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타깃의 사망을 확인한 뒤에, 우리는 탈출 작업을 서두른다. 나와 스벤은 아까 살펴보았던 회반죽으로 이뤄진 얇은 벽으로 다가간다. 겉보기에는 제법 단단해 보이지마는....... 겉보기로 모든 것을 판단해선 곤란하겠지.
나는 호흡을 잠깐 멈추고 헤머를 들어올린다.
“쾅!”
둔탁한 소음과 함께 헤머가 회반죽 벽을 뚫어버린다. 그 바람에 돌가루가 부스스하게 날리면서 코끝을 매캐하게 만든다. 헤머를 빼내니, 벽에는 동그란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을 중심으로 균열이 동심원 모양으로 형성되었다.
“마스크 좀 줘봐.”
스벤은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건넨다. 나는 그것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작업을 재개한다. 수 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벽에는 사람 하나가 무리없이 통과할 만한 구멍이 난다. 구멍 속은 별천지였다. 축축하고, 지저분하며, 어두침침한 통로가 그 속에 들어있었다. 알맞게 건조하고, 깔끔하며, 밝은 조명이 지배적이던 수상 관저의 내부에는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쌍둥이 동생이 품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구멍에 한 발을 걸친 채 뒤를 돌아본다. 어지러이 널부러진 서류더미 너머에 스벤이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얼른 끝내라.”
“걱정 마, 찾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설치하는 건 금방이라구.”
녀석은 가방 속에서 앰플 모양의 소형 폭약을 찾아낸다. 그는 자신이 씹던 껌을 뱉어 그것에 폭약을 붙인다.
“크기가........ 좀 작은거 아니야?”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하다구. 여기서 하나만 더 설치하면 이 집이 통째로 날아갈걸?”
스벤은 문과 문 사이에 앰플을 가로로 붙이고, 나머지 앰플병을 하나 더 네민다.
“정이 욕심이 나면, 하나 줄 테니까 가져봐. 그런데 조심하는 게 좋을겨. 이게 터져버리는 날에는 형을 반쪽밖에 못보게 될 테니까.”
“.........배려는 고마운데, 은연중에 그걸 바라고 있는 거 아니야?”
“에이! 우리가 지내온 나날이 몇 년인데 목숨가지고 장난치겠어? 자, 이제 이 좆같은 곳에서 벗어나자구.”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통로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기도 했지만, 우리가 들고운 짐 가방이 보통 큰 편이 아니기도 해서, 우리는 낑낑대며 통로를 통과한다. 통로의 얇은 벽 너머로 사람들이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런 소리가 들릴 때면 걸음을 멈추고, 인기척이 멀어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걸음을 재개하기를 반복한다.
꽤나 지리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에 비해 간 거리가 턱없이 적어서, 짐을 들던 스벤은 마침내 불만에 찬 신음을 토해낸다.
“아우 씨........ 왜 이렇게 통로를 좁게 파 놓은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벽속의 통로가 넓으면 그만큼 내부 인테리어가 좁아지는거 아니겠어? 이 건물이 무너지기까지 딱 한 번 쓸까 말까한 통로를 넓게 팔 필요는 없잖아?”
“대단한 건축가 나셨어? 이런 지미랄 이 일 그만두시면 건축 쪽으로 나서보는 건 어때?”
“불러주면 마다할 건 없지. 자리 잡으면 부를 테니까 둘이서 엄청 해 처먹어 보자고.”
이렇게 둘이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는 동안, 이제 이 지긋지긋한 통로도 시나브로 끝에 다가왔다. 이제, 몇미터만 더 가면 하강 계단이 나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쎄멘 바닥을 밟을 때와는 또다른 소리와 감촉이 발 아래에 느껴진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가면서, 무릎을 굽혀 손을 더듬는다. 금속성의 차가운 감촉이 손 끝으로 짜르르하게 느껴진다. 그래, 하강계단의 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 더 간 다음에 뒤를 돌아 스벤을 바라보면서 문을 연다.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오래된 쇠가 내는 녹이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조금은 끽끽거리기도 해서,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문을 잡은 팔에 힘을 더 싣는다. 팔뚝이 뜨거워진다. 조금만 더 참자, 그러면 끝이 날 것이다.
스벤의 얼굴이 어둠속에 있어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나는 그 외의 기색에서 녀석이 활짝 웃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너부터 내려가라.”
스벤은 고개를 끄덕하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려는데, 통로의 반대편에서 묵직한 폭음이 들리면서 먼지바람이 우리가 있는 곳 까지 훅하고 끼쳐온다. 그바람에 나는 철문을 놓쳐버렸고, 그것이 쾅 소리를 내면서 닫혀버렸다. 나는 벽 너머의 사람들이 눈치를 챌까하는 노파심에 후다닥 문을 다시 열었고, 스벤도 역시 마음이 급해져 진동한동 내려간다. 나는 스벤이 어느정도 내려가기를 기다린 뒤에, 그를 뒤따라 내려가기 위해 소리를 죽여가며 문에 손을 고정한채 뒤를 돈다.
문 너머에는 차가운 밤공기가 소용돌이치며 내 얼굴을 때린다. 그곳에는 철로된 비계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벤은 어찌나 빨리 내려갔던지 그 모습이 조그마한 점처럼 보인다.
나도 이 녀석의 뒤를 따라 비계로 발을 뻗는.........
“동작 그만.”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가드 몇 명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이 갈갈이 찢겨져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것이........ 스벤의 폭약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모양이다.
“네놈들 덕분에 우리 동료 몇이 목숨을 잃었다. 보아하니 선수인 것 같은데 최대한 발버둥치고 날뛰는 게 좋을 거야. 단언컨대 우리도 너를 곱게 죽일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Channel 2. 아이리스
생각을 이어가고 또 이어가 보지만, 불행하게도 머릿속 여행자는 눈에 띄는 성과를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 자리에 앉아 거인의 백골을 올려다봅니다. 반쯤 무너진 하얀 아치에는 초록색 풀이 돋아나 있었답니다. 풀들이 그곳에 자라난 것을 보니 참으로 생명이란 건 질기며 경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해를 넘기기 어려운 나약한 존재가 영원에 가까운 존재 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돌에 난 패인 자국을 보니, 이 사건은 일 년 전, 아니 몇 백 년 전에도 벌어졌을 거에요. 수 천 년 전의 오늘, 지금 당장 뽑혀나가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가녀린 풀뿌리가 우연히 아치에 자리를 잡았고, 세대를 거쳐 가며 수없이 오랜 시간동안 그 자리에서 피어나고 시들기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하얀 거인을 무너뜨려버렸지요. 어리석은 남자가 산을 옮겼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이런 미물의 위대함에 경탄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 식물에게 자신이 자랄 터전을 정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 존재는 지금의 장소를 선택했을까?’라고요. 그러고 보니 이 가녀린 잡초는......... 제가 고민했던 두 번째 문제를 표상하고 있었습니다. ‘값없이 받은 능력이니 대가없이 베풀어야’ 함을 명령받은 사역자로서의 운명 말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제게 주어진 권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 심지어 원장수녀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사람에게도 ? 권능을 베풀어야 합니다......... 과연 이런 삶을 ‘자신의 삶’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광대의 손 안에 있는 꼭두각시와 같이 절대자가 손을 까불리는 것을 따라 이리저리 놀아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하하...... 머리를 식히려고 주변을 본 것이 새로운 고민을 잉태하는 빌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참 답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머릿속 여행자가 다시 짐을 꾸려가다보니 재미있으면서도 약간은 발칙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아버님은 제가 이러한 신학적 고민을 끝내버리기 전에 이런 권능을 주셨던 걸까요? 고민을 끝낸 뒤에 권능을 받는게 더 ‘합리적’이었을 텐데........ 이 고민을 모두 끝내고서 보상으로서 이 권능을 받았더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이적을 행하였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지 않았을까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왜 아버님은 제가 이 권능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까지 정신적으로 성숙하기를 기다려주지 않으셨던 걸까요? 이것은 갓난아이에게 칼을 쥐여 준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느끼는 시간과 아버님이 느끼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낱 한 세기를 넘기기 어려운 필멸의 존재인 반면, 아버님은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으며, 그 시간을 경험하시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시간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분이 우리의 시간 감각을 공유하기란....... 매우 힘이 들겠죠. 마치, 거인의 백골이 자신의 머리꼭지에 돋아난 잡초의 입장을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다면...... 아버님이 실수를 하신 걸까요?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신 분이 말이에요. 6일의 시간이면 물과 궁창뿐인 곳에서 세상 만물을 세팅할 수 있고, 나팔이 연달아 일곱 번 울릴 시간동안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모두 무로 돌려버릴 수 있는 분이지만, 그 긴긴 시간동안 단 한 번의 실수를 한 게 아닐까요.
머릿속 여행자는 그 실마리를 손아귀에 꽉 쥐고 다시 한 번 사막을 떠나봅니다. 절대자와, 그가 저지른 실수........ 하지만, 머릿속의 사구를 넘고, 몇 번의 함정에 빠진 끝에, 저는 하나의 생각에 수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 실수가 아닐 겁니다. 이러한 현상 속에는 무언가 제가 알지 못하고 있는 이치가 숨어있을 거에요. 지금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준비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여자에게 권능을 내려야할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게 분명합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치를 넘어 들판으로 나아갑니다. 이곳은 한적하고, 사람이 앉기 쉬운 나무 그루터기가 열을 지어 나 있으며, 이 근방에서는 풀들이 드문........나지가 드러나는 몇 안 되는 곳이라 수사님들이 인근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종의 야외교실로 활용되는 곳입니다.
저는 이곳을 찬찬이 돌아봅니다. 탁트인 곳에 있어서인지, 바람이 불어와 제 머리칼로 하여금 정신없이 나부끼게 만듭니다. 저는 청량한 봄바람을 들이마시고, 또 다른 상상에 빠져듭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 많은 이들이 이 교실을 거쳤을 것입니다. 인근 농부의 자녀이든, 화전민의 자식이든, 혹은 수사들의 지식을 얻기위해 이곳을 찾은 학도이든 말이에요. 이들은 자신이 자라난 환경이 각각 다를지라도, 이곳에서 함께 수학하는 벗으로서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난을 피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화전민의 자식중 하나가 이곳에서 오랜시간 공부한 끝에 꽤나 명망 높은 학자로 거듭났을 수도 있었을 거에요.
환경과, 소유한 물질을 떠나서 이곳에서는 모두가 같은 출발선 상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이야 말로
“가능성의 산실이었을 거에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답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오고 난 직후에? 아니면........ 제가 이곳에 발걸음을 하기 한참 전부터 있었지만, 제가 이제야 발견하게 된 걸까요? 어쨋거나, 그는 저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짓습니다.
“수많은 학문은 세 가지 질문을 반드시 포함한다고 해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왜 학업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그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입가진 사람이라면 모두들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지요. 어떤이는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칭하고, 어떤 이는 천성이 나쁘다고 말하기도 하며, 또 반대로 천성이 착하다고 정의 내리기도 하지요. 우리의 신께선, 인간을........ 자신의 가능성을 소비하는 존재라고 칭한답니다. 그럴 듯 하지 않아요? 인간의 어린 아이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가능성을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데 소모하다보면, 20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자신의 가능성을 대부분 사용해버리고 말아버리지요.”
“누구신가요?”
남자는, 제가 질문을 던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립니다.
“저는 신의 의지를 이 지상에 전달하는 존재랍니다. 당신 편하실대로 불러도 좋아요. 우체부라고 해도 좋고, 통신원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호칭이 어색하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세요. 우리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천사’라고 부르더군요.”
“..........”
Channel 1. 로키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언행과, 자세로 보건대.........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실상 누군가 하나는 다치는 것이 불가피한데, 그게 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품속에서 두 자루의 나이프를 꺼낸다. 타깃을 처리한 다음 급하게 그 장소를 떠나느라 장비를 소제할 겨를이 없어, 칼자루가 피로 미끌거리는 것만 제외하면 장비의 상태는 나무랄데가 없다. 그렇다면, 나를 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어떤 녀석들일까? 어둠속에 가려 그 표정을 알 도리는 없지만, 자신들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달려드는 대신에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보아, 꽤나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어떤가?
아까 스벤과 이곳을 지나가면서 생각한 바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이 지나가는데는 불편함이 없을지 몰라도, 두 사람이상이 어께를 나란히 하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인다......... 그렇다면 대충 사이즈가 나온다. 아무래도 나는 지구력 싸움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나이프에 묻은 피를 문질러내면서 동시에 어둠속에 가려진 상대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노력을 한다.
경험상, 이런 종류의 싸움은 그 결과가 대개 눈치를 보는 와중에 결정이 되곤 한다. 몇 분이 걸리든,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치든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실상 싸움이란, 눈치를 보면서 얻어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 하지만, 나는 감이 좋은 편이라 이제까지 싸움에 임하면서 그 결과를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그건 상대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고, 지금과 같이, 나와 대치하고 있는 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없을 때에는 싸움의 결과가 슈레더의 상자속으로 들어가버린다.
나는 절반은 이겼고, 또 절반은 패배한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상자속에서 자신을 꺼내어 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급적 싸움을 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내가 이성적이라고 하더라도, 상대 역시 합리성을 품고 있을 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나이프를 꺼내들자, 무리들 중에서 가장 앞장을 선 이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꺼낸다. 검신이 얇다 못해 바늘처럼 날카로워 보인다. 음...... 아무래도 찌르기용 검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런 종류의 무기는 내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상대 역시, 자신이 무기라는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싸움이 일어나는건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별수 없지, 나는 결국 상대의 의도에 동의를 하고, 품속을 뒤져 담배 한 개비를 찾아 문다.
“........뭐하냐?”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담배 한 대 좀 피웁시다?”
상대는 내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야?”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둘 중 하나는 지금 이곳에서 죽을 운명인데, 혹시 그게 내가 되면 이 한 개피의 담배를 피지 못한게 한이 될 거 아니야.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고작 이 담배 한 개피 가지고 딱딱하게 나올 생각은 아니겠지?”
“어처구니가 없구만.”
라이터가 반짝 하면서, 이 좁디 좁은 복도의 풍경이 잠깐이나마 한 눈에 들어왔다. 일단 녀석의 얼굴을 살펴보니, 나라는 사람이 적잖이 한심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기회이긴 하지만, 아직 완벽하진 않다.
어쨌든 기왕 불이 붙었기에, 나는 이 독한 연기를 흠뻑 들이마신다. 그 연기가, 잠깐이나마 심란해졌던 나의 마음을 붙잡아주고, 동시에 나의 감각을 기민하게 만들어준다.
내 배짱에 상대는 더욱 어이가 없어졌는지, 검을 내려놓고 오픈된 자세를 취한다......... 역시 이번에도 완벽하진 않다.
기도를 타고 들어간 유독한 가스는 나로 하여금 좀 더 대담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준다. 나는 입을 오므리고 연기를 훅하고 뱉는다. 내 입안에 머금어졌던 연기는 도너츠 모양으로 퍼져나간다.
이제, 녀석은 검을 지팡이 삼아 그것에 자신의 무게를 싣는다.........지금이다.
나는 녀석의 얼굴에 담배꽁초를 집어던지고, 재빠르게 그를 향해 달려든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상대는 허둥거리며 검을 뽑아 자세를 취해보지만........ 타이밍은 내가 더 빨랐다. 녀석은 운이 좋아서 자신의 얼굴에 날아드는 꽁초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목으로 날아드는 칼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좋지는 못했다.
강한 저항의 느낌이 들면서, 내 손에는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려간다. 나는 순식간에 제압당한 녀석의 몸뚱이를 내려놓고, 그 다음 녀석을 바라본다. 두 번째 녀석은 첫째가 불의의 공격을 받아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눈치다.
일단 흐름은 내 것으로 가지고 왔다. 이제 이 흐름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녀석들의 당혹감을 공포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두 번 째 녀석에게 달려든다. 이번 녀석은 첫째처럼 어이없이 당할 수가 없었는지, 내 얼굴에 대고 칼을 휘두른다. 하지만....... 같은 동작이어도, 행하는 이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서, 그 의미와 효력은 천지 차이라는걸, 녀석은 알고있을까?
만약, 녀석이 나를 정말 죽일 생각으로 칼을 휘둘렀다면......... 나는 아마 그것에 맞아서 죽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겁이 잔뜩 들어,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마음으로 휘두른 칼은, 내가 맞을 리가 없거니와 혹여 칼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터럭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칼을 맞는건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니까, 나는 이런 허접스러운 참격을 흘려버린다. 내 얼굴을 향한 그 칼은 결국 허공을 가르고, 벽에 박혀버린다. 그 바람에 이 좁은 통로에 돌가루와 먼지가 튄다. 나는 잠깐 뒤로 물러선 다음에 다시 앞으로 달려들어, 그 칼을 쥔 손을 잘라버리고, 손잡이 뒷꼭지로 녀석의 목을 내리친다. 결국, 겁이 많던 이 어리석은 치는 허파에 바람이 단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린다.
“자, 다음놈은 누구냐?”
Channel 2. 아이리스
“........그런 호칭이 어색하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세요. 우리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천사’라고 부르더군요.”
“.........”
천사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잘 생긴 미친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세상에...... 천사라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게 상당히 놀랍습니다. 만약 제가 이 사람을 이단으로 고발한다면, 아마 그는 자신의 세치혀가 놀린 단 한마디의 단어 때문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모진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리스크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말이죠........ 듣는이로 하여금 물건을 쥐거나 걷지도 못할 정도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소리를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걸까요?
남자는 제 얼굴을 뜯어보더니, 저를 향해 다가옵니다. 물론 잘 생긴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판 남이기에, 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군요. 혹시 주변에서 20m 미녀라는 소리를 즐겨 듣지 않나요?”
“20....... 뭐라고요?”
“아닙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사람은 외모가 다가 아닌데 말이죠. 그나저나,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을 얻은 사람이, 정작 천사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다니.......”
그는 어떻게 제 생각을 알아낸걸까요? 저는 부끄러워져 고개를 수그립니다. 그가 천사인지 아닌지는 지금 당장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천사는 아니더라도,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건 인정할 수 밖에요.
“조.......좋아요. 제가 한 백 오십보 정도 양보해서, 당신이 천사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이유로 저를 찾아온거죠? 아버님께서, 당신더러 제게 무슨 말이라도 전해달라고 하던가요?”
참...... 일단 내뱉어버려서, 주워 담을 수가 없기는 하다만......... 말을 하고나니, 제 스스로가 당돌하다 못해, 싹수가 없는 여자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제 말을 천천히 곱씹다가 마침내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두눈이 똥그래져서 저를 바라봅니다. 그바람에, 저는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고개를 수그립니다.
도저히......,, 그와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하,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그렇게 바로 후회할 것이면서, 뭐하러 그런 말을 한건가요? 이제껏 많은 수령인들에게 고지를 전하기 위해 지상을 내려왔지만, 당신같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 저는 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사람은 나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상한걸까요, 아니면 이제까지 그가 만나온 사람들이 특별했기 때문에 나같이 평범한 사람을 특별하다고 여긴건 아닐까요?
그는 또다시 제 생각을 읽었는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갑니다.
“각양각색이었죠. 사무란 자는 신의 부름을 받을 때 매우 어린나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귀를 먹어서 귀가 어두운 편이었습니다. 제가 세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매번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저를 부르셨습니까?’라고 하더군요. 후에, 천국에서 그를 만나 농담하기를 ‘만약에 한번만 더 못알아 들었으면, 그의 침실로 쳐들어가 네 뺨을 때렸을 것이다.’라고 말했었죠. 그랬더니 그가 뭐라는줄 알아요? 그가 제 말을 듣고 겸연쩍어 하더니, ‘만약에 한 번만 더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신부님의 침실로 쳐들어가 그의 따귀를 때렸을 거에요.’라고 대답하더이다. 답답하기로 따지면 기돈도 뒤지지 않았어요. 녀석은 막내둥이로 형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고 자라서인지, 의심이 매우 심하더군요. 고지를 전하러 온 천사에게 대뜸 이불을 제 얼굴에 던져버리더니, ‘이것만 제외한 나머지 온 땅을 이슬로 적시면 당신이 천사란 걸 믿겠소.’라고 말하더니 쿨하게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황량한 황야에 이불 한 채를 들고 멍 하니 서있을때의 그 심정이란......... 진짜 고지고 나발이고 녀석의 집에 쳐들어가서 볼기짝이라도 두들겨 패고 싶더라니까요. 그래도 그중에서 진국은 단연코 리아였습니다. 동료 천사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가 하나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으니까요.”
“.......리아요?”
그는 이미 자신의 말에 도취가 되어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는 허공을 보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양입니다.
“제가 그녀를 찾아가서 리아에게 열 달 뒤에 사내를 낳게 되리라고 고지를 전하니,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더군요. 신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그녀에게 축하의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 대성통곡을 했더랬죠. ‘여덟 달 뒤에 결혼을 하는데, 지금 임신을 해버리면 내 혼삿길이 막히게 생겼다.’라면서 말이에요. 그러면서 종종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는데, 그 주먹이 어찌나 맵던지........ 사실 지금도 저는 그녀를 만나기가 꽤 껄끄럽습니다. 그날 고지를 전하고 천국에 돌아간 뒤에 동료들에게 리아에 대해서 잔뜩 험담을 늘어놓았거든요. ‘얼굴이 못생겼으면, 마음이라도 예뻐야하는데, 못생김과 폭력성이 비례하는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말이에요. 그녀도 천국에 당도한지 어림잡아 1600년 가까이 되니, 소문이 들었으면 진작에 들었겠지요. 아마, 저는 지상에 새로운 천년왕국이 건설될 때 까지 그녀를 피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Channel 1. 로키
라스알하게의 현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의 생은 고통이 넘실거리는 바다와 같다. 그러므로 파고를 하나 넘는다고 해서 안심을 할 수 없다. 곧 새로운 파도가 밀려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나는 네 번째 놈을 쓰러뜨린 뒤에, 앞을 본다. 아무리 야맹증이라고 하더라도, 이정도 시간까지 어둠 속에 있어뵈니, 윤곽이나마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숨이 나온다. 아직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현인의 말이 맞는 모양이다. 파도를 하나 넘으면,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게 마련이다.
물론, 새로운 파도의 정체는 바로 고통이다. 바다에 파도가 잔잔하길 바라는건 불가능한 기적을 바라는것과 똑같듯이, 이놈의 인간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도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너희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나에 대한 분노를 풀어내는건 이정도 신체적 활동이면 충분할거다. 괜히 더 한 희생을 부르지말고, 이쯤에서 서로 물러서는게 낫지 않겠나?”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남은자들에게 ‘최대한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했었는데, 그게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효과를 낳은 모양이다. 내가 이 말을 꺼내자마자, 녀석들 중에 선봉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칼을 치켜들고 나를 향해 몸을 던진다. 정말.......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정말 이중적인 존재인 모양이다. 어찌 본다면 정말 합리적인데, 또 한편으로 보면 이성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행위를 벌인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비합리성을 추구하도록 만든 것일까?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순순히 죽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녀석의 칼이 내 몸으로 파고들기 직전에 몸을 슬쩍 뒤로 뺀다. 칼은 허공을 후벼파고, 온몸을 다해 던진 그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쳐박혀 버린다....... 어휴 저 병신
나는 녀석이 일어나기 전에 후다닥 상대의 몸 위로 올라가, 녀석의 목을 짓밟아 버린다. 그 큰 몸뚱아리중 가장 얇은 곳을 밟혔을 뿐인데, 상대는 컥컥 거리며 몸을 버둥거린다. 나는 더 이상 봐줄수 없어서, 그 녀석의 몸 위에 질산 앰플을 던져 깨버린다.
“끄아아아악!!!”
녀석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격하게 몸을 떤다. 그래, 그럴 수 밖에....... 나는 질산이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녀석을 일으켜 세우고, 동료들에게로 걷어차 버린다. 힘을 잃고 비칠비칠 걸어가던 그는 동료들 앞에 쓰러져 버리고, 이윽고는 물그죽죽한 죽이 되어버린다.
“너네도 저 녀석처럼 멀건 죽이 되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그리고 그 경고가 정말 통해서 녀석들이 합리적인 생각하기를 진심으로 바랬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이번에도 비 합리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 다음 선봉이 내 경고를 무시하고 옛 동료를 만지작거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질산을 만져버려 손이 녹아버린 것이다.
머리가 멍청할 뿐 만 아니라, 운조차 없던 그 사내는 쓰러져도 하필 질산 웅덩이로 쓰러져, 옛 동료가 걸었던 전철을 그대로 밟는다. 결국, 그들앞에 있던 질산 웅덩이는 더 크고 더 넓어졌다.
.........살이 타는 지독한 냄새가 풍긴다. 통로가 좁아서인지, 냄새는 빠르게 퍼졌고, 그리고 오래갔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들은 휘발성 기체가 되어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자신들의 전의가 꺾였을텐데......... 평화를 모색하려는 나의 노력이 그들에게 도통 먹혀들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아....... 답답하다. 왜 이들은 나와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때 불현 듯 마스터의 말이 떠오른다.
‘열번 찍혀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존재한다. 그런 나무를 만나면, 재빠르게 포기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이란 것은 상책만을 선택하도록 두지 않는다.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차선책이라는 것인데........ 차선책이라는 것이 무엇 인고 하면........’
나는 주머니를 뒤져 또 다른 앰플을 꺼낸다. 그것에는 아까의 질산처럼 투명하지만, 조금은 점성이 있는 액체가 담겨있다. 아까 스벤이 내게 건넨 폭약이다.
‘전혀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나는 칼을 집어넣고, 앰플을 조심스럽게 쥔다. 스벤이 그랬지, ‘형을 반쪽만 보고 싶지 않으니까. 조심스럽게 다뤄.’라고 말이다. 나는 서서히 걸음을 뒤로 뺀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유독성 웅덩이에 발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서서히 발걸음을 앞으로 뗀다.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대치국면은 내 발 뒤꿈치가 철문에 닿을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발에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들면서, 나는 녀석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다.
“잘들어, 아까 두 녀석들 꼴이 나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이 문을 닫기 전까지 달려든다면, 이걸 너희들에게 집어던져 버릴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철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내 온몸을 쓱 하고 훑어지나가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한다. 녀석들이 알아차린건 아니겠지?라는 걱정을 하며 녀석들의 표정을 살펴보는데, 다행이 내게 별다른 틈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마지막까지 녀석들의 낌새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철문을 닫는다.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 나는 품안에 껌을 씹어 대충 씹고는, 비계에 폭약 앰플을 고정시킨다. 이건 녀석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결코 터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들의 합리성을 믿어보기로 하고, 빠르게 비계를 내려간다. 제발 녀석들이 최후의 순간에는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 편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나는 다리를 헛디디는 것도 무릅쓰고 두 계단 세 계단을 한꺼번에 내려간다. 가장 좋기로는 녀석들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녀석들이 멍청하게도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하는 이 순간에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것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쾅!”
녀석들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머리위로 요란한 폭음이 들린다. 이런 제기랄! 아니다. 지금은 투덜거릴 여유도 없다. 똑같은 말이지만, 위를 올려다볼 여유 또한 없다. 폭발은 이미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충격파를 피하는 것이다. 아까, 나는 두계단 세계단을 한꺼번에 내려갔다고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거진 뛰어내리다시피하며 계단을 내려온다. 충격파를 맞을 수 밖에 없다면....... 최대한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한다. 제발........
이렇게 정신없이 스스로에게 힘이 될 만할 말을 늘어놓으면서 내려가는데, 바로 옆에서 깡하는 소리가 나면서 도락루가 눈으로 확하고 튄다. 나는 팔로 눈을 가리면서 그것으로부터 올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위를 올려다보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돌...... 아니, 바위라고 불러야 할만한 사이즈의 광물더미가 파고를 이루며 내 머리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제기랄, 현인의 말이 다시금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끝도 없이 달려드는 돌머리 같은 놈들을 간신히 피했더니, 이번에는....... 진짜 돌이 내 머리위로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제기랄, 내 인생이 갑자기 엄청나게 꼬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정말 답답한 건, 다름 아닌 내 인생이 꼬이고 있는데, 그걸 지켜보는 인생의 주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 인생이 맞기나 한 걸까?
설상가상으로, 이 엄청난 바위의 파고를 바라보느라 다리가 굳어버려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치 몇십년 묵은 구렁이가 내 다리를 휘감아버린 것 같다. 안된다........ 움직여야 한다. 지금 그 행위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위다. 그런데....... 그걸 분명 알고있는데,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바보처럼 만든 것이란 말인가.
돌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혀버린다. 이젠, 폭발로 쪼개져버린 돌들의 표현도 똑똑히 눈에 보일 지경이다. 결국, 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려고 하는 무의미한 시도를 포기하고, 비계에서 손을 떼고 내 머리를 감싼다.
그 바람에, 나는 여러 가지 쇄설물들과 함께 비계에서 떨어지고 만다.
아주, 지극히, 마치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다. 하지만, 아주, 지극히, 찰나처럼 짧았을 순간은 마치 영원과 같이 길게 느껴졌다........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다.
쇄설물 사이에 박혀있던 석영조각에, 내 얼굴이 반사되어 비치는 것이 보인다. 나는 지금........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얼굴의 근육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나의 발을 꽁꽁 묶었던, 그 얄미운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를 속박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면서 내가 익숙하게 보았던 것이었다....... 그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감정을 억제하는 내가 감정을, 그것도 공포를 느끼다니 별일이 다 있다.
Channel 2. 아이리스
그는 킬킬거리면서 자신이 여러 수령인들과 가졌던 추억을 떠올렸지만....... 저는 도저히 그가 짓는 웃음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재미가 없었냐고요? 아니요. 재미있었죠.......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들었다면,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순간도 꿈뻑꿈뻑 졸지 않고 들었을 겁니다. 왜냐면....... 그 이야기들은 수사님들이나 수녀님들이 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성호를 그었을 법한, 아주........ 발칙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저도 몰랐는데, 제게도 그런 고루한 그런게 있었나봅니다. 저도, 그에게 ‘당신 지금 그 이름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거에요?’라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우선....... 기돈은, 어둠의 별의 폭정 아래, 신음하던 인민들을 구해낸 영웅입니다. 열 두 민족 중에서 가장 힘이 없는 겨레에서, 족장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막내아들로 태어났죠. 사람들은, 가장 보잘 것 없는 겨레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아이가 민족을 구해냈다고 하여, 새끼절이라는 명절을 만들었습니다. 그 명절이 그를 기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사무도 못지않습니다. 그는 불임녀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의 인생 전체가 아버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시대’에 최후의 지도자로서, 두 사람의 왕을 옹립했고, ‘왕들의 시대’를 연 개국의 지도자였습니다. 왕들은 사무의 가르침에 따라서 지금까지 이어진 ‘천년 왕국’을 건설했죠.
마지막으로 리아는...... 두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입니다. 천년의 왕국이 쇠퇴기를 맞아 여러 집단으로 분열되려고 하는 시대적 상황에..... 이 대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아드님’을 낳은 분입니다. 이분의 활동 덕분에, 천년 왕국은 새롭게 통합이 되었습니다.
그는 감히, 이름을 언급하기에도 어려운 분들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를뿐더러....... 그 분들을 희화화하고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가 천사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가 천사라고 해서 그들을 모욕해도 되는건가요? 저는, 흰자위를 뜨고 그를 노려봅니다만, 그는 제 시선을 웃음으로 맞받아칩니다.
“당신은 참 이상하군요. 오로지 신에게만 모든 권위가 가야한다고 믿는 사람이, 왜 가슴속에 우상을 셋이나 모시고 있는 건가요?”
“........우상이라고요?”
“그럼요. 당신에게 있어서, ‘감히 이름을 언급하기 어려운’ 존재는 딱 하나면 족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단지 당신보다 일찍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 인간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겁니다. 절대 우상이 아니에요.”
“선조에 대한 예의라...... 한낱 나무 조각에 절하는 이들도 그렇게 이야기를 합디다. ‘이건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조상들의 영혼이 담겨있다.’라고요. 따라서, 이것에게 절을 하는 것은 조상들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더군요....... 어때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
기분이 나쁘다 못해, 그에게 욕이라도 한바가지를 하고 싶지만, 그의 말 하나하나를 반박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씩씩거리는 제 모습을 보더니, 화들짝 태도를 바꿔 제게 사과의 말을 건넵니다.
“아이고...... 원래 이런 신학적인 논쟁을 하려고 내려온 것이 아니었는데, 제가 너무 흥분을 해버렸군요.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미완성의 존재’를 만나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나 봅니다.”
“미완성의 존재요?”
“아아, 표현이 거슬렸나 보네요. 우리는 인간을 가리킬 때 그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완성이 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기분 나빠 하실 필요는 없을거 같습니다. 그 표현에는 좋은 뜻이 담겨있거든요.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의 부드러운 설명에, 저는 조금씩 얼어붙었던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듣기 좋은 표현임에는 분명합니다. 저는, 기분이 좋은 티를 내는건 왠지 그에게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전히 딱딱한 말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럼...... 좋아요. 백보 양보해서, 당신이 천사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게 온 것은 아버님께서 제게 전달하려는 말이 있다는 건가요?”
“음...... 뭐 그렇게 해석하시면 좋겠네요. 제 본질은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니까요. 근데, 신께서는 제게 말을 전달하는 대신에,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달라고 하더군요. 뭔 소린가 해서 와봤는데, 보아하니........ 확실히 이 늦은 시간에 헤매고 돌아다니는걸 보면 고민이 있어 보이긴 하더군요.”
“.........”
“그래서, 무슨 고민인가 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대충은 알겠더군요. 당신은 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권능을 받고도, 아직까지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이 고민인게 아닙니까?”
저는 제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그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기적을 일으킬 수는 있게 되었는데, 막상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신에게 맡기는 삶을 살기는 싫고......그러다보니, 자신은 아무리봐도 이런 권능을 받기에는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권능을 받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 그런거 아닌가요?”
“.......맞아요. 왜, 아버님은 제가 신앙적으로 성숙하기 전에 이런 권능을 주신 건가요? 제가 이걸 아버님의 뜻이 아닌, 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악용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확신에 찬 삶을 산다고 해도....... 확신에 찬 삶이 제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
그는,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그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을 짓습니다. 뭐랄까요...... 말로 표현하기가 좀 힘든 표정인데,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말했던 것 기억하나요? 바로, 지금의 당신의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겁니다. 당신은....... 여태껏 봤던 고지 수령인들과는 사뭇 태도가 달라요. 아까, 기돈과 사무, 그리고 리아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들은 고지를 받기 전에는 그런 불손한 태도를 보여 왔지만, 막상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린 뒤에는 다들 두려움에 떨기 바빴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었죠........ ‘자신의 삶’을 주장하는 이는, 없었단 말입니다. 아마 당신은....... 신 앞에서 자신의 삶을 주장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수령인이 될 겁니다.”
“그거....... 칭찬이에요?”
제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합니다.
“글쎄요...... 그냥 가치중립적인 코멘트라고 칩시다. 그나저나, 이제는 신께서 제게 명령한 바를 해야 할 것같네요. 신께서 왜 제게 이 말을 전하라고 했는지도 이해되기도 하고....... 우선, 신께서 당신에게 전하라는 말부터 할게요.”
저는 그의 말을 기다리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킵니다. 대륙에는 3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신이 내리는 고지를 받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당장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의 수도 그 절반에 가까운데, 저는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로또에 당첨이 된 게 아닙니까.
“신께서는....... 당신에게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에, 선택을 해라.’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거죠. 아마 하늘 위에 있는, 당신이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당신이 고민하기를 바라신 모양이에요. 혹시나 당신이 고민의 끝에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그분은 결코 당신을 책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반대로........ 당신이 고민 끝에 올바른 선택을 하더라도, 신께서는 결코 당신을 칭찬을 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