“필요없어.”
공포에 젖어서 싹싹 비는 소리와, 그 목소리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오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가 대화를 나누는가 했는데, 와장창 하고 무언가가 박살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뒤이어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마지막으로 공포에 찬 울음소리가 뒤따릅니다. 뭔가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천막을 걷어 토굴속으로 뛰어들어가니,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은발머리의 사내가 한 말라빠진 노인장을 두들겨 패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멱살이 잡힌채로 공중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토굴 속 가재도구는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습니다. 토굴속 아이들은 완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고요.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생각에 저는 은발머리의 사내에게 다가갑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하단 표정을 짓습니다.
“어? 여긴 웬일이야? 내가 거기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잖..........”
“짝!”
저는 그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그에게 따귀를 날려버립니다.
“지금 그 손 놔요..........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