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답답이...... 말씀이십니까?”
“너는 그녀를 그런식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더군.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일 처리 빠릿빠릿하지, 사교성도 좋아서 벌써 관리인하고도 친해졌잖아. 나는 그 성격 괴팍한 양반이 아이리스양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걸 봤을 때 정말 놀랐어. 그만하면 된 거 아니야? 일이야 알려주면 되는 거고.”
“......”
지부장의 말은 어느 것 하나 꼬투리 잡을 수 없는 정확한 사실만을 담고 있었지만, 나는 선뜻 ‘알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로시와의 일이 이런 방향으로 불똥이 튀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국면의 전환에 적잖이 당황했고, 그것은 내 신체적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단지 그것만이 내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라 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정의내리기 어려운 요소 하나가 또 다른 손을 들어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지?”
“아니 뭐 꼭 그래서 그렇다기 보다는......”
“......그러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
그가 한 질문의 나열은, 고맙게도 내 스스로가 정체를 알지 못해 정의를 내릴 수 없었던 그 요소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정이 없는 내가 그것에 대해 논하는 건 매우 비논리적일 수 있겠지만, 분명코 그의 제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답답이를 휠맨의 총책에 앉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런 말을 하면 정말 내가 감정이 있는 것 같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좀 더 노골적인 표현이 필요 하겠군 나는 답답이를 ‘우리’의 손아귀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자신의 등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 녀석을 이곳에 끌어들일 수는 없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라고 그에게 말하라며 내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지만,
“꼭...... 그래야만 하겠습니까?”
내 입은 간신히 근육을 달싹거리며 수다쟁이의 노골적인 표현을 그나마 순화시켜서 표현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지부장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상한 노릇이군. 너같이 감정 없는 놈이라면, 당연이 내 생각에 동의할 줄 알았거든.”
“감정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 또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나는 말을 질질 끌며, 머릿속의 수다쟁이에게 ‘당장 그럴듯한 말을 뽑아내라.’라고 채찍질을 해댔다. 수다쟁이는 평소답지 않게 과격한 나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듯 했지만, 채찍질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주워섬길만한 말을 몇 마디 뱉어냈다.
“일단...... 녀석은 ‘우리’의 생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실진 모르겠......지만, 녀석이 가진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이해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아니,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다시 말할게요.”
“그만.”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생각 좀 정리하고요. 그러니까, 음...... 녀석이 휠맨의 총책이 되려면 말이지요...... 총 2가지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녀석이 그럴만한 능력이 되는가. 그리고 녀석이 그걸 할 의지가 있는가. 그걸 따졌을 때, 만족한다면...... 저야 더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바람에, 말이 꼬여버려 지부장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오긴 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럴듯한 말들을 뱉어내니 지부장의 눈꼬리가 차츰차츰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비언어적인 표현은 그가 내 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는 그가 내말에 동의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침착해야 한다.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뱉어내다가는 그의 눈꼬리가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일단, 답답이가 휠맨을 맡을 능력이 되느냐는 건데, 그건 제가 정확한 조건을 모르지만, 지부장님이 말씀하신 것이 조건이라면 맡을 능력이 될 겁니다.”
“그래, 그럼 첫 번째 조건은 만족했구먼. 그럼 두 번째는? 그것 때문에 반대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녀석은 ‘종교인’으로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종교인이라는 포지션은, 신념을 중요하게 여기게 마련이죠. 답답이가 가지는 신념이, ‘우리’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는 건, 지부장님도 동의하실겁니다.”
“......”
그의 눈꼬리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고, 심지어 짐짓 심각한 얼굴로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행동양태는 내가 아는 한, 어느 정도 수긍을 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집어던지는 멍청이가 아니다.
“과연 답답이가 ‘살인’을 하는 걸 도울까요? 그 목적을 숨기고 녀석에게 ‘사람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것만 하면 된다.’고 하면, 과연 녀석이 속을까요?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속아 넘어간다고 칩시다. 과연 언제까지 속아 넘어갈까요? 그리고 그걸 녀석이 알게 된다면, 누가 그 뒷감당을 해야겠습니까?”
“......”
지부장은 말이 없어졌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시나브로 입을 다물었다. 달변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재적인 요소와, 내가 그에게 전달한 외재적인 요소가 서로 충돌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사’가 보여준 모든 충돌의 양식들이 그러했듯, 처음의 격렬한 충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느려지고 약해지다가, 이윽고는 한데 뒤섞여 새로운 것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건 균형이다. 말 한마디 덧붙였다가 그것이 깨어지게 되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반대측면을 향해 추가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지금 그대로 입을 다물고 굳이 밀어붙이지 않으며, 그가 혼자서 이 모든 걸 곱씹기를 기다릴 뿐이다.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의 되새김질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주...... 그럴듯한 개소리였어. 그냥 너는 단지 아이리스양이 여기에 좀 더 깊숙이 관여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
“하지만, 니 말이 그럴듯한 건 사실이지.”
“......”
“이런 건 아무래도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게 더 낫겠지?”
Channel 2. 아이리스
토라는 ‘생각 있으면 나중에라도 술병하나 들고 찾아오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털고 취사장을 떠났습니다. 저는 세탁이 다 끝났을까 싶어, 얼른 세탁실로 가보았습니다. 세탁실에는 세탁기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따금씩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지요. 저는 냥사장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세를 고쳐 잡고 세탁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타이머는 제게 세탁완료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다고 말해주고 있었어요.
시간이 조금 남기도 하여, 저는 냥사장과 함께 세탁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세탁실 너머로 눈이 내리고 있었네요. 저는 냥사장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눈을 보며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냥사장은 차가운 바깥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발톱을 세워가며 어떻게든 제 가슴팍에 파고들어가려고 잔뜩 치댔습니다.
“춥니 냥사장?”
“그르르.....”
“에이, 춥다고 너무 치대지만 말고 눈 내리는 것 좀 봐봐. 진짜 예쁘지 않아?”
저는 냥사장에게 이런 말을 하고는, 제 말이 스스로 우스워 혼자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지금 제 행동이 참 웃긴 게, 전 눈이 내리는 게 정말 싫었거든요. 이스트 민스터에서는...... 아무래도 고바위에 위치하다보니 눈이 내리면 온 동네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니까요? 눈 온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너나 할 거 없이 창고로 달려가 설삽이며 대비를 들고 나와서 정신없이 눈을 치우기 바빴답니다.
물론 눈이 어느 정도 내리냐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마는, 그런 시도는 대개 무위에 그치고는 했어요. 모두가 한 줄로 서서 한참동안 낑낑대며 눈을 한 곳으로 치우고 나잖아요? 뒤를 돌아보면 정말 ‘내가 대체 뭘 했나’싶을 정도로 또 다시 눈이 쌓여있더라고요. 신화 속 시시포스가 딱 그런 심정이었겠지요.
눈을 치워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러하듯이, 저도 처음에는 ‘어차피 쌓일 거 그냥 다 내릴 때 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치우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열두 살 쯤 이었나? 정말 감당도 안 되게 눈이 내리던 날, 제 오랜 의문을 풀 수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양이 치우는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던 그날, 저희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애잔하다 싶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눈을 치워댔었습니다. 하지만 눈은 점점 쌓였고, 결국 저희는...... 수녀원 입구 10m정도 떨어진 곳에서 완전히 고립되어버렸었어요. 키 보다 더 높이 쌓여버린 눈 속에서 저희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를 부둥켜안고 덜덜 떨었습니다. 정말 이대로 요단강 건너나 했었다니까요? 다행이 경험 많은 수녀님들께서 눈 아래에 길을 뚫고 저희를 구출해 주셨기에 망정이지...... 눈은 방치해두면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버린다는 것을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지 않고 묵혀두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아니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일’같은 건 없다는 걸 어린 저는 스승 없이 경험으로 배웠던 것 같아요.
이렇게 눈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던 제가, 지금은 유자차와 함께 여유롭게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운터브룩은 고바위 길인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암살자들이 지역에 투자를 해놓아서인지 이렇게 눈이 내릴 때면, 길에 나 있는 조그만 구멍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게 장치를 설치해놓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이곳은 눈이 내려도 이렇게 한것진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모양입니다.
처마에서 나와 눈을 밟아보니, 발밑에서 뽀드득하는 소리가 납니다. 하하, 이전에는 정신없이 그저 ‘하나 둘 셋!’이라는 구호와 함께 너까레를 밀어가며 눈길을 질주하느라 전혀 신경 쓰지 못했었는데, 눈을 밟으면 이런 소리가 나나봅니다. 어째 이 소리..... 약간 이가는 소리랑 비슷한 거 같지 않나요? 전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아요.
“눈 참 예쁘게 내리네.”
“아! 안녕하세요. 지부장님.”
“아까 식사 때 봐놓고 안녕하긴 뭘.”
언제 오셨는지 지부장님은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제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지부장님이 여긴 무슨 일일까요? 어쨌거나 손님이 오셨는데 밖에 세워둘 수는 없어, 저는 지부장님을 취사장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아까 토라가 남기고간 찻잔을 비우고, 새로 유자차를 만들어 드렸어요.
“오실 줄 알았으면 뭐라도 미리 만들어둘걸 그랬네요.”
“아냐, 이런 날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눈 내리는 거 보는 게 최고지..... 야, 이거 기가 막힌다? 잘 만들었는데?”
“유자청에 물 부은 거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떠시는 거 아니에요?”
“너무 호들갑이라니, 이제 시작인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요즘 걱정이 하나 있어.”
“걱정이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에요?”
“그럼. 쉽지 않은 숙제가 생겼다니까.”
“......숙제?”
“살이 너무 쪄버렸거든. 예전 같으면 밥 몇 끼 거르고 운동 좀 하면 살이 금방금방 빠졌는데, 요즘은 밥 몇 끼 거르는 게 쉽지가 않네? 그러니 백날 운동을 하면 뭐하나, 식사 때만 되면 밥을 고봉으로 먹어대는걸.”
“에이, 그게 무슨 고민이에요.”
지부장님의 너스레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암살자의 주인이라는 것만 잊어버리면 정말 유머러스한 옆집 아저씨 같은 분인데......
“사실, 고민은...... 다른게 있긴 했는데, 이젠 없어졌어. 처음에는 다들 너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단다. ‘우리’가 아무래도 외부인에게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래서 혹여나 네가 이곳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는 우리의 걱정을 문자 그대로 기우로 만들더구나. 이제 이곳에 너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지. 오히려, 너를 따르고 믿어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 않니.”
“에이,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만 있었는걸요.”
“내가 이렇게 칭찬을 할 때는, 겸손을 떨기보다는, 유자차를 리필해주는 게 매너란다.”
“처음만 따라드리고요. 그 다음에는 셀프에요.”
“거참, 이젠 나를 상대로 상황극을 하려고 드는구나.”
지부장님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주전자에 손을 가져가려고 하셔서, 저도 이젠 농담은 그만하기로 하고 제가 먼저 주전자를 잡아서 지부장님의 찻잔에 물을 부어드렸어요. 지부장님은 유자청이 잘 섞이도록 찻잔을 몇 번 빙빙 돌리다가 찻잔으로 코를 가져다 대었습니다. 차가 제대로 섞였을 때 풍기는 미묘한 향의 변화를 느끼시려는지 눈을 감으면서 말이에요.
“로키에 대해서는 많이 알게 되었니?”
“음...... 꽤나?”
“아주 많이?”
“엄청나게?”
“미주알 고주알?”
“사실 그정돈 아니에요. 그냥...... 매사에 침착해 보이지만 은근 허당에, 무표정한 얼굴로 분위기 망치는 농담을 한다는 것 정도?”
“그래, 농담은 나도 백퍼센트 인정한다. 그게 녀석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지.”
“이정도면 많이 알게 됐다 싶기는 한데...... 아직 멀었어요. 워낙에 파도파도 끝이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럼 여기에는......”
사실, 그게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저도, 그리고 이곳도 모두 ‘각자의 사정’이라는게 있을 터인데,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밍기적거리면서 어색한 동거를 계속해 나갈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지부장님 말씀마따나 이곳에 어느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제가 이곳에 오래있으면 오래 있을수록, 사람이 좋은 일만 있으리란 보장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저는 지부장님께 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지부장님도 제 말씀을 들으면서, 웃음끼를 싹 빼고 진지한 태도로 임해주셨지요.
“그래...... 네 생각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구나. 그럼 딱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꾸나. 첫째는, 네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네가 온 것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도 눈치채고 있겠지만, ‘우리’가 요즘은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든. 구성원들도 많이 침체되 있는게 사실이고, 그런데 너라는 존재가 오면서, 우리에게는 정말 긍정적인 자극이 되지 않았나 싶구나.”
“정말 감사한 말씀이긴 한데요, 사람이 언제까지나 웃으면서 지낼수가 없으니까 문제겠지요.”
“하긴, 네가 ‘외부인’으로서 이곳에 있다면, 아마 너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 그래서말인데...... 두 번째 이야기는 네게 부탁을 해야 될 것 같구나.”
“부탁이요?”
“응, 그렇지. 뭐...... 네가 조금 불편해 할 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들어나 보고, 그걸 들어줄지 말지는 생각을 찬찬히 해 보고 대답을 해주었으면 싶어.”
지부장님의 말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오니, 부담감이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그 부탁이란 녀석이 오기 전에, 칭찬의 말들이 먼저 들어와, 무턱대고 ‘듣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하기도 그랬어요. 저는 조금은 꺼림칙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음...... 가볍게 들어도 될 거야. 혹여나 터럭만큼이나 부담이 된다면, 거절해도 상관은 없어. 그러니까...... 난 말이야. 너를 지켜보면서 네가 ‘우리’와......”
Channel 1. 로키
지부장이 답답이와 함께 취사장을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아마 지부장은 답답이에게 ‘제안’을 할 것이다. 답답이는 그 별명만큼이나 답답하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하겠지. 신념상 녀석은 분명 거절을 하겠지만, 지부장은 정말로 집요한 사람이다. 나는 이곳에 파견된 이래로, 그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온 과정을 지켜봐 왔기에 이렇게 단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걸 지켜만 봐야 할 뿐,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 몸에서 이상반응이 일어났다. 관자놀이에 혈류의 양이 증가해서 팔딱팔딱 거리고, 주먹과 발 등 신체의 말초부분에 힘이 실리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이따금씩 흉곽이 불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요사이 들어 이상하다. 이러한 신체반응이 나오면 ‘비정한 마음’에서 해시시 농축액이 흘러나와 내 혈관을 돌고, 나는 그 약물에 의한 진정작용으로 그 자리에 널부러져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었는데, 요즘은 바이탈 사인의 급격한 변화에도 ‘비정한 마음’에서 반응이 하질 않는다. 저번에 있었던 사고 때문에 이게 금이 가더라니, 설마 작동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그날의 사고에서 깨어났을 때, 토라는 비정한 마음에 금이 갔다는 걸 말해주면서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 결과...... 나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답답한건, 나를 이렇게 휘두르는 감정이 대체 무엇인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는 거다. 평생을 프로하기온 사막에서 산 이에게 빈데미아트릭스의 설경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프로하기안에게 있어 ‘눈’이란 그냥 땅을 하얗게 덮는 정체불명의 것으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정체불명의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는 동안에도, 이 녀석은 내 온몸을 헤집어 놓았다. 앞서의 반응 뿐만 아니라, 이제 그 감정이란 녀석은 내 가슴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고구마를 세 개정도 한 번에 삼킨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아니, 그런 단어의 얄팍한 조합으로는 이 느낌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누군가가, 내 가슴팍 위로 올라타서 이가 잔뜩 나가 잘 들지 않는 뻑뻑한 단도로 내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을 탕탕 두드려보아도 그 체증은 도저히 내려가지 않았고 답답함에 몸부림을 치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씨발.”
별로 입에 담아본 적이 없는 생소한 욕설을 웅얼거리는 것 정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저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아까는 잘난 듯이 ‘뭐 이러저러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해두는 척 하긴 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망상이 날개를 펼치고 뇌내에서 어지러이 비행을 펼치고 있었다. 지부장이 처음에는 신사답게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화를 내고 녀석을 겁박을 한다면? 답답이는 싫다고 반항하고 저항하지만 그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가 버린다면? 이 모든 망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취사장으로 박차고 들어갔을 때, 내 모든 망상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나는.......
나는 지부장의 머리를 내 주먹으로 짖이겨버리는 망상을 마지막으로 머리를 툴툴 털어버렸다. 대부분의 망상은 이러한 의례에 날아가버렸지만, 마지막 장면은 끈끈이처럼 머리에 달라붙어 당최 머릿속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하......씨. 도저히 안되겠구만.”
나는 주머니를 뒤져 펜릴의 유품인 동전을 꺼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건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위한 얄팍한 수라고, 이런 무의미한 행동을 당장 멈춰야 한다고. 하지만 머리통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결국 움직이고 행동하는건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육신이기에.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이대로 돌아서는 거고, 뒷면이 나오면 당장 저 빌어먹을 방으로 쳐들어가는 거야.”
나는 동전을 엄지손가락 위에 올린 뒤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손톱이 쇳조각을 치는 얼얼한 기분이 들면서 동전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쇳조각이 다시금 내 손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동전을 받으면 한번 뒤집을까? 아니면 이대로 볼까?’하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동전은 내 손으로 돌아오질 않았다.
“바보 같은 짓 하지마. 오빠.”
눈을 뜨자, 토라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에 동전을 잡아 빙빙 돌리고 있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어떻게......생각하니?”
“......”
지부장님은 제 눈치를 보시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셨습니다만, 저는 그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단칼에 거절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제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지남철이 서로를 만난 것처럼 딱 달라붙어서 좀체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더군요.
거절도, 수락도 아닌 그냥 침묵...... 제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로를 움켜쥐고, 서로를 탐하듯이 부비적거렸지만, 지부장님께서 스스로 주전자를 기울여 제 찻잔에 물을 부어주실 동안 아무것도 하질 못했어요.
“너는 내게 로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 그때 난 너란 사람을 믿지 않았어. 믿음이 안 가는 사람에게 내 속내를 쉽게 털어놓을 수가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거야.”
“......”
“그래서 일부러 네게 고약한 대답을 했었던 거고.”
지부장님은 자신의 몫의 찻잔에도 물을 부은 뒤에, 한숨을 쉬었어요. 그 순간에 제 눈에 보였던 지부장님의 모습은, 이제까지의 본 모습과는 너무나도 낯설어 보였습니다. 지금 그에게서는 첫 만남 때의 냉정함도, 이제까지 보여주던 넉살도, 푸근함도 어느 것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텅 비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난...... 로키를 칼과 같다고 생각했었단다. 하필 주인이 건망증 심한 칠푼이라 칼집을 잃어버린 거지. 돌아가야 할 칼집을 잃어버린 칼...... 식재료를 손질하던, 사람을 베어버리던 어떤 용도든 칼은 언젠가는 칼집에 돌아가야 하는 게 맞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칼은 그 주인마저 해하는 흉물이 되어버릴테니까. 처음엔 모두가 두려워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가 빠지고, 날이 무뎌지다가....... 결국 부러져버리고 말겠지.”
“지금 저보고......”
이 말을 하는 지부장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단해보였어요. 모든 가면을 벗은 그는 책임감과 세월에 짓눌린 노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난...... 로키를 보면 위태위태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단다. 녀석은 지킬게 없어. 달리 말하자면, ‘잃어버릴게 없는 놈’인거야. 잃어버릴게 없는 사람은 시한폭탄과 같지. 언제든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 당연히 그 선택은 스스로를 해할 뿐 만 아니라, 규모가 커지면 그 주변의 사람들 까지 휘말리게 만들거야.”
“......”
“그나마 마음 붙이던 동료 하나도 최근의 일로 잃어버렸으니......”
지부장님의 말씀에, 저는 문득 한 달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로키군과 다시 만나던 날, 그는 피범벅이 된 채 죽은 한 남자를 끌어안고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오열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를 버리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못하던 모습...... 바쁘게 지내느라 지난날을 되돌아보지도 못했다는 이유로 망각 속에 묻혀있던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지요. 제가 잊어버렸던 한 남자의 죽음이...... 아마 로키군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최악의 기억으로 남겠지요. 그가 제게 그런 기억을 주었던 것처럼.
“내가 이 제안을 네게 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부터야. 우리는 지난 사건으로 너무 많은 요원을 잃어버렸어. 하나하나가 천금과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아까운 목숨들이었지. 나는 로키마저 잃고 싶지 않단다.”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너라면 저 위태위태한 녀석을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갖게 됐단다. 너라면 저 위태위태한 로키라는 칼이 쓱하고 들어갈 든든한 칼집이 되어줄 수 있을거 같아.”
저는 지부장님의 모습에 그리고 그의 말에, 목울대가 울리도록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이젠 더는 머뭇거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제안으로 연결되는 건 솔직히 수긍이 되진 않아요. 뭐..... 제 입으로 이런 말 하자면 정말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요 백보 양보해서 제가 포용력이 있어서 로키군을 잘 보듬을 수 있다고 치자고요. 하지만 그게...... 제가 차기 ‘휠맨’총책이 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지부장님은 정말 그럴듯한 말씀으로 제 마음을 움직이긴 했지만, 지부장님의 그런 제안은 제가 평생을 지켜온 신앙을 져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서, 선뜻 수락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지부장님은 제 말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끝까지 들었습니다. 아니, 들었다기 보다는 온 몸으로 그걸 받아들이는 것같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제 말이 끝난 뒤에도 지부장님은 여전히 눈을 감지 않고서 제 말을 천천이 곱씹으셨습니다.
“그래...... 이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단다. 하지만, 나는 네게 지금 당장 대답을 듣기위해 이런 말을 한건 아니야. 지금 이야기 해봐야, 네 말마따나 마음이 움직인 것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것일 테니까.”
“아니, 이건 감정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제 신앙과 신념의......”
제가 지부장님의 말씀에 반박을 하려는 그때, 지부장님은 손을 뻗어 제 말을 가로막으셨어요. 힘 없이 뻗은 가녀린 손이었지만, 그 손에 실린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져, 저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요.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감정은 묻어두고서 차가운 이성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에, 네가 내린 결론을 내게 말해주렴. 그때도 거절한다면, 더는 묻지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