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나는 상자를 닫아서, 저 옆에다가 치워놓았다. 아무리 감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자의 유해를 보는건 그닥 유쾌한 일이 될 수는 없는 거니까. 대신, 나는 상자에서 도로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은 내가 자신을 무슨 이유로 쳐다보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까? 아마 이 질문을 하루 전에만 들었더라면 나는 전자의 대답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자 속 내용물을 보아버린 지금에는, 나는 첫 번째 대답에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녀석은 정말.......
“생각보다 총명한 축이었군.”
“응? 나?”
“그래, 너요.”
“아하하! 웬일이야? 니 입에서 칭찬의 말이 다 나오구.”
“칭찬만 나올까, 축하한다.”
“뭐? 뭐가?”
“이제 너는 선요원의 차기 총책이 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잖아?”
“그건 뭐...... 사고였어.”
“사고라기 보단...... 기획이었겠지. 모처럼 잡은 기회를 찰리 녀석에게 뺏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 임마.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쩌면....... 그마저도 지부장의 의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내 말이 이어질수록, 도로시의 얼굴은 차츰차츰 굳어져갔다. 이젠 더 이상 그 바보 같은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는구만, 어쩌면 저 얼굴이야 말로 도로시년의 ‘진짜’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그걸 감추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고 바보 천치같은 짓거리를 해왔을지도....... ‘없는 능력을 있는 척 하는 것 보다, 있는 능력을 없는 척 하는 게 더 힘들다.’라는 말이 있다. 전자의 것은 속된 말로 ‘허세’라고 할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겸손? 아니, 겸손과 같은 단어의 뉘앙스와는 다르지....... 이번건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거니까, 뒤에서 뭔가를 꾸미기 위해 일부러 허한 모습을 보이는 것....... 그걸 정의할만한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명의 개념은 도로시를 묘사하기에 적절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녀석은 아주 교활했다. 미친년이라기 보단, 교활한 년이었다.
“...... 지부장도 그런 소리를 했었나?”
“아니, 그냥 소설 한편 써 본거지 뭐.”
“사실은 말이야.”
“됐어. 난 니 부모가 아니니까 네 녀석의 그 ‘말 못할 사정’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어. 게다가...... 딱 봐도 너에게 불리할 만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 같은데, 말해봤자 본전도 못 건질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않나?”
“......”
녀석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근육을 찡그려가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 뜯었다. 나로서는 녀석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지금 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득을 본 자는 바로 녀석뿐이다. 도로시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걸, 자신의 방식으로 얻어냈다. 그 방식은 나는 물론이고 지부장의 허를 완전히 찌르는 거였지. 녀석이 그토록 원하던 ‘우리가 엿을 먹는 상황’을 훌륭하게 잘 연출해냈다. 그런데 왜? 녀석은 흡족해 하는 대신 짜증을 부리는 것일까?
녀석의 입에서 딱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톱이 깨져나가 그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개중에는 큰 것도 있어, 내 얼굴에 날아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 만치 뒤로 젖혀야만 했다. 손톱을 물어듣는 그 눈은...... 불길이 그러하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 녹아있는 감정은 나로서는 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개념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마음에 안들어.”
분노였다.
Channel 2. 아이리스
스벤의 방에서 나온 뒤에도, 저는 한참 동안 복도를 누비며 방과 방 사이를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인생은 시계추와 같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한다지만, 어째 저 같은 경우에는 방을 들어갔다 나오면 나올수록 바구니가 점점 무거워 지는지 알 도리가 없네요.
“아.....이고.”
한참의 반복 끝에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바구니와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고 삭신이야...... 고아원에서도 빨래는 해왔지만, 이들의 빨래량은 고아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몸을 쓰는걸로 업을 삼는 분들이니 하루에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으시는지 원...... 생각하면 할수록, 아주머니가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몇 십 년 동안이나 혼자서 해 오셨던 거잖아요. 그런 마당이니 다들 아주머니께 함부로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임에는 마땅한 권리가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고르고 난 뒤에, 이젠 내려갈 만한 체력이 되었다 싶어 몸을 추스르는 찰나, 눈 앞에 제가 내려가야 할 계단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어요. 빈 바구니로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이거 경사가 보통이 아니네요? 하하...... 정말 보는 것 만으로도 맥이 탁 풀려버릴 노릇입니다. 대체 이걸...... 어느 세월에 내려가야 하는 걸까요?
계단을 보며 망연자실해 있는 동안, 위층 계단에서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그 와중에도 누가 내려오는 것이 궁금했었는지 저도 모르게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 지더라고요.
“어? 언니! 여기서 뭐해요?”
아아, 누군가 했더니 토라씨였습니다. 그녀는 계단을 총총 내려오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참......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그녀는 ‘예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거 같아요. 어쨌거나, 그녀는 걸음을 빨리해서 제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빨래 거리가 많아서...... 잠깐 쉬고 있었어요.”
“이것들이 양심껏 옷을 입지는...... 양이 좀 많죠? 내가 도와줄까요?”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전 이미 틀렸어요. 그냥 날 버리고 먼저가요.”
“하하! 뭐에요 언니, 한 달 사이에 유머가 많이 늘었는데요? 이젠 상황극까지 욕심내고......”
뭐긴 뭐겠어요...... 아주머니와 한 달을 붙어 다니는 동안 둘이서 온갖 상황극을 해 댔으니...... 토라씨는 다행이 제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짐짓 웃으면서 바구니의 손잡이를 잡아챘습니다.
“어차피 저도 내려가는 길이었으니 같이 가요. 도와드릴 테니까.”
“뭐......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면 굳이 사양을 하지는 않겠다마는...... 정말 고맙습니다.”
토라씨의 도움으로 기운을 차리고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바구니를 잡았습니다. 저와 토라씨는 바구니가 엎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가면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호흡이 잘 맞지 않아서인지 삐그덕 거리는 통에 한때는 서로 위험한 상황에 까지 직면할 뻔도 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어요.
“여기 조심해서 돌아요. 토라씨가 크게 돌아야겠네......”
“이......렇게 말이죠?”
“그렇죠 그렇죠. 좋아요...... 그럼 우리 모두...... 침착해, 침착......해애......”
“아 근데 언니......잠깐만, 이거 진입각이 좀 좋지 않은데...... 잠깐 스톱!! 에헤이! 박을 뻔했잖아요.”
“어......어라? 이렇게 들어가면 될 줄 알았는데.......”
“잠깐만 뒤로 뺏다가 다시 들어가자고요. 자......자. 들어가요.”
“이제 돌까요?”
“잠......잠깐만요. 아이고 왜이리 성격이 급해요!”
하하...... 이거 지독한 시어머니를 만난건가요? 토라씨한테 이런 기질이 있을거라고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이래서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하는 거 같습니다.
Channel 1. 로키
뭐...... 애초에 나는 나 자신의 감정도 모르는 판에, 타인의 감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녀석의 분노는 오롯이 녀석의 몫이다. 나 이외의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십중팔구 녀석의 감정에 대해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며 녀석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최후의 최후까지 책임져 줄 수 없다. 그것은 감정의 주인인 자신의 몫이니까.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녀석에게 ‘지부장에게 가자.’고 말하며 도로시와 함께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복도에는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이런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층계참 앞에 토라와 답답이가 바구니를 든 채로 서 있었거든. 아마, 답답이가 빨래바구니를 들고 내려가는 걸 토라가 도와주려고 나선 모양이었다.
“어? 저거 토라하고 아이리스씨 아니야?”
“있어봐.”
평소대로라면 녀석들에게 다가가서 바구니를 들어주거나 했겠지만, 지금은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사람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토라 녀석이 짐을 나르면서 답답이에게 잔뜩 투덜거리고 있었거든. 가서 중재를 해줘야 하는거 아니냐고? 글쎄, 토라의 그런 모습을 보이는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거든. 배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토라는 녀석 나름의 기준에 합격점을 받은 사람에게만 저런 행동을 한다.
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답답이가 토라의 마음에 들었다는 거다. 그래서 녀석이 답답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거고. 그런 중에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든다면...... 토라 녀석의 성격에 간신히 연 문을 꽉 닫아버릴게 분명해보였다.
답답이 녀석에게 있어 한명이라도 더 친해지는 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 그걸 도와주는 것이 내가 녀석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일 거다.
“하 진짜 답답하게 구네. 안 돕고 뭐하는데?”
“너야말로 잘 풀리는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얼른 지부장 만나러 가자.”
도로시가 일을 더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 전에,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답이다 싶어,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아끌다시피 하여 지부장실로 갔다. 도로시는 제 멋대로 하지 못하니 기분이 나빴는지 잔뜩 부루퉁해져있었다. 뭐...... 내 알바인가.
문을 열어 지부장실에 들어가니, 지부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판오디콘 모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도로시가 돌아왔습니다.”
“벌써? 찰리 녀석...... 숨바꼭질에는 영 젬병인 모양이구먼.”
지부장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이 남자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걸까. 아니, 지금 도로시가 한 행동에 대해 설명을 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지부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의문이다. 과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Channel 2. 아이리스
토라씨와 함께하는 빨래와의 사투는 한참의 시간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한참의 시간동안 상황은 나아지기 보다는 악화일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요. 남 핑계 대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토라씨는 정말로...... 보통내기가 아니었어요. 저는 솔직한 말로, 토라씨는 잘 나서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냥 모두가 시끄럽게 굴 때 뒤에서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선을 넘어갔을 때는 정리를 해주는 그런......느낌? 그렇게 생각을 해왔었는데...... 보스 기질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깐깐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고...... 하하, 참 저랑은 잘 안 맞는 캐릭터이더라고요.
이렇게 잘 안 맞는 사람과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지체되고, 땀은 나고...... 옷들이 땀을 먹기 시작하고, 짐은 점점 무거워지고...... 눈 위에 서리가 앉은 걸 제 눈으로 지켜보는 것 같은 아주...... 뭐랄까...... 더러운 느낌? 그런 느낌으로 한참을 계단에서 낑낑댔던 것 같았어요.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하......하아. 이 언니 참....... 우린 일은 같이 일할 정도는 못되나 봐요.”
“헥......헥...... 쓰읍!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방금 그 생각 했었는데.”
제가 토라씨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토라씨가 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서로 일치한다는 거랍니다.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서로 미워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어느 한쪽은 사랑하는데 반대쪽에서 그 사랑을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거야 말로 비극 아니겠어요? 서로가 일적인 부분에서는 안 맞는다는 걸 합의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어.....언니, 이제 딱 세 계단만 내려가면 되니까.”
“네......”
“이거 그냥 던져버릴래요?”
“.......”
세상에, 이런 건 또 귀신같이 맞네요. 저는 토라씨에게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을 서로 교환하면서 이견이 없다는 표시를 했고, 토라씨 역시 제 생각을 읽었습니다. 저희 둘은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에, 이 지긋지긋한 빨래바구니를 바닥을 향해 던져버렸답니다. 참...... 이런 말 하면 안 될 거 같긴 한데, 빨래를 흩뿌리며 날아가는 바구니를 보노라니,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속이 아주 시원했더랬지요.
“에이, 진작에 던져버릴걸 그랬네. 어차피 빨거.”
“그러게요, 왜 이런 생각을 이제야 했는지 몰라.”
저희 둘은 어께를 주무르며 계단을 내려왔고, 빨래를 주섬주섬 바구니 안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이리저리 흩어진 빨래를 줍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옥 같던 계단에서 해방됐다는 생각에, 저희 둘은 콧노래만 부르지 않았다 뿐이지 신바람을 내며 빨래를 주웠었지요. 그리고......
“자, 이제......”
“끝!”
저희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좋아라하다가...... 문득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그대로 손을 놓았습니다. 짙은 농도의 어색한 공기가 저희 둘 사이에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어요.
“고마워요. 토라씨...... 이제 빨래장까지는 금방이니까,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그럴래요?”
“네, 일 보세요. 재삼 말하지만, 정말 고마웠어요.”
저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에 빨래 바구니를 챙겨 세탁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어..... 아이리스 언니.”
“네?”
“이거 끝나고 시간 좀 잠깐 내줄 수 있어요? 물어 볼게 있어서......”
“음...... 저한테요?”
“네.”
“네, 그럴게요. 도와주셨는데, 그보다 더한 것도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 걸요 뭘.”
Channel 1. 로키
수많은 언어의 파편들 중에서 지부장에게 할 만할 단어를 찾고 있는 동안, 지부장은 의자에 앉은채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남자의 시선은 내 거죽과 뼈를 넘어, 그 속에 숨어있는 나의 머릿속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시선이 매우 불쾌하게 느껴졌고, 그 불쾌감은 나의 의식을 언어의 심연에서 현실세계로 끌어내버렸다.
“꿀을 먹은 건가, 아교를 먹은 건가?”
“음......”
“......찰리를 제거했나보구먼.”
“......”
나의 침묵 속에서 의미를 발견했는지, 지부장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의자 속에 자신의 몸을 파묻어버렸다. 라스 알게티로 파견 온 이래로 지부장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왔지만, 그가 이렇게 지치고 무기력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 적절한 생각일까 싶지만 이렇게 지부장의 모습을 보니, 그가 늙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이마는 주름살이 지층처럼 쌓여있었고, 숱 없이 희끗한 머리털 사이로 반들반들한 두피가 보였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지부장이 아닌 과중한 책임감에 짓눌려있는 딱한 늙은이로 보였다.
“그러고도 남을 년이지. 총명하고 집착이 심한데다가 이쪽에 지독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그냥 놓쳐버릴 리가 없지 않나?”
“녀석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물을 엎질러버렸는데 그게 하필 모래밭이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니 사과 같이 의미 없는 행위는 그만두자고.”
“.......”
“아 진짜, 살다 살다 그 미친년이 위세부리는 꼴을 다 보겠구먼. 지부장 노릇도 더러워서 못해먹는 시대가 열리겠어. 마스터에게 사직서라도 내든가 해야지.”
“......”
“뭐해? 데리고 오지 않고. 어찌됐던 선요원의 총책이 되었으니 작업구상이나 함께 해야지.”
“데리러 갈 필요 없어. 이미 왔으니까.”
도로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자를 든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얼굴에는 감정의 징후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어께의 들썩거림과 목울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래, 녀석의 딴에는 녀석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통쾌한 순간이 될 터겠지. 물론...... 녀석이 즐거운 만큼이나, 우리는 재미가 없게 될 것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 그게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전제다.
내가 녀석에게서 감정의 징후를 읽어내는 동안, 도로시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 알바가 아니라는 듯, 상자를 열어 찰리의 목을 꺼내 보였다.
“안타깝게도 택배기사가 서투른 바람에 배송 중에 사고가 생겨 물건이 파손 돼버렸네요. 그래도 이정도면 얼추 잡아주기는 할 거 같은데, 암살자들 법도는 어떻게 되시나?”
“뭐...... 우리도 대충 비슷하게 결말 내버리려고 했었는데, 손안대고 코를 푼 셈이니 고마울 따름이지.”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 2부를 책상위로 꺼냈다.
“이제, 계약서에 도장 찍고 일 이야기로 넘어가자고.”
“사업하는 사람끼리 무작정 도장 찍을 수 있나, 계약서 좀 봅시다.”
도로시는 계약서를 잡아들고는 마룻바닥을 쓸 듯이 계약서를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걸 찬찬이 읽어 내렸다. 녀석이 그러는 동안, 나와 지부장은 그녀가 마지막 장을 읽을 때 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도장 찍는 건가?”
“아뇨. 계약조건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게 몇 가지 있는데, 도장 찍기 전에 짚고 넘어갑시다.”
“그래? 그럽시다. 계산할건 빨리 계산하자고. 어떤 걸 조율하고 싶은데?”
녀석은 지부장의 질문에 대답대신 득의연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커미션”
Channel 2. 아이리스
빨래야 간단하지 않냐고요? 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해요. 바구니 속에 들어있는 빨래들을 꺼내서,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 막아놓았던 수로를 열어 세탁기 안에 흐르도록 조작만 해놓으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이 모든 걸 다 해결해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이번 빨래는 그런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란 것이겠죠. 저와 토라씨가 인내심이 바닥나 빨래바구니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빨래들이 바닥에 뒹구는 일이 벌어져 버렸잖아요.
“에휴, 생각보다 일이 쉽지는 않네?”
그러다보니, 몇몇 빨래에는 흙이나 먼지 같은 것이 잔뜩 묻었을 거란 말이죠...... 이런 녀석이 세탁기 속에 섞여 들어가버리면, 아마 단 한 번의 세탁으로 그 빨래가 품고 있던 먼지가 퍼져나가서 종당에는 모든 빨래들이 먼지를 공유하게 될 거에요. 살림살이는 하는 입장으로서는, ‘만약’ 이라는 가정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참극이 벌어지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저는 지금 바구니에서 빨래를 하나씩 꺼내어 일일이 털어가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야 토라씨에 대한 미안함과 조급함에 급하게 털어 넣긴 했는데, 빨래의 양이 워낙 많다보니까...... 토라씨에겐 미안하게도 빨래 터는데 정신이 팔려 토라씨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하기사, 시간도 많이 지체되다보니, 토라씨로서도 기다리다가 다른 할 일을 찾으러 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고요. 어쨋거나 저는 꽤 많은 시간을 공을 들여가며 빨래의 먼지를 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비어버린 바구니를 제 자리에 놓고난 뒤에야 저는 빨래라는 큰 과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고, 하도 팡팡 털어대는 통에 어께가 욱씬거리네요. 저는 어께를 주물러가며 빨래장을 나섰습니다.
“다 끝났어요?”
“어.....어어? 토라씨, 아직도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럼요. 언니하고 이야기 하기로 했었잖아요.”
세상에......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 꽤 오래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토라씨는 저를 보냈던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저를 기다려주고 있었어요. 비록 웃으면서 맞이해 주긴 했지만...... 맞잡은 두 손과, 동동거리는 두 발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요. 아니, 대체 얼마나 이곳에서 오래있었으면......
“세상에, 이태껏 여기에서 계속 서 있었던 거에요?”
“뭐...... 이렇게 오래 걸리실 줄은 몰랐죠, 언니. 에이 괜찮아요. 이정도 날씨가지고......”
“이정도 날씨라니! 오늘이 섣달 초하루인데. 얼른 방으로 가요. 이러다 동상 입겠어.”
저는 얼음장 같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얼른 취사장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다행이 취사장의 화덕에는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가 있었어요. 저는 얼른 불을 피워, 물을 덥혔습니다.
“김이 나오기 시작하면, 손 녹이고 있어요. 전 그동안 창고에서 유자청 꺼내올테니까.”
“아니, 유자차까지는......”
토라씨는 허위허위 손을 저었지만, 그 손마저도 너무 차가워 보여, 저는 그녀의 만류에 대꾸 없이 창고로 갔습니다. 너무 미안했어요. 전...... 토라씨가 정말 끝까지 기다릴 거란 생각은 안했었거든요.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했어야 했는데...... ‘설마’라는 생각이 사람을 잡을 뻔 한 거잖아요. 만일 제가 더 늦게 나왔다면...... 그건 정말 생각하기도 싫네요.
창고에서 소스쪽 파트를 뒤지다가 구석에 놓여있는 유자청을 발견했습니다. 겨울에는 유자차죠. 저는 혹시라도 늦을까 허둥지둥 유자청을 챙겨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기다렸죠?”
“쉿.”
토라씨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제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아하! 냥사장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토라씨 무릎 위에 앉아서 그루밍을 하고 있었어요. 평소에는 오라고 해도 오질 않던 녀석이...... 토라씨 같이 예쁜 사람이 오니 무릎위에 냉큼 앉아있는 거 봐요. 세상에 저렇게 티가 나게 영악한 녀석이 다 있나 싶습니다.
저는 토라씨가 냥사장을 쓰다듬는 동안, 화덕에서 주전자를 꺼내 유자청이 담긴 머그컵에 물을 따랐습니다. 티스푼으로 몇 번 저으니까 유자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김과 함께 몽글몽글 퍼져 나왔지요.
“고양이 파?”
“아! 예, 고마워요 언니.”
“에이, 고맙긴요. 나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찬데서 기다렸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돌아설까 하려는 차에 언니가 나와 버렸어요.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발걸음 돌려버렸어야 했었나 싶어요.”
“에이, 그길로 돌아섰으면 이렇게 고양이랑 놀 수나 있었을 거 같아요?”
“하긴...... 네 발 달린 건 다 옳아요.”
사람일은 참 모르겠어요. 토라라는 사람의 존재도 모르고 살다가, 그런 사람과 한 달을 함께 살게 되고, 그러면서 은연중에 서로 견제? 뭐 그런 것 비슷하게 하다가...... 토라씨와는 결코 친해질 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의 각오를 하게 되었죠. 그런 다음날 바로 토라씨와 함께 일을 하면서 ‘이 사람이랑은 같이 일 못하겠구나.’하는 판단을 하는가 싶었는데. 종당에는 이렇게 함께 불가에서 고양이를 끼고 앉아 유자차를 함께 마시다니요.
“아이리스 언니.”
“네?”
“저..... 언니한테 물어볼게 있다고 했잖아요?”
“아, 맞다 그랬었죠.”
“근데 사실..... 물어본다기 보다는 확인할게 있어서 그래요.”
“아....그래요? 무얼.....?”
“언니.”
그건 그렇고, 토라씨는 정말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제가 그녀를 함부로
“언니 로키오빠와 무슨 관계에요?”
미워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