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35

갑과을 작성일 16.07.21 00: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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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예상을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토라의 반응은.......

 

내가 알기로는 찰리를 데리고 온다고 했던거 같은데....... 이 미친년은 뭐야?”

 

정말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찻잔을 거칠게 내밀었다. 그 바람에 찻잔속의 커피가 도로시의 블라우스에 튀었다.

 

, 실수 미안.”

 

토라는 말과 달리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도로시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녀석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얼굴로 찻잔 속 검은 액체를 호로록 마셨다.

 

여긴 직원 복리후생이 확실한가봐? 이런 손님접대가 거지같은 직원도 자르지 않고 있는 걸 보니.”

매뉴얼대로 한거 뿐이야. ‘손님은 손님같이.’ ‘손놈은 손놈같이.’”

 

나는 토라의 독설이 한층 더 노골적으로 변하기 전에, 재빠르게 녀석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기 선요원 총책이다. 예의를 갖춰라.”

예의? 오빠 비정한 마음에 금이 가더니 나사못이라도 흔들거리는 거야? 우리가 왜 저런 미친년이랑......”

 

도로시는 팔짱을 낀 채로 토라가 내게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쓰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녀석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한 이 모든 상황이 당사자 도로시에게 있어서는 한 편의 재미있는 촌극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인생 참 재미있지 않아? 3년 전이라면 이런 미친년의 손도 잡지 못해서 안달이 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저게 진짜 죽을려고......”

 

도로시의 도발에 토라는 기어코 반쯤 이성을 잃었는지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말리려고 했지만, 토라쪽이 좀 더 빨랐다. 토라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도로시의 목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수화학원에 등록원서를 내게 될 거다.”

이야, 이게 뭐야? 가시는 생선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도 도로시는 여유작작하게 제 목의 칼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라고 할지라도 불안감에 근거한 신체적 반응이 나올 법 한데,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면 동요를 의미하는 어떠한 신체적 반응이 감지되지 않았다. 정말로 정신줄을 놓은 걸까? 아니면....... 토라 녀석이 자신을

 

이런 걸로 죽겠어? 위협을 할 거면 좀 더 현실성 있는 래퍼토리를 선택하라구. 그리고.......”

 

도로시년은 그대로 칼날을 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런 과감한 행동은 얼마지 않아 그 과실을 거두어, 녀석의 손에서 천천이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참 자기 자신의 몸을 초개같이 던지는 건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런 액션이.......정작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고, ‘굳이 이런 걸 가지고 해야 하나?’하는 때에만 등장한다는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녀석의 행동은 어느정도 효과가 있어서, 칼을 쥔 토라가 오히려 당황하여 칼을 빼려고 들었지만, 도로시의 손아귀는 그것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토라는 헐떡거리면서 칼자루를 놓아버렸고, 이제 그 칼을 도로시의 손에 들려있었다. 녀석은 나이프를 내려놓은 뒤에, 토라의 커피잔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어 피를 닦아냈다.

 

어른들 노는데 애들이 끼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알겠지 꼬맹아?”

 

 

 

 

 

 

  

Channel 2. 아이리스

 

응접실에서 전쟁이 나는 동안, 저는 전쟁의 화마를 피해서 부엌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부엌에는 아주머니께서 달걀을 꺼내고 있었어요. 제가 화장터에서 남아 비정한 마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을 동안, 아주머니는 먼저 올라가셔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그 전까지 잠겼던 생각과 했던 말들이 모두 부끄러워졌습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속편한 생각만 한 것 같았거든요.

 

늦어서 죄송해요.”

아냐, 나도 쉬다가 이제 막 시작한 참인걸. 그런데 밖이 많이 소란스러운 거 같은데 무슨 일이 난거니?”

손님이 왔어요.”

그래? 손님이라기보다는 손놈이 온 게 아니고?”

 

아주머니의 말씀을 듣다보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하고 돋았습니다. ‘손놈발언은 아까 토라씨의 입에서도 나왔던 것 같은데....... 정말 토라씨의 말대로 매뉴얼이란게 존재하긴 하나 봅니다. 그냥 홧김에 한 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토라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그 와중에도 철저하게 매뉴얼에 근거하게 행동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그녀는 참으로....... 철두철미한 사람입니다.

 

아이리스, 달걀 좀 풀어줄 수 있니?”

달걀말이라도 만드시려고요?”

아니, 지부로 올라오다가 잠깐 시장에 들렀는데 밀가루가 싸길래 좀 샀거든. 그걸로 계란빵이나 만들어보게.”

 

저는 아주머니가 주신 계란들을 받아 그것을 깨트려 큰 볼에 풀었습니다. 제가 그러는 동안 아주머니는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드셨고요. 몇 번의 손질이 오가는 동안, 계란은 시나브로 거품을 내며 걸쭉한 노란 죽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아주머니가 반죽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반죽이 완성된 것 같은 시점에 프라이팬을 달구고 버터를 준비했습니다.

 

설탕도 꺼내요?”

........ 좋지.”

얼마나 꺼낼까요?”

....... 열 컵 정도?”

매번 말하는데, 너무 많이 넣는거 아니에요?”

그럴꺼면 말을 말던가.”

 

아주머니는 제 말에 역정을 내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재미있어, 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주머니와 이렇게 촌극을 하다보니, 응접실에 있었던 그 살풍경이 머릿속에서 잊혀지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저희가 웃음을 터뜨린다고 해서 응접실의 소란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곳에 있었던 긴장감은 확실히 누그러진 건 사실이에요. 그나저나.......

 

맛있게 먹으면 절대로 살 안쪄.”

질량 보존의 법칙 몰라요? 분명 입속으로 들어가는데 살이 안찐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저 설탕꾼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요? 아주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제가 소신 있게 설탕을 다섯 컵 정도면 꺼내놓았지만, 아주머니는 굳이 밀가루 반죽 때문에 하얘진 손으로 설탕봉지를 집어 나머지 다섯 컵의 설탕을 만들어 놓았거든요. 이렇게 아주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티격태격 하기도 하면서 요리를 준비하면서 저는 어께의 통증도, 도로시씨에 대한 증오도, 응접실의 살풍경에 대한 잔상을 깔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 그리고 열중할 거리가 있다는 건 참 복된 일인 게 분명합니다.

 

아이리스야. 계란은 다 풀었지?”

, 여기 있어요.”

역시 경력자라 솜씨가 좋구먼, 그럼 이제........”

 

아주머니는 큰 볼을 받아서 한창 달궈진 프라이팬에 그것을 서서히 붓기 시작했습니다. 치익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부엌에는 계란이 익는 고소한 냄새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버터를.......”

아오 개 씨부랄 년 때문에 열 받아 죽겠네!”

우악! 큰일 났다!”

 

조심스럽게 계란을 붓는 중에 들려온 고함소리에 저와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니....... 놀라기만 했다면 다행인데, 문제는 아주머니의 손이 반죽으로 워낙 미끌미끌해져서, 그만 계란 볼을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계란볼이 떨어지면서 부엌의 바닥에는 노란 계란물이 쫙하고 튀어버렸지요. 하아....... 십년공부 도로나무아비타불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절절히 실감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와 아주머니는 울상이 된 얼굴로 바닥을 내려보았습니다.

 

무슨 일에요. 토라씨.”

 

 

 

 

 

 

 

Channel 1. 로키

 

지부장실의 문을 열기 전에 나는

 

“......”

뭐해? 문 안 열고?”

있어봐. 이 미친년아.”

 

생전 처음으로 이라는 가공의 존재에게 지부장의 반응이 토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이성적이기를.’이라고 가슴에서 절절이 우러나는 기도를 했다. 그 모습이 도로시의 눈에는 퍽 거슬려 보였나본데........ 앞서 응접실에서 있던 난리통을 생각했을 때, 그런 꼴을 또 안보기 위해서라면 자리라도 깔고 3일을 금식하며 기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시간을 끌다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에 문을 열었다.

 

지부장은 지부장실의 탁자에서 토라가 만들었던 판오디콘의 모형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어찌나 그 모형에 심취해 있었는지,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했다. 그 주름진 눈이 깜빡거리지도 않고 그것을 살펴보는 지부장의 모습은, 하나의 지부를 책임지는 장이라기 보다는, 기대하고 또 고대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왔습니다.”

......으응. 왔나?”

 

결국 그를 기다리다 지친 내가 인기척을 내니, 그는 간신히 모형에서 눈을 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길은 모형과 도저히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지, 흘긋 흘긋 모형을 향해있었다. 마치, 끈끈하게 굳은 밥알이 벽에 붙어있는 것을 어거지로 떼내는 것 같이 보였다.

 

어쨌거나, 그는 마침내 모형에서 눈을 떼었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껌뻑껌뻑 눈을 감았다 뜨면서 나를 보았다가....... 도로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은

 

찰 리가...... 아닌데?”

 

총평을 내리자면, 나의 걱정보다는 이성적이었지만, 나의 바람만큼은 이성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말속에 담긴 어조, 그리고 도로시를 바라보았을 때 눈가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를 보자마자 팔장을 끼고 다리를 꼬는 행동은 내 짐작이 그것을 넘어서 확신이라는 것으로 갈 수 있도록 거들어 주었다.

 

그는 실망을 했다. 그것도........ 지독하게.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범위 안이었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고...... 이제는 걱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한쪽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쌍방에서 이루어지는게 일반적이다. 그런점에서 지부장의 패는 이미 접수를 했고...... 이제 도로시의 패를 볼 차례다. 녀석에게도 눈이 있다면, 토라 뿐 만 아니라, 지부장 마저도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는걸 알았을 것이다. 과연....... 녀석은 지부장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까? 만약 녀석이 토라때의 그것을 보인다면, 내 입장은 크게 난처해질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입 안이 잔뜩 텁텁해지고, 입술이 말라가는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면, 면전에서 환영을 띠꺼운 대접을 받았음에도 도로시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래, 이 제멋대로인 망나니년도 사람인지라 눈치라는게 있었던게 분명했다. 선요원으로의 방출은 녀석의 인생에 있어 큰 교훈을 준 것이.......

 

왜요? 찰리가 아니라서 실망이라도 했나?”

 

그래....... 너는 비록 지부장에게 실망을 주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실망을 주지 않았다. 이래야 도로시지. 귀신은 속여도 클래스는 못 속인다더니, 천한 출신성분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전심전력을 다해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말든, 둘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든 말든 아무런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알 바 아니다 하며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두 다리를 이 땅에 붙이고 있었고, 하늘을 나는 새는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너무 뻔 한 결과밖에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인 셈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부장 쪽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도로시를 구슬러내기를 기도해야 하는걸까? 아니면 도로시년이 이 오만방자한 태도를 고쳐먹기를 바라야 하는 걸까? 그리고 기도하고 바란다면...... 대체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 하는걸까? 이 방에 들어가기 직전에만 해도 이라는 가공의 존재에게 가슴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했음에도, 그 존재는 대차게 내 기도를 무시해버렸었는데......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그럼 어쩌실 참이죠?”

 

도로시는 지부장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와 보란 듯이 그 책상위로 올라간 뒤에 궐련을 꺼내 불을 당겼다. 이런 녀석의 모습을 보다보니, 이제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녀석은...... 애초에 우리와 선요원의 총책으로서 함께 일을 할 생각이 있기나 한 걸까?

 

분명 나는 감정을 잃어버렸지만, 내 육신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또 다른 생리적 반응을 일으켰다. 입술이 마르고 입안이 텁텁해지는 걸 넘어서, 내 손, 발과 같은 말초부위에 떨림 현상이 일어났다. 과연 지부장은 도로시의 도발에 어떻게 대처를 할까?

 

 

 

 

 

 

  

Channel 2. 아이리스

 

부엌문을 박차고 들어온 토라씨는 이교도 신화에 나오는 아레스신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앞서 도로시씨와의 갈등 때문인 건지, 그녀는 잔뜩 격양되어있었고, 그 분노 탓에 그녀의 주변의 공기가 일렁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지요.

 

....... 이 개잡년을 그냥.”

무슨 일인데요?”

귀 있었으면 알거 아니에요. 응접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토라씨는 분노 탓인지 그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혀가 내뱉는 말을 그대로 지껄이고는 의자에 털퍼덕 주저앉았습니다. 그녀의 가시 돋친 말을 듣다보니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하며 조금은 부아가 치밀어 오르긴 했었지만 한편으론 오죽 하면 저 점잖은 토라씨가 저런 행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이제껏 이곳에 머물러있는 동안 그녀를 지켜본 바로는....... 토라씨는 이런 종류의 행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에게 언제나 친절하게 대할 뿐 만 아니라, 흥분이나 분노와 같은 과격한 감정을 그녀의 얼굴에 담은 적이 없었거든요. 이런 그녀가 지금의 감정과 행동을 보이는건......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뭐에요? 바닥이 완전 누래졌는데요.”

계란 빵......이 될 뻔했죠.”

아쉽네, 반죽 진짜 잘 된거 같은데.”

 

토라씨는 아쉬운 얼굴로 볼에 엉겨붙은 계란빵 반죽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습니다. 한낱 반죽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을 감기까지 하며 그 맛을 음미했더랬지요. 한참동안 입을 오물거리며 맛을 보던 토라씨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 진짜 웃긴 일이지요? 이 상황에도 먹을게 넘어가긴 하나봐요.”

도로시씨와 사이가 썩 좋은 편이 아닌 모양인가보네요.”

네 뭐....... 그런 좋은 표현으로 포장하기도 아까운 년이죠.”

 

토라씨는 손가락을 옷자락에 쓱쓱 닦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도로시씨가 이곳 지부에 몸을 담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대부분은 그녀에 대한 험담이었지요. 시간의 경과에 따른 기억의 왜곡과, 토라씨가 도로시씨에 대한 악감정 때문인지 일화들 하나하나가 기괴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과장되어있었어요. 이 모든걸 백보정도 양보해서 사실이라 믿는다고 친다면......

 

엄청난 사람이었네요. 도로시란 사람.”

엄청난......미친년이죠.”

 

사실 저는 토라씨의 말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고, 거짓말 좀 치지 말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무는걸 선택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만, 토라씨의 말을 듣다보니 아주 교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다른 이와 증오의 대상을 공유하는 건, 매우 음습하고 비열하지만...... 꽤나 말초적인 쾌감을 주는 경험인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 토라씨도 제 반응에 신이났는지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이 점점 커지고 격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크읍!”

언니 괜찮아요? 얼굴이 많이 아파보이는데.......”

 

토라씨의 말을 듣는 동안 제 어께에 다시 한 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감각을 잊기 위해 어께를 주물러 보기도 하고, 통통 두들겨보기도 했지만, 그 감각은 그것을 잠재우려는 제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지에 종이가 스며드는 것처럼 점점 더 넓은 부위로 퍼져나갔습니다. 결국은 토라씨도 알아차릴 정도로 제 얼굴에 티가 많이 났나봐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벌리는 순간 어께로 섬뜩한 통증이 짜르르하게 퍼져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토라씨도 제 기색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 채고 제 어께에 손을 얹으려고 했지만,

 

...... 아주머니, 제가 오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죄송하지만 쉬러 제 방으로 가도 될까요?”

......응 그러렴.”

 

저는 토라씨의 손길을 뿌리치고 황급히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토라씨의 손을 뿌리칠 때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는걸 보았지만...... 도저히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신이 없었어요. 제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생각은 지독한 고통의 방해 탓에 언어를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습니다.

 

 

 

 

 

 

  

Channel 1. 로키

 

지부장은 도로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아니....... 관찰했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구경했다고 표현을 해야할까? 애석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그의 행동양태를 적절히 묘사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좀 구구절절하게 묘사를 한다면 그는 도로시를 버러지 보는 것과 같은 뉘앙스와 신기한 동물 보는 것과 같은 뉘앙스의 사이 어느 지점에 서 있는 태도로 그녀를 봤는 것이다.

 

실망은 실망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지.”

호오, 그래도 지부장님이라 말이 좀 통하네요.”

그럼, 우리는 실용주의자거든.”

 

도로시는 지부장의 답변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책상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 도발적으로 책상위에 걸터앉았던 문신쟁이 미친년은 책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건실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탈바꿈 했다. 물론 복장이 아니라, 태도적인 측면에서 그랬다는 건데, 그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그녀의 손에 여전히 연기를 내는 궐련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지부장 자신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의 호스트 석에 앉았다. 그는 내게 눈짓을 했다. 나는 그의 무언의 지시대로 그의 책상위에 올려져있던 판오디콘 모형을 챙겨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판오디콘을 보는 도로시의 눈매가 매우 가늘어졌다. 이러한 녀석의 행동양태를 보았을 때...... 아마 이 모형에 대해 흥미가 생긴 것 같았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더니, 이거 판오디콘이잖아?”

잘 알고있군.”

라스알게티에 사는 놈 치고 이것도 모르는 멍청이도 있나?”

그럼 우리가 이걸로 뭘 할지도 짐작할 수 있겠나?”

....... 대충은 알거 같은데? 여길 털어버릴 셈이야?”

맞아.”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한 거였군.”

 

지부장은 이번에는 손수 책상으로 가서 2개의 작전 기획안을 꺼내왔다. 그는 도로시가 잘 볼 수 있도록 그것을 흔들고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기획안을 보는 도로시의 눈은 탐욕의 불꽃으로 일렁이는 것 같이 보였다.

 

꽤나 재미있는 발상을 했군. 그럼 시나리오 좀 볼까?”

 

장난감에 손을 뻗는 아이와 같은 기세로 도로시는 그것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지부장이 기획안을 쥔 손을 슬쩍 당기면서, 기획안은 아슬아슬하게 도로시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으응? 대관절 무슨 생각이지? 이야기가 잘 이어가고 있던 것 같았는데, 지부장이 무슨 이유로 뜬금없는 무력시위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생각은 도로시년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우리 지부장님 제법 위트있으시네, 참 재미있었어. , 이제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선수들끼리.......”

선수라서 그래.”

 

그는 다시 한 번 기획안을 자기쪽으로 당겼고, 도로시의 손은 다시 한 번 허공을 저었다. 이제 도로시의 얼굴이 슬슬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장판을 피우지 않고 눈살만 찌푸리는걸로 보아, 그녀는 지부장의 행동을 자신의 나름대로 이해해보려 무던히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적 갈등에 잠겨있는 동안, 지부장실에는 긴장감이 시위처럼 팽팽하게 감돌았다.

 

선수.....라서?”

그럼.”

미안한데, 알아듣게 이야기 좀....... 해줄래요? 나 지금....... 화가 나려고 하는데.”

말 그대로야.”

이 영감쟁이가 노망이라도 났나!”

 

도로시는 결국 팽팽한 긴장감의 시위를 싹둑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는...... 그녀의 악다구니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자약했다. 그의 태도는...... ‘정말 천연덕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를 정도였지. 그 둘의 모습을 보니, 지부장이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슬슬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도로시가 그에게 도발을 했던걸, 이런식으로 되갚아주려는 것이었던 거다. 역시 지부장이다. 토라처럼 화를 벌컥내고 길길이 날뛰는건 도로시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란걸, 그녀에게 제대로 된 앙갚음을 하려면 그녀와 똑같이 해야 한다는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부장은 그녀의 반응이 퍽 재미있었는지, 다리를 꼬며 궐련에 불을 붙였다.

 

많이 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애송이구나.”

이 미친 노인네가 세상 바뀐 줄도 모르고......”

 

그녀가 길길이 화를 내며 위협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이젠 내가 나설 차례다. 이 오만방자하고, 불손하기 그지없는 미친년에게 우리가 결코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란 걸 알려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에게 다가가 그 팔을 낚아채 그대로 꺾어버렸다.

 

세상이 바뀌었을지는 몰라도, 네 녀석이 우리의 소굴에 맨몸으로 들어온 건 확실하지.”

이익..... 이거 안놔?”

 

녀석은 내게 악다구니를 쓰며 대들었지만, 워낙에 완력에서 차이가 났던 터라, 내가 녀석의 악다구니에 꿈쩍이라도 할 리가 만무했다. 녀석은 내 손을 물고, 다리를 걷어차보며 완강하게 저항해봤지만,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제풀에 지쳐 백기를 흔들었다.

 

아오! 그래 내가 졌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사업 한 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닐 테고, 이 바닥 신용장사인건 잘 알고 있겠지?”

아아? 그래, 내가 못미덥다 이거지?”

못미덥지. 지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쫓겨난 년을 우리가 어떻게 덥석 믿을 수 있겠냐?”

그래서......”

우리가 널 믿을 수 있게 너도 어느 정도는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겠어?”

바라는 게 뭔데?”

 

지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녀석의 낯짝에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찰리놈이 우리한테 제법 건방진 소릴 했었는데....... 지금 우리앞에서도 그런 소리를 다시 지껄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구먼.......가능 하겠어?”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도망치듯이 부엌을 나서서 복도를 후다닥 뛰어갔습니다. 어께는 타들어가듯이 아프고, 눈앞은 핑핑 돌고..... 정말 모든게 악화일로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고통이란 녀석은 제 어께를 좀먹을 뿐 만 아니라, 제 머릿속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편백나무의 복도가 제게 왁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지요.

 

얼른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아니, 하다못해 어께가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지 살펴보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서.......

 

“........”

 

생각이 여기에 닿았을 때, 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복도를 둘러보았습니다. 복도는 여전히 울렁거렸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방문이 배열되어 있는건 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방문 역시 울렁거리긴 했지만.......하지만, 그 어떤 문도, 저를 위한 것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방이 이 건물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저를 위한 방은 없었어요. 그걸 깨달은 순간 엄청난 강도의 비애감이 고통을 앞질러서 제 어께를 짓눌렀습니다.

 

어디로.......가야하지?”

 

저는 어께를 부여잡고, 푹푹 꺼지는 환상속에서 걸음을 간신히 디뎌가며 복도를 걸었습니다. 토라씨의 방이 보이고, 스벤의 방이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제 발걸음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제 발은 저를 이 건물에서 제일 익숙한 곳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비록 제 방은 아니지만....... 제가 제일 자주 왔었고, 어떠한 사정으로 제가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먼 발치에서 방문이라도 봤었던 곳, 그곳은........

 

하아......하아...... 실례할게요.”

 

저는 없는 힘을 쥐어짜면서 목재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열었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 외에는 어느것도 두지 않는 소박한 수도승의 방과 같은 곳, 바로 로키군의 방이었습니다. 다행이 방에는 그가 없었고....... 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자마자, 그것을 잠글 새도 없이 옷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아서, 옷이 어께에 스치면서 강렬한 통증이 엄습했고, 제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대체 제 어께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한참을 씨름 한 끝에 벽에 덩그라니 걸린 거울에는 저의 나신이 저녁 햇빛을 받으며 비쳐보였습니다. 저는 거울에 대고 몸을 돌려 제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건.......”

 

제 등에는, 새겨진지 얼마 되지 않은 문신이 박혀있었습니다. 어떻게 새겨진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알았냐고요? 문신 주변의 살이 불긋불긋하게 일어나 있었거든요. 하하, 저는 문신가게 근처도 간 적이 없었는데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인걸까요? 이상한 점은 그 것 만이 아니었습니다. 문신의 모양 역시 정말 이상하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뭐지?”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의 잘린 목을 잡고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잘린 목의 주인은 그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반면, 그것을 잡고있는 여인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경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 왜 이런 문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등에 새겨질 수 있는 거지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도통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제 등에 이런 고약한 장난을 쳐놓은 걸까요?

 

이건 백도라고 하는거에요. 지금 당장은 이게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당신의 가치관을 반영해가면서 의미를 가진 무언가로 새롭게 변화할 겁니다.’

 

자신을 천사라 지칭했던 사람의 말이 문득 제 머릿속에서 떠올랐습니다. 그럼....... 그가 말한 대로라면, 이건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백도라는 것이 변화를 했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 변화는....... 제가 살아온 삶을 반영한 것일 테고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고 백도의 모습을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자괴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이 형상은, 제 삶에 대한, 아니 제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의 성적표였어요. 저의 가치관은....... 사랑이나, 자비, 관용, 친절과 같은 것이 아니라, 로키군에 대한 독점욕, 그리고 질투, 증오와 같은 추악한 것이었다는 거에요. 지독하게 솔직하고, 지독하게 냉정한 성적표였어요.

 

나는....... 지독히 나쁜 사람이다.”

 

비록 저에 대해서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다.’ ‘친절하다.’라고 평가하더라도,

 

나의 본질은....... 지독하게 추악한 것이었다.”

 

그것은 저의 껍데기에 대한 평가였을 뿐, 저라는 인간, 제 본질은 이렇게 추악한 것이었던 거에요. 이 세상 모두가 몰라도 저만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 저는 그것과 이렇게 마주했습니다. 소감이...... 어떠냐고요? 정말....... 하아, 미안하지만 좀 노골적으로 표현해도 될까요? 정말 존나게 쪽팔렸습니다.

 

이제야, 자칭 천사의 말이 구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는 백도에 대한 이야기 뿐 만아니라, 그런 말도 했었지요.

 

신께서는....... 당신에게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에, 선택을 해라.’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거죠. 아마 하늘 위에 있는, 당신이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당신이 고민하기를 바라신 모양이에요. 혹시나 당신이 고민의 끝에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그분은 결코 당신을 책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반대로........ 당신이 고민 끝에 올바른 선택을 하더라도, 신께서는 결코 당신을 칭찬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아...... 차라리 혼을 내세요. 이게 뭐에요........”

 

저는 누군가가 이 부끄러운 모습을 볼까 싶어 주섬주섬 옷을 입었습니다.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모습을 결코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다행이 방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어느덧 저는 옷의 마지막 고름을 끼울 수 있었어요. 거울에는....... 피곤과 괴로움으로 찌들어버린 한 여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분명 저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매우 낯설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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