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비가 내렸다. 12월의 차가운 빗방울이 처음엔 머리칼에, 그다음은 어께에, 세 번째로는 손등에 떨어지더니, 갑자기 빗줄기마냥 온몸을 적셨다.
나는 빗줄기의 차가움 속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펜릴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 머리칼을 적신 빗방울은 내 머리칼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녀석의 뺨 위로 떨어졌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시시를 투약받을 때 보다 더한 환각작용이 내 의식에 개입을 한 것 같았다. 그래, 어쩌면 지금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은 모두 환각일 지도 모르겠다. 이 환각에서 깨어나면, 나는 땅바닥에 퍼질러 누워있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고, 펜릴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멍청아 잘 잤냐?’라고 말하면서 내 머리통을 찰싹 때릴지도 모르겠다.
“짝!”
별안간 내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가는 느낌이 들면서 나의 왼쪽 뺨이 불에 덴 듯이 뜨거워졌다. 펜릴 이새끼, 말하기가 무섭게 뺨을 때리는구먼 허허허.
“이봐요! 정신좀 차려요!”
내 귓전에는 높은 주파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펜릴 녀석의 목소리가, 이렇게 높았던가 의문이 들었다.
“이봐요, 아저씨!”
이번에는 내 얼굴이 오른쪽으로 홱하고 돌아갔다. 이제는 반대쪽 뺨마저 얼얼하다. 마치 애벌레가 내 볼 위를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개를 드니, 내 눈앞에 펜릴이 아닌 다른 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어....... 그렇군, 어리버리한 여자다.
“이제야 날 바라보는군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의 뉘앙스가 담긴 근육의 궤적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가, 내가 자신을 올려다 본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내 어께를 잡더니 앞으로 뒤로 흔들었다.
“일어나요.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구요!”
그녀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입을 벌려 내게 뭐라고 뭐라고 지껄였지만, 그녀의 말은 마치 외국의 노랫가락처럼 아련하게 들려와 내게 의미로서 다가오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뭐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구요! 아오 이 답답한 남자야!”
그녀는 제 가슴을 탕탕 치더니 펜릴을 잡은 내 손을 홱하고 뿌리쳤다. 아...... 녀석의 목이 힘없이 꺾이면서 바닥에 널부러졌다. 내리는 비가 만든 웅덩이에, 녀석의 얼굴이 쳐박혔지만, 녀석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야...... 얌마. 그러면 네 콧구멍에 물이 잔뜩 들어가잖아. 빨리 일어나라고.
“일어 좀.......나라구요!”
그녀는 내 멱살을 잡고, 날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나는 펜릴을 향해 손을 허위허위 저었지만, 녀석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녀는 내 팔을 제 어께에 올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허허, 보기보다 힘이 좋은 여잘세? 그래, 꿈이라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도 놀라울게 없지뭐. 그녀는 끙하는 소리를 내며 제 몸을 일으켜 몇걸음을 떼더니,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잇사이로 끓어오르는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고.......이게 뭐하는 꼴이람. 차라리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Channel 2. 아이리스
커먼 브룩에서 이스트 민스터까지의 길은 제법 멀었습니다. 특히나, 장정 한명을 어께로 받치고 가려니 유난히 힘들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때아닌 중노동에 12월의 차가운 비가 온 몸을 적셔도, 저는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와하는 소리가 울려퍼질 때 마다, 저희는 쓰레기더미에 몸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여졌지만, 그런짓도 세 번이 넘어가니, 이제는 길을 걸을 때 마다 쓰레기더미부터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자연은 인간에게 상황을 제공하고, 인간은 거기에 적응을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하하, 살면서 제가 쓰레기더미에 몸을 던지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요.
어쨌거나, 저희를 따라오던 마지막 추격자를 따돌린 뒤에, 저는 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려보았습니다. 그의 풀린 동공은 여전히 초점을 찾지 못했지요. 저는 한숨을 쉬고, 쓰레기더미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제 앞에는 수녀원으로 가는 언덕길이 솟아있었습니다. 저는 혹시나 그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다시한번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이봐요, 정신이 좀 들어요?”
“...........”
그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에는 먹장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붉게 투영되어있었습니다. 하하, 이거 원 돌부처와 마주 앉아서 뉴타운의 떡볶이와 니카라과공국의 족벌 독재 정치에 반한 니카라과 혁명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저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는 일을 반복하는 걸 그만두고 그를 다시 들쳐 업었습니다. 아이고, 이 고생스러운 노릇을 또 해야 할 노릇입니다.
저는 거진 기어가다시피 하여 그를 수녀원으로 가는 계단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이 계단을 보니, 몇 달전 그와 함께 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몇 달만에 이 곳에 다시 돌아오니, 감회가 사뭇 새롭겠어요?”
“.........”
그는 대답이 없었고, 저는 그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아마 그 때로 다시 돌아갈수만 있다면, 당신의 엉덩이를 뻥하고 걷어찼을지도 모르겠어요. 하하......”
“.......”
“생각 같아서는 당신을 이대로 수녀원에 데리고 가는 대신에 수비대에 넘겨버리고 싶어요. 아니, 그 전에 제 속이 시원해질 때 까지 당신을 두들겨 패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난.......”
“.......”
대답 없는 이에게 혼잣말이라니, 제 자신이 참으로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여, 저는 더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아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갔다가는........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제 어께에서 내던져버리고 그를 정말 두들겨 팰지도 몰라서 그만 두었다는게 더 솔직한 심정이겠지요.
저는 심호흡을 하고, 어께를 추슬러 그를 끌어당겼습니다. 제가 걸음을 뗄 때마다 그의 어께는 가녀린 가지에 매달린 홍시마냥 대롱대롱 흔들렸답니다. 서리를 맞은 은빛홍시.......를 보는 것 같았어요.
“학.......학.........학.......”
“........”
“........그냥 지금 딱 한 대만 때릴까?”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미네요. 어머니같은 원장수녀님을 헤친 이 사람을 저는 대관절 무슨 이유로 구하기 위해서 기를 써야만 하는 걸까요? 좋아요. 종교인으로서의 자세라고 해둡시다. 그래도, 모름지기 세상에는 공짜라는게 없다고 하거늘...... 원장수녀님의 원수에게 뺨 한 대만 때리고 목숨으로 퉁을 친다면,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뺨을 제게 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올려 그의 뺨에 윤곽을 대어보았습니다. 이정도 거리에서, 이정도 각도로, 이정도 세기로 때린다면....... 정말 찰지게 들어가겠지요? 저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의 뺨을 향해 제 손을 뒤로 틀었습니다.
“빡!”
.......아차
Channel 1. 로키
“어이, 정신 좀 차려라.”
“........”
“야!”
“.......”
“야 이 병신아, 손 짤리기 전에 얼른 눈 안뜨냐?”
나에게 윽박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날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어.......어?”
“뭐 이 병신아.”
나는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펜릴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으려고 하는데...... 그는 화들짝 놀라 팔로 얼굴을 가리고 날 향해 발길질을 했다.
“뭐, 뭐야 시팔! 칼 닦다 말고 뭐하는 지랄병이여!”
“응?”
난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가,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에는 고무장갑이 씌여져있었고, 거기엔 비누거품이 잔뜩 묻은 칼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입성도 제법 볼만했다. 앞치마에 고무장갑이라니........ 거기에 칼을 왜 닦아?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내게 유입되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있는 동안, 펜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다 살다 칼 닦다가 조는 놈은 처음보네. 침 좀 닦아 멍청아. 아주 드러워 죽겠네.”
그의 말에 나는 비로소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래, 우리는 선배들이 의뢰를 마치고 반납한 칼을 소제하고 있었다. 허허,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우리 같은 생 초짜가 크로스가 되는 꿈을 꾸다니, ‘기지도 못하는 게 날려고 든다.’더니, 하여튼 나란 놈도 웃기다. 이곳에 온지 한 달도 안 된 녀석이 뭘 안다고 그런 꿈을 꾸었을까? 그것도 벌건 백주대낮에 말이다....... 꿈치고는 제법 생생한걸 보니, 나란 놈은 상상력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상력도 경기가 있다면, 국가대표로 나가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겠다.
그래도, 이 얼마나 다행인가. 꿈속에라도 친구가 죽는 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아닌가.
나는 아직도 지금의 행복이 믿기지 않아 펜릴에게 운을 띄웠다.
“야, 내가 어떤 꿈을 꿨는지 아냐?”
“어이고, 그 와중에 꿈까지 꿨냐? 순발력이 대단하셔?”
“내가 크로스까지 올라가는 꿈을 꿨다니까?”
“확실히 꿈이 맞구먼, 너 같은 병신이 크로스라니.”
“.......그 와중에 넌 떨어졌더라.”
“거기서부턴 니 소원 아니여?”
“근데, 너랑 같이 의뢰를 맡았는데, 니가 그만 죽어버렸지 뭐냐. 그러니까 임마 자고로 요원이란 심신의 수련을 통한 자기발전을 끊임없이 해야 하거늘, 맨날 이상한 소리나 씨부리고 말이야. 너도 이 새끼야. 이제 정신 좀 차려.”
“........”
“아, 그거? 그거 꿈 아니야. 이게 꿈이지.”
Channel 2. 아이리스
길고 긴 인내와 고통을 견뎌내고, 저는 마침내 그를 제 방의 침대에 누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온몸은 땀인지 비일지 모를 액체에 축축이 젖어버렸고, 근육은 뜨겁게 익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리고 온몸의 열기는 눅진한 옷속에 갇혀, 빠져나갈 곳을 찾아 몸부림 치고 있었답니다.
전 우선 그의 옷을 벗기고, 침대 이불보로 그를 꽁꽁 동여맸습니다. 그는 갑갑한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몸을 뒤척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참 뜬금없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잠버릇이 참 예쁜 사람이네요.
전 그가 도중에 깨지 않길 바라며, 갈아입을 옷가지와, 벗겨놓은 그의 옷을 챙겨 샤워실로 갔습니다. 다행이 샤워실을 가는 동안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샤워실에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펌프를 내리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쏟아집니다. 주무관님께서 오늘은 탱크의 물을 덥혀놓겠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우리들 젊은 수녀들이 집회에 참석한다고 했을 때, 그분은 격려와 걱정으로 우리를 배웅해주셨습니다. 아마 우리가 교구를 떠난 뒤에, 홀로 남은 그는 우리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을 덥혀놓았을 것입니다.
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제 몸에 깃들인 땀과 빗방울을 흘려보냈습니다. 피부에 묻어있던 염분과 눅진한 습기가 씻겨내려가면서, 뜨거운 시원함과, 가슴의 울컥임이 찾아왔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쾌감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신부님은 종교란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종교가 그러하다면, 목욕은 우리의 삶에 묻은 오점과 먼지, 그리고 죄를 씻어주면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제법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제 몸을 씻고 난 뒤에, 전 그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의 옷은 이것저것 찢겨져 거진 넝마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기사, 그런 거친 일을 하는 사람의 옷매무새가 깔끔하다면 그게 더 의아한 일이 아닐 수가 없겠지요. 사람의 옷에는 그 주인의 삶의 흔적이 배어가는 법이니까요. 저는 그의 옷에 물을 적시고, 그것을 쥐어짰습니다. 옷에는 붉은 물이 흘러내려 샤워실 바닥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붉은 물에서 흘러나오는 비릿내음에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지요.
날마다 갈아입는 옷이 그러할 진대, 갈아입을 수 없는 그의 몸에는 이런 냄새가 가실 날이 있을까요?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저는 문득 ‘내가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엄청난 살인마를 이곳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할지는 그 자신만이 알고 있지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실수를 인정하고, 더 큰 화로 이어지기 전에 신고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를, 아니 이 사람의 마지막 인간성을 믿어야만 하는 걸까요?
저는 그의 옷가지에서 더 이상 붉은 물이 떨어지지 않을 때 까지, 그의 옷을 물에 적시고 또 쥐어짰습니다.
마침내 그의 옷에서 투명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한 뒤에, 저는 그의 옷에 남은 물을 모두 쥐어짜고, 다시 한 번 제 몸을 물에 헹구었습니다. 그의 옷을 빠느라 진땀을 깨나 흘렸거든요.
Channel 1. 로키
“무슨.......말이야?”
펜릴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에,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홀린 듯이 녀석을 따라 일어섰다. 나는 펜릴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얼이 빠져 입을 헤 벌리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는걸? 잘 살구, 가끔 이렇게나마 얼굴이라도 보자구.”
“야, 너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허허 참....... 눈치가 없는거냐, 아니면 대가리가 부족한거야?”
녀석은 헛웃음을 짓다가,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겼다. 녀석의 몸에는 평소엔 나지 않았던 비릿한 냄새가 났다.
“한 개피 빌려간다?”
“.......뭐?”
녀석은 씩 하고 웃으며 손가락 사이로 담배 한 개피를 떡하니 꺼내 보인다. 나는 황망히 주머니를 뒤져 담배곽을 꺼내 그것의 개수를 살펴보았다. 한 개피가 비어있었다.
“그럼 빠이다. 나중에 볼 기회 있으면 보자고들.”
녀석은 내가 담배곽을 뒤지는 동안 내 가슴팍을 확 밀쳐버렸다. 그 순간 바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나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를 향해 팔을 뻗어 허위허위 저었다.
“야이 빌어먹을 놈아!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좀 더 시원하게 욕을 하려는 순간, 내 뺨에 뜨거운 것이 닿는 느낌이 들어 나는 황급히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괜찮으세요?”
한 여자가 내 이마에 손을 짚은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헉!”
숨이 가쁘다. 숨을 쉬고 싶은데 허파에 돌멩이가 꽉 들어찬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숨을 쉬기 위해 가슴팍을 탕탕 두드렸다. 이렇게 하면 가슴속에 알박기를 한 이 돌멩이들을 게워낼 수 있을까 했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숨을 쉬기 위하여 격하게 바등바등거리는 걸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괜찮아요.......괜찮아요........”
“으힉! 헉! .......으힉! 힉! 히끅!”
이런 빌어먹을, 내 입에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아니 의지가 있었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었을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꼴이 진정으로 사납다. 이게........ 나라고? 할 수만 있다면 내 뺨을 내 스스로 후려치고, 어디까지 굴러 떨어질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고, 무기력감에 몸이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마치 갓난아기인양 그녀의 품에 매달려,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뿐이었다.
내 얼굴의 근육은 기괴하게 일그러졌고, 마치 마른 걸레에서 물을 짜내듯이, 내 눈시울에는 짭쪼름한 액체가 조금씩 배어나왔다.
나는 울었고, 그것은 매우 꼴사나웠다.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샤워실에서 나와 도망치다시피 제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샤워를 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그가 깨어나지는 않았겠지요? 여전히 인기척이 없는 층계를 올라, 제 방이 있는 5층으로 올라왔습니다. 두근거리는 제 심장소리가 쿵쾅 소리를 내며 크게 들릴 정도로, 복도에는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501호 마르다 수녀의 방을 지나고, 502호의 에바 수녀의 방을 지난 뒤에, 마침내 제 방인 503호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문을 열기전에 잠깐 심호흡을 하고, 문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가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쿨........푸흐으......”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잘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의자에 앉아있던 냥사장은 단잠에 빠져 있다가, 미세한 문 소리에 잠에 깨어 반쯤 감긴 눈을 느릿느릿 껌뻑이며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잘 잤니?”
저는 소리를 죽여가며 냥사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습니다. 냥사장은 앞발을 크게 뻗으며 하품을 하고는 사뿐하게 의자에서 내려왔습니다. 저는 냥사장의 인사에 허리를 숙여 답례를 하고, 샤워실에서 빨아온 그의 옷을 빨래대에 걸어두었습니다. 냥사장과 저의 상항극이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그는 깨어나지 않고 혼곤한 잠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전 빨래를 걸어놓은 뒤에 그의 머리맡에 앉았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인기척이란건 숨기기가 어려운 것인데, 그는 눈썹하나 찌푸리지 않았습니다. 잠을 자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평온해 보였더랬지요.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그저 입을 헤 벌린 그의 모습은....
“이제 보니 당신은 어린아이와 같군요. 순진하고, 세상걱정이라곤 한 점도 없고........”
저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침을 닦아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착한 어린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도 살인은 할 수 있어.”
순간적으로 떠오른 악한 생각에 저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지만, 그것은 마치 끈끈한 가래처럼 제 머리통에 찐득하게 들러붙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한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채 비에 씻겨내려가지 못한 도료가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젠 그가 반인반수의 괴물처럼 징그럽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물이 찔끔 나도록 볼을 세게 꼬집고 다시한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침대에는 무기력하게 누워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책상에서 물휴지 몇 장을 꺼내, 네모낳게 접어 그의 볼을 닦아주었습니다.
“냥!”
물휴지가 그의 뺨에 채 닿기도 전에 냥사장이 무슨 심통이 났는지 제 손을 햘퀴었습니다. 그바람에 저는 화들짝 놀라, 휴지를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물휴지는 그대로 그의 얼굴에 들러붙어버렸습니다.
“왜그래 냥사장?”
냥사장은 대답대신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절 올려다 보았지요. ‘왜 이런 금수같은 놈을 이곳까지 불러들였느냐.’라고 제게 따지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래, 냥사장. 나도 그가 미워. 하지만...... 원장수녀님이라면, 지금의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겠니?”
저는 한숨을 포오 내쉬고, 그의 얼굴에 떨어진 물 휴지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으........히끅!”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언제 깨어났는지 몰라, 허둥지둥 하고 있었는데 그가 침대 맡에서 일어나 저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무언지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지만........ 그는 지독하게 슬펐던 모양입니다.
“흑.......흐........컥!”
그는 가슴이 답답했던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더니, 제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그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괜찮아요........괜찮아.
“으힉! 헉! .......으힉! 힉! 히끅!”
거의 제 몸에 매달리듯이 안긴 그의 등을 쓸어내려주면서........ 저는 그가........ 매우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