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나는 ‘비정한 마음’을 만지작거리면서 동시에 답답이를 지켜보았다. 비록, 그것을 입 밖에 꺼내놓지는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 둘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었다. 아니........ 그 양태를 올바로 묘사하려면 그런 표현으론 조금 부족한 면이 있을 것 같군. 다시....... 내 머릿속에서는 이 둘을 놓고 난장판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답답이를 옹호하고, 다른 쪽에서는 ‘우리’의 안위를 드높이고....... 이 두가지의 생각이 나라는 존재의 행동을 결정짓기 위해 치열한 아귀다툼을 벌였다.
이 난장판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추상적인 사고의 싸움을 언어로 표현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 싸움의 처음은 전쟁터보다는 100분 토론과 같이 나름 격식과 체계를 갖추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다. 하지만, 그 사고의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양되면서, 격식과 체계를 무너지고 지저분한 인신공격으로 퇴보하였다. 나중에는 ‘저년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자.’ 혹은, ‘그까짓 유리조각을 당장 부숴버리자.’라는 등........ 진흙탕 개싸움에서나 볼 수 있는 추악한 구호가 머릿속에 왱왱 울려댔다.
“........저기 로키군?”
“........”
나도 모르게 얼굴근육에 힘이 실렸다. 이런 식의 추악한 싸움은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걸로도 성이 차지 않아 동족을, 심지어는 스스로의 목숨에도 손을 대는 추악한 존재와 나 자신을 동일 시 하는 건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다. 나는 숨을 고르며, 광적으로 흥분한 생각의 파편들을 잠재웠다. 처음에는 워낙 격양되어 미쳐 날뛰었지만, 인내를 가지고 한참을 어르고 달래니, 사고의 태풍이 시나브로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답답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겁을 한 숟갈 가득 집어먹었는지, 그 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발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어찌나 겁을 집어 먹었기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도 잊고서 내 눈치를 보았던 걸까........ 문득 나도 참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이런 겁 많고 어리버리한 녀석이 어떻게 ‘우리’의 존속에 위협이 될 수 있겠는가? 그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생각의 끝에서 나 스스로를 바라보니, ‘거대한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보고 나니, 그것이 실은 병아리의 그림자였다.’ 하는 일화 속 주인공과 겹쳐 보였다.
그래...... 녀석은 그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뿐....... 나,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존속에는 영향을 줄 능력도 의지도 없을 것이다.
“저기......”
“이게 뭔지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나의 반문에 녀석의 눈이 더 커졌다. 세상에, 저 크기에서 더 커지는 건 불가능해 보였는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질 줄이야. 저거....... 뒤통수를 탁하고 치면 눈이 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쨌건, 녀석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결의를 다지려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유라기 보단, 예감이에요.”
“무슨 예감?”
“이것이.......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는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 같다는 거요.”
녀석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팍에 손이 갔다. 녀석은 이미 ‘비정한 마음’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상상도 못할 엄청난 촉이 발동한 것일까? 전자라면 조금 일이 복잡해 질 수도 있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녀석은 수녀의 길이 막힌다면 저잣거리에서 작두를 타도 될 것 같았다. 세상에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쥐를 잡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만, 이렇게 소름끼치도록 절절히 다가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혹시........ 우리의 계약, 잊어버린거 아니겠죠?”
녀석은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의 태도가 자신에게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바싹 다가와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녀석의 말은 나로 하여금 다시금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제기랄 간신히 난장판을 가라앉혀놨더니, 엉뚱한 녀석이 다 꺼진 뇌관에 다시 불을 붙여버린 셈이다. 이번같은 경우는 양상이 조금은 달라서, 녀석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힘을 잃고, ‘우리’의 존속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높였다.
‘녀석을 죽여. 칼은 쓸 것도 없어. 그냥 목을 잡아서 비틀어버리면 그만이야.’
‘일단 대답하는 척하면서 녀석을 안심시키자. 아니, 일단 모든 걸 다 말해주는 거야. 그 뒤에 죽여 버리면 더 재미있을 걸?’
‘자 손을 들어.’
솔직히...... 매력적인 제안이라 생각했다. 녀석을 살려두는 쪽보다는 죽여버리는 쪽이 더 간단하거든. 그리고 그게 원칙에 맞기도 하고. 만약 내가 녀석을 살려두게 된다면, 내 입장은 ‘제보자’에서 ‘공범’이 되어버린다. 비밀을 공유하는 것 만큼......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건 드물다.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나는 내 머릿속 수다쟁이의 말에 따라 손을 천천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너는 사람을 제법 곤란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군.”
“그러게 계약서 잘 읽어보시고 사인 하셨어야죠.”
녀석은 내가 품은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저리같은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나는 결국 내가 들어올린 손을 이마에 얹을 수 밖에 없었다. 자기가 처한 상황도 모르는 저런 바보 천치 같은 년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Channel 2. 아이리스
“솔직히 이게 어떤 물건인지 너무 궁금해요.”
어차피 내친김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보였어요. 만약 로키군이 칠성이와 마찬가지로 버리려고 하는걸 보면, 제가 발견한 물건이 확실히 예삿 물건이 아니란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소위 ‘비정한 마음’이 제 손에 들려있을 때 그것에 대해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 물건이 무엇인지 정체를 알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수렴하게 되겠지요. 요컨대,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는 겁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로키군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뻥 뚫린 심연으로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요.
“이게 뭔지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건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바닥에는 무엇이 숨어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던 그의 눈 속에 있는 심연이 조금 흔들린 것 같았습니다.
“이유라기 보다는...... 예감이에요. 이것에 대해 알아본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거란거요.”
제 말에 심연은 더욱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표정하나 낯빛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저는 그의 눈을 보면서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말이....... 점점 먹혀들어가고 있어요. 못이 박혀들어갈 때, 더욱 망치질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긴장감을 보내버리기 위해,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마지막 돌을 그의 심연에 집어넣었습니다.
“우리의 계약...... 잊은거 아니겠죠?”
“........”
로키군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요동치기 시작한 심연이 잦아들기란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계약’이란 돌을 집어던졌으니, 조만간 물이 넘칠 것입니다. 저는 숨을 죽여가며 그를 살펴보았습니다. 로키군의 이마에....... 그 하얀 이마에 푸른 핏줄이 일자로 쭉 일어섰습니다.
“........사람을 제법 곤란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구먼.”
“그러게 계약서 잘 읽어보시고 사인 하셨어야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과 같던 로키군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너무 통쾌한 나머지, 저는 조금은 으스대며 그의 말을 맞받아 쳤습니다만....... 돌아온 건 그의 싸늘한 눈초리였지요. 그 강하고 매서운 시선에 저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아...... 제가 그렇죠 뭐.
“미안해요.”
“사과해봐야 늦었어.”
그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손 위의 ‘비정한 마음’을 부숴버릴 듯이 움켜쥐었습니다.
“이건 ‘비정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긴걸 보니 카트리지형이군. 내장형의 단점을 보완한 신형제품이다. 여기 세공품의 칼을 누르면........”
그가 조각상의 가슴팍에 꽂힌 칼을 꾹 누르자, 시신도 재로 만든 불속에서도 실금하나 가지 않았던 ‘비정한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딸칵 소리와 함께 가슴팍이 열렸습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그것을 잡아 손바닥에 대고 톡톡 두드렸습니다. 그가 몇 차례 두드리자.
“이런게 나오지.”
“와 신기하네요. 그럼 그 카트리지는......”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그 이상을 알려고 들었다간, 왜 칠성이라는 녀석이 네게 그것을 버리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테지.”
“그러면......”
“칠성이 말대로 이건 망자한테 돌려주면 좋겠군. 야! 도로시!”
로키군은 제가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비정한 마음’과 그 카트리지를 그대로 물가에 던져버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보았지만, ‘비정한 마음’은 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한 ‘퐁당’소리만 남기고 물속에 가라앉아버렸지요. 로키군은 제 모습을 무감각한 얼굴로 지켜보다 자신의 일행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일행분은....... 로키군이 부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쓰지 않고 화장터를 서성이며 자신만의 감상에 젖어있었습니다.
“야! 가자고!”
“아...... 진짜 낭만 없는 남자네.”
로키군이 몇 차례 채근을 한 끝에, 도로시라는 분은 터덜터덜 걸어와서는 대담하게 그를 째려보았습니다. 와....... 그에게 저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었군요. 제 눈앞에 벌어지는 저 기이한 광경에 저는 제 볼을 꼬집어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현실적이라고 생각 할 수가 없었거든요. 뭐....... 저도 솔직히 말해서 상상 속에서는 로키군에게 과감하게 대해본 적은 있었지만....... 과감한 시도에 이어지는 그의 매서운 눈초리는 도저히 받아낼 재간이 없었어요.
“너무 바쁘게 구는 거 아니야? 숙녀를 재촉하는 남자는 별로 섹시하지 않아.”
“한 번만 더 그딴 개소리를 지껄인다면, 멀지않은 시일 내로 네 배때기의 순대로 줄넘기를 하게 될 줄 알아라.”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존나 섹시한데?”
역시나 그의 눈길은 상상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이 도로시라는 여성은 어찌된 일인지 주눅든 모습이라곤 하나 없이 그와 당당히 눈을 마주보았습니다. 지구가 넓은 이유가 수 많은 또라이들을 품어주기 위해서라더니...... 얼마나 많은 생명보험을 가입하면 저렇게 기세가 좋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거기에....... 그녀는 마지막 말에 이어 씩 웃더니 쥐를 휘어 감는 뱀의 그것처럼 로키군의 팔에 자신의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
Channel 1. 로키
나는 내 팔에 거머리마냥 엉겨붙은 도로시년의 팔을 간신히 떼어낸 뒤에 녀석을 답답이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여기는 도로시. 새로운 선요원 총책 후보다.”
“그리고 이쪽은 답..... 아니 아이리스라고 한다. 내가 최근에 신세를 진 적이 있었지.”
“반가워요.”
답답이는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도로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관절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답답이가 타인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냥 착한여자 콤플렉스인줄 알았는데 꼭 그런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도로시 역시 만만치 않은 여자이기에, 녀석은 악수를 하는 대신 답답이를 위 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아주 살짝이지만....... 침묵과 함께 껄끄러운 공기가 우리 셋 사이에 흘렀다.
“아...... 반갑습니다.”
답답이를 쓱 훑어본 도로시는...... 씩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웃음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유발시키기 딱 좋아 보이는 녀석의 외양이 문제겠지. 사실 녀석의 저런 웃음을 본 게 한 두 번이 아닌 입장으로서 말하는 건데...... 녀석이 저런 웃음을 짓는다는 건 아주 높은 확률로 제 딴에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답답이’일 것이다. 역시나, 도로시년은 답답이와 악수를 하는 대신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또 다시 내 팔에 엉겨 붙었다. 산낙지의 끈질김이 이런 것일까? 아니면 진흙탕의 질척거림이 이런 것일까....... 확실한건 이 행동의 목적이 ‘이 모습을 답답이에게 보여주고 싶다.’라는 과시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거다.
“팔뚝과 몸통을 분리시켜버리기 전에, 이 역겨운 행위를 그만두었으면 좋겠군.”
“어쩜...... 우리 자기는 화내는 것도 이렇게 섹시할 수가 있지? 표정하나 안 바뀌고 이런 조크를 할 줄이야.”
사람의 아들이 생전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을 쫒아내려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아이들이 내게 오는 걸 막지 말거라. 천국은 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거든.’이라고 말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설을 달자면, 어린아이들은 워낙 순진무구하여 어른이 하는 말은 덮어놓고 믿기에, 천국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도 의심 없이 믿으니까 천국의 주인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저 ‘순진무구’라는 개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결코 좋은 의미 따위가 담기지 않은 나의 말을 ‘조크’라는 한 마디로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녀석을 나는 ‘순진하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영악하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걸까?
어쨌거나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더욱 엉겨 붙는 끈끈이주걱 같은 녀석의 공세에 나는 별 수 없이 백기 투항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도로시와 함께 먼저 계단을 오르고, 자연스럽게 아이리스는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계단이 거듭될수록 경사는 점점 가팔라지고, 계단의 폭 역시 줄어들어 종당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가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지만, 이 워터 프론트 산 끈끈이주걱은 나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오히려......
“꽤나 재미있는 여자를 데리고 있네....... 애인?”
“전혀.”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지?”
“지금 이 상황만 할까.”
내게 엉겨 붙는 와중에 창의성이나 신선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진부한 이야기를 내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나의 마지막 대꾸에 킬킬거리며 도로시년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건드리는 순간, 나는 녀석을 그대로 난간 너머로 밀어버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로시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처럼 제 할 말만 계속해서 찍어댔다.
“하기사, 자기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너?”
“아니, 이건 그냥 컨셉이지 뭐. 그 있잖아 대가리 터럭 퍼런 년.”
“토라?”
“그래, 그 년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기미만 보이면 바로 달려들어서 저 여자의 머리를 몸통에서 뜯어냈을 걸?”
“토라를 싫어하는 건 여전하구먼.”
“그럼! 그런 년처럼 남자한테 여지를 질질 흘려대면서 등골이나 빼먹는 년들 때문에 모든 여자들이 싸잡아서 욕을 먹는 거 아니야. 그런 개잡년들은 아주 그냥.”
“네가 굳이 모든 여자들을 대표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벌거벗겨서 저잣거리에 거꾸로 매달아버려야 한다니까?”
내 말을 전혀 들을 생각 없이 제 말만 지껄이는 도로시년을 보노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과연 이런 미친년에게 선요원 총책 자리를 맡기는 게 맞을까 싶다.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한 고육책이라지만....... 녀석이 하는 꼬라지를 보노라면, 이건 고육책을 넘어서 자충수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걱정에 휩싸여있는 동안, 나는 문득 답답이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답답이 녀석은 이미 저 만치 뒤쳐져서는 난간에 제 몸을 기댄 채 헉헉거리고 있었다. 하아....... 한 녀석은 지독한 마이 페이스에, 다른 하나는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지식하다. 왜 조물주는 이토록 극단적인 두 창조물을 한장소에서 만나게 했단 말인가.
나는 도로시년을 어거지로 떼어놓고 답답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너무 뒤쳐진다 싶으면 같이 가자고 말이라도 해라.”
“하아....... 죄송해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네년의 팔뚝과 몸통을 잡아 뜯어버리기 전에 이 역겨운 행위를 멈춰줬으면 좋겠는데.”
로키군은 도로시씨의 팔짱을 떼어내려 들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도로시씨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팔에 매달려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쩜 우리 자긴 화 내는 것도 섹시한가 몰라? 이렇게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조크를 다하고.......”
로키군에게 끈적거리는 눈길로 추파를 던져댔지요. 그 둘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보다가 도로시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비록, 그녀의 입은 미소를 짓느라 바빴지만, 그녀의 눈이 입을 대신해 제게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물론 명확한 언어를 빌리지 않았기에 그 의미를 왜곡하거나 거짓되게 받아들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받아들이기로는.......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마.’
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어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제로도 제가 그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은 종잇장 두께만큼도 보이질 않기도 했고요. 로키군은 결국 도로시씨의 육탄공세에 두 손을 들고 그녀와 함께 계단을 올랐습니다. 저도 별 수 없이 그 뒤를 따라가야만 했지요.
계단은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 가까워졌고,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경사는 가팔라졌습니다. 경사가 가팔라지면 가팔라질수록 그 폭이 좁아져, 이윽고는 한 사람이 오르기에도 벅찰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곳 운터브룩에 기거한 지도 한 달 정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이 계단 만큼은 도저히 익숙해 질 수가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저는 잔뜩 녹이 슬어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난간에 기대 낑낑대면서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는 것이죠.
제가 혼자서 난간과 고군분투를 하는 동안, 도로시씨는 로키군에게 여전히 찰싹 달라붙어있었습니다. 1월의 추운 날씨에도 팥죽땀이 쏟아질 정도인데 저 둘은 얼마나 더울까요? 아니......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며 이 고통을 줄여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고통이 서서히 스며들어왔지요. 그 고통은....... 그녀가 키스라도 하려는 듯이 로키군의 얼굴에 바싹 달라붙어 이야기를 할 때 왈칵 쏟아지는 듯 했습니다. 고통과는 별개로 그녀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제 모든 신경을 거기에 집중해보았지만, 거리가 많이 떨어진데다, 산바람이 윙윙대며 부는 통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도통 알 도리가 없었어요.
.......지독하게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로키군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의 세계에 몸을 던졌는데, 그가 살던 세계는 제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넓었어요. 저는 제 스스로가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로키군의 세계에 갇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문제는 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도로시씨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까닭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로키군이 고아원에 처음 온 날 원장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발견했을 때, 그 때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더 농도가 짙고 자극적이었던 것 같았어요. 그 증오의 감정이 제 자신을 너무나도 강하게 흔드는 통에 손이 덜덜떨려 난간을 제대로 붙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윽!”
증오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쯤에, 어께죽지에서 강렬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따끔거린다고 해야 할지 뜨근거린다고 해야 할지 모르는 이 감각은 제 어께에서 시작해 제 등까지 훑어 내려갔습니다. 그 감각이 너무나도 신경쓰여 제 어께에 손을 대는 순간 엄청난 통증이 제 등골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갔습니다.
아팠냐고요? 고통스러웠냐고요? 그 감각을 묘사하기에는 제가 아는 언어는 턱없이 투박하고 박리한 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날이 잘 들지 않는 고기 칼로 제 몸을 저미는 것 같았어요. 그 강렬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덜덜 떨리는 몸이 계단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이를 악무는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어서, 제가 이렇게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로키군과 도로시씨는 여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어요. 머리칼은 땀으로 눅눅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1월의 차디찬 산바람과 만나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뺨은 덜덜 떨리는데, 저는 그들이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사람의 것이라 생각되기 어려운 신음소리만 흘러나왔고 그나마도 이 빌어먹을 쓰레기 산을 휘감는 산바람에 묻혀, 입을 여는 제 귀에조차도 들리지 않았어요.
저도 모르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도로시씨는 지독히 미웠습니다. 정말 둘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뒤쳐졌으면 같이 가자고 말이라도 해라.”
어느새 나타난 건지, 로키군은 제 앞에서 손을 네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믿기지 않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뭐해? 잡어.”
“미......안해요.”
저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짐짓 활짝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과 별개로 그의 손은...... 정말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