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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로시로부터 건네받은 패용증을 들고 수상 관저에 도착한다. 비구름에 달이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가로등의 등불이 희미하게나마 관저의 모습을 비춘다.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곧게 뻗어나가 하늘로 치솟은 직선의 모습에, 우리는 잠깐 말을 잃는다. 사람의 신장은 2m를 넘지 않는데, 이 작은 유기물이 만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스케일을 한참 벗어나게 거대하다. 그리고 더욱 대단한 것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로 210 세로 100 높이 60mm의 자그마한 입방체라는 것이다. 티끌을 모아 거대한 산을 이룬다는 오랜 옛말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산물을 올려다보는 우리가 의심스러웠는지, 그곳을 지키고있던 경비병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우리는 대답대신에 그에게 패용증을 네민다. 그는 그것을 한참동안 살펴본 뒤에, 우리에게 거수경례를 한다. 이러고보니 감회가 새롭다. 단지 가죽패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수비대로부터 경례를 받다니, 우리가 그들과 맺어온 지난날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장면이 분명하다.
“수상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가 내문까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따라 외문을 통과해 관저 안으로 들어간다. 쇠로된 외문을 통과하니 정원이 나온다. 정원에는 역대 수상들의 모습을 조각해놓은 환조상이 줄을 맞춰 늘어 서 있고, 그 사이로 조경수와 연못이 나름대로의 계산에 입각해 배치되어있었다. 그 속사정을 모르니, 배치에 내재된 계산속을 완전히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얼핏 보기에는 관저의 겉모습만큼이나 직선의 정결한 느낌이 느껴진다.
우리는 정원을 지나 내문으로 들어섰고, 경비병은 내문 앞에서 우리를 놓아두고 자신의 근무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목조로 이루어진 거대한 내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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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은 내일 좀 더 열심히 하자며 먼저 들어가셨지만, 저는 잠자리에 들어가는 대신에 숙소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어가 봤자, 두발을 쭉 펴고 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비구름이 부슬비를 뿌리고, 달은 구름사이에 가려 빛을 잃었습니다. 저는 한참동안 저녁비를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연기마냥 흩어져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생각이, 저녁비를 지켜보는 중에 서서히 뭉치고 얼개를 맺어 하나의 실체처럼 명확해졌습니다. 뭐....... 솔직히 말해 그렇게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고요, 그냥....... 뭐랄까. 일종의 감상이라고 해야하는게 맞겠네요. 전 ‘원장수녀님이 젊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이곳에는 비가 내리던 날이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원장수녀님은 이곳에서 ‘구마 사역’을 사사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기도력을 통한 치료가 금지되어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지금보다 좀더 자유롭고, 그리고 충분히 몰두할 수 있는 환경에서 구마 사역을 사사받았을 것입니다. 배경이 어쨌건 간에, 그녀는 이곳에서 구마사역을 사사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 하나의 팩트에서 상상을 좀더 가미해,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에도 오늘밤과 같이 비가내리는 밤이 한번쯤은 있지 않았을까요? 구름이 달을 가린 이 어두운 밤에 쉼없이 쏟아지는 부슬비를 바라보면서, 그때의 원장수녀님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취하셨을까요?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팩트를 가지고 나름의 생각을 하는 것을 ‘재해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것은 팩트를 넘어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니, 잠시나마 명확한 실체처럼 느껴졌던 생각이 다시금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사고를 도구로 하는 정신노동은 집중을 지속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에서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를 수도원으로 보내면서 새로운 원장수녀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너는 훌륭한 교사가 될 수도 있고,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도 있으며, 훌륭한 성직자나, 멋진 배우가 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가능성에 불과할 뿐이란다.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면......... 우선 해봐야 한단다. 교사가 되려면 가르쳐야하고, 소설가가 되려면 일단 글을 써봐야 하며, 배우가 되려면 연기를 해보아야 하는 법이지.’
.........그래요. 일단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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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문이 열리고, 이 집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그는 우리를 응접실로 데리고 간 뒤에, 비서관을 불러오겠노라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우리는 그가 자리를 뜬 사이에, 파티플래너가 작성한 ‘킬링 리스트’를 꺼낸다.
“일단 메인 타깃은........ 수상이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스벤은 긴장이 되는지 마른침을 삼킨다. 스벤은 기본기가 뛰어나고, 눈치가 빠르며,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점에서 유능한 요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녀석의 실력에 비해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긴장을 곧잘 타곤 하는게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경험의 부족은 경험으로 메꾸는 것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녀석은 아주 훌륭한 요원으로 거듭날 것이다. 내가 보증한다.
어쨌거나, 이번 심사의 성공여부는, 관리인이 시간을 비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토라가 했지만, 이제까지의 승진 심사를 분석해보니, 크로스로서 가장 요구되는 능력은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플랜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토라의 분석결과를 듣고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평가란 말인가.
피지컬이나 멘탈이라던지, 하는 것들은 요원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이 두 가지만 있어도 훌륭한 요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크로스라면......... 그보다 적어도 한 단계 더 격조 높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상황에 대한 통찰로 보았고, 그것은 정확했다. 수많은 나라가 이 대륙에서 나고 졌지만, ‘우리’는 변함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역사적인 사고로까지 내 의식의 폭이 넓어졌다는게 놀랍다. 확실히 토라는 나를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반대로 나 역시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파티플래너가 제공한 또 다른 자료인, ‘수상 관저 내부 지도’를 살펴본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응접실은 1층, 중앙 계단에서 그리 멀지 않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8층에 수상 집무실이 있다. 중앙계단에서 오른쪽으로 쭉 들어가면 맨 끝방이다. 각 층에는 경비가 둘 정도 배치가 되어있고, 특별히 집무실이 있는 8층에는 3명의 경비가 더 있다고 나와있다. 아무래도, 이 건물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들이겠지. 이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 같다.
“집무실이 너무 높은데 있는 것 같은데..........”
스벤의 걱정이 이해도 된다. 타깃의 위치는 탈출로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유유히 걸어서 탈출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해결이 불가능한 의뢰는 없다. 승자는 방법을 찾는다면, 패자는 핑곗거리를 찾게 마련이다. 분명 해결책은 존재한다.
“스벤, 한 장 더 줘봐.”
“어떤걸 말하는거야?”
“내부 설계도 말이야. 배관이라던지 수도관 같은 것의 배치도가 있을거다.”
스벤은 봉투를 뒤져 내가 요구한 지도를 건네준다. 파티 플래너가 제법 센스가 있었는지, 이 지도는 미농지로 되어있다. 나는 내부 설계도를 수상관저 지도와 겹쳐본다. 그래, 이렇게 하고나니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제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겠다. 그래, 이렇게 라면 무리 없이 의뢰를 성공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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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마음만 앞섰을 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한 것은 딱히 없었기에 저는 수도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수사님들이 경작하는 작물들이 자라는 밭을 거닐기도 하고, 이곳의 흙으로 돌아가신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는 묘지를 둘러보기도 하다가........ 이제 제 발걸음은 어느 폐허에 다다릅니다.
지금의 수도원 건물은 수도원이 처음 지어지던 그 당시에 지어진건 아니라고 해요. 천년 가까이 되는 오랜 옛날에 그러니까........ 첫 번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어둠의 별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숭배소를 지었다고 해요. 중립의 시대가 끝나고 대륙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이 숭배소는 그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사도들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면서, 예전의 숭배소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거닐다보니, 하얀색 돌무더기 사이로 이름 모를 풀들이 돋아나, 왜인지 모르게 특별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뭐랄까........ 이런 말을 한다고 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치 ‘풀밭위에 숨을 거둔 거인의 유해 근처를 거닐고 있는’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때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거인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 흔적이 오간데가 없고, 백골만 훵덩하니 남은거죠. 저는 그 위를 거닐며 감상에 젖는 역사학도인 셈이고요.
참 우습죠? 물론 이 건축물이 실제로 거인의 백골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메타포라고 생각해요. 꽤나 퇴락했지만, 이 돌무더기의 크기 하나하나와 함께, 돌무더기가 놓여진 배치를 보노라면, 지금의 수도원만한,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크기의 건축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자그마한 인간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그리듯이 하나의 거대한 피조물을 만든 셈입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피조물을 이루는 것은 순백의 돌 판입니다. 천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 매끄러움은 그 당시의 기술력, 생활양식을 고려하건대, 감히 인간의 솜씨라기보다는 신의 손을 빌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저는 피조물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쯤에 뒤를 돌아 ‘거인의 백골’을 돌아다봅니다. 다 무너진 건물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실례될 수도 있겠지만, 이 건물은........ 폐허가 되었기에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이곳의 돌무더기 하나하나에서 저는 한때 이곳에 몸을 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영화로웠을 한때, 영광의 수훈, 역사의 현장에 함께함의 자부심, 그리고 뼈에 사무쳐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치욕스러운 퇴락........ 그 기억들을 올바르게 재해석 해낼지는 의문이지만, 천년의 세월을 지나 그 감회를 나누고자 하는 이의 마음을 조금씩 적시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는 제 손길은 시나브로 외계에서 내부로 옮겨져, 다시 한 번 기억속의 한 장면으로 향합니다. 저는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원장수녀님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작지만 꼬질꼬질하게 때가 앉고 상처로 짓물러버린 한 소녀의 발에 얹어집니다.
이제는 굳이 눈을 뜨지 않더라도 알 것 같습니다. 제 손에서 피어오르는 초록색 인광이 감겨진 제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마치 저의 두 손에 초록색 빛을 발하는 태양이 일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드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는 아드님이 오셨을 때 함께하지 않은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드님을 보았다 하니, 디두모는 ‘내가 그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 하니라. 여드레가 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디두모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힐 때 아드님이 오사, 인사하고, 디두모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네밀어 보라.’라 하더라. 디두모는 그의 얼굴을 만지며 ‘당신은 나의 주인이다.’ 하니, 아드님이 말씀하길 ‘너는 나를 본 후에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너보다 더 복될 것이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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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벤과 탈출 루트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 하고나서, 장비를 정비하는데, 관리인이 비서관을 데리고 왔다. 그녀는 꽤나 섹시해보이는 여자였다. 스벤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가........ 비서관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피해버린다. 덕분에 ‘감정이란 것은 의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금언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우리는 아까 외문에서 경비병에게 했던 그대로 그녀에게 패용증을 건넨다. 그것을 살펴보는 그녀는 아주 잠깐 입술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관리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관리인은 허리숙여 인사를 하고는 응접실을 나선다.
“하하,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그녀는 사교적인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손을 네민다. 스벤은 얼씨구나하고 그녀의 손을 움쥔다.
“그런데....... 조금 의외네요? 저는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은 좀 더 뭐랄까....... 우락부락하게 생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그녀는 우리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가 싱긋 웃는다.
“내 타입 들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딱 좋다. 완전 좋아.”
“.......”
나는 그녀의 말에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꽤나 불편하다. 감정이 없기에, 이렇게 감정이 녹아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수상의 위치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집무실을 지키는 3명의 가드를 비롯해 여타 안전장치에 대해 일러주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당신들이 원하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어요.”
“.........”
“괜찮습니다.”
스벤은 나를 뜨악하게 쳐다본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라는 표정이다. 나는 스벤과 이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내 주장을 관철시켜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을 느꼈다.
“굳이 눈에 띄는 짓을 벌이는 건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사관들의 시선이 비서관님에게 향할 수도 있으니까요.”
스벤은 어느정도 수긍을 한 듯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호의가 보기좋게 거절당한 것이 퍽 불쾌했는지, 자신의 눈을 치켜뜨고 나를 응시한다. 나는 딱히 눈을 피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본다. 내가 알기론, 그녀의 역할은 우리를 타깃으로 배달시키는 것 까지다. 자신의 역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월권이다. 월권의 결과가 성공으로 돌아가더라도 공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굳이 처음보는 사람에게 그런 고부담을 지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한참동안 나의 눈을 응시하다가...... 눈을 피하더니 한숨을 쉰다.
“좋아요. 닭모가지를 자르는데는 닭잡는 칼을 써야죠. 전문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닭잡는 칼’이라는 표현이 거슬렸는지, 스벤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한다.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를 도발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지만, 그녀의 노력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스벤에게는 그녀의 전략이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을지는 몰라도, 감정이 없는 내게는 그냥 언어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녀의 의도를 읽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의 눈을 보면서 무엇을 읽어냈기에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포기했던 것일까?
“그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수상님이 계신 곳으로 당신들을 데리고 갈게요.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떠한 도움도 제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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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음속의 확신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심스럽게 눈을 떠 봅니다. 제 손에는 여전히 초록색의 빛을 발하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이 불을 어떻게 꺼야 하는 걸까요?
성령의 불은 밝히기가 어렵지만, 동시에 껄 사그라들게 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뭔가 불경한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불을 끄듯이 입으로 호호 불어보아야 하는 걸까요? 저는 손안의 불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피곤함을 느끼고 ‘불길이 그냥 사그라들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불길이 조금 사그라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조금 흔들어보니, 와! 제 손안의 불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 두 손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위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저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짜릿함에 몸을 부르르 떱니다. 솔직히...... 처음입니다. 제가 무언가를 원했고,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보란 듯이 성공했습니다.
“축하한다. 아이리스.”
뒤를 돌아보니, 수사님이 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얼굴도 밝게 상기되어있었습니다.
“기분이 어때?”
“글쎄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마음속에 무언가가 가득차서 흘러넘치는 것 같아요. 양 손이 저릿저릿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 힘껏 뛰어오르면 하늘에 머리가 닿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어떤 기분인지는 잘 알겠구나. 생각보다 디테일한걸? 하지만, 네가 이것 하나는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구나. 지금 네 손을 살펴 보거라.”
수사님의 말을 따라서, 저는 제 손을 바라봅니다. 제 손에 무엇이 있다는 걸까요? 손등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손바닥에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손바닥을 뒤집어보니, 그곳에는.......
“아.......”
“그래, 이제 발견했느냐?”
“어........ 제 손이 왜 이런거죠?”
“이건 성흔이라고 하는 것이란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게서 너를 선택했다는 증표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성흔.......”
제 손은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손바닥은 뭐랄까....... 잔뜩 쪼그라들었습니다. 불에 데어서 화상을 입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물에 퉁퉁 불어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확실한건 제 손이 흉하게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손이 그닥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충격이네요.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수사님이 제 어께에 손을 얹습니다. 저를 바라보시는 수사님의 얼굴은....... 담담함과, 연민이........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권능은 바로 이것에서 출발한단다. 내가 사역을 함에 있어서 교만함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걸 기억하고있니? 앞으로 너는 지금 얻은 이 권능을 발휘하겠지만, 그건 너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란다. 단지, 신이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일 뿐이지......... 너는 이 권능을 값없이 얻었으니, 이제 그것을 대가없이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것이란다. 성흔을 보며, 그 사실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도록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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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의 안내를 따라 중앙 현관을 오르고 올라, 우리는 마침내 수상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무실의 가드들은 그녀의 눈짓을 보더니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집무실의 나무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서류더미의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노인장이 있었다. 과중한 업무 탓인지, 그의 피부는 거칠거칠해 보였고 깊게 패인 눈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그는 서류철을 살펴보는데 정신이 없어서 우리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손님을 이렇게 맞이하는게 예의가 아니란걸 알지만 용서해 주시겠소? 요즘 따라 일들이 마구잡이로 덤벼들어서 말이오.”
우리는 그가 서류철에서 눈을 떼지 않으리란걸 확신하고, 더 이상 눈치볼 것도 없겠다 싶어서 당장 장비를 꺼냈다. 그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흰 종이 너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음........ 설계도에 따르면, 이쪽 벽이 회반죽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번 확인을 해볼까? 역시나 가볍게 두드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속이 빈 물체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의뢰가 끝난 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장소에서 시작될 것이다.
방안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끝날 동안 우리의 ‘착한 타깃’은 서류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다. 장비도 모두 정비했고, 탈출 루트도 확인했겠다, 이젠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나는 스벤에게 눈짓을 한다. 스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는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손잡이는 하얀 성에로 서서히 덥혀 완전히 얼어붙어버린다. 문고리를 얼리는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 돼었을 때, 스벤은 손잡이를 내리친다. 얼어붙은 문고리는 퍽하는 소리를 내며 박살나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소리에 드디어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우리를 바라본다........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서류 너머로 그를 죽이려는 암살자 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말이다. 나는 타깃이 상황을 파악해 대처하기 전에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을 테이핑 해 버린다. 스벤은 나를 도와 그의 수족을 결박한다.
“당신의 악행에 천벌을 내리기 위해 왔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드러난다. 내가 그를 제압하는 동안, 스벤은 서류더미를 뒤져 결재가 완료된 서류를 하나 찾아낸다. 서류의 상단 중앙에는 ‘외국과의 통상을 위한 법률 개정안’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 서류는 우리가 가져가도록 하겠다.”
수상의 시선이 그 서류로 서서히 옮겨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면서 하나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아까만 하더라도 ‘공포’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이제 ‘경멸’의 감정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수상은, 제 얼굴의 표정을 바꾼 것 뿐 만 아니라 무언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테이프로 봉해진 입을 오물오물 거린다. 무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그리고 그럴 이유도 없다. 일을 빠르게 마치기 위해, 나는 그의 명치에 칼을 몇 대 쑤셔박는다.
그러자, 그의 코에서는 붉은 선지피가 쏟아진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얼굴근육이 또 다시 변화를 일으킨다. 이번에 그의 얼굴근육이 지시하는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지금 이 상황과는 별 상관없는 딴 소리를 잠깐 해보자면........ 이런 종류의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하다보면, 지금과 같은 반응을 심심찮게 마주하곤 한다. 요원들끼리의 말로는 ‘꽃갯질경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왜 꽃갯질경이인고 하면, 그 꽃의 꽃말이 ‘놀라움’이라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선물이라 함은, 이러한 반응을 타깃에게서 이끌어 낸다는건 ‘의뢰가 거의 성공에 다다랐다.’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냥 한낱 미신일 뿐이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싶어하는 요원들의 바람이 죽어가는 이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을 만나고, 더불어 꽃말에 관심이 있던 한 요원의 입담이 슬쩍 숟가락을 올려놓음으로써 한편의 도시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꽃갯질경이의 선물을 받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수많은 타깃들은 왜 생의 마지막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자신의 목숨이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소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 모양인걸까? 하지만, 자신의 목숨은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것이다.
값없이 얻은 것을 빼앗긴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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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은 졸리다고 하품을 삼키며 들어가시고, 저는 또 다시 혼자 남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상념이 수사님 대신에 말벗을 자처하여, 저는 거인의 백골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깁니다.
‘값없이 얻었으니, 대가 없이 베풀어라........’
가만히 보면 표현이 참 기가 막히지 않나요? 무릎을 치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표상이자, 사역을 질어진 자들의 비애와 고뇌가 묻어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이 짧은 말은 사역자로서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말고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명제는 남은 생의 시간동안 제가 행할 모든 기사는 ‘나’라는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께서 저를 빌려서 행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기사를 기다리는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버님의 사역을 ‘직무유기’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감사를 거절치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님에게 돌아갈 감사를 ‘횡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화된 신....... 그것이 바로 사역자로서의 삶의 본질이겠죠. 한편으론 이건 ‘사역자’들의 비애와도 연결될 것입니다. 탈 맥락적으로 심판하기에 앞서 내부자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역자도 결국은 하나의 ‘사람’일 뿐입니다. 때리면 아프고, 찔리면 피가 납니다....... 표현이 조금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사역자도 사람이기에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신학은....... 사람의 욕구를 ‘욕망’이라고 정의내리고 이를 따르는 것을 경계해 왔습니다. 당시 신학자들이 만든 대표적인 터부는 바로 ‘7대 종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만, 나태, 질투, 분노, 탐욕, 식욕, 성욕이 그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7이라는 수가 ‘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7대 종죄는 한마디로 ‘완전한 악’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요. 그렇게 숫자를 정해놓고 그것에 여러 부덕함을 끼워맞추다보니, 그 면면을 살펴보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이 그것이에요.
먼저 식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물론 시대가 바뀌어 그런 면이 없잖아 있겠으나 요즘은 식욕이 죄악시 되지 않고 있잖아요. 제 주변에도 식욕이 왕성한 이가 제법 많고, 이들은 자신이 대식가임을 숨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식성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거리를 가 보아도, 꽤나 육덕진 몸을 질질 끌고 다니는 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마....... 7대 종죄에서 식욕을 포함시킨 이가 지금의 거리 풍경을 본다면......... 종말의 표지가 거리에 즐비하다며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을 겁니다. 더더군다나, 대학에서 배운 인류학 시간을 떠올린다면, 예전에는 식욕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나 싶어요. 그루미엄 근처의 동굴에서 고대의 조각품으로 보이는 작품이 발견되었는데, 매우 육덕진 여성의 모습이었다고 해요. 풍만함 속에서 풍요를 찾았다나?
성욕도 마찬가지겠습니다. 17세기인 지금은 수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연애를 합니다. 남녀의 서로다름이 만들어낸 근원적인 호기심은,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을 낳게되요. 오히려 그것을 죄악시하는 바람에 지금도 지우기 어려운 수많은 악습들이 생겨났고, 그것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악습의 대부분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아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종속되도록 만들어버렸죠. 뭐........ 요즘은 남녀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말입니다.
비록 7대 악에는 제외되었지만, 명예욕은 ‘값없이 받았으니, 대가없이 베풀어라.’라는 도그마에 갇혀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의식에서 억압받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툭 터놓고 말을 해보자구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싶어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메슬로우라는 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총 5가지의 위계를 갖추고 있는 계층적 시스템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상위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는 쪽으로 움직이노라고 시스템의 운용원리를 밝히기도 했죠. 간단히 설명해 볼까요? 사람들은 궁지에 몰렸을 때,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물, 산소, 음식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걸 ‘생존의 욕구’라고 해요. 그것이 충족되면 그 다음단계인 ‘안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디엔가로 소속되어 물리적 안정감을 느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안정감을 얻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반쪽을 찾고자 합니다. 그걸 ‘소속과 안정감의 욕구.’라고 합니다. 여기에까지 충족을 하게되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경에 대한 욕구’랍니다.
존경을 받기위해 분투한 결과가 ‘명예’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존경 받기를 포기한다면, 과연 이 사회가 발전을 하겠느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