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지부장은 완곡한 어법으로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그가 말한 어떤 표현보다도 더 직선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잡을 수 있었던 두 가지 패 중에서 내가 선택한 두 번째 패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워터 프런트산 미 친 년이 운터브룩의 쓰레기산을 올라와도,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그와 둔 세 번째 판이 패배에 직면했다는 걸 직감했다. 패장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승자에게 자신의 처분을 묻는 것뿐이었다.
“너는 죽게 되겠지만, 네가 생각한 것 보단 먼 미래의 일이 될 거다. 너도 알겠지만 ‘비정한 마음’에 손상이 간 일이 좀 드물어야 말이지. 나는 네게 ‘우리’의 발전과 존속에 마지막까지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솔직히 내 처분에 대해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건 답답이의 처분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묻자, 지부장은 헛웃음을 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참...... 오래 살다보니 니가 남 걱정을 다하는 걸 다 보는구나. 이건 일기장에 꼭 적어놔야겠어. 뭐 니가 용기내서 이런 보기 드문 명장면을 보여주는데 나로서도 답례를 해야겠지. 아이리스양은 너와 마찬가지로 ‘비정한 마음’을 처분 받을 거다. 아울러 그녀에 대한 사회적 기록 일체를 말살해 버릴 것이고, 행동교정소에서 이전의 기억도 소거 시킬 거야. 이 모든 조처가 끝나고 나면 그녀는 아마 훌륭한 총책이......”
“야 이 개 자식아!!”
분노의 감정이 엄청난 강도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러한 감정과 행동은 내게 특이한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경험의 발단이라고 한다면, 그와 장기를 두면서 그가 쳐놓은 포위망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알게 모르게 감정적인 응어리가 쌓였던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그에게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름으로써, 감정의 응어리라는 게 뻥하고 날아간 거지. 가슴팍에 얹혀있던 그것이 날아감과 동시에, 나는 온몸이 진동시키는 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었다. 이 감정은...... 이 쾌감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아주 용감한 발언이었어.”
지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바포레이터 둘이 내 어께를 붙잡아선 그대로 자리에 앉혔다. 물론 발버둥을 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들의 손에 실린 힘이 너무나도 묵직한 바람에 나는 결국 책상에 엎어져 씩씩거리는 건 말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버둥거리는 꼬락서니가 퍽 우스워 보였는지 지부장은 껄껄 웃었다.
“이거 참! 터미널 인스티튜트에서 좋은 샘플이 왔다고 좋아 하겠구먼. 자 이제, 이 녀석을 끌고 가서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마.”
“너 이 개자식! 내가 지옥 끝까지라도 너를 찾아내서!!”
“쨍그랑!!”
그에 대한 폭언을 마저 다 끝내기도 전에, 내 방 창문이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나더니 무언가가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철제로 된 원통형의 그 물건에서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왈칵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우왁! 이게 다 뭐람?!”
매캐한 연기는 순식간에 방안을 가득 메웠고, 당황한 에바포레이터가 얼타는 사이에, 나는 그들의 팔을 뿌리치고 문 밖으로 도망쳤다.
“거기 서!”
“좆 까는 소리하고 있네!”
Channel 2. 아이리스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요? 한참 만에 눈을 뜨니, 터미널 인스티튜트의 하얀 천장이 아닌 전혀 다른 풍경이 제 눈앞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음...... 뭐랄까요? 빛이라곤 없는...... 나무로 된 상자 같은 곳에 갇혀 있는 것 같았어요.
“일어났어 언니?”
제가 깨어나자, 옆을 지키고 있던 토라가 알은체를 했습니다만...... 그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보였습니다.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그녀의 볼은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고, 머리칼은 지저분하다 싶을 정도로 헝클어져 있었거든요.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아 맞다. ‘그 아이’는?”
“........‘그 아이’?”
“그래, ‘그 아이’”
“........”
제가 몇 차례나 재차 물었지만, 그녀는 씁쓸한 표정만 지을 뿐 굳게 다물린 입에선 끝내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더 물어봐야 소득이 없을 거란 생각에, 저는 질문을 달리 해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야?”
“.......”
대답이 없었던 건 여전했지만, 토라는 대신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습니다. 그곳엔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 저는 그 구멍에 눈을 대 보았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열기가 훅하고 끼쳐왔어요. 그 엄청난 열기 때문에 그 너머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계속해서 시도를 하니, 이내 열기에도 익숙해져서 밖을 보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구멍 너머엔......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지부 건물이 서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지부의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인거죠? 저는 열기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걸 무릅쓰고 구멍너머의 만화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멍너머에서는 화염에 무너져가는 지부와, 칼이 맞부딪치는 파열음, 그리고 비명소리가 어우러져 한 폭의 완벽한 지옥도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게.....대체......”
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토라는 주먹을 꼭 쥐고서 뿌득뿌득 이를 갈았어요. 어찌나 세게 갈던지, 그녀의 입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녀의 입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토라는 매정하게 제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 빌어먹을 년이 기어코 일을 쳤어. 지부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버렸다고.”
“도로시.....씨? 말이야?”
“그래, 그년이 휠맨 들을 데리고 운터브룩으로 왔어. 연막탄을 뿌려 대서 우리가 허둥지둥하는 동안 완전히 이곳을 둘러싸버렸다고.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하더라.”
“.......그래서.”
“우린 당연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라고 했지. 그랬더니 지부에 불을 질러 버린 거야.”
“로키군은 괜찮아?”
“그런 더러운 이름 더는 부르지 마. 그 새끼가 우릴 배신했던 거야. 우리가 언니를 총책으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생각해서 선수를 쳐버렸어.”
토라의 말을 듣다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졌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급하게 무언가를 먹다가 체해버린 것처럼,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정신없이 쏟아지다보니, 머리가 더는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 같았어요. 로키군이...... 도로시씨와 함께 지부를 배신했다고요? 그런데...... 그게 제가 휠맨의 총책......? 이게 대체 무슨 소린 거죠?
이 모든 알 수 없는 음성언어의 파편 속에서 뜰채를 드리워 주워섬기다보니 지부나, 로키군이나 모두 위험에 빠졌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로키군이 위험하다면 제가 이곳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를 구하러 가야해요. 하지만 제가 일어서려고 하자, 그녀는 저를 거진 끌어내리다시피 저를 앉히며 제 귀에 속삭였습니다.
“가만이 있어 언니. 지금 나가면 둘 다 죽어.”
“하지만 로키군이......”
“우지직!!”
제가 그녀에게 제가 일어나려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차에, 마른 장작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상자너머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습니다. 누군가가 저와 토라가 있던 엄폐물을 발견하고 그걸 박살낸 모양이에요. 저는 깜짝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빛은 새어 들어왔고, 그 빛 너머에 있던 것은 손 하나..... 그건
“찾았다 답답이.”
로키군의 손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반사적으로 로키군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놔 오빠.”
“네가 이걸 놔라.”
절 놓아줄 수 없었는지, 토라가 제 다른 손을 확 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로키군과 토라 모두에게 손이 잡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어요. 전 이 손을 놓아달라는 요량으로 토라를 바라보았습니다만......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예쁜 얼굴과 붉은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거든요.
“오빠 여친의 예쁜 손이 피범벅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놓는 게 좋을 걸?”
“.......”
토라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던 게, 다른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 손을 칼로 찌르는 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요. 하늘을 붉게 물들인 염화의 불빛이 칼날을 만나 부스러지는 모습을 보노라니, 간담이 서늘해져, 식은땀이 대중없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 능력...... 너한테도 유효하겠지?”
“......네?”
“조금만 참아.”
로키군은 제가 머뭇거리는 동안, 제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토라가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에 저는 로키군에게 이끌려 엄폐물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구멍너머에서 느껴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가 제 온몸을 덮쳐왔어요.
“으앗! 뜨거워!”
“감동적인 재회를 하기엔 이곳이 너무 덥지? 얼른 안전한 곳으로 가자.”
Channel 1. 로키
조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답답이는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고, 나와 함께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동의 했다. 나는 답답이에게 내 등 뒤를 놓치지 말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답답이가 내 말을 충실히 들어준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찾았다! 이 배신자 새끼!”
역시 사람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일까? 몇몇 요원들이 나와 답답이를 가로막고 섰다.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는구먼...... 장소적인 측면에선 불타고 있는 지부 근처라 언제 이곳이 불길에 휩싸일지 모르는 일이고, 상황적인 측면에선, 나 홀로 네다섯의 요원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다. 거기에...... 답답이가 다치지 않게 지켜야하기 때문에 내 운신의 폭이 넓은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도망쳐라. 라스알게티 역 근처에서 만나자.”
“당신은요?”
“네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지. 내가 죽더라도 상관 말고 도망쳐.”
내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려는데, 아이리스가 내 손을 잡았다.
“누군가가 그랬어요. 칼에는 칼집이 필요하다고.”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야?”
“칼은 쥔 사람의 목적을 위해 쓰이지만, 칼집은 칼을 위해 쓰여요. 칼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에요.”
“그러니까 그게 지금 이 상황하고 무슨 상.......”
내가 답답이에게 말을 하려는 찰나, 그녀가 나를 확 밀쳤다. 그리고 나와 답답이 사이에 서슬퍼런 칼날이 파고들어왔다.
“이거 참, 우릴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우리를 앞두고 여자랑 말이 나와?”
나는 빈정거리는 말을 늘어놓는 요원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어보이고는 답답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가에 어린 주름에는 ‘결의’라고 보이는 감정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나는 당신을 지키기로 했다 이거라고요. 이 답답한 남자야.”
녀석의 말에, 내 목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콱 하고 틀어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먹은 기억은 없는데 이상한 노릇이지? 그런데 내 신체가 보인 이상한 반응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눈가가 뜨거워지기도 한 것이다. 아무래도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감정적인 반응을 이번 일로 경험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눈을 쓱 닦고, 앞서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나와 답답이의 모습에 잔뜩 약이 올라있었다.
“죽어 이 새끼야!”
최근 들어 감정이란 것에 휘둘리게 된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요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분노라는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고,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욕설과 고함이라는 형태의 쇼맨십을 통해 메꾸려고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동작이 터무니없이 커졌다. 나는 그가 자신과 나 사이의 거리라고 상정했을 그 거리에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가 그의 거리감을 빼앗고는 오른쪽 팔꿈치로 그의 턱을 때리고, 오른다리로는 그의 뒷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너희나 나나 이곳에서 타죽기는 싫을 거 같은데, 그냥 놓아주면 나도 너희를 건드리진 않겠다.”
Channel 2. 아이리스
결국 로키군은 우리 앞을 가로막은 모든 요원들을 제압했습니다. 마지막 요원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나서야 모든 일이 끝이 날 수 있었어요.
“하아.......하아.”
“쉬고 있어요.”
저는 지친 로키군이 쉬는 동안, 쓰러져 있는 요원들을 부축해 화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끌어다 놓았습니다. 여기라면 혹시나 불길이 더 번지더라도, 그들을 집어삼키지는 않을 거에요. 기절한 요원들을 수습한 뒤에, 저는 로키군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칼을 든 상대와 맞서 싸우다 보니 그의 몸은 성한 곳이라곤 없었어요. 저는 그런 그가 너무 딱하다는 생각에 로키군을 끌어안은 채로 기도문을 읊었습니다. 로키군은 제 행동에 당황 했는지 버둥거렸지만, 이내 제 허리에 손을 얹고서 제게 몸을 맡기더군요. 다행이 제 기도문은 효험을 발휘해, 그의 몸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킨다고 했죠?”
“그래.....고맙다. 그런데 기왕 지켜주는 김에, 날 좀 부축해 줄 수 있겠냐? 완전히 지쳐버려서......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겠거든.”
저는 그때처럼 그를 부축했고, 조금은 위태위태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운터브룩의 쓰레기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차꾼을 불렀고, 그와 함께 라스알하게 역을 가는 마차위에 올랐습니다.
“이야기 들었어요. 로키군...... 저 때문에 지부를 배신했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미안해요. 저만 아니었으면......”
“아니야. 계약을 지키려 한 것뿐이다.”
“계약이요?”
“그래, 네가 나에 대해 알 게 될 때 까지 내가 너를 성심성의껏 돕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난 그걸 지켰을 뿐이라고.”
“그래도 로키군, 이런 일을 당할 정도로 모르쇠로 밀고 나갈건 없었잖아요.”
“아 뭐, 말이 나온 김에 미안해 할 것도 없어. 이건 ‘우리’의 복잡한 사정이 네게 손을 뻗친 것이라, 네 잘못이 아니다. 만약 네 쪽에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되돌릴 수도 없기도 하고.......”
“......하지만.”
당황했는지 로키군은 말이 많아졌어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가 한 말들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자꾸 첨언을 했고, 그걸 설명하고 수습하려니 말이 더 길어지고..... 그런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습니다. 왠지 그의 모습이 부끄러운 장면을 들켜버린 사춘기 소년처럼 보였거든요.
“그리고...... 미안하다.”
“네? 뭐가요?”
“앞으로 이스트 민스터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된 거 같아. 요원들이 너와 나를 추격할 테니...... 아마 평생을 도망치며 살아야 되지 싶다.”
“아무래도 그러겠죠?”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당신 역시 모든 걸 잃었는걸요.”
“그래도.......”
고개 숙인 로키군을 보면서, 그가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장수녀님에 대한 죄책감은커녕 제가 무슨 이유로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지 짐작조차도 하지 못했던 그가...... 지금 제게 사과를 하고 있잖아요.
터미널 인스티튜트에서 많은걸 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을 둘러봄으로써, 그 장소가 로키군의 가슴에 박혀있는 ‘비정한 마음’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어요. 아마....... 로키군의 ‘인간성이 결여된’ 모습들은 그곳에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그랬던 그가, 조금씩 ‘인간성’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그게, 로키군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충분히 긍정적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운터 브룩도 이스트 민스터도 갈 수 없다면, 이젠 어디로 갈건가요?”
“태풍이 불 때 가장 안전할 만한 곳으로 가야지.”
Channel 0. Finale
마차가 라스알게티 역 앞에 섰고, 로키와 아이리스는 셈을 치르고 나왔다. 출근 시간을 지난 라스알게티 역은 이전에 비해 한산해진 편이지만, 그래도 역이 역인지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역전 광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둘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합실에 가서 가장 빠른 시간대의 프로하기온 행 열차 두 자리를 예매했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 몸을 맡기면서 그들은 플랫폼에 도착했다. 로키와 아이리스는 벤치에서 서로에게 기대 앉아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앞서의 소동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는지,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열차가 빼액 하는 굉음을 내면서 철로를 따라 느릿느릿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타자.”
로키와 아이리스는 줄을 서서 열차에 올랐다. 아이리스는 불안감에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그렇게 주변을 자꾸 살펴보면 오히려 더 수상하게 보일 거다.’라는 로키의 지적에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그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 자리가 어디였었죠?”
“15A하고 15B야. 다행이 순방향이네.”
“아, 다행이다...... 저 멀미 되게 심한 편이거든요.”
“그래? 그런 것 치곤 마차를 얌전히 잘 타던데?”
“그거야. 상황이 보통상황이 아니었잖아요.”
둘은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양, 조금은 과장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지나갔다. 이때에도 어느 누구하나 그들을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걸음은 15열 앞에서 멈췄고, 아이리스는 창가에, 로키는 복도측에 앉았다.
“후아아...... 이제야 뭔가가 끝난 거 같아요.”
“그래, 이제 다 끝났어. 고생 많았다.”
“로키군도요. 정말 아침 벽두부터 서로 난리도 아니었네요.”
자리에 착석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는지, 그들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들은 오늘 아침에 그들의 인생에 있어 정말 큰 고비를 만났고, 기어코 그걸 넘고야 말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하루를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열차가 출발하오니,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좌석의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장에는 승무원의 안내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이리스에겐 그 방송이 그녀를 짜릿하게 만들었던 걸까? 그녀는 싱글벙글해져서 안전벨트를 쭉 당겨 벨크로에 장착했다. 로키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열차는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누구도 그들의 행복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어! 저기 있다!”
“빨리 움직여!! 저 빌어먹을 열차를 멈춰야 돼!”
느긋하게 창문너머의 플랫폼을 바라보던 아이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푹신한 좌석에 몸을 기댔던 그녀를 벌떡 일어서게 만든 건, 계단을 따라 플랫폼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딱히 남의 눈에 띌만한 차림새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그녀의 눈에 대번에 띄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 사이였고, 하필 딱 눈이 마주쳐버렸거든. 아이리스는 순간 기지를 발휘해 그들과 눈을 피했지만, 그들은 그런 눈 가리고 아웅에 넘어 가랴는 식으로 열차를 잡기 위해 플랫폼을 달리기 시작했다.
“로키군...... 어떻게 해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지. 일단 커튼부터 치자.”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리스의 손을 잡으며 로키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둘은 커튼의 틈 사이를 지켜보았다. 요원들은 열차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데, 열차는 그런 그들을 뿌리칠만한 속도를 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열차가 어느 정도 움직이고 나고서야 그들이 플랫폼에 도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나마도 요원들의 맹추격 덕분에 차츰차츰 좁혀지고 있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요원들이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걸 지켜보는 로키와 아이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요원이 몸을 날려서라도 손잡이를 잡는다면....... 아이리스와 로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요란한 폭음이 들리더니, 열차가 좌우로 강하게 흔들렸다. 거치대의 짐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졌고, 승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미처 머리를 감싸지 못한 운 없는 승객들은 짐 가방에 머리를 맞아 비틀거렸다. 그런 혼란한 상황에서도 로키와 아이리스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해냈어요!”
아이리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엄청난 폭음이 열차만 뒤흔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요원들까지 날려버린 것이다. 그들은 폭발의 위력 때문인지 땅바닥에 납작하게 짓눌리는 바람에, 감히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게...... 와 진짜 수명이 몇 년은 깎여나간 거 같군.”
로키는 욱씬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품속에서 빈손을 빼냈다. 대관절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폭발 덕분에, 요원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아이리스는 기쁨에 몸을 떨며 로키를 끌어안았고, 로키는 당황해서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근데 그 폭발은 뭘까요?”
“글쎄....... 저것 때문인가?”
로키는 커튼의 틈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엄청나게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승객들도 창문너머의 빛을 보며 경탄을 하고 있었다.
창문너머 하늘에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만큼이나 밝은 빛이 서쪽 하늘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