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1월 10일
녀석을 내 옆에 앉혀놓고 계속해서 막주를 마시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려보았지만, 답답이 녀석은 도통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장사가 끝났다는 주모의 말에 답답이를 들쳐매고 좌판을 나서야만 했다.
1월의 찬바람에 맞서 싸우며 간신히 지부에 도착하니 괘종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허, 장장 8시간을 술로 보냈다니........ 펜릴이 살아있었을 때도 이렇게 마신 적은 손에 꼽는데 오랜만에 위업을 달성한 것 같아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뭐 이쯤 되면 지부에는 깨어있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나는 별수 없이 답답이 녀석을 내 방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침대는 하나 뿐이니, 손님에게 내어주는 수밖에....... 아무리 감정이 없어도, 손님에게 바닥에 자라고 할 정도로 박정하지는 않으니까.......
녀석에게 침대를 내어주니, 딱히 내 몸 하나 뉘일데가 없어, 나는 결국 테이블에 엎드려 선잠을 자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몸이 불편할 때 마다 뒤척이고, 뒤척일 때 마다 깨는 매우 불편한 시간을 한참동안 보내다가....... 이대로 잠을 자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인정하고서 잠에 드는 걸 완전히 포기했을 때는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래서....... 난 술이 참 싫다.
이대로 녀석이 자는 이 방안에 홀로 깨어있는 것도 참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싶어, 나는 녀석이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가며 방을 나섰다. 고작 2시간 사이에 복도의 공기가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내가 지부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약간의 온기가 들떠있는 듯 했는데, 5시의 복도공기는 온기 조각 하나 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옷깃 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그것은 내 몸을 송곳마냥 파고들어 기분 나쁜 한기의 궤적을 남겼다.
“어라? 일찍 일어나셨네요. 로키씨?”
“아.......네. 잘 주무셨습니까?”
응접실에 가니 아주머니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응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처음에는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내게 다가왔다.
“어제 아이리스가 로키씨와 술 한 잔 한다고 했는데........”
“아, 걘 지금 제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어제 술을 진탕 먹어대더니 그만........”
아주머니는 말이 없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가의 주름이........ 내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 메시지는......
“뭘 생각하시든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군요.”
“누가 뭐라고 했나요?”
“그건 아니긴 한데.......”
“이런 짐승 같은......”
“네?”
“혼잣말이에요.”
그녀는 내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뭐라고 속살거리다가 나의 추궁에 그대로 얼버무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부엌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가버리자 이 큰 응접실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뭐....... 어찌 됐든 이곳에는 나뿐이니 이제는 남 눈치 안보고 내 멋대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남들의 시선이 없다고 해서 일탈적이면서 변태적인 행위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성벽은 없던 지라, 나는 응접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응접실의 벽에는 빈 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액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액자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들어있는데, ‘우리’의 요원들이 의뢰주와 함께 서 있다던지, 아니면 ‘우리’의 요원들이 단체로 서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이 그림들은 그 자체로도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의뢰주에게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하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홍보물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요원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들을 상기시키거나, 교육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사건을 담고 있고, 사건은 망각을 덧입으면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역사’에 어느정도 참여적인 입장이었기에, 몇몇 액자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여기 오른쪽 위편에 걸려있는 그림에는 나와 펜릴 그리고 찰리의 모습이 담겨있다. 펜릴과 찰리는 반파된 마차 앞에서 해맑은 얼굴로 포즈를 잡으며 서 있고, 나는 그 둘과 떨어져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아마...... 이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그림은 한 2년 전쯤에 있었던 의뢰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스트민스터 교구의 수사들 몇을 처리하는 의뢰였었는데, 그땐 나와 펜릴이 팀장으로서 처음 나서는...... 일종의 데뷔전이었을 것이다. 그 의뢰에서 하이라이트라면, 단연코 다리 위를 지나는 마차를 다리째로 폭파시켜서 빼돌리는 것이었다. 와 진짜 그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정말로 해낼 줄이야. 그때 나와 펜릴은 팀원들을 앉혀놓고 누가 마차위에 올라탈 것인지를 놓고 동전던지기 내기를 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펜릴의 동전이 가진 비밀을 몰랐으니 난 홀라당 당할 수밖에 없었다........ 참 펜릴은 그 시절에도 지독한 새끼였지.
그리고 저기 왼쪽 아래에 걸려있는 그림에는 토라가 완전히 탈진해버린 채로 타깃의 시신 옆에서 주저앉아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한심하단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래, 이 의뢰도 기억이 나는군. 빈데미아트릭스라고 만년설로 유명한 고장에 은신하고 있는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인물 하나를 처리해 달라는 아주 시시껄렁한 의뢰였다. IATP를 수료한 신규요원들의 업무능력 평가를 겸한 것이었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토라는 IATP를 갓 수료한 초짜였던지라 이런 별 것 아닌 의뢰였음에도 꽤나 허둥지둥 댔었다. 나는 그때 당시에 ‘감시관’으로서 녀석을 감시 · 평가하는 입장이었는데 녀석이 너무 허덕거리는 것 같길래, 의뢰 말미에 녀석을 슬쩍 도와주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건 들통이 나버렸고, 나는 감봉 3개월의 징계를, 그리고 녀석은 내근직으로 행정내신을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었다. 어찌보면 둘 다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지....... 자존심 강한 토라 녀석은 그 사건으로 나에게 완전히 삐쳐버려서 한동안은 말도 안 걸었었다.
이 외에도 상당수의 액자 속에는, 나라는 인물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개입이 되어있었다. 어찌 보면 나도 ‘우리’의 라스알게티 지부에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액자들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 액자들의 상당수는....... 이름 모를 ‘선배’들이 자신들의 위업을 기념하며 서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의 선배들이 쌓아온 토양위에 지금의 내 세대가 있는 것이고, 우리 세대 역시 미래를 위한 토양이 될 것이다. 먼 미래에,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의 흔적은 그림으로서 지부에 남게 될 것이다.
액자를 보며 내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떠드는 걸 가만히 두고 있는 차에, 이번에는 지부장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늙으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말이 사실인걸까? 그의 손에는 조간신문이 들려있었다.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 안 궁금해 해도 서운해 하지 않을 거지?”
내가 대답이 없자, 지부장은 나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낄낄 웃으며 응접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한 부 줄까? 여러 개 챙겨왔는데.”
“아닙니다.”
“그래 그럴 줄 알고 한 부만 챙겨왔어.”
“여러 개 챙겨 오셨다면서요.”
“뻥이지.”
“아 진짜 쫌.......”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1월 10일
눈을 뜨자마자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초원위에 드리운 푸른 하늘과 구름 대신 나무판자가 정교하게 짜맞춰진 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워있던 것은 풀밭이 아닌 이불이었고요. 저는 기억이 잘려나간 뒤에 찾아오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마치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현실 감각을 잃고 공중에 동동 떠다니던 제가 실낱같게나마 정신 줄을 붙잡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입김 덕분이었습니다. 벌어진 입에서 나온 뜨거운 숨은 1월 냉골방 속의 공기와 만나 언어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형태로 제 눈앞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입김도 차디찬 공기 속에 이내 보이지 않는 무의 영역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무형의 탄생, 확장 그리고 쇠퇴와 소멸의 과정을 지켜보다보니, 혼란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제 정신이 시나브로 두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실 감각을 잃은 동안 저는 한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은 ‘대관절 내가 무슨 일을 겪은 거지?’라는 도저히 정답을 내릴 수 없는 곤란한 난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현실 감각이 땅에 발을 디디면서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꿈....... 이었구나.”
제가 내린 결론에 부연을 하려는 것일까요? 천장을 보던 제 눈가가 별안간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시야를 가렸나 궁금하여 그쪽을 바라보니, 한 줄기 햇살이 성에가 잔뜩 끼어있는 창문에 아스라이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밤은 지났고, 이 땅에 아침이 찾아온 것입니다.
현실에 땅을 디디게 되었지만, 제가 모르는 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허둥지둥하며 종종걸음을 치고 싶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들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가 제게 잔소리를 한 바가지를 쏟아 부을지도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아무려면 어때?’라는 대담한 생각만이 제 머릿속에 슬금슬금 피어올랐습니다. 아니, 하다못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겠지요.
어쨌거나, 현실은 현실이기에, 저는 한참동안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린 끝에 느릿느릿 침대에서 나와서 흐트러진 이불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누군가가 이 방에 갑작스럽게 뛰어 들어와도 ‘방금 나가려고 했어요.’라고 변명의 말을 할 수 있겠죠? 물론........ 그 말을 믿어줄 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걸요.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눈을 뜬 시점부터, 제가 이렇게 헛웃음을 터뜨리기 까지 보여준 일련의 사고흐름은........ 평소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나태’하고 ‘무책임’한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곳에’있는 저는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런 생각을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게 참 재미있지 않나요?
저는 이불에서 기어 나올 때 만큼이나 느릿느릿하게 일어나서 다시 한 번 거울 앞에서 옷을 천천이 벗어보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도로시씨의 잘린 목을 들고 기뻐서 춤을 추고 있었지요. 제 생각의 변화, 그리고 제 행동의 변화는....... 아마 이 백도를 수원지 삼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나쁜 년이네 나.”
타브리스씨와의 대화는 제게 있어서 그동안 집요하게 피해왔던 화두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도로시씨를 질투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 감정을 유발하게 만든 건 바로 로키군이었지요. 이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로키군과 가까이 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싫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또 다른 가지를 쳐서, 저는 토라씨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제가 토라씨와 시간을 보내면서 토라씨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토라씨가 제가 가진 좋은 점을 찾아내더라도, 저희 둘은 결코 ‘완벽한’ 의미로서 친하게 지내는 건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토라씨도 저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로키군과 친근하게 대하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씁쓸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전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사람들에게 ‘좋은’사람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 하다는걸 깨달았습니다. 같은 대상을 추구하는데 그것의 양이 한정되어있다면, 다툼이 일어나는 건 연역적으로도 오류가 없을 뿐 더러, 이제까지의 역사를 귀납적으로 돌아보아도....... 그러한 현상이 반복되어 왔었거든요. 작은 것은 분쟁, 큰 것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조상들 때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밟아올 수 밖에 없던 전철, 아니 진흙탕 개싸움에 뛰어드는 격임에도 불구하고, 슬프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해야겠지요. 추한 구석이라고 피해온 것조차도 내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사람으로 남기를 포기하고 미움 받을 각오까지 다지는 것, 그것은 제게 묘한 쾌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이 수도승의 방과 같은 곳에서, 책장에 꽂힌 책 한권을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림책이었나봐요. 참...... 로키군이 그림책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책에는 새 한 마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그림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처음 본 삽화이지만, 뭔가 묘한 공감이 들어 저는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새의 모습이, 지금의 제 모습과 많이 닮아보였거든요.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동물이든, 알을 깨고 나오는 동물이든, 주변을 의식할 수 있다면, 모태든 알이든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세계였을 것입니다. 그 나름의 규칙이 있었을 것이고, 그걸 통해 모범적이냐 반항적이냐를 가를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들은 결국 모태 혹은 알에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세계에서 탈출한 그들에게 있어서 이전의 규범은 더 이상 그들을 구속할 수가 없을 겁니다. 또한, 어미 뱃속에서 나온 뒤에도 여전히 뱃속에 규칙을 운운한다면 참 웃기는 일이겠죠? 그들은 이전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새로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저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가진 추한 감정을 인정했고, 더 이상은 그걸 배척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거거든요. 그런다고 지금까지 제가 가진 모습을 한 순간에 모두 버릴 수는 없겠죠. 저는 새로운 규칙을 ‘배워야’하니까요. 그리고 언젠가는........
“........”
저는 로키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 중에서 제가 공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제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혹시나 그에게 결여된 것이 있고, 제가 그 것을 채워줄 수 있다면.......정말 행복할 겁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는
“우선.”
비정한 마음이란 것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아야 하겠죠.
Channel 1. 로키
지부장은 나를 놀려먹었다는 것이 정말 뿌듯했는지 낄낄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참 속편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지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인데 이렇게 낄낄거릴 수 있다는 건, 보통 멘탈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긴, 그 정도 배짱이 있으니까 지부장자리를 해먹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여튼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캐릭터다.
“왜? 뭐?”
“아닙니다.”
“아니긴...... 나를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이 봐놓고 아니라고 빡빡 우기냐?”
“.........”
“뭐가 신기한데?”
지부장의 채근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입장이 난처해질 만한 말은 에둘러서 표현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보통 멘탈은 아닌 거 같다는 요지는 확실히 전달했던 것 같다. 그는 내 말을 듣는 그 순간만큼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내 말을 곱씹었다.
“뭐....... 나라고 속 없이 웃고만 있겠냐. 나도 걱정이 있다고.”
“그런게 전혀 티를 안 내는 게 신기하다는 겁니다.”
“리더의 고뇌라고 해두자. 솔직히 생각해봐라. 지부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지부장이란 인간은 한숨 푹푹 쉬면서 좆됐다 좆됐다. 하고 돌아다녀봐라. 너네가 힘이 나겠어?”
“글.......쎄요?”
“아아, 그래 너한테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미안하다. 내 잘못이지.”
“........”
“이거 잘 봐봐.”
지부장은 나를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신문의 표지를 턱 가리켰다. 1면의 탑기사에는 한 남자가 곤죽이 되어 거리 구석에 쳐박혀 있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음....... 최근에 의뢰가 있었나요? 전 기억이 없는데.”
“그러게. 내가 알기로도 그런데.”
그와 나는 한참동안 신문의 사진을 바라보았지만....... 사진에서는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류의 사건이 이 도시에 한 두 건이냐.’라고 신경을 끄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신문을 더 읽을 생각이 없어졌는지 신문을 반으로 접은 뒤에 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서로 할 일도 없는거 같은데 이야기나 하자고.”
“좋지요. 무슨 주제에 대해 이야길 하시려고요?”
“뭐...... 도로시?”
지부장의 말을 듣다보니, 그가 이제까지 해온 것들- 나를 놀리거나, 신문의 기사를 의미없이 펼쳐보인다거나 하는-은 모두 이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할지를 계산하고 고민해왔다는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딴 소리가 되겠지만, 감정이 있다는건 이렇게 비효율적이다.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하면 되는데, 이른바 체면 혹은 분위기라는 것 때문에 이야기를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계산하고 앉아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작태란 말인가. 내가 지부장의 태도에 대해 이런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동안 그는 팔장을 끼고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놀랐어. 네가 찰리를 데리고 올거라는 기대는 안했고 다른 누군가를 데리고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게 도로시일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도로시년이 이곳에 왔을 때 지부장과의 대화를 들으면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 역시도 도로시가 여간 탐탁치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 미친년이 이곳에 해놓은 짓거리를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은게 더 이상한 노릇이겠지. 참 그러고보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살다 살다 도로시를 옹호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나중에 도로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쨌거나, 내가 데리고 온 녀석이니, 녀석을 옹호하는 것 역시 내 몫이 될 것이다.
“솔직히....... 녀석이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저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본인마저도 잘 알고 있는바 일겁니다. 하지만, 지부장님도 아시다시피 녀석이 미친년일진 몰라도....... 무능한 녀석은 결코 아니죠.”
“하지만 도로시가 지부에서 쫓겨날 때........”
“맞아요. 실수가 있었죠. 그게 녀석이 받은 가장 치명타일겁니다. 그게 하필 녀석이 자랑하는 ‘과감성’ 때문에 벌어진 거니까요. 그래서 군소리 없이 이곳에서 나갔던 걸겁니다.”
“그래, 도로시는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경향이 있어. 그게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거다.”
모두 맞는 소리다. 솔직히 지부장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을 옹호해야만 한다. 그게....... 내가 해야 할 도리이니까.
“일단...... 시선을 좀 바꿔보죠. 녀석의 성향에서 잠깐 눈을 돌려서 지금의 상황을 보자 이겁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신중함과 더불어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과감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티 플래너의 신중함과 도로시의 과감성이 만난다면......”
“........”
나는 말을 이어가다가 문득 지부장이 반응이 없어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내 열변에도 지부장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어른벌레가 빠져나가 버린 번데기와 같이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걸까?
“지부장님?”
“.......그래, 너야 감정이 없는 녀석이라 네 말에 사심이라곤 들어있을 턱이 없을테니, 그 말을 믿어보도록 하마. 그럼 도로시가 우리가 낸 숙제를 얼마나 잘 해결하는지 기다려보도록 하자고.”
“감사합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부장의 말에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했다. 이제 남은 건 도로시가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비는 것이겠지.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응접실에 인기척이 났다. 나와 지부장은 마치 부정한 행위를 하다 들킨 사람마냥 화닥닥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 말씀들 나누고 계셨네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뭐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둘이서 무슨 일로......?”
“아침 찬거리 좀 사려고요. 새벽시장을 가려는 차였어요.”
“아아....... 잘 다녀오세요.”
답답이와 아주머니가 장바구니를 든 채로 우리를 멀뚱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는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딛으며 살아갑니다. 상징, 표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기호학자라고 했던거 같은데, 그 사람들에 따르면 여러 문화권들을 통틀어 하늘은 ‘이상’을, 땅은 ‘현실’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메타포라고해요. 앞서 말했던 말을 그들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자면....... 우리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현실에 기반 해야 한다는 거겠지요?
그 이야기를 지금의 저에게 적용을 해보자면....... 앞서 로키군에 대해 알고 싶지만 한편으론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인 ‘일’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걸 거에요. 그런 이유로.......
“어 춥다. 옷 잘 입었지?”
“그럼요.”
“응? 근데 너....... 장갑 좀 따뜻해 보이는데? 이런 건 또 언제 산거야?”
“기가 막히죠? 핸드메이드에요.”
“......내꺼는?”
“인생사 셀프 아니겠어요?”
“말을 말아야지 원.”
서로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저희는 도깨비 시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행이 로키군과 술 한 잔 하러 갈 때처럼 바람이 심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새벽의 차분한 분위기만큼이나 산동네의 공기도 바람 한 점 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저는 바람 불지 않는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런 날씨에 바람마저 불면 온몸이 박살날거 같으니 싫어하지만, 그건 제가 바람 불지 않는 날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바람이 불지 않는 추운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람이 부는 날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하아아.”
“.......”
“호오오.......”
“고만 좀 해라 쫌.”
“이거 진짜로 신기하지 않아요?”
진귀한 경험이라 함은.......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서 이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거랍니다. 음.......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요? 난 정말 신기하던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입김을 내는 것도 기술이 있다고요. 예를 들어볼까요? 입을 ‘오’발음을 내듯이 동그랗게 만들고서 입김을 만들면, 입김이 빠르게 나오면서 기차의 연기같이 나온다면, 반대로 입을 ‘으’발음을 내듯이 길쭉하게 만들고서 입김을 뿜으면, 김이 느리게 나오면서 물안개 같이 입에서 흘러나온답니다. 물안개 같은 입김이 제 얼굴이나 몸을 휘감을 때는 제가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곤 합니다. 뭐랄까...... 영적인....... 아우라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아주머니가 제게 하듯이 제 이런 모습이 때로는 남들의 푸념을 살 때도 있긴 한데, 뭐 어떤가요? 이 새벽에 아주머니 말고 누가 또 나타나겠습니까?
“어......으응?”
“........예?”
“아! 아아!”
“누구......세요?”
역시........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니, 함부로 단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왠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도깨비 시장에서 나오다가 저를 보시고는 알은체를 하셨네요. 혼자서 즐기는 작은 즐거움이 남에게 들킨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건 둘째 치더라도, 저로서는 처음 보는 분이 저를 알아본다는 것에서 오는 궁금함이 더 컸던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은 대관절 누구이시기에 저를 저토록 어색하게 알아보는 걸까요?
“저런....... 기억이 안나시나 보구나. 어제 저녁에 로키 녀석하고 저희 좌판에 오셨었잖아요.”
“어......음......아.......아아!”
아주머니의 말씀에 걸레를 쥐어짜는 느낌으로 제 기억을 쥐어짜보니........ 역시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게 맞는 소리였던 걸까요? 촛불이 훅 꺼지듯이 사라졌던 기억의 구석에서 육덕졌던 주모아주머니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기억이 납니다. ‘그’ 로키군에게 장난을 쳐댔던 재미있던 아주머니........ 왜 이런 인상적인 캐릭터를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요? 아주머니에 대해 죄송한 마음에 저는 다소 과장되게 아주머니의 알은체에 답례를 했습니다.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뭐 놓고 온거라도 있나?”
“아니에요. 여기 이분하고 새벽장을 보려고 왔거든요.”
주모님은 아주머니와 함께 서로 약간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에, 제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저를 보는 주모님의 얼굴은....... 조금은 놀랍다는 느낌이 묻어있었습니다.
“역시.......젊음이 좋긴 좋아.”
“네?”
“어제 그렇게 떡이 되도록 술을 먹고도 이렇게 아침에 장을 볼 수 있잖아요.”
“떡........이요?”
“아, 기억 안나요? 자기 진짜 엄청났었는데.”
“엄청........났다고요?”
“하하........ 기억이 안나나 보구나. 그럼 뭐 어쩔 수 없긴 한데........ 아쉽네요. 정말 주모인생 20년에 그런 명장면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그랬나요?”
아주머니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저희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산동네 아래로 내려가셨고, 저희는 도깨비 시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새벽장답게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생선의 비릿한 냄새와 채소의 풋풋한 냄새가 뒤섞이는 장소........ 1월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연의 선물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대륙의 동맥이라는 광활한 철도 덕분이겠지요. 광활한 대륙의 남쪽 끝에서 나는 과실이 이렇게 라스알게티까지 오게 될 수 있는 것,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게 하는 것, 과학과 기술이라는 건 정말 사람에게 풍요로운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뭐할 거에요?”
“글쎄....... 오늘이 납일이니까, 납평전골이나 해먹을까?”
납일.......이라.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는게 무슨 말인가 헷갈릴 때가 많았어요. 무슨 날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소리니 원........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하지요?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럴 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을 텐데요. 하나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에 대해 알려고 덤벼드는 것이겠지요. 저는 후자를 택했었고....... 이제는 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인종의 용광로라는 라스알게티이니 만큼, 이 도시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보편성의 기둥에 기대면서도 각자의 다양성을 지키며 살고있습니다. 운터브룩은 라스알하게 출신의 주민들이 모여사는 편인데, 라스알하게 유민들은 날짜를 헤아릴 때, 태양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달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1월 10일이지만, 그들의 방식대로 하면 12월 1일이에요. 그 날을 특별히 납일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저번에는 동지라고 해서 팥죽을 쑤어서 먹었는데, 이번에는 고기를 만들어 먹는 전통이 있나보네요.
“그럼 푸줏간을 가야겠는데요?”
“아니지 아니야. 거긴 집짐승 고기를 파는 데잖니. 오늘 같은 날은 바로 저길 가야 한다구.”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가죽으로 된 옷을 입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아저씨가 손질된 고기를 바닥에 널어놓고서 앉아있었습니다.
“납일날에는 산짐승 고기를 먹어야 한다구.”
“아...... 그래요?”
“이 언니 따라갈라면 아직 멀었구나.”
“뭐가 그렇게 엄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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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 시간동안 연재를 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