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만에 올리는거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어떤 변명을 가져다 대도 소용이 없는 제 게으름의 소치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모바일에서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관리자님께 여쭤봤더니 해결을 해주셨더라고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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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의 난데없는 행동에, 나는 한동안 얼이 완전히 빠져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사람은 인지적인 부조화를 겪는데, 지금 나의 경우는 그것이 강하게 찾아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겪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양태의 저변에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화가 났다. 왜 내가 토라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거든, 대체 저 녀석에게 내가 왜......? 하지만 이런 나의 자기 기만적인 생각과 감정과는 별개로 내 육체는 답답할 정도로 정직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관자놀이는 그 피부 밑에 흐르는 혈류 탓에 펄떡거리다 못해 터져버리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맥동해댔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냐?”
“그래.”
“닥치고 그거 내놔.”
“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같지도 않은 말장난은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오빠, 지금 오빠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 거울이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지금 오빠는 정상이 아니야.”
“정상이 아니라고? 내가?”
“그래. 오빠가 하려는 게 뭔지 알아? 하극상이라고. 그건 어떤 이유를 들이대도 정당화가 될 수 없는 일이야. 말 그대로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녀석의 말을 듣다보니, 문득 ‘내가 지금 같은 언어권의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분명 동전을 돌려달라고 말을 했는데, 저런 잔말을 무슨 이유로 들어야 하는 것인가. 심지어 그 말들의 대부분은 나로서는 납득은커녕 알아듣기도 어려운 개 소리들 뿐이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가? 그걸
“왜 니가 판단하는데?”
나는 녀석에게서 동전을 빼앗으려 들었지만, 토라는 손을 팩하고 쳐 올리는 바람에 내 손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녀석의 부당한 행동에 항의의 표시로 녀석을 쳐다보았지만, 토라의 얼굴은 어떠한 변화도 보이질 않았다. 나름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나를 더욱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지금 오빠는 정상적인 사고나 행동이 불가능한 것 같아. 이건 곧 돌려줄 테니까, 차분하게 머리 좀 식히고......”
나는 녀석이 잘난 듯이 말을 지껄이는 틈에 녀석의 오른쪽 팔목을 낚아챘다. 하지만, 내가 잡아챈 녀석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이봐, 타인에게 자신의 의도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너..... 적잖이 이 손목에 미련이 없는 모양이다?”
“손목쯤이야....... 대신 절대 합의 같은 건 안 해 줄 거야. 그리고 이건 깽값이니까 잘 받고.”
“뭐?”
녀석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무언가가 내 이마로 날아 들어왔다. 평소라면 피하거나 아니면 내 머리에 꽂히기 전에 잡아챘을 터였지만, 토라의 말마따나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이마를 때렸고, 그 순간 내 눈앞에는 번쩍하고 별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통증이 너무나도 강렬한 바람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우왁!”
“거봐. 평소 오빠였다면 이런 같잖은 장난에 놀아날 리가 없다고.”
나는 얼얼하게 달아오르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토라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다가...... 내게 동전을 돌려주었다. 어차피 돌려줄 거 곱게나 줄 것이지...... 하지만, 나의 불만과 별개로 토라의 말은 부스러기 하나도 태클 걸 것이 없는 명명백백히 옳은 말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내 자신이 보더라도 뭔가 이상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이리스 언니를 ‘우리’에 끌어 들이는 게 뭐가 그리 불만이야? 오빠로서도 좋은 거 아니야? 신경 쓰이는 여자를 자기 곁에 둘 수도 있는 거고.”
“누가 누구를 신경 쓴다는 거야?”
“오빠가. 언니를.”
“참나, 요즘 개소리가 제철인가 보지? 내가 저런 답답이를 왜?”
“그럼 왜 반대를 하는데?”
“그야...... 녀석이 ‘우리’에 발을 들이게 되면, 다시는 녀석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니까 그렇지.”
“그럼 뭐 안 될 거 있어? 언제부터 오빠가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너 임마. 답답이랑 이제 친하게 지내려는 거 같은데, 니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거 아니야? 사람 등에 칼을 꽂는 것도 유분수지.”
“언니가 좋아졌지. 그건 오빠 말이 맞아.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살면 좋은 거 아니야?”
“그건 니 본위의 이기적인 생각이고......”
“지금 그 말, 오빠가 평소 하던 생각하고 완전 정 반대인거 알고는 있어?”
“......”
토라의 말에 완전히 의표가 찔려버리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해져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토라가 굳이 쐐기를 박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의 모순됨을 느끼고 말을 이어가는 걸 그만두었을 지도......
“그런걸 바로 신경 쓴다고 하는 거야.”
“......그만하자.”
“참 신기한 일이구먼, 오빠 같은 사람이 감정을 느끼다니.”
“지부장님한테...... 보고 할 거냐?”
“반반이야. ‘우리’ 전체를 놓고 보자면 보고를 해야 하는 게 맞겠지. 불량이 발생했으면 적절한 피드백을 제공해야 앞으로 발생할 부작용을 막을 수 있을테지......만, ‘나’ 개인의 입장에서는 오빠는 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오빠를”
“...... 에바포레이터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
“뭐 사실 그거야 오빠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긴 해. 오빠는 어때? 에바포레이터에게 순순히 끌려가고 싶어?”
나는 녀석의 질문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은’게 아니라 눈을 마주치지 ‘못한’ 것이다. 녀석은 내게 대답이 뻔한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 뻔한 대답을 해야 하니까...... 그건 녀석에게 잔인한 승리감을 맛보게 만드는 행위라서....... 도저히 녀석의 눈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어쨋거나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고, 토라는 상인에게 값을 치르는 바이어와 같은 표정으로 내게 통보의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을 듣노라니
“오빠, 나 약속 같은 건 잘 안하는 거 알지? 근데 오빠가 이렇게 성의를 보여주었으니 나도 도의상 약속이란 걸 해줄게. 나는 절대 오빠를 에바포레이터에게 넘기지 않을 거야. 오빠는 아직까진 내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기분이 더없이 더러웠다.
Channel 2. 아이리스
지부장님은 손을 흔들며 취사장 밖으로 나가버리셨고, 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와 함께 오도카니 그곳에 앉아있었습니다. 주변은 고요하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제 의식의 상태를 뭐라는 말로 묘사해야 할까요? 아담의 첫 일이 그러했듯이, 세상의 만물을 묘사하고 설명하라고 ‘아버님’께서 사람에게 ‘언어’라는 것을 주었을 텐데....... 제가 아는 언어의 영역은 복잡하게 엉겨가는 제 머릿속을 설명하기에 가난하고 하잘 것 없어, 그 소임을 다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결국 제 머릿속의 생각을 정의내리고 묘사하는 걸 포기하고, 제 옆에 놓여있는 주전자를 보았습니다. 주전자의 주둥이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어요. 약간 다른 소리 같지만, 연기란 녀석은 관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재미있는 녀석이에요. 주둥이를 나올 때에는 밀려올라오듯이 힘차게 나왔지만, 주둥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은 세상밖에 나와서는 그 광활함에 주눅이 들었는지 점차점차 그 힘을 잃고 부유하더군요. 그들은 그렇게 제자리에서 미적미적거리는 선배들을 만나, 함께 미적거리다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후배들을 맞이했습니다.
함께 뭉그적 거리면서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궤적을 만들던 그들은 결국...... 자신보다 더 거대한 차원인 공기 속으로 흩어지더라고요. 흔적도 없이 말이에요. 저는...... 지금 저 연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로키군에 대해 알고 싶다.라고 기세 좋게 이곳에 들어왔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지만...... 그러는 중에 어느덧 애초에 제가 생각했던 ‘로키군에 대해 알고 싶다.’라는 걸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곳에 뭉그적거리게 되었고...... 지금 이곳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 아닐까.
처음에 날카로웠던 이상은 무뎌지고 이가 빠져 날카로움을 잃어버리고 이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뭉게구름처럼 되어버린 현실...... ‘적응’이라는 가면을 쓰고 찾아와 제 온몸을 뒤덮어버린 타성....... 지부장님의 제안을 듣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그 덫, 제 스스로가 많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덫에 빠져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저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살을 찢는 고통을 무릅쓰고 덫에게서 빠져나올 것인가, 아니면 사냥꾼이 나를 꺼내줄 때 까지 기다릴 것인가. 고통스러운 삶과 편안한 죽음 중에 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누나!”
아무래도 저를 부르는 소리였겠죠? 뒤를 돌아보니, 칠성이가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녀석을 보면 괜시리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딱 페터 나이 또래잖아요. 그래서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 지푸라기로 만든 신을 신고 있는 조막 발을 보면 마음이 저려오기도 하거든요.
“오지마!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아니에요. 제가 얼른......”
“안 돼, 눈밭을 그런 신발로 가면 신발 젖는다구. 거기 서 있어. 누나가 금방 갈게.”
역시나..... 칠성이는 보기에 딱할 정도로 푹 젖어서는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그대로 안아 올려서 세탁실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어차피 이리된 거, 생각도 좀 할 겸, 세탁기가 끝나는 거나 지켜보자’라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세탁실은 세탁기가 내뿜는 김으로 후끈후끈했어요.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기술이 많이 발전하긴 한거 같습니다.
“갈아입을 옷 없니?”
“괜찮아요.”
“괜찮기는,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한참 앓는다?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이럴 줄 알고, 짜잔!”
“어......이거?”
“여기 단만 마무리하면 되니까 여기에 있어봐. 금방 마무리 짓고 줄게. 이걸로 몸 닦고 있어.”
저는 칠성이가 수건으로 제 몸을 닦는 동안, 이제까지 녀석에게 주려고 조금씩 만들어둔 솜옷의 끝부분을 공그르기로 마무리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바느질이라 조금 삐뚤삐뚤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바느질하는 걸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는 칠성이를 보니 조금은 어께가 으쓱하더라고요.
“고맙습니다.”
“네가 열심히 일하니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렴.”
칠성이는 솜옷을 입지도 않은 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 얼굴이 너무 기뻐보여서, 약간 눈시울이 뜨뜻해지려고 했어요. 칠성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저는 그 아이에게 수건을 받아, 머리며 발이며를 닦아주었지요.
“칠성이 너는 이곳생활이 할 만하니?”
“처음엔 무서웠는데, 지금은 좋아요.”
“그래?”
“누나는 어때요?”
“음...... 나도 비슷한 거 같아. 처음엔 많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구나싶어.”
“그죠? 전요, 누나가 정말 좋아요.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잖아요.”
“에이, 얼굴은 토라누나가 진짜 예쁘지.”
“그건 맞긴 한데, 누나가 더 착할걸요?”
“그거......칭찬 맞지?”
칠성이는 코를 쓱 하고 닦으면서 웃어보였습니다. 정말 가슴에 폭 안아주고 싶은 아이에요. 이 아이를 보니 문득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습니다.
“칠성이 너는 학교는 다니고 있니?”
“아뇨. 못 다니게 해요. 학교를 가게 되면,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고......”
“허어......”
“어차피 이곳에 오면서 호적도 말소해버렸대요. 전 잘 모르겠는데, 저는 있어도 있는 애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를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이 아이를 보면서, 저는 새삼 세상의 비정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제 손으로 자식을 버리게 만드는 가난함, 집단의 존속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개인...... 어쩌면 토라가 말했던 이면은 바로 이렇게 무심결에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고발당해 잡혀갈 걸 알면서도, 기도로 보행 장애인을 일으킨 중견 수녀님이 어떤 마음에서 그런 일을 하셨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칠성아.”
“네 누나.”
“누나가 너랑 얼마나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누나랑 함께한 시간은 기억해 줄 거지?”
“그럼요.”
“그럼, 어차피 누나를 기억할 김에, 하나만 더 기억해줄래?”
“음...... 길지 않으면요?”
“하하, 별로 길지는 않을 거야. 자, 이제 시작할게 잘 들어. 이 세상은 네가 경험해온 것처럼 많이 부조리하단다. 거기에 순응하고 살 수도 있겠지만...... 난 네가 꼭 공부를 해서...... 이 세상의 정체를 알고, 그걸 극복했으면 좋겠어.”
“......”
“길어?”
“음...... 그러니까 누나는 제가 학교를 다녔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렇지.”
“저도 사실은......”
“답답이!”
칠성이는 제 말에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로키군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녀석은 겁먹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습니다. 순간이었지만, 그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저는 내색을 하지 않고 로키군을 보려고 했지만,
“뭘 그런 식으로 보고 있어?”
“아무것도......”
“지부장이 널 찾는다. 얼른 가자.”
“.......네?”
Channel 1. 로키
뻔한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답답이는 사환을 놓고 나를 따라왔다.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기엔 이곳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녀석도 어느 정도는 인지를 하고 있었고, 나의 의견에 동의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우중충한데 땅은 유난이 희었다. 그 우중충한 곳에서 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하얀 눈이 온 땅을 덮어버렸거든. 우리는 걸음을 옮기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방문객을 즈려밟았고, 그것은 내 발아래에 깔려 ‘뽀드득’하는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나와 답답이는 그렇게 천객을 짓밟았다.
천객을 짓밟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보려 했지만, 나는 답답이에게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화두 자체를 꺼내는 것에서부터 벽에 가로막혔다. 덮어두고 ‘이곳에서 도망쳐.’라던가, ‘그냥 나랑 여기서 살래?’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짐짓 다른 소리를 빙빙 해가면서 점점 핵심으로 다가오는 말을 해야 할지....... 하기사 요지는 앞에서 말한 ‘여기서 도망쳐’ 혹은 ‘나랑 살자’ 둘 중 하나일 것이니, 일단 거기서부터 내 의견을 정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사박.”
녀석과 어떻게 되고 싶은 걸까? 자체로만 보면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대답을 이끌어내는 데는 제법 머리가 지끈거리는 질문이다. 나로서는 어느 쪽의 말이든 하고 싶었고, 반대로 어느 쪽의 말이든 하고 싶지 않았거든.
“사박.”
이렇게 공존할 수 없는 선택지를 동시에 포용하고 싶기도, 반대로 버리고 싶기도 한걸 보면, 감정이란 것은 정말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기 그지없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모순됨을 혐오해왔고, 내겐 그런 쌍비적인 측면이 나타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지부장을 보며 치를 떨었고, 토라를 보며 화를 냈으며, 지금 녀석과 이 눈밭을 걷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고나니, 그것은 내 자만과 착각이었다는걸 절절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을 혐오했고, ‘인간적’인 것에 거리를 두어왔지만, 나는 결국 ‘인간’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눈발이 제법 굵네요.”
“그러게.”
“왁! 깜짝이야. 말도 없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면........ 으응?”
적당한 장소에 왔으니, 이젠 그만 걷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걸 암시하는 답답이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녀석의 말 대로, 이곳은 우리의 말을 엿듣고자 하는 이들에겐 퍽 불리한 장소임이 분명해 보였다. 몸을 숨길만한 나무는 한그루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탁 트인 장소였거든 이 정도라면 둘이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른이에게 새어나갈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뭐든지
“눈밭을 걸을 때는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눈이 온갖 데를 다 덮어서 어디가 푹 파여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힘들거든.”
“아 진짜 놀랐다고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는 녀석이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손을 잡았고, 손가락으로 답답이의 손바닥에 진짜 메시지를 전했다. 녀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특히 지금처럼 눈이 내리는 날은 멀리 나가면 안 돼. 잘못하면 네가 온 길마저 눈에 파묻혀버리기 때문에 길을 잃을 수 있거든.”
「지부장이 네게 우리에 합류해달라는 말을 했었나?」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로키군.”
답답이도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표면적인 대답을 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이면적인 질문에 답을 했다. 어쩌면...... 녀석을 답답하다고 생각한건 지부장의 말대로 나의 편견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빈데미아트릭스 만큼은 아니지만, 눈발이 센 곳이야. 그래서 풋내기 심마니들이 겨울에 무턱대고 산행을 나섰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곤란을 겪은 일이 많다고 하더군.”
「너는 뭐라고 대답했지?」
“아 정말요? 그러면 그분들은 다들 안전하게 돌아오셨나요?”
「거절 했어요.」
“모두가 잘 돌아오면 다행이었을 것이고, 내가 네게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겠지.”
「잘 했......」
나는 차마 마지막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그 이상의 표현은 내 입장상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 내겐 녀석의 행동에 가치판단을 내릴 자격이 없다. 하지만, 마음은 그것과 달리 잘했다고 말을 하고 싶었고, 나는 또다시 딜레마 속에서 머뭇거렸다. 답답이는 나의 이런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칭찬받은 거 맞죠?”
“음......뭐.”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음속이 한결 정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는 ‘거절했다.’라는 나의 말에 잘했다고 칭찬을 했었죠. 그러고보면 지부장님도 참 보통내기가 아닌게, 정말 교묘하게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지부장님의 말은 달콤하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열었잖아요. 거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제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이라는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쓰셨어요. ‘우리’라는 곳이 요즘 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로 말이죠. 그런 뒤에 제게 ‘우리’에 일원으로 들어올 수 없냐는 제안을 하시면서...... 로키군을 언급했죠. 그가 위태위태하니 지켜달라고.
...... 뱀이 어떻게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일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이란건 참 무서운 것 같아요. 만일 제가 로키군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저는 좀 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을 것이고, 그리고 제 신념에 반하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말은 감정을 자극하고, 그 감정은 행동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참 무섭지요.
“어? 다됐네.”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세탁기가 그 움직임을 멈추고 배수구를 통해 물을 뱉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페이즈 2네요. 다 빨았으니, 말려야겠지만, 날씨가 날씨이기도 하고, 물먹은 상태에서 곧바로 말리면 더 늦게 걸릴테니, 빨래에서 물을 빼야하거든요.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탁기 옆에 놓여있는 탈수기를 돌리기 위해, 수압밸브를 열었습니다......만, 아이고 수압밸브에선 대답이 없네요. 아무래도 추운 날씨다보니, 배관이 얼어버린 모양이에요. 하지만, 다행이도...... 탈수기의 제작자는 이런 사정까지 생각을 했는지, 밸브가 얼어버리는 상황이 생겨도 탈수기를 사용할 수 있게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래버를 수동으로 돌리면 이렇게....... 페달이 나오거든요. 조금은 번거롭고 힘이 들겠지만, 이거면 충분히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그것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가면서 탈수기에 넣었습니다. 물을 먹어서인지 많이 무겁긴 했지만, 힘 좀 덜 들이자고 급하게 하다가는 빨래를 또 다시 해야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특히 조심해야 해요. 모든 사고는 끝이 다가왔을 때 오게 마련이거든요.
“끙......차!”
저는 페달 위에 매달려있는 줄을 잡고, 힘을 주어 페달을 밟았습니다. 처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줄에 매달려서 몇 번 발을 구르니 조금씩 조금씩 페달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그 움직임에 따라 탈수기의 통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갔지요. 시작이 반이라는 이야기 있죠? 저는 그걸 탈수기를 돌리면서 그 실 례를 알 수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잘 돌아가지 않지만, 한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탈수기가 돌아가려는 관성 때문에 쉽게 페달을 밟을 수 있거든요. 탈수기가 돌아가기까지의 시작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막상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간단해집니다.
페달을 밟으며, 저는 아까 했던 생각을 더 이어갔습니다. 일단 로키군의 생각은 잘 알았어요. 그 역시, 제가 이곳에서 계속 있는 걸 원하진 않았어요. 로키군에 대해 언급한 지부장님의 말씀은 교묘하게 짜여진 거짓말이었던 셈이지요. 그렇다면 지부장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거절의 의사를 밝혀야 할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거절을 과연 지부장님은 순순히 받아들이실 것인가.’라는 것이지요.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부정적이었어요. 지부장님의 말씀도 잘 생각해보면 ‘더 이상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말이 또 무섭다는 게, 말하는 이의 의도와 해석하는 이의 의도가 마냥 같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지부장님의 말씀을 정말 부정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네가 거절을 하면, 더는 묻지 않고 너를 강제로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라는 것 까지 닿을 수 있단 말이에요. 거기까지 생각한다면 정말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고, 제가 이제까지 봐온 지부장님의 모습과는 큰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직업이 ‘암살자’라는 걸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겁니다.
“끙.......”
페달을 밟느라 나온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벽에 부딪쳐서 였는 지, 제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쉽다고 하더라도,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페달을 밟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저는 잠깐 쉴 겸하여 페달을 지긋이 밟은 채, 빙빙 돌아가는 탈수기 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빨래들이 벽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지요. 그 모습을 보니, 제가 저 탈수통 속의 빨랫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돌아가느라 정신이 없는 빨래, 저 안에서 탈출을 해야겠지만, 저것을 짓누르는 원심력과, 그리고 함께 얽혀있는 다른 빨래들 탓에 저기를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어요. 하지만 탈출을 포기하고 저 안에 안주하다보면, 물이 쥐어짜여지겠지요. 조금씩...... 인간성을 상실하게 될 거에요.
저는 힘을 주어 페달을 한 번 더 힘차게 밟은 다음, 줄에서 내려와 탈수통을 바라보았습니다. 어, 저기 조그만 흰 빨래가 빙글빙글 돌고있네요, 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보려고 하는데....... 아야! 역시나 그 엄청난 속도탓에 빨래에 호되게 손을 얻어맞을 뿐, 그것을 잡기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저는 얼얼해진 손을 한참동안이나 어루만져야만 했습니다. 사실상......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이곳을 나가야 하고, 그건...... 조력자에게도 피해가 끼치는 일이란걸 어느정도 감수해야 하는 제 상황과 너무나도 닮아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은 될 수 없어요. 나의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영향을, 다른 사람에게는 악영향을 준다고 하지만, 이건...... 제가 볼때는 악영향밖에 보이질 않네요. 그렇다면, 누구를 조력자로 해야 할까요. 어차피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다면....... 최대한 피해가 덜 가는 사람, 그리고 제가 죄책감을 덜 느낄만한 사람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