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 Channel 1. 로키 1623년 9월 12일 눈을 떠보니 낯이 익은 천장이 보인다. 날이 이미 밝았는지, 내 눈에는 대들보의 갈라진 틈까지 똑똑하게 보일 정도다. 나는 기억이 끊어진 사람이 느낄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어리둥절함에 빠졌다. 분명 내 마지막 기억은 ‘한 밤중’이라는 시간과 ‘수상관저’라는 공간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시 공간적인 배경에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나는 아직도 계속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어리둥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리를 일어나려고 하는데, 짜르르한 통증이 훅하고 내 가슴팍을 훑고 지나간다. 그 바람에 내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움찔한다. 내 몸이 내것이 아닌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혹시나 해서 내 몸을 빠르게 살펴보았지만, 가슴팍과 다리에 붕대가 감겨있을 뿐, 그 외에는 외과적인 문제가 전연 감지되지 않는다. 손은 또 어떤가, 오른손과 왼손 모두 굽히고 펴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손에 실리는 힘에도 그닥 제약이 실려있지 않고....... “잘 잤어?” 내 몸을 살펴보는 동안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더라? 옳지! 토라의 것이다. 이로서 내 청각적 인지능력에 이상이 없다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보니, 토라가 날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식사가 들려있었다. “스벤은...... 괜찮은건가?”“음...... 오빠가 말하고자 하는게 ‘몸이 성하냐?’라는 뜻이라면, 괜찮아. 그 친구는 다행이 터럭하나 다친데가 없거든. 하지만, 오빠의 의도가 ‘정신이 성하냐?’라는 거라면....... 그렇진 않아. 오빠가 잠들어있는 동안, 스벤이 닥터를 계속 붙잡고 늘어졌거든. ‘나 때문에 우리 형님 죽는거 아니냐.’라고 끊임없이 징징대더라구. 오늘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었어.”“.......다행이군.” 스벤도 괜찮다 하니, 마음이 놓여서 나는 침대에 다시한번 드러눕는다....... 기억에 약간의 공백이 있긴 했지만, 모든 일이 잘 끝났다. 하지만 내가 안도에 잠긴 것이 불만이었는지, 토라는 눈썹에 힘을 준다. “다행이기는.......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시간이 지나도 복귀를 할 생각을 하지 않길래 무슨 일이 생긴건가 싶어서 얼마나 걱정했다구. 그러다가 스벤이 오빠를 들쳐매고 세이프티 하우스로 온거야. 일단 오빠를 뉘인 다음에 살짝 카메라를 살펴봤는데........ 와 정말 오빠라는 사람은......”“두 세 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두 세 번이 뭐야? 아주 콩가루가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을걸? 세상에나, 세상에나...... 8층 건물 비계에서 니트로를 터뜨리다니 제정신이야?“난 그게 그렇게 센 줄 몰랐지.” 내가 말했지만 제법 뻔뻔한 내 대답에 토라는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내 손에 거칠게 쟁반을 쥐어주고는 신문을 펼쳐 내 코앞에 들이민다. 토라가 펼친 페이지에는, 지붕을 비롯해 건물 반쪽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흉물스러운 건물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오빠가 만든 작품이야. 잘 보고 감상평좀 말씀해 보시지?”“와......” 나는 건물의 처참한 모습에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비계에 설치했던 폭약이 이런 위력을 가졌단 말인가...... 만약 그 위력에 정통으로 휩쓸렸다면 하고 생각하니, 등 언저리가 시리면서 간질간질해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토라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는 십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기적이 따로 없군, 저런 폭발에 휩쓸렸어도 이렇게나 멀쩡하니 말이야.”“음...... 사실, 오빠가 완전히 멀쩡한건 아니야.” 나는 토라가 말한 것을 알아듣고, 그녀에게 내 가슴팍과 다리를 툭툭 가리킨다. 내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같이 실력이 출중한 요원이야 이런정도의 상처를 얻는건 매우 드문건 사실이다. 하지만....... 뭐 그야말로 ‘보통’의 실력을 가진 요원들이라면 이정도 상처를 얻는 것은 보름에 한번정도 겪는 흔한 일이 아닐까? 토라 역시 동료들이 그런 부상을 겪는걸 심심치않게 보아왔으니, 그닥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토라가 지은 표정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오빠 다리가 다친건 별로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다른 부위가 좀 심각해.” 그녀는 주저주저하다가 내 가슴팍을 가리킨다. “여기가 뭐?”“음.....그게, 그 부위에 있던.......그 있잖아 그거. 비정한 마음.”“응 그게 뭐?”“그게....... 금이 갔나봐.” 비정한 마음에 금이 갔다고? 원래 그건 금은커녕 기스도 나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비정한 마음이 손상되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부작용에 대해선, 어떠한 연수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게 금이 갔다고? 나는 그제서야 왜 토라가 그토록 망설였는지를 깨닫고, 가슴에 감겨있던 붕대를 찢어낸다. “사실..... 그걸 시술받은 사람중에, 그게 그렇게 된건 오빠가 처음이래. 그래서 이런 현상이 오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대.” 토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마지막 말을 뗀다. “오빠가 감정을 억제하는데 장애를 느끼게 된다는거야.”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9월 12일 날카로운 새소리에 눈을 떠보니, 저는 야외교실의 책상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젠 가을의 초입이라 아침공기가 제법 쌀쌀해서, 온 몸이 뻑뻑하게 굳어있었나 봅니다. 기지개를 쭉하고 펴니 온몸의 관절에서 오도독하는 소리가 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이러고 보면 저도 참 맹한 사람이죠? 잠깐 밖을 둘러본다는게, 밤새도록 밤이슬 맞으며 쏘다니다가 이런 곳에서 잠이 들어버리다니....... 거기에, 이런말 하긴 참 부끄럽지만, 입주위가 축축해진걸 보니, 아무래도 책상에 엎어져 자는 동안 침을 질질 흘려버린 모양이에요. 혹시나 누가볼까, 재빠르게 볼에 번진 침을 훔칩니다. 하늘을 보니, 시간이 조금 일렀는지 검푸른 어스름이 아직 완전하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동편은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고 있긴 합니다만, 하늘의 중앙과 서쪽하늘은 여전히 짙은 감청빛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붉고, 동시에 푸른 하늘을 멍하니 보면서, 저는 어젯밤의 행적에 대해 반추를 해봅니다. 성화의 권능을 얻었고, 수사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제 자신이 이런 권능을 감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저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지요. 그래서, 그 멜랑콜리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쇠락한 옛 수도원의 유적을 거닐었죠. 폐허 속에 피어난 풀들을 보며, 제 마음의 괴로움을 달래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욱 더 커진 괴로움에 이곳 공터로까지 흘러온 모양입니다. 하..... 그동안 고아원 일에 치여 사느라 전혀 그걸 느낄 겨를이 없이 살아왔는데, 저라는 사람도 제법 감수성이 풍부한 모양이에요. 해답 없는 고민을 위해 밤새 찬이슬을 맞으며 헤매다니...... 아, 그러고보니 꿈까지 꾸었었죠? 자신을 천사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었습니다. 호기심에 말을 몇 번 나누다보니, 호기심은 확신으로 굳어졌었습니다. ‘이 사람은 천사라기보다는, 그냥 잘생긴 미친놈에 훨씬 가깝다.’라는게 제가 꿈속에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구요? 딱히 하나만 짚어내기엔 너무 이유가 많아서........ 그래도 생각나는 것을 몇가지 짚어볼까요? 일단, 자신을 천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생각하는 지나친 자의식 과잉...... 그리고, 그가 제게 이야기한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발칙한 조롱 등이 떠오릅니다. 기돈님이 그렇게나 의심많은 사람이었다고요? 그쯤이면 거의 허언증에 가까운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도 참 웃기죠, 고민을 해결해주겠다고 온 사람이 고작 한다는 소리가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라.’라니, 이건 마치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두고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비법을 원하는 학생에게 ‘열심히’ 공부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 걸까요?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옵니다. 오죽하면 그런 꿈을 다 꾸었을까요? 확실히, 제 마음이 많이 초조했었나 봅니다. 이런 제 모습이 우스워, 저는 잠시동안이지만 가슴이 뻥 뚫리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는 동안, 해는 높이 높이 떠올라, 저를 가리던 나무 그림자를 제 가슴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그 바람에 눈이 부신 저는 손으로 눈을 가립니다 그런데...... 응? 손바닥이 이상합니다. 성흔이 그렇게 기괴하게 생겼냐고요? 물론......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성흔 이외의 것이 제 팔뚝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소매를 걷어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뭐랄까....... 얼핏 보면 그림 같기도 한데, 그 의미를 알기가 매우 어려운....... 안개? 아지랑이와 같은 흰색의 궤적이 제 팔뚝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상하네요. 문신을 한 기억은 없는데......... 대관절 이게 무엇일까요? ‘이건 백도라고 하는거에요. 지금 당장은 이게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당신의 가치관을 반영해가면서 의미를 가진 무언가로 새롭게 변화할 겁니다.’ 하얀 무늬를 지켜보노라니, 꿈속에서 보았던 그 미친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남자가 제게 말했던 기억들이, 제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라고 해야겠죠.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을 겁니다. 당신 팔뚝에 새겨진 백도를 보면서,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 할 수 있을거에요.’‘그럼, 이것을 가지게 되면, 제가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가요?’ 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귀를 틀어막고 싶어집니다.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싶은데 제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서, 날카로운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모두 먹어버리고 제 귓속에서 왕왕하고 울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꿈을 꾼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어제 제 기억속에 있는 일련의 사건은 정말 꿈이었던 걸까요? 이젠, 그 마저도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꿈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제 팔뚝에 새겨진 하얀 문양은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고 제게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네요. 인간이 만든 도덕적인 잣대를 넘어서서 생각해보세요. 그래야 당신이 가진 고민을 해결 할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개의 주인은 자신이 기르는 개에게 훌륭한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것을 명확히 생각해보는게 어떨까요?’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나고, 저는 다시 한 번 팔뚝에 아로새겨진 그 문양을 바라봅니다. 저는 더 이상 웃음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지부장실에 들어가니,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은 구면이고, 한 사람은 초면이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내 소식을 들었는지 지부장은 걱정어린 인사를 건넨다. “걱정 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말만 들어도 든든하군. 그래도 서있기 힘들텐데 일단 앉지.” 지부장은 내게 자리를 권한다. 나보다 높은 이가 건네는 호의에 나는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는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자네의 의뢰 수행 결과를 심사해, 자네가 크로스로 승진할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야. 일단 일인칭 시점 카메라를 살펴보도록 하지.” 지부장의 말에 찰리는 눈치껏 일어나 조명을 끈다. 윙 하는 팬 소리와 함께 프로젝터가 켜지고, 내 시야에 맞춘 카메라의 영상이 스크린 너머로 투영된다. 지부장은 시가곽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이고, 찰리는 대담하게도 가방에서 팝콘을 꺼내든다....... 좋은 관람태도이긴 하다만,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저러한 행동은 과감이라기 보다는 광기라고 표현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어 그의 행동을 말려야 하는거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냥 그만 두기로 한다. 일단은....... 그는 나를 심사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어쨌거나, 초면의 인물을 포함하여 세 명의 인물들은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는 그 사이에 초면인 제 3의 인물을 관찰한다. 그는 짧게 친 반 백발을 한 사내로, 턱선과 코가 꽤나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특히 희끗희끗한 백발이 섞인 눈썹은 그가 녹록치 않은 세월을 이겨내온 증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강단의 증거와는 별개로, 그의 눈매와 입가는 퍽 부드러워보였다. 뭐랄까...... 푸근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아니 다정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이제껏 적지 않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인상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본다. 누군가 내게 ‘이 사람의 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라고 질문해본다면. ‘니가 해라 개새끼야.’라고 맞받아치고 싶다. 그만큼 한 마디의 말로 정의내리기 복잡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뜯어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이크, 직업적인 병이 도진 모양이다. 인간학에서는 ‘사람은 자신의 인상을 살피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서 자신의 내면을 관찰당하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쳤었다. 일단 그도 심사관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가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그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그는 나를 한참동안 쳐다봤다가...... 스크린으로 시선을 거둔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투영되는 살풍경을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어떤 장면에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표정으로 쓱쓱 필기를 한다. 하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허어’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필기하는 것을 넘어서 입을 닫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프레임 하나하나를 망막 속에 박아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쳐다보기도 했다. 어차피, 이 모든 상황의 결말까지 다 알고 있는 입장으로서는 그닥 흥미가 당기진 않지만, 그 긴 시간동안 달리 할 일이 없기도 하여, 나도 그 영상을 보기로 한다. 1인칭 시점이라 화면이 제법 심하게 흔들리는 것만 제외한다면, 꽤 멋진 액션활극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내가 방금 한 코멘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상을 느꼈으리라고 자신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영상의 화려함과 긴박함에 젖어들어 그들이 이 영상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실 ? 이 영상은 픽션이 아니라 팩트라는 것 ?을 잊어버리지는 않을까하는 것이다. 생각과 판단은 결국 시청자들의 몫이기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겠지....... 영상은 폭발로 인한 쇄설물들이 카메라를 덮쳐 영상이 중단될 때 까지 계속된다. 불이 켜지고, 세 사람은 필기를 마무리 짓는다. 운을 먼저 뗀 것은 지부장이었다. “잘 보았고, 그리고 고생이 많았다는 말부터 하고 싶군. 표현의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카메라로도 이렇게 긴박했는데, 그 당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짤막하게 격려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비평을 시작한다. “몇가지 질문거리가 있는데, 나 말고 다른 패널들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으니, 돌아가면서 질문하는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내 궁금한 점을 해결하려고 하네. 아까 본 장면에서...... 자네와 스벤이 자신들을 추격해온 왕국군과 대치를 했었던 장면이 있더라고. 그런데 그 장면을 지켜보니, 그들과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 뉘앙스가 느껴지던데...... 왜 그랬지?”“가급적이면 불필요한 싸움과 희생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수적으로 우리가 열세이기도 했고...... 의뢰와 관계없는 이들은 언제든지 우리의 고객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고객’이기 때문에, 그들을 해침으로서 향후에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의뢰의 가능성을 닫고 싶지 않았습니다.”“그렇군......” 지부장은 내 말을 듣고는, 메모지에 이것저것을 휘갈겨 쓴다. 그의 표정만으로는 나의 대답이 그를 만족시켰는지 여부를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해봐도 괜찮겠습니까?” 찰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는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에는, 순간적이지만 장난끼와 비슷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일단 잘 봤다는 말씀과 함께........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의뢰 현장을 어찌나 깔끔하게 정리를 해놨던지, 저희가 청소를 할 필요와 이유가 전혀 없더군요. 덕분에, 저희 크루로부터 배부르게 욕을 얻어먹은 것 같은데요........ 아무튼간에, 제가 질문을 하려는건, 비계를 타고 내려가면서 계단에........ 그 뭐지? 니트로글리세린인가요? 폭약을 설치 한 부분에 대한 겁니다. 굳이 계단에 그런 고성능 폭약을 설치할 이유가 있었나요? 이 때문에 당신도 하마터면 죽을 뻔 했었는데 말이죠.”“음...... 일단 저는 그걸 안전장치로 생각했었습니다. 만약 왕국군 경비대들이 조금만 더 합리적이었다면, 저를 더는 추격하지 않았겠지요. 물론 저는 그들의 합리성을 믿고 싶었습니다만...... 만에 하나 그들이 저를 추격한다면 그들의 걸음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폭약을 설치한 것입니다.”“보험이란 말씀이신거죠? 그렇다면, 비계에 다른 종류의 트랩을 설치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예를 들자면 앵클 스네어 같은 것 말입니다. 그 정도 트랩이라면, 당신이 아까 말했던 불필요한 희생을 피함으로서, ‘잠재적 고객을 지켜낸다.’라는 명제를 실현시킬 수 있었을 텐데....... 니트로를 설치하는 바람에, 잠재적 고객이고 뭐고 몽땅 시원하게 날려버리지 않았습니까?”“............” 깜빡이도 안켜고 훅 치고 들어오는 그 질문에, 나는 잠깐동안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찰 리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치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일 끝나면 율무차나 내오는 율무차 셔틀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신차리자. 내 과업에 대해서 정당화 해야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 행동을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걸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위한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우선.......” 나는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정신 차리자.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칼을 들 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말로 하는 싸움 역시, 정신을 차리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제가 사용한 폭약이 니트로인지는........몰랐습니다. 폭약을 사용하는 것은 스벤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폭약이 니트로라는 것을 알았다면, 솔직히 다른 트랩을 사용하는 것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을 하자면, 니트로라는 폭약은, 다른 트랩과 달리 설치가 매우 용이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다른 트랩을 설치한다고 하면........ 시간을 지체하느라 또 다른 대치국면을 맞이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그렇다면, 로키씨 당신은 ‘단지’ 시간을 절약하기위해 당신의 원칙을 포기하는 발언을 한 것인가요?” 나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찰리를 쳐다본다. 녀석은 반쯤은 장난끼와, 반쯤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지금 녀석이 해야하는건 말로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 날카로운 공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 세 명에게 내가 가진 역량을 과시하는 일이니, 결과적으로 찰리는 나를 위해 독설을 하는 셈이다. 나는 평정심을 되찾고 대답을 이어간다. “포기라기 보다는, 차선책의 강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제 잠재적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바로 요원의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알기로는 미숙련 요원을 한 명 육성하는데 15만 파운드가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숙련된 요원을 육성하는데는 더욱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귀중한 재원을....... 임무 수행중에 죽게된다면, 15만 파운드 이상의 돈이 그냥 공중으로 사라져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화장(火葬)을 하니까요.” 찰리는 내 마지막 말이 우스웠는지, 내가 말을 마치기 전에 고개를 수그리며 웃음을 짓는다. 비록 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그의 어께가 흔들리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니, 내 의도가 통했다는 것을 알겠다. 강건한 상대가 비틀거린다. 이때가 결정타를 날려야 할 때임을 알고, 나는 양 손에 쐐기를 들어 마지막 망치질을 한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불필요한 희생을 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상에서 보셨듯이, 그 당시는 이른바 ‘불가피한’상황이었고, 니트로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Channel 2. 아이리스 피곤에 찌든 채 수도원으로 돌아오니, 수사님을 비롯한 수사님을 비롯한 수도원 식구 몇몇이 저를 맞아줍니다. 수사님은 제 얼굴을 보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밤에 들어오지 않았던데, 혹시 밤새 쏘다닌거니?” 저는 죄송하다고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수사님은 그런 저를 만류하시고는 식사라도 하라며 빵과 스프가 담긴 그릇을 건네주십니다. 그런 수사님의 호의를 도저히 저벼릴 수가 없어서, 저는 식탁에 앉기로 합니다. ........사람이 참 간사하죠? 막상 먹을 걸 보니 식욕이 돋아납니다. 신의 선택을 받든, 권능을 행하든, 성흔과 백도라는 표적을 받든, 저도 결국은 먹어야 하는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품위를 지키려고, 스푼과 포크를 잡고 조금씩 떠먹긴 했지만....... 하나 둘 음식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점점 속도가 빨라지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게걸스럽게 스프를 퍼먹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체할라, 천천이 먹거라.”“얼른 먹고 들어갈테니, 지켜보지 않으셔도 되요.”“아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건, 요리하는 사람의 즐거움중 하나란다. 너는 내게 그런 즐거움을 빼앗을 참이냐?” 수사님이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데, 차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저는 조금은 이성을 되찾고 천천이 식사를 이어갑니다. 빵의 퍽퍽한 맛을 부드럽게 해주는 스프가 제 목구멍을 지나, 뱃속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줍니다....... 그 맛은 한마디로 “정말 맛있어요 수사님!”“오늘은 간만에 힘 좀 썻거든, 그걸 바로 알아차리는 걸 보니 너도 사회생활을 제법 수월하게 하겠구나.” 수사님은 빙긋 웃고, 저도 수사님께 미소를 보냅니다. 이렇게 미소를 나누다보니, 간밤에 제 머릿속을 흔든 거대한 고민이 조금은 그 발톱을 누그러뜨린 것 같습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수사님이라면 제가 간밤에 겪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사실, 고지를 전하러 온 천사님은 이 일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왠지 스스로가 이 일을 저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그건 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짐이라, 할수만 있다면 누군가와 같이 짊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기왕이면 저를 잘 알고, 제가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한 분이었다면 참 좋겠지요. “저......수사님.” 수많은 고민과 예행연습 끝에, 저는 스프 그릇에 고개를 쳐박고서 수사님께 입을 엽니다.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으셔서 고개를 드니, 수사님께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응? 왜그러니?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거냐?”“음....... 그게.......실은 저........ 어젯밤 누군가를 만났어요.” 제 말에 곧고 진한 수사님의 눈썹이 꿈틀합니다. “만난다라........ 누구를?”“제 말이 허황되고, 거짓말 같아서 비웃을지도 모르는데........ 천사를 만났어요.” 망설임 끝에 수사님의 눈치를 보려는데........ 수사님은 아무런 말이 없으십니다. 입을 떡 벌리지도, 그렇다고 눈가에 비웃음의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지금 수사님께서는........ 방금 제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시는 것 같습니다. “천.......사라고 했느냐?”“네. 저도 처음엔 수사님처럼.......황당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 사람이 천사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럴 수도........ 그럼, 천사님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느냐?”“.........네?” 처음엔 이런 황당한 소재를 들먹거리는게 수사님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사님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수사님의 반응이 이쯤되니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지는건 제쪽입니다. 아니, 천사라는 화재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거부감없이 들릴 만한 것이었던가요? 지금이 17세기인데....... 이성과 과학이라는 두 말이 이끄는 계몽주의의 시대에 천사라고요! 그런데 이 시기에 천사라는 존재를 의심하는 제가 정신이 나간건가요? “에......그러니까, 제가 천사님을 영접하기 전에, 제가 어떤 고민이란걸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천사님께서 오셔서 제가 가진 고민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셨어요. 전...... 사역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었거든요.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그래서?”“그 분은 제게........ 치열하게 고민을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그리고?”“신께서 제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네가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너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고, 옳은 선택을 하더라도 널 칭찬하지 않을거라고 하지 않았느냐?”“.........어? 그걸 어떻게.”“그것만 아는게 아닐걸?” 수사님은, 아무런 눈치도 주지 않으시고 제 손을 갑작스럽게 꽉하고 움켜쥡니다. 워낙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저는 놀라서 수사님에게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수사님의 악력이 워낙에 센 바람에 저는 빼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바들바들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사님의 양 손이 제 팔뚝을 꽉 움켜쥡니다. 도대체.......왜....... 전 그냥 천사라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머리가 하얘져서 멍하는 동안에, 수사님은 천천이 제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합니다. “........ 나는 너와 마찬가지로 팔뚝에 이런 문신을 새겼던 한 여자를 알고 있었단다.”
Channel 1. 로키 “잘 들었습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는걸 인정해야 할 것 같군요.” 찰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포문에 천을 덮는다. 말과 말이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망망대해에, 나는 내 입이라는 하나의 서핑보트를 벗삼아서 하나의 높은 파고를 멋지게 넘어섰다. 앞으로 몇 개의 파고를 더 넘어야 해안가로 당도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느긋해지려는 차에, 이번에는 지부장이 펜을 놀리던 것을 멈추고 날 본다. 이번에는 지부장이 치고 들어 올 요량인 것 같다. “난 조금은 부차적인 것을 묻도록 하겠네. 왜 비서관에게 더 많은 호의를 받는걸 거절했던거지?”“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지부장이 이런 질문을 하니 실망스러웠다. 왜 지부장은 내게 이런 시시껄렁한 질문을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지부장이 한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한 일이지만, 기왕 나온 질문인지라 나는 그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질문자의 클래스에 비해 질문의 질이 워낙에 저급한지라, 대답 역시 늘인 노력에 비해 허접하게 포장 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비서관을 매수하는데 꽤 많은 돈을 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었고, 이런 일을 할 동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녀는 수상의 그림자라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수상관저의 구조도 꿰뚫고 있었어. 만약 네가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면, 그녀는 너를 타깃으로 데리고 가는 것 뿐 만 아니라, 경비병이 들이닥칠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었고, 나아가 탈출루트까지 제공해 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이기만 했다면 너는 굳이 수상관저를 반쯤 박살내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네.” 지부장은 시가통에서 굵직한 시가를 하나 꺼내선 냄새를 맡는다. 눈을 감은채 냄새를 음미하던 그의 코가 시가의 끝에 다다르자, 눈을 치껴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런 날카로운 시선을 도저히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귀는 어쩔 수 없었기에........ 그의 지적이 시선만큼이나 날카롭게 내 폐부를 파고든다. ........독사와 같이 지혜롭고, 사냥개와 같이 끈질긴 인물이다. 그래, 이번 의뢰를 수행한 의도는....... 크로스로서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뢰를 수행하면서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혹은 의사결정 능력을 심사관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요원과 차별되는 크로스의 덕목이었는데...... 후회가 든다. 왜 이제야 그가 사소한 것을 화두로 삼았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내 자신도 한심하다. 왜 나는 이렇게 내 발목을 잡는 ‘사소한 것’을 그때 간과했던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려고 애를 써봐도, 지부장의 말에 반박을 할 어떠한 말도 찾지 못하겠다. 빌어먹을....... 두 번째 파고에 비한다면, 첫 번 째 파고는 애교에 불과했다. 귀신은 속여도 클래스는 못속인다더니....... 남들로부터 헐렁하다고 비웃음을 사기 일쑤인 그가 지부장 자리를 꿰찬 건 결코 고스톱을 해서 딴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 내 지적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가?”“.........없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릴때는, 침묵을 지키며 ‘당신에게 졌다.’라는 신호를 보내는게 상책이다. 사실, 이렇게 아랫사람을 말로 제압하는 것이, 상사로서의 작은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내 생각이 맞다고 동의라도 하려는지, 지부장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와 비슷한 비틀림이 배어나왔다. 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자네처럼 ‘기술’이 좋은 요원은, 매년 한두명씩은 꼭 나온다네. 하지만 기술을 넘어서서 ‘통찰력’이 좋은 요원은 5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네.”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수사님의 말씀에 귀를 의심하면서 당신의 말씀을 곱씹어봅니다. 예전에 저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요? 그럼 그 분은 저와 같은 고민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옛날에 이와 같은 고민을 하셨다면....... 그에 대한 해답을 얻지 않았을까요? 생각이 이에 이르자,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이 짊어져야 하는 짐을 어떻게 짊어졌으며, 어떤 해답을 얻었던 걸까요? “저......와 같은 문신을 한 사람을요?”“응. 그녀는 나와 같은 입교 동기였었어. 비록 머리가 총명한 편은 아니었지만.......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것에 겁을 먹지 않았단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의 끊어지지 않는 물음에 짜증을 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선생님이 그녀를 아낄 수 밖에 없었단다.”“........”“6년간의 신학과 생활을 끝나고, 나는 수도원으로 갔고, 그 여자는 수녀원으로 갔단다. 그래도 입교 동기라고 해마다 동창회마다 만났고, 때로는 교단에서 하는 몇 가지 일들을 함께 추진하기도 했었단다. 사회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지독한 고집불통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정말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었어.”“고지식.......했다라.”“그래,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될 리가 없었을 텐데도 그녀는 정말 문자 그대로 ‘불도저 마냥’ 무식하게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더구나.” 수사님은 어느새 제 팔뚝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회상에 잠겨듭니다. “상당히 겁이 없었던 분이었나봐요.”“글쎄......... 네 생각이 이해는 되,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너처럼 말하긴 하더구나. 뒤에선 그녀에 대해서 온갖 말이 오갔었지.. 벽창호라는 말은 차라리 애교스럽기라도 하지. 귀머거리라던가, 버버리라던가.........때로는 미친년이라는 악담까지 그녀에게 쏟아졌단다. 하지만, 그걸 듣고있어야 하는 내 생각은 조금 달랐어. 내가 아는 그녀는 결코 귀를 먹지 않았단다. 또 남들이 자신에 대해 주고받는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어. 그녀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곧잘 흘리곤 했단다.”“........”“내가 아는 한 그녀는, 눈물이 많은 여자였어. 하지만, 자신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단다.” 수사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강인하면서.........애처로운 사람입니까. 과연.......전 그렇게 그녀처럼 신념을 고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나약한 사람인데......... “수사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정말.......멋진 분인 것 같아요.”“글쎄,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너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입장에서는.......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구나. 한마디로 꼴사나웠단다. 마치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기를 쓰고 덤비는 애같다고 해야 할까? 너도 고아원에 있으면서 애들 싸우는 건 많이 봐왔을 테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지?” 수사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수사님 말씀대로 애들 싸움이야 많이 봐왔죠. 보면 때로는 그런 친구들이 있긴 해요. 마음이 여려서 친구들에게 함부로 못하는 아이들........ 그런 친구들은 아이들 사이에선 ‘조금 시피보이는’축에 들어서 곧잘 무시를 당하고는 합니다. 정말 어지간한 일에도 웃어넘기는 밝은 아이지만...... 참다 참다가 화가 폭발하면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더라구요. 겁은 먹어서 질질 짜는데.......화는 나니까 주먹은 휘두르고....... 그러다가 선생님이 나타나면 꺽꺽 울음을 터뜨립니다. 딱 봐도 견적이 나오는 싸움이죠. “하지만...... 우스운게 무언질 아느냐? 그녀는 내게 항상 이런 말을 입에 담곤 했단다. ‘정말로 겁이나면 도망쳐도 괜찮아.’라고 말이야......... 어불성설이지. 자신은 결코 도망치지 않으면서, 남보고는 도망치라고 하다니........” 수사님의 얼굴엔 쓸쓸한 표정이 감돕니다. “그런 여자였어....... 테펠린은 바보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