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우리는 앞을 막아서는 폭도들을 밀쳐내고 최대한 빠르게 현장에서 벗어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진압대가 우리의 뒤를 바짝 쫒아오고 있는데, 앞에는 폭도들이 우리를 막고 있다. 이는 마치 두 개의 큰 파도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나룻배 위에 탄 것 과 같은 형상이다. 죽을 맛이라는걸 맛볼 수 있다면, 아마 지금 느끼는 감각이 아닐까?
“악!”
내게 어께를 부딪친 폭도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 폭도는 여성이었는데, 품에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그녀가 나동그라지면서 고양이까지 함께 땅에 패대기쳐질 뻔 했으나, 고양이는 재빠르게 여자의 품에서 폴짝 뛰어 안전하게 땅에 착지했다. 녀석은 제 주인을 치고간 이를 향해서 꼬리를 세워가며 그르렁거렸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이 난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라고 빠르게 속삭인 뒤에, 얼른 자리를 뜬다. 이 광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나는 폭도들 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내 앞에 나타난 폭도를 제끼고 난 뒤에야 광장에서 벗어나 골목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숨이 가쁘다.
나는 내게 남은 힘을 쥐어짜서 품안의 칼을 꺼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건 어쩔 수가 없었는지 손가락이 덜덜 떨려 칼자루가 내 손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꼴사나운 모습이라니...... 이런 내 추한 꼴을 다른 요원들이 보았다면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 것인가?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다시 한 번 품을 뒤져 코카잎을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이파리의 알싸한 향이 콧잔등에 어릿어릿하면서 찡한 느낌이 들었다.
지독하기 그지없지만, 효과는 확실해서 내 몸같지 않았던 내 몸이 다시 한 번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칼자루도 내 손에 확실하게 감겼다. 나는 마약의 효과에 대해 다시한번 실감하고 있었는데, 골목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이런, 불청객이 찾아온 모양이다. 얼른 몸을 숨겨야 할텐데........ 이 상황에서 몸을 숨길 곳이라곤 쓰레기더미밖에 없었다. 나는 코를 틀어막고, 쓰레기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골목 너머로 온 것은 진압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료요원도 아니었다. 골목에 모습을 들어온 것은 바로
“헉........헉! 어디로 갔지?”
어리버리한 수녀였다.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두 번째 악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입니다. 원장수녀님을 해친 그 남자였어요. 장례식 때 언 듯 보고 다시는 못 만날줄 알았던 독사의 자식이, 거짓말처럼 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달려가 그의 뺨을 세게 때려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뺨을 맞고 그의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 해 진다면, ‘왜 그랬냐고, 그럴 수 밖에 없었냐고.’ 따지고 싶었지요.
저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리 비켜!”
그는 제 어께를 툭 쳐버리고는 그대로 달음질을 쳐 도망가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전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수 밖에 없었지요. 제 품에 안겨있던 냥사장도 바닥에 떨어졌는데, 고양이 특유의 운동감각 덕분에 다치진 않았답니다. 냥사장은 그에게 앙칼지게 그르렁 거렸지요.
그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엎어진 저를 바라보았고, 저는 엎어진 상태에서 그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저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지요. 얼굴은 붉고 검은 도료로 칠해져 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붉은 눈동자 만큼은 확실히 알고있었습니다. 이젠 확신이 들었어요. 이 남자는 그입니다.
그는 저를 알아보았을까요? 그리고 잠시나마....... 미안함이라는 마음을 가지긴 했을까요? 그는 입을 달싹거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인파 사이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저는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대로 그를 보낼거야? 아직 묻지 못한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마자, 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저는 냥사장을 제 품에 끌어안고, 그를 뒤쫓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달린다면, 그를 따라갈 수 있을거에요. 저는 제 앞에 밀려드는 사람들을 제치고 또 제쳐가며 그를 쫓아 달려갔습니다. 저기 멀리 그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마치 성난 황소처럼 사람들을 밀치고 밀치면서 달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걸어간 자리에는,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길바닥에 나자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답니다.
저는 그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가면서 조심해 가면서 그의 뒤를 밟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사람을 제치고 골목으로 들어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도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응?”
그곳에는 쓰레기 더미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골목을 가로막은 철조망이 보입니다. 그 걸 넘어서 도망을 간 걸까요? 생각 같아서는 저도 철조망을 넘어서라도 그를 쫒아가고 싶었지만...... 품안의 냥사장이 마음에 걸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저는 허탈감에 다리가 풀려버렸습니다.
Channel 1. 로키
나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예의 주시했다. 그녀는 뒷골목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다리가 풀려버렸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어께가 들썩이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도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 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이 품안에 들려있던 고양이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햝아먹었다. 아마 고양이의 신체조건상 짠 음식을 먹지 못했을 테니, 그이로서는 그녀의 눈물에서 나는 짠맛이 정말로 유혹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고양이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고양이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할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일로 그리 슬퍼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슬퍼하는 까닭이 왠지 나에게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쓰레기더미에서 나올 수 없었다.
“허허, 더는 도망칠 데가 없지? 이 개새끼야. 아까부터 요리조리 도망다니면서 우리들 염통에 장작을 지피시던데, 이제 어떻게 뒷감당을 할지 적지않게 기대가 되는걸?”
“뒷감당은 지미, 형 나이도 있는데 너네랑 계속해서 술래잡기를 하고 앉아있어야겠냐? 형이 배려를 해주었으면 눈치껏 놓쳐줘야 하거늘, 눈치 없이 여기까지 따라오는걸 보니 형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니들이 온 길이 황천길인줄은 알고 따라온 거지 그럼 오늘 니들은 단체로 병풍 뒤에서 손님맞이 하는 거야.”
골목길 너머로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정황상 우리 측 요원이 진압대에 붙들린 모양인데, 우리 측 요원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 이런 제기랄, 펜릴 녀석이다. 이 어리석고 멍청한 자식이 여지껏 진압대를 떨쳐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녀석이 진압대에게 도발을 놓는걸 보니, 도망칠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짖는 건 개지, 사자는 짖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도와야 한다. 그런데........
“히...히익!”
문제는 그녀다. 이 멍청한 여자가, 겁에 질려서 도저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붙박혀 있는 바람에, 도저히 움직일 도리가 없다. 얼씨구? 이젠 눈물을 질질 짜면서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다가가서 대답할 리가 없는 신에게 기도하는걸 집어치우고, 이 자리를 당장 뜨는게 그녀의 신상에 유리할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녀에게 내 위치를 노출하는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드는 최악의 수가 될 수가 있다. 나는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나 쉬고 있을 수 밖에........ 마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결국 냉전이 열전으로 변한 것일까 칼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자신의 눈앞에서 칼날이 서슬 퍼렇게 번쩍번쩍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웅크리며 흐느꼈다. 그래도 그 판국에 자신의 몸을 사리고 싶었는지 입을 틀어막는건 잊어버리지 않았다. 허허, 인간의 생존의지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사람에게 감정이란 길들지 않은 야생마와 같이 통제하기 쉽지 않다고 했지만 그런 야생마조차도 생존의 위협 앞에서는 얌전해지는 모양이다.
고양이는 주인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의 품 속에서 잔뜩 몸을 움크렸다. 나는 나대로 귀를 기울여 골목 너머의 사태를 유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거친 숨소리가 그 꽁무니를 쫒았다.
“허억.......허억........”
“푸....... 뭐 이런.......”
“히히히......몰랐어? 세상일은 다......그래! 운이 7이라면 기예가 3이지. 난 그 7이 존나게 좋은거고, 너네는 7이 영판 별로인 모양이다.”
"이 개새끼가!"
“왜? 한 대 치고 싶냐? 치고싶으면 드루와봐! 먼저간 친구들 길동무라도 해주려면 어서 드루오라고!”
펜릴의 목소리에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모조리 쥐어짜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큰일이다. 가뜩이나 수적으로 불리한데 저렇게 체력이 달리기라도 한다면........ 이젠 앞뒤 가릴 계재가 아니다. 내 목숨이 위태롭다는 수다쟁이의 만류가 내 몸을 붙잡기 위해 손을 허위허위 저어보지만, 나는 그 손을 팽개친다.
나는 쓰레기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헉!”
그녀는 나를 발견해서 화들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다. 나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그녀에게 달려가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지르면 죽인다.”
Channel 2. 아이리스
그곳엔 쓰레기 더미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골목을 가로막은 철조망을 넘어가고 싶었지만, 냥사장 때문에 여의치 않았어요. 아무래도 그는 철조망을 넘어서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허탈감이 들어 다리가 풀려버렸습니다. 지금 그를 놓쳐버린다면, 언제 또 그를 다시 만나게 될까요? 아직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냥사장은 제 품에서 절 올려다보니, 위로라도 하고 싶었는지 제 얼굴을 햝아주었습니다. 하하,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일까요? 도둑고양이와 수도원을 방문한 수녀가 인연을 맺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교류하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마술같은 일인가요.
저는 냥사장의 마음이 고맙고 따뜻하여, 저도 그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었습니다. 냥사장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낮은 소리로 가르릉 거렸습니다. 그런데,
“허허, 더는 도망칠 데가 없지? 이 개자식아. 아까부터 요리조리 도망 다니면서 우리들을 적잖이 약 올리더니, 이제 어떻게 뒷감당을 할거지?”
“뒷감당 같은 소리하고 있네. 형 나이도 있는데 너네랑 계속해서 술래잡기를 하고 앉아있어야겠냐? 형이 배려를 해주었으면 눈치껏 놓쳐주는게 인지상정이거늘, 눈치 없이 여기까지 따라오는걸 보니 형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니들이 온 길이 황천길인줄은 알고 따라온 거지 그럼 오늘 니들은 단체로 저승꽃 꺾는거야.”
몇 사람이 다툼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는데, 이내 요란하게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뭘까요? 칼부림 사건이 벌어진 거 같은데....... 요란한 욕설, 그리고 칼부림 소리가 들리자, 저는 순간적으로, 이곳에 저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해하자마자, 제 몸은 대나무가 바람에 휘청이는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지요.
소리를 질러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냥사장을 끌어안고 오들오들 떠는 것이 다였지요. 비명소리가 들릴 때 마다 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어요. 그리고 쉴새없이 기도문을 읊조렸답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네........ 아버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내 오른........흑!”
아아, 이젠 눈마저 절 배신하려고 드는지, 방정맞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무서워요....... 꼴사나운건 알지만, 정말 무서워요........ 누구라도 나타났으면, 절 지켜주었으면........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네 옆에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그 순간, 쓰레기 더미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었지만, 그 무언가는 제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오기도 전에 재빠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소리 지르면 죽인다.”
나지막하지만,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그 목소리......... 무언가는 바로 그였습니다.
Channel 1. 로키
내게 입을 틀어막힌 그녀는 놀라움에 눈이 똥그래져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조용히 하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리둥절 해 보였지만, 내 말을 얼추 알아듣기는 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는, 그녀에게 협조해줘서 고맙다는 표시로 고갯인사를 한 뒤에, 그곳으로 향했다.
예상했던대로, 그곳은 난장판이었다. 진압대중에 한 녀석은 이미 길바닥에 나자빠져있었고, 펜릴 녀석은 복부에 피를 흘리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마, 녀석의 목숨을 거둬가는 과정에서 상대에게서 강한 저항에 부딪친 모양이다. 하기사,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나는 펜릴과 눈을 바라보면서, 소리를 죽여 오른쪽 녀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펜릴은 내가 취한 제스쳐를 본 뒤에, 장단을 맞추려는지 단검을 휘둘러대면서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들, 드루와! 드루오라고!”
녀석들은 ‘이놈이 쥐약을 먹었나, 왜이리 지랄병이지?’라고 생각했는지, 그 기세에 움찔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들의 발 뒤꿈치가 내 발가락에 닿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응?”
나는 녀석들의 인사를 받기 전에, 녀석의 얼굴을 잡고 거칠게 돌려버렸다. 오도독하는 소리와, 내 손에 가벼운 진동을 남기고, 녀석의 목이 180도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렇게 첫 상대의 목숨을 거둔 뒤에, 그 시신을 쓰러뜨리고 두 번째 상대의 팔을 잡았다.
녀석은 내 손을 뿌리치기 위해 거칠게 저항을 하다가.......
“어.......어헉!”
허탈한 한숨을 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녀석의 등에는 펜릴의 단검이 꽂혀있었다.
“늦었잖아 병진아.”
“늦기는, 너야말로 띨띨이 같이 붙들리고 지랄병이냐.”
“어허! 전략적인 유인 전술이여. 쟤들은 낚인거고.”
“유인한 거 맞나? 당한게 아니라?”
“했지이~.”
우리는 서로를 공격하며 티격태격하다가 허허 웃어버렸다. 다행이다. 어쨌거나, 소중한 동료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해낸 것이 아닌가.
나는 펜릴의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그의 옷을 걷어보았다. 이 머저리는 담대한 척을 한답시고 ‘남자가 내 옷을 벗길 날이 올 줄이야. 최악이다.’라고 씨부렁거리다가, 옷이 벗겨지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녀석의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야, 씨팔 새끼야. 그만 애무해라. 질질 싸기 직전이여.”
“드러워 죽겠네. 이쯤 되면 입 다물 때도 되지 않았어?”
드디어 녀석의 옷이 벗겨지고 맨살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도 모르게 큭 하고 헛숨이 새어나왔다. 녀석의 옷이 피칠갑이 되었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을 하긴 했다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힘들어 뵈냐?”
녀석은 내 표정에서 최후의 순간이 임박했다는걸 짐작했는지. 힘겹게 내게 속삭였다. 아까의 기세와 달리 녀석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닌데? 존나 멀쩡한데?”
“멀쩡하기는, 나도 대충 눈치깟어.”
녀석은 숨을 쉬기가 힘든지 히히히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내 기침과 신음으로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래 형이 솔직하게 이야기 해줄게. 유인 당했다. 제기랄, 그놈이 생각보다 제법 총명하더라고.”
“갑자기 왜그래 임마. 치료받으면 이까짓 상처따위는.”
“약통있어? 없는거 다 알어.”
“야 임마.”
녀석은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야, 나랑 내기하나 할까?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날 어떻게든 살리는 거야. 뒷면이 나오면, 지금 날 죽이고 도망쳐.”
“뭐래? 개소리 하지마라.”
“운에 맡기자 이거야. 혹시 아냐. 이 동전에도 앞면이란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내가 그따위 개수작을.......”
“셋 하면 던진다. 잘 봐........하나........셋!”
이 얄미운 자식은, 내가 어떻게 대처하기도 전에 휙하고 동전을 던져버렸다. 동전은 하늘을 날았고,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볼 것도 없이....... 뒷면이다.
“히히, 내가 이겼네? 미안하다.”
녀석은 씩하고 웃더니, 단검이 들린 내 손을 꽉 잡더니, 그대로 단검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감정을 잃어버린 나지만........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동전은 팁이여. 받아둬.”
“........야.”
“........”
“장난치지 말고.”
“.......”
“야!”
“........”
“야!”
Channel 2. 아이리스
그 남자가 사라진 뒤에, 저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고, 내 머릿속으로 납득하지 않으면, 도저히 몸이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답니다. 자.......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그 남자를 만났어요.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는데...... 전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요. 그거밖에는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내 입을 틀어막고, 나지막하게 제게 ‘조용이 해라.’라고 속삭였습니다.
그 말에, 저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조심스럽게 제 입에서 손을 뗀 뒤에, 고갯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지요. 그렇다면 그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제 몸은 ‘이만하면 이해가 되었다.’라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수도관에 물이 흐르기 시작 한 것처럼 몸에는 피가 다시 돌기 시작한 것 같아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은 시나브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리고, 벌어진 턱이 다물리지 않지만, 저는 벽에 기대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어요. 품속의 냥사장은 제가 걱정스러웠는지, 나지막하게 야옹 하고 소리를 내었습니다.
“괜찮아.......괜찮아.”
“.......야옹.”
“이젠, 그에게 물을 수 있어.”
“........”
냥사장은 그 똥그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 노오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어요. 냥사장은 눈을 찌푸리고는 제게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마치 제게 ‘그곳으로 가지마. 후회할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내가...... 그곳으로 가질 않길 바라는거야?”
“.......”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야옹!”
냥사장은 대답하는 대신에, 철조망을 턱짓으로 가리킵니다. 저곳을 넘어서 도망치라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곳을 넘으려면 냥사장과는 이별을 해야 합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미안해, 하지만 그럴 순 없어. 그에게 해야 할 이야기도 많고........ 그리고 너를 버릴 수는 없는걸. 너도 버려지기는 싫잖니.”
“........야옹.”
냥사장은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금 턱짓으로 철조망을 가리켰습니다. 자기는 버려져도 상관이 없다는걸까요? 냥사장은........ 왜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걸까요? 수녀원에 와서는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아이였는데, 저는 이 아이가 그렇게 속이 깊은 친구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냥사장에게 그동안 오해를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저를 걱정해 주는 것이 대견하기도 해서, 그의 턱을 쓸어주었습니다.
“미안해, 후회해도 상관없어. 아마 지금 저곳으로 가지 않는다면, 난 더 큰 후회를 하게 될거야.”
“.........”
냥사장은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것이 답답했는지, 제 가슴을 종종주먹으로 통통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냥사장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냥사장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후회할지, 하지 않을지는 네가 한번 지켜보지 않을래?”
저는 조심스럽게 벽에 기댄 등을 일으켜 두 다리로 땅에 섰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마치 처음 걸음을 떼는 아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보자. 냥사장.”
저는 때로는 불안불안하게 휘청이는 걸음을 벽을 짚어가며 정돈하고는, 천천이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골목 밖에는, 진압대와 시민들의 충돌이 벌인 상흔이 거리 곳곳에 널려있었습니다. 건물은 부서지고, 쇼윈도는 박살이 나, 유리조각이 길거리에 위협스럽게 널려있었습니다. 가로수는 불타고 있었고, 그리고........
“윽.........으윽!”
“.........”
“윽.......흑!”
“.........”
그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의 시체를 부여잡고 말입니다. 그의 품에 안긴 사내는, 평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맞잡고 있었고........ 그 맞잡은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는 단검이 들려있었습니다.
“........”
“큭........”
그의 어께는 흐느낌 때문인지 들썩이고 있었고, 은빛 머리칼은 힘없이 축 늘어져있었습니다. 그를 그렇게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습이........ 유난히 작고 여려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톡!”
저는 그에게 다가가다가, 머리 위로 차가운 감촉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정신없이 거리를 행진하느라, 진압대와 부딪치느라, 사람의 장벽을 넘은 괴물들에 놀라느라, 그리고 그를 뒤쫒고, 허탈감에 주저앉느라. 칼부림 소리에 몸을 웅크리며 기도문을 읊조리느라 깨달을 새가 없었는데........ 오늘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있었습니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되돌아올 모양입니다.
“.......톡!”
“.......”
“톡!........토톡!”
빗방울이 한 두 방울 제 머리위로, 이마위로, 어께위로 떨어집니다. 아아..... 오늘은 비가 내리려나 보네요. 저는 그에게 다가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가만이 응시했습니다.
“........비가 내리네요.”
“.......”
“죄악으로 더럽혀진 우리의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