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11

갑과을 작성일 14.01.23 1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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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8월 17일
그 기묘했던 의뢰가 끝난지도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것이 참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 그 당시에는 ‘내 직업 인생’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시급해 보였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보니 ‘벌써’라는 말이 쓰일 정도로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왜 그 당시에는 이런 별것 아닌 일에 덜덜 떨며 지냈던 것일까? 참 알 도리가 없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쿨하게 나오기 까지 꽤나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노력이라는 표현을 해서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을 드려서 죄송하다고 미리 사과의 말을 하겠다. 히트맨이라는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란 그냥 ‘더 열심히 의뢰를 하는 것’일 뿐이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내게 들어오는 의뢰를 그다지 가리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을 해왔지만, 막상 들어온 모든 의뢰를 하려고 들다보니, 정말 하루가 24시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텐션을 바짝 끌어올렸을 때는 하루에 세 탕을 튀기도 했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점심을 먹기 전에, 저녁을 먹기 전에 나는 세 번을 화장실에 틀어박혀 내 몸에 밴 냄새를 빼야했다. 마지막 의뢰가 끝나고 만난 찰리의 표정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 볼만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지. 그는 내 손에 율무차가 든 종이컵을 거칠게 쥐어주곤 이렇게 내뱉었다.
“율무차 좀 그만 축내 미친놈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내 행동에 대해서 반추해 본다면, 이 모든 행동들은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IATP의 연수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대면하면 자아를 지키기 위해 심리적인 모션을 취한다고 한다. 때로는 애먼 남 탓을 하는 것으로, 때로는 잊어버리는 것으로, 때로는 자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으로 말이다. 모습과 양태는 다양하지만,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다. 나의 경우는........ 회피일 테지.
당시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나는 어쨋거나 이 행위 자체를 두고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섰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칼을 내려놓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택덕분에 나는 일정의 보상을 받기도 했었다. 커리어는 쌓여갔고, 신문에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한 것 같은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문을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은발 귀신’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마음’이라는게 없으니, 좋다 싫다를 판단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기사가 난 뒤에 놀릴 거리를 찾아낸 토라와 펜릴 녀석이 시도 때도없이. ‘어이 은발 귀신씨~’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주문하신 새로운 별명이 나왔습니다. 마음에 드시나 모르겠군요.’라고 놀려댔다. 그리고 항상 놀림의 끝에는 ‘어때? 새로운 별명이 마음에 들어?’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도저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아아, 이제 기억이 났다. 내가 이 새로운 별명을 보상이라 여긴 까닭은, 이 호칭에 담긴 사람들의 인식변화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나를 그저 ‘닥치는 대로’사람을 죽이는 인간백정으로 여겼다. 하지만, 의뢰가 계속될수록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내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사연이 밝혀졌고, 그들은 이제, 나를 박멸해야할 악인을 묵묵히 청소하는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생긴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일이 생겼다면 바로 토라 녀석 때문이다. 예전에는 종종 들러서 내게 ‘야망’이 어쩌고 저쩌고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녀석이, 이젠 아예 이곳에 들어앉아버렸다. 내가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자, 간간이 해오던 현장 업무는 완전히 접어버리고, 오로지 나를 서포트할 수 있는 업무로으로 보직이전을 신청했다고 한다. 녀석이 들어앉은 뒤부터는 내 귓가에 ‘크로스’이니, ‘지부장’이니, 그리고 ‘마스터가 어쩌니’하는 등의 말이 쉴 사이 없이 들려온다. 전부터 느껴오던 바이지만, 녀석은 확실히 야망이 큰 녀석이다.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녀석이 자신의 역량보다 더 큰 꿈을 꾸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녀석에게 유의미한 의미를 가진 언어로서 들릴지는 미지수다.
하기사, 이런 때 아닌 유명세로 가장 곤혹을 치르는 건 나라기보다는 아마 찰리일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말로 하지 않지만, 이렇게 유명세를 타다보니, 자신의 크루를 모집하기가 점점 힘들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떳떳하게 구인광고를 낼 수 있는 직장은 아니니 그럴 법도 하다. 여담이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잔뜩 텐션이 올라서 하루에 세 탕씩 뛰던 때에 있던 일이었는데, 마지막 의뢰를 마치고나서 또 다시 찰리와 대면을 할 때의 일이 있었다. 찰리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요원이 나라는 걸 알자마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내 손에 율무차가 든 종이컵을 거칠게 쥐어주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 이 시팔 새끼야! 율무차 니 혼자 다 처먹을래?.”“뭐. 누가 달라고 했었냐?”“그럼 마 거절을 하던가. 여지껏 넙죽넙죽 얻어먹던 놈이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미네? 니미 이래서 터럭이 검은 짐승은.......”
금번의 일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찰리가 제법 입이 걸쭉하다는 것이었다. 일전에 나는 그가 대단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고, 한편으론 더욱 대단한 비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한 적이 있었다. 이제 한 가지를 더 추가해서, 찰리는 더더욱 대단한 입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말이 길어졌는데, 내가 하고 싶은 요지는 간단하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8월 17일
4월이다 싶었는데 벌써 8월입니다. 사람들은 얇게나마 걸치고 있던 긴팔옷을 벗어버리고 짧은 팔의 의복으로 갈아입었지요.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색채 대신에 강렬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의 색채가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올해는 특히나 천문 아문에서 예고한 바처럼 무덥습니다. 10년만에 무더위라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들리는 말에는 도로에 깔린 포장재가 녹아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의 무더위를 보면 아주 과장된 소리만은 아니라고 생각도 듭니다. 저희 수녀원 식구들도 겨울에서 봄까지 입었던 검은색 수녀복을 벗어버리고, 마로된 회색 하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어지간하면 옷을 갈아입지 않는 검소함을 중시하는 우리 수녀원도, 10년만의 무더위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연이 변하면 사람도 생활의 양식을 바꿉니다. 그 점에선 우리 수녀원도 마찬가지였죠.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변하듯이 모든 건 변하게 마련입니다만, 시야를 넓히면 그 변화라는 것도 일정한 틀 속에 있는 것이라, 어찌보면 새로울 것이라고 할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아까 언급했던 계절의 변화를 생각해 보자구요.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은 움직이지만, 이렇게 계절이 변화하는 것자체는  ‘아버님’이 세계를 만든 이래로 계속해서 반복해 왔을 것입니다. 결국, ‘변화하는 것은 결국 불변한다.’라는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슨 생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아두었냐구요? 전 또 다른 불변의 명제를 이야기 해보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시간이 모든 것을 무디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원장수녀님의 빈 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워졌습니다. 그 후임으로는 에스더 수녀님이 오셨어요. 원장수녀님과 같은 해에 입교한 입교 동기일 뿐 만 아니라, 원장 수녀님과 묘한 인연이 있어 그동안 그림자처럼 원장수녀님을 도와 오셨던 분이랍니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인수인계작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에스더 수녀님은 매끄럽게 원장수녀님의 업무를 맡을 수 있었답니다. 에스더 수녀님이 원장수녀님의 자리로 임관하신날, 환영식 자리에는 비가 내렸었어요. 건조한 봄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폭우는 안그래도 무거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었답니다. 그때, 에스더 수녀님이..........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멋있었던게, 비를 가리던 천막에서 내려와서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들과 같은 곳에 서서 우리와 눈을 마주쳤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연설 원고는 이미 비에 젖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어요. 그녀는 과감하게 원고를 던져버리고 우리를 향해 쥐어짜듯이 소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아주 소중한 두 식구를 잃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지금 제가 느끼는 바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울어도 좋습니다. 저도 울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이 자리에서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운다면, 두 분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기뻐할까요? 언젠가 우리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다시금 우리는 재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할 겁니까? 우리의 남은 생애를 당신들을 추모하면서 보냈다고 말할거에요? 아뇨! 전 단언컨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들을 그리워했지만, 우리에겐 삶이 남아있었다고. 그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거에요. 그 편이 두 수녀님들께서 더 기뻐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내키지 않겠지만, 웃어봅시다. 슬퍼하고 몸부림 치는건, 아마 두 수녀님을 앗아간 이가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럴 때 일수록, 웃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내일이니까요!”
에스더 수녀님의 진심이 우리를 움직였던 걸까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내 얼굴에 흐르는 것이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편이 우리에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빗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배를 움켜쥐고 원없이 웃어버린 것 같습니다.
다소, 전위적이다고 할 수 있을 신임 원장수녀님의 임관식을 마치고, 우리는 거짓말처럼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신임 원장수녀님의 배려도 다소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그분은 사역의 시스템을 바꾸어서, 기존에 운영되던 로테이션 시스템에서, 고정적인 시스템으로 변화를 꾀하셨어요. ‘이젠 모든걸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잘하는 분야를 만들어서,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셨어요. 모두에게 새로운 사역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는 지난 슬픔을 잊기 위해, 다소 생소하다 싶을 분야를 골랐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주방 쪽 조리 사역으로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비록 제 전공은 교육 쪽이지만, 그동안 혼자 살면서 그럭저럭 요리거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이 자리에 적응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주방쪽 역시, 그동안 터줏대감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한 수녀님을 제외하고는 각자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수녀님들이 지원해 오셨답니다. 그동안 같은 수녀원에 있다 뿐이지 사실상 남이나 다를바 없었던 수녀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죠.
처음에는 터줏대감 수녀님 (이름으로 말씀드려야 할텐데, 워낙 그런 이미지가 강하셔서요........)께서 군기를 잡느라 눈물 쏙 빠지게 혼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정이 많으신 분이라 적응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어요. 그리고 다른 수녀님들 역시 다른 곳에서 오셨기에 처음의 혹독한 시절이 지난 뒤에는 다들 마음의 여유가 생겨, 각자 자신있게 준비하던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하다 보니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여름이 왔습니다. 이제야 원장수녀님과 마리아 수녀님을 생각할 정도로 정말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람을 잊는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에스더 수녀님이 말한 것처럼, 마냥 슬퍼하는 것 만이 두 분에 대한 추모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다소 두서없이 흘러가서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방황을 하게 될 것 같아 사과를 드립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간단해요. 시간은 흘렀고,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답니다.






Channel 1. 로키
1623년 9월 11일
오늘 아침부터 하늘에 구름이 끼어 하루종일 햇살이 보이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밤이 다가오자 이제는 숫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옷이 눅눅해지고, 몸도 무거워진다. 하늘에는 만월이 떠야 하는데, 만월조차 자취를 감추고, 이 저녁에 내가 기댈 것은 가로등 뿐이다.
“조건이 그닥 좋지 않은 날인 것 같아 형.”
스벤이 테라스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손으로 받아내면서 나를 바라본다. 녀석의 얼굴에는 걱정을 표현하는 근육의 궤적이 나타난다. 아무래도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된 만큼, 녀석도 내가 지독한 야맹증에 시달리고 있다는걸 잘 알고있기 때문이리라.
“상관없어. 내가 일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패자들이.........”“핑곗거리를 만들어내는 동안, 승자들은 방법을 찾아낸다고?”
녀석의 얼굴에는 이제, ‘내가 그런 말 할 줄 알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좋아. 그럼 형 방법은 찾아낸거지?”“방법은 이미 파티플래너가 찾아냈잖아.”“진짜 그 여자 말 대로 할참이야?”“그래야지. 그게 내가 아는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니까.”“모르겠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또라이고, 보이는 대로 말하면 미친년인데. 왜 다들 그 여자를 맹신하는거지?”“그건........ 너도 겪어보면 알아.”
스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마저 수트로 갈아입는다. 나는 수트의 재질을 확인하기 위해 테라스 너머로 손을 뻗는다. 빗방울이 옷감에 떨어지는데, 그 속으로 스며드는 대신에, 방울이 지거나, 아니면 그대로 튕겨져 나간다. 방수 처리가 된 코팅제품....... 아무래도 파티 플래너는 오늘 비가 내리리란 것 또한, 계산한 모양이다.
나는 스벤과 함께 내 방을 나선다. 1층으로 내려가니, 토라와 펜릴도 수트로 갈아입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벌써 왔냐?’라고 물었고, 그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부장님께서 오십니다.”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비서관이 먼저 들어와 지부장의 방문을 예고했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서 지부장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짧은 순간이지만, 스벤은 나를 ‘결의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일체의 표정을 지어보이고 싶지만.......... 아무래도 감정이 없는 나로서는 쉽지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그의 격려에 대해 보답을 하였다.
지부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시가를 입에 물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우리는 그를 향해 목례를 하였고, 그도 가볍게 시가를 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고한대로, 오늘은 승진심사를 위한 의뢰를 하도록 하겠다. 심사방식과 의뢰할 내용에 대해서 알려주도록 하고, 바로 제비를 뽑도록 하지. 심사방식은, 3인의 심사관에 의해서 심사를 하게 된다. 심사관은 나, 찰리, 그리고 의뢰주다. 나는 너희들의 의뢰 수행방식을 1인칭 관점에서 촬영하는 영상을 보고 채점을 할 것이다. 찰리는 너희들이 처리한 타깃의 상태를 보고 채점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뢰주는 의뢰가 마친 뒤에 수령하게 될 만족도 조사 설문에 응하는 것으로 채점에 참여할 것이다.”“질문 있습니다. 3인의 심사관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각자 팀을 이루어 의뢰를 수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의뢰주는 단 한명인 것입니까?”“그렇다.”“그래요? 한 명이 두 개의 의뢰를 맡겼다는 이야기인데, 그 두 가지 의뢰 중에서 의뢰주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의뢰가 있다면, 승진심사에 공정성이 의심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토라가 곰곰이 듣는가 싶더니 꽤나 예리한 질문을 해냈다. 토라는 동조를 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 요원들은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동조를 해냈다.
“좋은......... 질문 고맙다.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좋은 의뢰를 고르는 운’또한 실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측정 곤란요소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도 나름 보정점수를 부과하기로 했으니, 만족도 조사에서 불리한 의뢰를 맡게 되더라도, 나머지 두 명의 심사관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내면 분명 높은 성적을 받게 될 것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9월 11일
오늘 아침부터 하늘에 구름이 끼어 하루 종일 햇살이 보이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밤이 다가오자 이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빗방울이 제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시면서, 조그마한 도랑을 이루어 제 얼굴로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푸핫!”
그 조그마한 도랑들이 제 콧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저는 꼴사납게 재채기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코 끝에 고춧가루가 잔뜩 뿌려진 것처럼, 제 코가 사정없이 아려옵니다.
“정신을 똑바로 집중하거라 아이리스. 네가 이런 자그마한 자극에 시달리는 동안, 네 눈앞에서 하나의 생명이 덧없이 사그라들 수도 있단다.”
가을 서리 같은 수사님의 말씀에, 제 어께가 저절로 움츠러듭니다. 정신을 아무래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수사님의 말씀대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하나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립니다. 다름아닌, 원장수녀님이 생시에 제 다리에 낫던 상처를 치유해주신 장면이었어요.
괜찮다고,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거듭 당신을 만류하던 저를 뿌리치고, 원장수녀님은 제 다리를 어루만지셨죠. 그 때 그 당시에 원장 수녀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때 당신의 마음에 다다를 수 있다면, 아니, 그 마음의 십분지 일이라도 알 수만 있다면.........
한참 정신을 집중하는데, 눈거풀 사이로 초록색의 빛줄기가 파고들어와 제 눈을 간질입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뭔가 해냈구나 싶어서 눈을 번쩍 떠봅니다. 제 두 손에는 다름이 아니라 초록색 인광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제 눈앞에 벌어진 이 놀라운 장면에 탄성을 지르려는데, 거짓말처럼 손 안의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 들어 버립니다.
저는 고개를 들어 수사님을 바라봅니다.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수사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네?”
제가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퍽 답답하셨는지, 수사님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가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십니다.
“왜 네 손아귀에 있던 성화가 꺼진거라고 생각하지?”“음..........그게.”“일순간, 네 마음속에 교만이라는 것이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란다. 어떠냐, 내 말이 틀린 것 같으냐?”“.........”
그 꽉찬 돌직구를 도저히 받아칠 수가 없어서, 저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에 등장한 수많은 사도들은 우리에게 ‘교만이 들어간 권능은 악마의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경고를 해왔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굳이 사도들을 동원할 것 까진 아니더라도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짓된 권능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단다. 너는 그들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그들과 같은 길을 걸을 생각이냐?”“..........”“..........걸을 것이냐고 물었다.”“아니요.”
수사님은, 기가 잔뜩 죽어버린 제가 딱해보였는지, 눈썹에 들어간 힘을 푸십니다.
“넌 테펠린의 아이야. 기왕 그녀가 걷던 길을 걷는다면, 그녀가 너를 기쁘게 여겨야 하지 않겠니?”“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쉬자꾸나. 비도 추적추적 내리니 감기 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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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짊어지고, 한참을 걸은 끝에, 스벤과 나는 노스 에비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스 에비뉴에서 3시 방향으로 1603걸음.”
나는 지령장에 적힌 내용을 되새기며 내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세어가며 걸어 나간다. 1545 걸음쯤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 걸음 수를 잊어버리고 당황하던 차에, 스벤이 저기 먼발치에 있는 가로등을 가리킨다. 가로등 아래에는 검은 형체가 빛을 받으며 서 있다. 저긴가 싶어서, 가로등 근처로 다가가니, 그 형체가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긴다. 도로시다.
“여어, 오랜만?”
워터 프론트에 있어야 할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이 신기하여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씩하고 웃으며 내게 그 못난 얼굴을 들이민다.
“왜애? 오랜만에 보니, 심장이 적잖이 벌렁벌렁한가봐?”“음........ 그 정돈 아니지만, 놀라운 건 사실이군.”“재미있는 일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지 뭐. 자 받아.”
그녀는 우리에게 금속조각이 붙어있는 가죽 판을 건넨다.
“이걸 패용하고 있다가, 수상관저로 가서 경비원들에게 보여주면 돼. 그럼 대문까지는 프리패스야.”“......... 매수했나보군.”“에헤이! 매수라니! 아웃소싱이라는 좋은 말 놔두고. 그런 기분 나쁜 말을 써야겠어?”“......... 똥이나 설사나.”
스벤이 무심코 흘린 말을 들어버렸는지, 도로시는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본다. 스벤은 도저히 그녀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는지, ‘말이 그렇다는거지 뭐.........’라며 우물우물 거리면서 시선을 피해버린다. 애초에 이길 자신이 없으면 싸움을 걸지나 말던가........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도로시는 ‘별 것도 아닌 놈이’라며 툴툴거리면서 우리에게 가죽판을 내던지듯이 넘겼다.
“로키, 내가 당신을 많이 생각해서 이런 말 해주는거니까 잘 들어.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하는거야. 꽃과 함께 하는 사람은 그 향기를 품지만, 거름더미 옆에 있으면 거름냄새가 몸에 배기밖에 더하겠어?”
그녀도 딱히 향기가 날만한 위인은 못되지만, 그 말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긍정적 제스쳐가 마음에 들었는지, 도로시는 선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그럼,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자구!”
그녀는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고, 스벤은 그 뒷모습을 보며 침을 뱉는다.
“왜 저런 병신 같은 년을 두둔 하는거야? 형.”“뭐...... 네게서 거름냄새가 난다는건 아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고.”“참나........ 대~단한 성인군자 나셨구만.”
우리는 증표를 가지고 수상 관저로 향한다.






Channel 2. 아이리스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보니, 수사님이 회랑에 앉아계셨습니다. 그의 옆에는 술잔이 놓여있었습니다.
“어 왔니?”
수사님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합니다. 아까만 하더라도 가을 서리마냥 엄격하시던 분이었는데, 지금 와서는 그 모습은 마치 손아귀에 담긴 한 줌의 물이 말라버린 것처럼 그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네, 수사님도 씻으셨어요?”“씻기는........ 이곳의 비는 제법 깨끗한걸. 그냥 몸만 슥슥 닦아내면 그만이란다.”
수사님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기울입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허허, 요즘 애들은 당차구먼. 그래, 한잔 줄 테니 받아 보거라.”
수사님은 술잔을 건네주십니다. 술잔에는 우유같이 하얀 액체가 꼴꼴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오릅니다. 제가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수사님은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막상 받아보니, 훈련은 어떤거 같냐?”“힘들지 않다는 거짓말은 도저히 못할 것 같네요........ 그나저나, 이 술 이름이 뭐에요? 정말 맛있는데요?”“탁한 술이란다. 쌀과 누룩을 섞고 딱 한번 증류를 해낸 것이지.”“..........쌀로 술을 빚는다고요?”“하하, 놀랐나 보구나. 하기사, 우리도 처음에는 화들짝 놀랐지. 그 귀한 걸로 술을 빚는다니..........”
수사님은 제 손에서 잔을 뺏고는 스스로 술잔을 채우십니다.
“그나저나, 너만 먹을 셈이냐? 내 입도 입이다. 요즘 것들은 영판........”
수사님은 장난스럽게 씩 웃고는 술을 털어 넣습니다.
“이럴 때면, 수사노릇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손에는 하루의 피로를 달래줄 술이 있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운치를 더해주지. 이보다 더한 낭만을 즐기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거야. 특히 네 나이 또래엔 말이다.”“하하.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이렇게 산중에 들어오니, 제가 어떻게 그 공기나쁜 곳에서 복닥거리며 살았나 싶어요.”“그런데 말이다 아이리스.”
수사님은 다시 한 번 입을 꾹 다문 표정으로 돌아오시고 저를 바라보십니다.
“아무리, 에스더의 제안이었다지만 이 산중에 선뜻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이냐?”
저는 수사님을 바라다봅니다. 황소의 눈망울 마냥 검고 큰 수사님의 눈동자에는 머리를 땋은 여자의 모습이 비쳐 보입니다. 그렇게 제 자신을 마주하노라니, 도저히 웃으면서 얼버무릴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건 교만도 아니고, 악감정에 의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호기심이 들더라고요. 원장 수녀님은 과연 그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라면 그분이........”“걸었던. 길을 밟아보아야겠다?”“.........그런 셈이죠.”“큼큼.......”
수사님은 술기운이 오르셨는지 연신 코를 찡그리십니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당신의 목에선 굵게 가래가 끓어오르는 소리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한 사람의 생을 추적하는 길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단다. 예를 들자면, 그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의 증언을 듣는다거나, 아니면.........”“물론........ 그 모든 방법들을 생각해보지 않은건 아니에요. 다만....... 이것 저것을 저울질 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모든건 결국....... 한 사람의 생에 대한 타인의 ‘재해석’에 불과하지 않을까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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