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09

갑과을 작성일 14.01.16 1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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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아홉시 취침시간을 알리는 점호가 지나고 한 시간이 흘렀다. 아까 식사시간에 혼자 생각한 바이지만, 아무리 봐도 열 한 시 반에 원장수녀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나는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뭉그적거리기만 할 뿐, 도저히 일찍 가서 ‘업무’를 처리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왜 그런 걸까........ ‘이제 좀 나가자.’ 싶으면, 뭔가 잊어버린 것이 생각나고, 그걸 처리하고 ‘이젠 진짜 좀 나가자.’싶으면 또 다른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이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나는 문 앞에서만 벌써 다섯 번 가까이 서성일 뿐, 도통 문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있다. 앞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목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 해보니 세상에........ 벌써 열시다. 막연하게 ‘열한 시 반에 가는건 사자 아가리에 머리통을 집어넣는 것이다.’라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이젠 정말 사자의 날카로운 어금니가 내 눈앞에 번뜩이는 것 같다. 가야한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한다. 내가 훈련생에 불과했을 때, 마스터는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상급으로 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가가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고, 중급으로 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더라도,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말려들게 함으로써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이며, 하급으로 치는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킬 뿐 만 아니라,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그의 손아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다.’ 나는 상급인가, 중급인가......... 아니면 하급인가. 나는 ATTP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었고, 다른 동료들이 우러러보는 ‘왕도’로 발령났었다. 상급은 되지 못할지언정, 하급은 될 수 없다. 그건, 내 자존심의 문제다. 그러니........ 상대의 손아귀에서 허우적거리기 보다는, 상대를 나의 무대로 초대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고르곤의 매듭처럼 도저히 물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생각의 실타래가, 알렉산더의 칼을 만난 것처럼 단칼에 잘려 내 눈앞에서 흩어지는 것 같다. 그래, ‘상대보다 반 발자국 느리게 살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보다 반 발자국 빠르게 움직여 상대의 의표를 찔러라.’ 그건 ‘우리’에게 내려오던 귀한 신조다. 가르침이든, 아니면 전통이든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 있다면, 그건 고루하다고 비난 할 것이 아니라, 무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선조의 가르침을 이어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나는 주머니의 손목시계를 꺼내 다시 한 번 시각을 확인하고 문을 연다. 지금 시각은 열 시 사십 오 분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저녁식사를 마치고, 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연필을 잡고 일기장을 펼쳐듭니다. ‘1623년 4월 1일’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섭니다. 일기장을 쓴지 꽤 되어서인지, 오늘자 일기를 위한 빈 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전에 써 놓은 세계의 부스러기들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제 눈길은 이전에 제가 만들어놓은 저만의 세계로 향했답니다. 어떤 날은 이 보다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즐거운 고민을 해야 했고, 다른 날은 이보다 더 나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어야 했던 저의 고뇌가 활자가 되고, 그것은 의미가 되어 제 머릿속으로 들어와 펼쳐집니다. 손은 바쁘게 페이지를 넘기는데, 제 머릿속은 마치 진공상태에 놓여진 초코파이처럼 눅진하고 끈적거리는 궤적을 남기며 팽창합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마치 보이지 않는 솜이, 제 콧구멍과 귓구멍을 틀어막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진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듭니다........ 외부의 자극과 격리되어 내가 보고 느낀 것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마치......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자각’하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내가 어떤 심정을 느끼는 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1623년 4월 1일을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게 될까요, 아니면 ‘이보다 더 나쁘지 않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안간힘을 쓰느라 진을 빼게 될까요. 사실........ 많은 일이 있었죠. 소매치기를 당했고, 도움을 받았고, 오해를 해서 도움을 준 은인에게 상처를 입혔고........ 화해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둔 이야기를 했으며, 원장수녀님과 이야기를 하는 그 사람을 발견했고........ ........모르겠습니다.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더 나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야 할지. 머릿속이, 그리고 마음속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이 세계를 함부로 손댔다가는 마치 어린아이가 말라붙은 나비표본을 건드려버린 것처럼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망가뜨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듭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거리낌 없이 세계를 수술하고 재 창조해왔던 나였는데. 이번만큼은........ 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결국, 저는 오른손에 잡힌 연필을 내려놓고, 그냥 일기장을 덮어버립니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서는,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런 날은 그냥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꿈에 모든 것을 맡길 수 밖에요.        Channel 1. 로키 내가 숙지한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원장수녀의 집무실은 내가 묵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생활관은 직선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건물의 양 끝과 중앙에 계단이 있다. 내방은 중앙 계단에 바로 붙어있는 쪽방이고, 그녀의 집무실은 건물의 끝에 있다. 치고 빠지기에는 적절한 곳에 입지해 있는 셈이다. 문을 나서니, 중앙현관에 서 있는 램프가 계단과 사물의 형태를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나도 약해서 빛을 등지고 세 걸음 정도만 나서면 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나는 이 어둠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바이지만, 나는 ‘히트맨’으로서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단점이란 다름 아닌 지독한 야맹증이다. 그래서 지금 내 눈앞에 치마폭을 드리우고 있는 어둠속으로 걸어가는 건, 내가 의뢰를 하면서 가급적 피하고 싶은 행위다. 하지만, 나는 히트맨이다. 조건을 선택하는 것은 의뢰를 수임하기 전에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일단 의뢰를 받고나면 어떠한 조건이 주어지더라도 감수하고, 성공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일단 히트맨으로서 내 소임을 되새기며 기세 좋게 나서긴 했지만, 역시나 야맹증이 내 발목을 잡는 걸 막을 수 없게 마련이라서, 결국 나는 몇 걸음을 떼지 못하고 이내 더듬더듬 손잡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은 이 상황을 원망하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초봄의 날씨가 제법 더운 탓인지 내 등뒤에는 땀줄기가 정신없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때 아닌 더위와 사투를 하며 한참을 갔을까, 복도의 끝자락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아주 조그만 빛줄기가 새어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래, 저곳이 아마 원장수녀의 집무실일 것이다. 나는 정말로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그 빛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드디어, 나는 오랜 시간의 사투 끝에 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말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을 터인데, 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은 내 눈을 따갑게 만들며 흘러내린다.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친 뒤에 더듬거리며 손잡이를 찾아 문을 연다. 나무걸쇠가 아구가 맞지 않았는지,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누군가 듣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이미 점호시간을 훌쩍 넘긴 뒤라 밤 귀가 제법 밝지 않은 이상 이 소리를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에는 역시나........ 원장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서류를 점검하다가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어, 문가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아, 벌써 약속시간이 되었구나. 의외로 어른말씀도 잘 듣는 착한 아이인걸? 난 솔직히 네가 좀 더 빨리 올 줄 알았거든.” .........빌어먹을        Channel 2. 아이리스 일기장을 덮고 나서 전 몸을 내던지듯이 침대위로 뛰어듭니다. 침대의 매트가 좋은 것이었다면, 아마 저는 침대에서 튕겨져 나가 꼴사납게 방바닥에 쳐 박혔겠지만, 다행이 소박한 방의 소박한 침대인지라, 저는 튕겨져나가는 대신 돌바닥애 내팽개쳐진 개구리마냥 침대의 매트위로 털푸덕하고 쳐 박힙니다. 튕겨져 나감으로써 입을 수 있는 2차 사고는 예방할 수 있었지만......... 코끝이고 가슴팍이고 배고 허벅지고....... 잔뜩 얻어맞은 것 마냥 너무 아픕니다. 마치, 전속력으로 벽을 향해 달려가다가 미처 제동을 못하고 벽에 부딪혔을 때, 이런 통증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어쨌거나, 곤장을 맞은 것 같은 통증과, 비록 혼자일지언정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부끄러움에 저는 소리를 죽여 가며 온몸을 비틀어댔습니다. 그렇게 몇 분을 괴로움에 몸부림 친 끝에, 허물을 벗듯 통증이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저는 등을 돌아 천장을 바라봅니다. 거뭇거뭇하게 곰팡이가 슨 서까래가 눈앞에 우직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 서까래를 보노라니........머릿속이 그것에 아로새겨진 곰팡이의 궤적처럼 복잡해집니다. 오늘따라 왜 이런 걸까요? 정체를 모르겠지만 매우 불쾌하고 눅진한 생각이 제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제 몸을 괴롭히기까지 해봤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이 정체모를 마음은 빚 문서 마냥 내 머릿속에 자리를 깔고 들어앉아 버립니다. 아아......... 발버둥을 쳐도 되지 않는다면, 끌어안을 수밖에요. 이젠 솔직히 인정을 해야겠습니다. 아마도 저는 처음부터 이 모든 번뇌의 원인을 알고 있었던 거겠죠. 저는....... 원장수녀님을 원망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 그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준 마리아 수녀님도 원망하고 있었어요. 분명 그를 처음 발견한 건 저였고, 마음속에 기이 감추어둔 이야기를 꺼낸 것 역시 저였어요. 저는 제가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줬는데, 그는.........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무어라고 그에게 그런 권리를 행사하는가 말입니다. 원장수녀님과 마리아 수녀님은 결단코 그럴 권리가 없어요. 저만이, 오로지 나만이.........       Channel 1. 로키 그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 시계를 꺼내보니 정말로 시계의 바늘은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가 찼다. 아무리 야맹증이라고 하더라도, 근 한 시간을 저 복도에서 헤맸다고? 그냥 난간을 붙잡고 앞으로 걷기만 하면 되는 길을? 뭔가 지독한 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든다. 정신 차리자. 지금 내가 할 질문은 ‘왜 이토록 시간을 잡아먹었는가?’가 아니다.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국 타깃에게 오는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타깃을 제거하고 문서를 탈취하는 것,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추격대를 따돌리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이면 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신경 쓰기에 앞서, 나는 나를 가지고 노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내려와 나의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호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낸다. “당신은 나에게 모든걸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던데........ 그럼 내가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겠군.” ........적지 않은 의뢰를 수행하면서 배운 노하우 비슷한 것이 있다면, 바로 ‘아무리 대범한 척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에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순간, 평정심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호주머니에 있는 단검을 여봐란 듯이 꺼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단검의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음에도....... 그녀는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의 징후를 보여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에 망정이지, 내가 만약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상황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놀랐나 보구나.”“놀란다는 감정은 알지 못한다.”“흠....... 모른다라. 하기사 ‘놀란다’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면, 그걸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도 지금 이 정도 간단한 사실은 알고 있을 거야. 이 모든 일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말이지.”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을......... 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무응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득의연한 웃음을 소리 없이 짓는다. “그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놀람’이라고 한단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페이스에 놀아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목을 움켜쥔다. 사실, 이 행위는 그녀의 야코를 죽이는 것도 있었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다는 것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물고기의 부레를 밟을 때와 흡사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는 여전히 ‘원망’이나 ‘두려움’이라고 정의내릴 만한 징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간신히 입을 달싹거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네가 찾는 책은........ 내 첫 번째 서랍에........ 놔두었단다......... 날 죽이면........ 이곳의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도록 빨리........챙겨서 가도록 하거라.”     

Channel 2. 아이리스 눈을 뜨니......... 기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붉은 하늘, 그리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황량한 벌판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붉은 하늘이 뜬 걸 보니, 벌써 아침이 된 것일까요? 아니, 도대체 그 은발머리 남자가 무어라고 그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지새워 버린 걸까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 저는 은발머리 남자에 대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장소는 제 방의 침대였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자신을 인지한 바로 이 장소는 제 침실도 아니고, 수녀원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장소입니다. 심지어 붉은 하늘도 아침의 여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죠. 태양이 지평선 대신에 하늘 중앙에 떠 있는걸요. 뭘......까요? 왜 이런 곳에 저 혼자 던져진 걸까요? 뭔가........ 아주 고약한 장난에 놀아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난이라면 언젠가는 장난을 친 사람이 나타날 것이 분명하기에, 저는 제 자리에 털퍼덕하고 주저앉아버립니다. 경험상, 이런 류의 장난에 당했을 때는 그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게 가장 효과적이더군요. 그것이 바로 제 모습을 훔쳐보는 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저에게 장난을 친 그 사람을 기다리며 저는 갖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에서부터, ‘그가 정체를 드러내면 어떻게 응수를 할까? 화를 낼까? 화를 낸다면 어떻게 화를 낼까?’로, 나아가서는 ‘용서를 해볼까? 용서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말로 해야 그가 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에 이르기까지 정말 잡생각이라면 잡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다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이 바닥을 드러낼 때 까지, 저에게 장난을 친 사람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혼자 남겨졌다.’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저는 이가 시리는 추위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한참을 외로움에 떤 끝에, 결국 저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으니, 제가 직접 찾아나서는 수밖에요. 저는 마음이 정하는 곳을 방향으로 삼아 걸어가 보았습니다. 붉은 하늘 아래 펼쳐진 황량한 벌판은 제게 얼마나 왔는지에 대한 시간감각과 거리감각을 앗아버렸고, 결국 저는 처음에 제가 있던 곳도 놓쳐버린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중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처지에 놓은 사람이 아닐까요? 저는 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끼며, 그 사람에게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Channel 1. 로키 나는 그녀의 유언을 접수한 뒤에, 단검을 들어 그녀의 배를 찌른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나를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변태’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분명 이 단검으로 나는 그녀의 다양한 부위를 찌르거나 벨 수 있었다. 어떤 부위는 그녀에게 빠르고 안락한 죽음을 가져다 줄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부위는 그녀에게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찌른 부위는 후자의 부위였다.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야 할텐데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냐고? 나는 그녀가 죽어가면서 공포나 고통에 시달리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내 머릿속에서 말뚝을 박아버린 이 불편한 생각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같은 ‘히트맨’에게는 의뢰를 마친 뒤에 ‘미련’이라든지, ‘뒤끝’이라든지하는 것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의뢰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검버섯 같은 것이다. 일단 사람을 죽이기로 했으면 철저히 나의 페이스를 유지해야한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내가 만들어온 노하우중 하나다. 하지만 원망스럽게도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나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의 배에 칼이 들어왔을 때 그 불편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을 뿐, 그 흔한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신음소리가 나올라 치면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나는걸 선택할 정도니까......... 그녀의 얼굴에 고통이나, 두려움의 기색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쯤 되면, 이번 타깃은 정말로 지독한 녀석이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본 입장으로서, 이번 경우는 처음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죽음을 초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시간은 금이기에, 나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서랍장을 뒤져 문서를 찾아냈다. 그것은 귀퉁이가 조금 헤진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는 책이었다. 이 책을 보자니 ‘분노’라는 감정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작 이런 평범한 책을 하나 찾자고 이런 불편함을 감수한 걸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책을 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발로 짓이겨버리고 싶다. 그것이 ‘분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어쨌거나 문서를 찾아 그것을 호주머니에 우겨넣은 이상, 이곳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어느 누구도 마주치지 않도록 서둘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왜인지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머릿속의 수다쟁이는 ‘얼른 이 바닥을 뜨지 않고 뭐해?’라고 나를 다그치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따르는 대신,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는 것을 선택했다. 문득......... 궁금증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이 생각을 ‘궁금증’이라는 단어로 단정 짓는 건, 지나치게 급하거나 짧은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난 마당이라 긴장감이 풀린 것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나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든, 지독하다는 말로밖에 형용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상대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걸....... 사람은 ‘경외심’이라고 이름붙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직감했는지 눈을 감는다. 아마 그 동작은 지난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되돌아보는 것일거라고, 내 마음대로 추측해보았다. 단 한 번도 해본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보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뭐라고 평가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걸 보니, 이번 의뢰는 정말 기묘하다라고 자평을 하며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Channel 2. 아이리스 저 이외의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그녀에게로 내달리던 제 발걸음은 그녀에게로 다가갈수록 차차 느려지고, 마침내는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그녀의 자그마한 어께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이따금씩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슬프게 만든 걸까요? 저는 직업적인 의무감으로 그녀를 달래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그녀의 어께에 손을 얹습니다. 제 손바닥으로 어께의 떨림과.......... 그녀가 느끼고 있을 슬픔의 짙은 농도가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있을 때 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 한낱 유기물 따위가........” 그 여자는 알칼지게 소리치며 제 손을 뿌리쳐 버리는 바람에 저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뿌리쳐버린 제 손이 얼얼해졌어요. 마치....... 냉기로 활활 타오르는 얼음조각에 손을 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내 일을 그렇게 실컷 방해해놓고 나선 이제 와서 날 위로하려는거야?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보지?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려....... 안그럼 내 모든 권능을 다해 네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릴거야. 소멸하기 직전이어도 아직 그정도 힘정돈 남아있으니까.” 전 그녀가 내뱉는 밑도 끝도 없는 독설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져버립니다. 제가 왜 이런 독설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이 중학교 2학년 학생도 차마 남에게 내뱉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법한 낯 뜨거워지는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진짜, 그녀가 심각하게 소리치지 않았다면, 아마 전 ‘뭐래?’라고 말하며 그녀의 뒤통수를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유기물 덩어리’라던지,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던지....... 이게 무슨 손가락이 오그라들어버릴 것 같은 소리냔 말입니다.       Channel 1. 로키 등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여인네가 자신의 입을 가리고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가만히 보자........ 구면인데 누구였더라? 아, 그렇다! 저녁식사자리에서 내게 이것저것을 묻던 수녀였다. 이런........ 딱하게도 이 여자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로는 봐서도, 관여해서도 안될 상황에 발을 담가버렸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무고한 생명을 해쳐서는 안된다.’가 우리의 직업윤리라지만........ 지금이 바로 그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어찌하기도 전에 그녀를 쓰러뜨리고는 그 목에 칼을 들이댄다. 그녀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그녀의 두 눈은 날 바라보는 대신에, 내 머리 너머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아마,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용한 모양이다. 하지만, 방어기제는 자신의 심리를 안정시켜주는 역할만을 할 뿐, 그녀에게 닥친 구체적인 일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이 중요한 순간을 현실도피로 무의미하게 보내는 대신에, 자신의 생을 좀 더 진지하게 곱씹으라는 배려로서,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난 원장수녀를 죽이러 왔고, 운 나쁘게도 당신이 그걸 목격했으니, 당신 역시 죽게 될거다.’라고 최대한 자신의 처지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준다. 이런 내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동하게 했는지, 그녀는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날 바라본다. 그녀의 동공은 잔뜩 확장되어있다. “잠깐만 아들아! 그녀는 죄가 없어!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니....... 이번 한번만........ 한번만 봐 주면 안되겠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은 타깃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간 지켜온 초연함을 버리고 잘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손을 허위허위 내젓는다. 참........ 알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의 죽음에는 그렇게 초연한 그녀가, 타인의 죽음에는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인다니........ 종교란게 참 무서운 것인가보다. 타인에게 친절하라는 신념체계가 이렇게 유기물의 기본적인 욕구를 앞서나가버리니 말이다. 여하튼......... 그런 타깃의 모습을 보노라니, 감정을 버린 나라고 하더라도 잔인한 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결코 굴복시킬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정신을 이렇게 보기 좋게 굴복시켜버렸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난 그녀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이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책상위에 내동댕이를 치고는 재빠르게 그녀의 뒷 목에 칼을 들이댄다. 당사자도, 그리고 타깃의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저승길 길동무가 생겼으니, 그리 심심하진 않을 거야.”       Channel 2. 아이리스 제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폭언을 쏟아내고 씩씩거리는 그녀를 보노라니, 저도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합니다. 이런 황량한 곳에 홀로 버려진 채로 떠돌다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인데, 이런 불쾌한 신고식이라뇨. 전 그저 대화를 나눔으로써 위로를 받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공유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 공간의 또 다른 세입자는 위로를 받기보다는, 제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감정의 교류를 끊어버리고, 이어서 상황을 타개할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보여주어 버렸습니다. 저도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원장수녀님의 가르침이 떠올랐거든요. ‘누군가가 네게 화를 내거나 적대적인 기색을 내보인다면, 그녀의 겉모습을 보고 비난을 하기 보다는, 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일까?라고 골똘이 생각해 보도록 하거라. 그런 이는 십중팔구 너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네가 쏟아내는 비난은 그를 더욱 더 겁먹게 할 것이고, 대화의 문은 점점 좁아질 거란다. 너는 그를 바라보는 눈으로 네 자신을 바라보거라. 분명 네 어딘가에 그를 겁먹게 하는 구석이 있을 테니까 말이야.’ 사실, 그녀의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지만, 제가 배운 바에 의하면 학술적으로도 분명 일리가 있는 말씀이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의 연약한 자아가 상처받지 않게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것은 때론 ‘과잉 친절’이라든지, ‘합리화’라든지 아니면 ‘비난과 독설’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답니다. 이것을 넘어서야만, 마음을 터놓은 대화가 시작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었죠. 대개의 경우는 정신분석학자인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튼, 요지는 저는 저에 대한 그녀의 경계심을 풀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놓기 보다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옆에 걸터앉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의 옆에 앉는 것이 불편했는지, 멀찍이 떨어져 앉았지만, 한참동안 같은 곳 그러니까, 황량한 붉은 벌판을 응시하다보니, 서로 말은 없어도 그녀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답니다. “미안하구나.”“아니에요.” 마침내 입을 연 그녀는, 붉은 벌판에서 눈을 돌려 저를 바라봅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줄 수 있겠니?”“말씀 해 보세요.”“왜 날 방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거니?”“..........네?” 어느 정도 감정의 장벽을 넘어서서 그녀와 대화를 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전 무슨 소린가 싶어서 그녀를 바라봅니다. 그녀는 제 눈을 찬찬이 살펴보다가........ 체념이 섞인 미소를 짓습니다. “생각 보다 이른 시간 축에서 온 모양이구나........... 이게 마지막 기회였는데.”    

 Channel 1. 로키 난 그 여자의 목에 칼을 꽂았다. 이름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어느것 하나 그녀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봐서는 안될 장면을 목격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내 칼이 혈관을 찔러버렸는지, 상처 사이로 피가 간헐적으로 솟구친다. 그것도 정맥이 아닌 동맥을 찔렀는지, 그 피분수가 천장까지 솟구치는 바람에 내 얼굴이고 머리카락이고 할 것 없이 피가 쫙하고 튀어버렸다. 깔끔한 모습으로 퇴근하기는 글러버린 모양이다. 의뢰복에 구비되어있는 손수건을 이용해 내 몸을 대충 소제하고 나니, 타깃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망울과, 앙다물려진 입술에는 ‘원망’에 가까운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일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 그런데.........”“왜 죽였냐고? 바로 그 ‘아무 상관 없음.’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여자는 자신이 봐서는 안될 장면을 목격했고, 이를 비밀로 간직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엄수할 의무가 없는 사안을 목격했다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나아.” 이렇게 대답은 침착하게 청산유수처럼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날 원망스럽게 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내가 이제껏 겪어왔던 부조화와 불합리성이 이제야 정돈되고, 나는 다시금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로 복귀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소 ‘이례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불만에 가득차서 내뱉듯이 툭하고 중얼거린다. “기분이 좋은가보구나....... 날 짓밟아서 말이야.”“부정은 하지 않도록 하지. 사실, 지금 ‘날아갈 것 같다’라고 정의내릴 만한 감정 상태를 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나와 처음 만난순간을 기억해? 난 그때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었거든. 내가........ 뭔가 당신의 페이스에 말린다는 그런 느낌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여자의 희생덕에, 부조화는 사라지고 세계는 다시 질서를 되찾았어.” 이제껏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 말을 함과 동시에 내 흉부가 바르르 떨리더니, 호흡이 불규칙하게 흘러나온다. 내 얼굴의 근육은 기괴한 모양으로 일그러지고, 입에서는 마대자루에 바람이 빠지는 것과 유사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이제껏 해시시가 제공해주었던 그 어떤 쾌감보다도 더한 황홀경이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 전율에 몸이 바르르 떨리지만, 해시시가 그랬던 것처럼 내 온몸이 축하고 늘어지진 않는다. 뭘까....... 왜 나는 이런 비합리적인 행위를 하는 것일까? 의문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쳐들지만 내 육체가 정상적인 페이스로 돌아오는 데는 수 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 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내 몸은 이따금씩 움찔거리는 것만 제외하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것 ‘그녀의 목숨’, ‘문서’, 그리고 ‘그녀의 정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모두 챙겼으니 더 이상 이곳에는 볼일이 없다. 나는 죽어가는 타깃을 버려두고 문을 나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가볍다.       Channel 2. 아이리스 경계심을 푼 그녀와 나름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보지만, 여전히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야기만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시간 축......?’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진 단어인 걸까요? 뭔가 시간과 관련된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만,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의미를 온전히 해독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핵심단어인 것 같은 ‘시간 축’을 제외한 다른 단어를 가지고 그녀의 말을 해석해보니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긴 했지만 그 사람이 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좀 더 의미를 보충해 자세히 말해보자면, ‘그녀는 저를 기다리긴 했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제가 온 것은 아닌 셈.’이에요. ......... 아이고, ‘정확히 말하자면’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설명을 하는 제 머릿속도 엉켜버린 실타래마냥 복잡해져버렸습니다. ‘시간 축’이라는 단어가 뭔가 힌트가 되어줄 것 같은데....... 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제 손을 그러잡습니다. 아마, 더 이상 제 자신을 괴롭히는걸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제 손을 잡는 그녀의 손은....... 뭐랄까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애정이 담겨져 있어서, 저로 하여금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거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답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저는 거짓말처럼 고분고분하게 제 머리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헝클어진 제 머리칼을 당신의 손으로 정성스레 빗어줍니다. “네 기준으로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나면, 너와 나는 지금처럼 다시 만나게 될거란다. 그 때가 오면, 난 너에게 오늘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할 거야. 내가 무엇을 네게 물었었는지 기억하고 있니?”“네........ 왜 당신을 방해하느냐고 물었었어요.”“시간 축은 좀 다르게 왔었지만, 그래도 제법 총명한 아이가 와서 다행이로구나. 하하........” 그녀는 제가 기특했는지 방긋 웃으며 머리칼을 좀 더 정돈해 줍니다. 저는 비록 뒤를 돌아볼 순 없었지만, 방금의 그 대답으로, 그녀의 손길에 애정이 더욱 실려진 걸 느낄 수 있었답니다. “너희의 선조가, 네 총기의 절반이라도 따라왔었다면......... 너희가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오지는 않았을 텐데.”“선조요?”“그럼, 너희의 선조........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꽤, 심하다 싶을정도로 동안이거든. 그러니까 나이는 묻지말고.”“왜요?”“까먹었거든.”“하하........” 그녀는 익살스럽게 저를 웃기고는 좀 더 말을 이어갑니다. “그동안 너희 선조들은 맹목적으로 ‘선현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왔었어. 내가 그들에게 나를 방해한 까닭을 물었을 때는, 그들은 대개 ‘예전에도 그래왔었으니까.’라는 요지의 대답만 해왔었단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 아니니? 적어도 날 영접한 너만큼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뭐....... 제일 좋기로는 내 뜻에 동조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 가려면 이제까지 보내온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고.”“나의......뜻이요?”“그래, 나의 뜻. 뭐....... 네가 내 뜻에 동조하는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기왕 내 뜻에 반하겠다면, 다른 사람들이 강요한 것에서 의한 것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 치열하게 사유한 그 결과로서 나에 대해 반항해 주었으면 좋겠어.”“음....... 왜 그래야 하는 거죠?” 그녀는 제 질문에 놀랍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방긋하고 웃습니다. “그래, 질문은 지혜를 낳는 모태야. 특히 ‘왜’라는 질문은 지혜의 가장 튼튼한 산실이라고도 알려져 있지. 아이고...... 너무 잡설이 길었구나. 미안 미안, 이렇게 누군가와 적대감이 없이 대화를 나눈건 너무 오랜만이라 내가 좀 신이 났던 것 같구나. 쨌든, 바로 그 네가 말한 ‘왜’라는 질문은 지혜를 낳고, 그것은 느리지만 네 겨례의 의식수준을 고양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란다. 개인적으론, 너의 사유가 나를 자유케 할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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