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0. Prelude
1624년 1월 31일
아침의 아케르날,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문자 그대로 처녀림이 우거진 곳이지만, 밤사이에 무르짐 산맥을 타고 내려온 짙은 백무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파고들어왔다. 평소에도 우거진 덤불 탓에 한 걸음도 제대로 옮기기 힘든 오지였건만, 나무사이를 감도는 백무탓에 그곳은 그야말로 하얗고 푸르른 자연의 방벽처럼 되어버렸다. 그런 자연의 방벽을 누군가가 헤집듯이 돌파하고 있었다.
엄청난 두께의 녹음과 백무는 필연적으로 그곳을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할 법도 한데, 이 여행자의 걸음에서는 두려움은커녕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정글나이프 한자루 없이 덤불 사이를 요리조리 넘나들었고, 그가 걸었던 자취에는 풀 한포기 눕지 않았다. 그 누구도 여행자의 걸음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안개와 녹음조차 막지 못했던 그의 발걸음은 거대한 암벽 앞에서 비로소 가로막힐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은 자연의 방파제 앞에서 자신이 기어오를만한 곳이 있는지 오목조목 살펴보았지만, 방벽은 바늘하나 들어갈 틈 없이 매끈해 보였다. 비록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 암벽은 사실 수많은 서로 다른 돌들이 맞물려서 형성된...... 즉 인공물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이 방벽앞에서 파훼법을 찾는 데 실패를 했고, 여행자는 곤란함을 느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한참동안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든 뒤에야 그는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가 없네.”
그는 포오하고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걸쳤던 옷을 주섬주섬 벗어놓았다. 그리고 안개에 가려진 장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몸에 힘을 주었다. 근육이 긴장한 탓인지 그의 어께가 부풀어 올랐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붉으죽죽해질 때 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그의 등이 천천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갈라진 틈으로 피가 나오다가......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사람의 몸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것...... 그것은 흡사 박쥐의 날개와 같았다.
그는 팔을 높이 치켜들었고, 그와 동시에 날개가 활짝 펴졌다. 그 날개는 그의 팔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듯싶었다. 그는 시험 삼아 날개를 몇 번 펄럭거린 뒤에, 하늘로 본격적으로 날아올랐다.
방벽 너머로 착지한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방벽 너머에는 거대한 크기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여행자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어께에 돋아난 날개를 꺾어서 떼어내 버렸다. 날개가 떼어진 순간에는 그의 어께에서는 대량의 피가 솟구쳤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그는 날개를 버려두고서 구덩이의 한 가운데로 천천이 걸어갔다.
구덩이의 한 가운데에는 돌멩이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는 돌이 무슨 알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손이 돌멩이에 닿자, 두 개의 돌 중 왼쪽에 있던 돌에서 빠득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갈라진 금 사이에서는 쭈글쭈글한 작은 손이 확하고 튀어나왔다. 여행자는 돌을 조심스럽게 들어 품었다.
아이를 받아든 뒤에, 남자는 남은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그의 용무는 이미 끝난 것으로 보이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조금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남은 돌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설마 게임 시작부터 반칙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여행자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중무장을 한 사람 여럿이 그를 보며 경계 태세를 하고 있었다. 여행자는 나머지 돌에서 손을 거두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뒷걸음질을 치는 만큼 중무장 인원중 몇이 앞으로 걸어 나왔고, 그들은 돌을 집어 견고해 보이는 상자에 그것을 담았다. 상자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다크스타의 사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야기만 들어왔지, 이렇게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당신이 그 알파르드의 사도인 모양이군요. ‘반갑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글쎄요, 경쟁자에게 반갑다고 인사를 나눌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진 않아서요.”
돌아온 말은 차가웠지만, 중무장 인원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막상 말로 들으려니 조금 섭섭하려고 하는데요? 말이야 경쟁을 한다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이지 않습니까?”
“방법론적인 것에선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렇긴 하군요.”
리더는 여행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여행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의 손을 맞잡았다.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모시고 있는 분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우리 정정당당한 경쟁을 하도록 합시다.”
“정정당당이라...... 알파르드가 입에 담을 소린 아니겠지만, 그렇게 합시다.”
Channel 1. 로키
1624년 4월 19일
라스알게티에서 도망쳐 나와 프로하기온으로 온 지도 벌써 3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3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이야기는, 찬 바람이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의 손길에 잠들어있던 만물이 깨어나, 겨우내 품고 있던 생명의 응어리들이 뿜어지듯이 껍질을 깨고 펼쳐지는 시기가 왔다는 걸 의미했다. 그건 말라붙은 사막의 도시인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모래언덕 사이로 드문드문 돋아있는 알로에들이 제 꽃망울들을 팝콘처럼 펑펑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 생명의 탄생속에서, 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비숙련 노동자다보니, 그렇게 고급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틀에 흙과 물을 섞어서 걸쭉해 질 때 까지 개면 되는 것이다. 라스알게티에서는 시멘트라는 것을 건축에 사용했는데, 이곳 프로하기온은 그런건 쓰지 않는다. 워낙 고온 건조한 곳이다 보니, 진흙을 물에 개어 걸쭉하게 만들면 그게 시멘트 대용이다. 기후도 기후지만, 이곳에는 석회암 광산이 없는것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뭐 요즘같은 17세기에야 철도가 온 대륙을 구석구석 훑어지나가기에 원료산지가 없다는건 한낱 변명에 지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천 여 년 가까운 시간을 시멘트 없이 잘 만들어왔으니, 이제와서 시멘트라는 새로운 건축자재가 들어와 봐야 굳이 설 자리도 없을 터다.
한참동안 비지땀을 흘려가며 저어댄 결과, 흙과 물이 만나 걸쭉해졌다. 나는 막대기를 담갔다가 한 소끔을 집어올렸다.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나다가 뚝뚝 끊어지는 것이, 이만하면 될 듯 싶었다.
“흙구리 다 쳤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벽돌공들 여섯 일곱명 가까이가 흙구리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거푸집조 둘, 운반조 둘, 건조조 셋으로 구성되었다. 거푸집조가 흙구리에 거푸집을 푹 담근 뒤에, 잉여 흙구리를 긁어내면, 운반조가 그걸 건조조에게 가져다 주었다. 건조조는 거푸집에서 흙구리를 떼어낸 뒤에, 솜씨 좋게 모래를 뿌리고 발라댔다. 그들이 이 건축현장의 재료인 벽돌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꽤나 호흡이 잘 맞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담배를 두 세 개비를 피우는 동안 내가 만들어낸 흙구리를 문자 그대로 바닥을 내버릴 정도로 작업속도가 빨랐다.
“이거 참, 쌔가 빠지게 만들어놨더니, 담배 두 개비 필 시간만 주는거에요?”
“얼른 해야 얼른 끝내지.”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거푸집을 내 발치에 던져놓고는 그대로 야자수 그늘 아래로 기어 들어가버렸다. 그들에게 있어 ‘얼른 끝낸다.’는 말에 생략된 주어에는 내자리가 없었다. 더 얄미운 것은...... 저렇게 후다닥 해치우고 한숨 잘 자고나면 나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래서 공부에 자신이 없으면 기술이라도 배우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위장신분으로 하는 거라지만....... 솔직히 부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나는 좀 더 많은 휴식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틀에 더 많은 물과 흙을 가져다 부었다. 사실, 비숙련공의 작업이라지만,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무작정 동시에 부어서 섞어버리면 점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을 수가 있어, 이 기술을 터득하기 전에는 꽤나 많이 깨졌었다. 그 노하우라함은....... 일단 흙을 산처럼 쌓아놓은 뒤에, 그곳에 조금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웅덩이로 흙을 삽으로 퍼서 집어넣는 것이지. 조금 시간은 걸리지만, 점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문제는 이 기술이란게, 흙을 물웅덩이로 생각 없이 넣다보면 물이 넘쳐버리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러면 매우 골치 아파진다. 흙을 붓는 것과 동시에,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것, 겉보기 보단 엄청난 세심함을 요하는 작업이다.
“어이, 산냐신! 점심먹자 어서 오라구!”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알로에에서 눈을 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텁수룩한 수염 때문에 ‘수염고래’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작업반장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제법 많은 수의 인부들이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까고 있었다. 나는 캐비닛에서 도시락을 꺼내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수염고래와 그 친구들은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도시락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여기 앉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수염고래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 통 안에는 베이컨 다섯줄이 열을 맞춰 돌돌 말려있었고, 그 옆에는 계란 옷을 입은 빵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빵 위에는......
“이야, 역시 신혼이라 그런지 뜨겁구먼 그래.”
“하하......하.”
케첩으로 그린 것 같은 큼지막한 붉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작업반장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지위 때문인지 특히 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께를 탕탕 두드리기까지 했다. 하...... 정말 이런 순간만큼은 그의 텁수룩한 수염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제수씨는 우리를 날마다 놀래 키는구먼. 대체 비결이 어떻게 되는 거야?”
“.......”
“아우님 이젠 그만 좀 빼고 비결 좀 알려주시게, 내가 그걸 몰라서 공갈빵으로 한 달을 연명하고 있다니까. 이러다가 ‘더스트 앤 데저트’에 굶어죽었다는 부고 기사로 남을지도 모르겠어.”
이 짓궂은 아재들은 낄낄거리면서 내 허리를 탕탕 두드렸다. 개중에는 탁자를 잡고 허리를 흔드는 동작까지 보여준다. 남초 집단의 질펀함이란....... 가끔 답답이가 내가 일하는 곳으로 구경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내가 뜯어 말리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난 이곳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건 내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지금은 ‘우리’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그곳의 가르침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내게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팁을 주었는걸. 나는 ‘지금’, ‘이 장소’, ‘이 상황’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여자야 뭐...... 남자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키야!! 명언이다. 명언이야! 이래서 젊은 게 최고라니까!”
프로하기온에선 프로하기온의 법을 따르라는 것이지 뭐. 나는 최대한 음험하고 질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을 했고, 그 언어적인 의사소통과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결합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께를 두드렸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이 짓거리도 계속 반복하다보니 어떻게 처신해야 넉살좋다며 넘어가는지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선, 꽤나 성공적으로 이 질펀한 아재들판에 잘 어우러 든 것 같다.
나는 아재들 사이에서 답답이가 싸 준 도시락을 훌훌 비웠다. 모래바람 탓에 조금 까끌거리는 것 말고는 맛이 좋아서 먹는데 문제는 없었다. 정말 도피의 파트너로서는 최고였다. 도시락을 비우는 중에, 수염고래의 친구들 중 하나가 내 옆에 앉아 말을 붙였다.
“어이, 젊은이 오늘 야근 한다고 하면 할 거냐?”
“야근이요? 오늘부터 한대요?”
“아까 본사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 들어보니까, 작업을 빨리 마쳐야한다고 오늘부터 야근할 직원을 모집한다고 하던데.”
“지금대로만 해도 공기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는 턱으로 작업장 너머를 가리켰다.
“페어 게이트 쪽 있지? 거기 전부터 재개발 이야기가 솔솔 나왔잖아. 본사에서 했던 사업안이 통과된 모양이더라고. 그쪽에 재개발이 확정됐다고 하더라.”
“아아...... 일이 그렇게 됐군요.”
“그래, 여기 쪽 말고 마지막 뉴타운 후보지였잖아. 이젠 본사에서 거기까지 먹게 된거야. 그러니 이쪽일은 빨리 장 마감하고 그쪽으로 뛰어들어야지 않겠어?”
“하......참.”
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돈이 돈을 낳는다. 뭐, 그들이 움직여주느라 흘리는 돈을 우리가 받아먹긴 하지만, 진짜 알맹이는 그들의 몫인 것이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밥알을 입속으로 집어넣는 동안, 본사 쪽 직원이 서류철을 들고 나타났다.
“오늘 야근할 사람 있나? 다 알겠지만 수당은 시급의 1.8배라고.”
그의 말에 모두들 도시락을 내던지고 본사 직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사료를 향해 덮어놓고 달려드는 물고기와 같이 느껴져서, 나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4월 19일
이곳 프로하기온에 온지도 벌써 세 달 가까이 됐습니다. 젊은 남녀 둘이서 누구하나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해서라고요? 아뇨. 생활비는 로키군이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도 해결하는데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다만 라스알게티와 달리, 여러 출신들이 뒤엉켜 사는 곳이 아니라 이웃들이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세대를 걸쳐 살아가는 좁은 동네이다 보니 소문이 생각보다 빨리 퍼지는 것이 문제였지요. ‘벽에 귀가 달렸고, 바닥에는 눈이 달린’ 이 고장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별다른 직업 없이 빈둥대다 보면 호사가들의 눈에 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요. 그리하여 저희 둘은 사람들의 눈에 어색하지 않을 직업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저를 부르는 학생들의 소리에 저는 마당에서 기르고 있던 알로에에서 눈을 떼고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양장본의 책을 들고서 저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아 그래! 학교는 잘 다녀왔니?”
“네! 오늘은 뭐 먹어요?”
로키군은 몸을 쓰는 것이 더 편하다며 토목사로 들어갔고, 저는 제 대학 때 전공을 살려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로키군은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했어요. 안전가옥에 외부인이 드나드는 것은 조금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외부인이 저희 집에 내왕을 해서 소위 ‘보는 눈’이 많아진다면, 만에 하나 요원들이 들이닥쳐도 그 눈들 때문에라도 함부로 행동하기는 어렵지 않겠냐고 역설을 했고, 로키군도 그 말에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는지 결국 아이들을 받는 것에 동의를 했었습니다.
“오늘은, 파티마네 어머님이 가져다 주셨던 얌을 쪄먹으려구 준비했지.”
“얌이요?”
주흐르는 제 말에 불만스러운 듯 볼을 잔뜩 부풀렸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에요. 하하...... 그동안 이곳 음식에 익숙하질 않아서 평소에 해먹던 음식을 해주었더니 애들의 반응이 퍽 좋았거든요. 그래도 애들이 평소에 먹는 걸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나름 열심히 배웠는데....... 아무래도 라스알게티식 음식이 이 아이들에겐 별식으로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일단 선생님도 이곳에 오랫동안 있으려면 이곳 음식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해봤거든. 너네들이 먹어보고 평가해주면 안될까?”
“음......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단 맛을 봐볼게요.”
“야 너 진짜. 선생님한테 그런식으로 할래? 죄송해요 선생님.”
슐라이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흐르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 아이는 제게 고개를 숙이며 주흐르의 말에 대해 대신 사과를 했습니다. 하하, 오빠노릇을 한다손 치더라도 정말 의젓한 아이에요. 슐라이만과 주흐르는 남매입니다. 두 아이는 이곳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꼽히는 알미스네드 가문 출신이에요. 제가 갑자기 왜 남의 집안 족보를 들먹이냐고요? 이곳의 문화적인 특질 상 가문을 빼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렵거든요. 길게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 간단히 요약을 하자면, 알미스네드 가문은 이곳의 토호 부족 중에서 저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가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아니야. 일단 다 익는데 좀 걸리니까. 일단 공부부터 할까? 얌은 쉬는 시간에 먹도록 하자.”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부방으로 갔습니다. 주흐르는 자신의 자리로 종종걸음으로 가서 양피지 책을 펴고 앉았습니다. 슐라이만은 하나 건넛자리로 가서 앉았지요. 그 둘 사이에 제가 앉는 것입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어디까지 공부했니?”
“황도와 12궁에 대해서 배웠어요.”
“그래? 그럼 황도가 뭐니?”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있다고 치면, 태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길이지요.”
“그렇지...... 맞아, ‘가상의’...... 길이야.”
슐라이만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저는 조심스럽게 동의를 했습니다. 하하...... 참 무섭다고 생각한 것이, 슐라이만에게 조심스럽게 대답함으로써,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된 ‘규범’과 ‘가치’가 한 사람에게 ‘자기검열’을 강요하는 생생한 현장의 주인공이 된 셈이 되어버렸거든요.
프로하기온이라는 타지에서 살다보니, 저는 어느 순간 제 고향 라스알게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람이 숲속에서는 그 숲을 볼 수 없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러더라고요. 말이 길어질 거 같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살아왔고, 뜨겁게 사랑했던 그 도시는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파쇼적인 곳이었어요. 라스알게티에서 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명제가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아버님께서 7일 만에 세계를 창조했고, 이 세계를 위해 첫날 만들어둔 빛을 셋으로 구분해 해와 달과 별로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선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한다는 것 만큼이나 당연한 것처럼 알았었죠. 사실 슐라이만이 말한 말 속에 숨어있는 근원적인 명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라는 사상에 대해서 아예 문외한이었던 건 아니에요. 대학교 시절 독서동아리를 중심으로 금지된 사상을 담은 찌라시들이 배포되었었거든요. 저도 나름 지적인 호기심에 찌라시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읽어보았었죠. 그리곤 세 장을 넘기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 같아요. ‘세상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뭐 이런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내용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지만, 사실 그 찌라시는 실제로도 매우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어요. 찌라시속에 언급되었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상은 ‘배교자 조르다노’가 주장한 내용이기도 했어요. 그는, 지금으로부터 24년전, 그와 같은 사상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한 걸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런 곳에서 살다가, 뜻하지 않게 정착하게 된 이 모래사막의 도시에는, 정말 다양한 사상들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값싼 금속을 특정한 공정을 통해 금으로 바꿀 수 있다.’라는 연금술부터 시작해서, 가끔 왕도를 덮쳐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흑사병’의 치료법, 마지막으로 아까 언급했던 ‘배교자 조르다노’의 사상까지 말이에요. 왕도였으면 종교재판에 회부될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처음에는 몇 번이나 성호를 그었어야만 했어요.
하지만 다양한 사상들이 서로 대립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주장과 논거’라는 칼과 방패로만 맞서는 모습을 보다보니, 아까 말했듯이 제가 얼마나 하나의 사상만을 강요하는 곳에 살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천동설도, 그리고 지동설도 하나의 사상으로서 존재해요. 그걸 주장하는 이들은 언성을 높일지언정 멱살은 잡지 않고, 한바탕 토론이 끝나면 ‘밥이나 한끼 먹으러 갈까?’라고 말하며 태연이 식당으로 함께 들어가곤 하죠. 그것은 이 도시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살던 도시를 조망하게 되다보니, 이젠 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찌라시를 버리던 그 때로 기억을 돌려보면, 쓰레기통에 버릴 때 남들의 시선을 살피던 한 겁쟁이가 있었죠. 그마저도 혹시나 누가 쓰레기통에서 꺼내서 무엇인지 확인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 찢기 힘든 종이를 어거지로 박박 찢어버렸죠. 저는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라는 생각 뿐 만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은 사악한 것이다.’라는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에요. 그것이 저로 하여금 끝없는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씁쓸한 자화상을 그리는 것을 멈추고 슐라이만, 주흐르와 함께 교재를 살펴보았습니다. 교재에는 ‘계절에 따른 별자리’라는 제목 아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대표적인 별자리들의 삽화들이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봄이니, 봄철 별자리부터 볼까?”
“선생님, 그거 말고, 여름철부터 하면 안 되요? 견우성이랑 직녀성 때문이 요즘 핫하단 말이에요.”
“견우성이랑 직녀성? 그게 왜?”
제 질문에 주흐르와 슐라이만은 대답을 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아아, 그러고보니 그 아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3달전, 그러니까 제가 로키군과 함께 이 고장으로 오던 날 하늘에서 엄청난 사건이 있었지요. 독수리자리의 견우성과 거문고자리의 직녀성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밝은 빛이 온 대지를 덮더니, 엄청난 굉음과 충격이 이 땅을 뒤흔들었지요. 그날 우리는 열차안의 짐이 모조리 땅에 떨어지는 혼란속에서 정신을 잃고 서로를 부여잡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덕분에 요원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저희는 프로하기온으로 오는 내내 그 여파가 이곳 대지에 남긴 흔적을 지켜보면서 와야했습니다. 나무가 꺾이고, 바위가 짓이겨지고 박살난 참상...... 부실하게 지어진 몇몇 건물은 그대로 무너져내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해요.
이곳 프로하기온은 라스알게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지라 그다지 큰 피해는 없었지만, 완전히 그 영향에서 자유로운건 아니에요. 이곳에도 그 사건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건 바로...... 서쪽하늘에서 도도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거대한 빛의 구체입니다.
빛의 구체는 서쪽하늘에서 엄청난 빛을 발하고 있어요. 마치 하나의 새로운 태양이 생겨난 걸로 오해할 정도였지요. 이것이 태양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면, 이 기괴한 구체는 해가 뜨고 지고, 달이 그 빈자리를 대신할 동안, 서쪽하늘에서 그대로 붙박여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덕분에 우리는 밤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극지방에서나 가끔 경험한다는 하얀 밤, 백야를 우리는 석 달 가까이 경험하고 있답니다. 그래서인지, 안대가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버렸지요.
“견우성이 누구인가를 놓고는 두가지 설이 있어.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라고도 하고, 염소자리의 다비흐라고도 하지. 근데 이 근방에 워낙 많은 별들이 있어서, 손가락을 어느 쪽에 두냐에 따라 이게 견우성이 되기도 하고, 저게 견우성이 되기도 하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 그래서 요즘은 견우 성단이라고도 한단다.”
“직녀성은요?”
“직녀성은 좀 간단하지, 얘는 거문고자리에서 제일 밝은 별이야. 여름철의 별자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쪽하늘에 있어서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이란다.”
“근데 쟤들이 무슨 이유로 부딪친 거에요?”
“글쎄.......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이 움직이는 것에 대한 건 내 전공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견우와 직녀가 드디어 하늘의 왕에게 용서를 받은 게 아닐까 싶어.”
“하늘의 왕이요?”
새로운 것에 대한 아이들의 탐구심이란...... 이교도적인 설화에 대한 건 그다지 이야기 하고 싶진 않지만, 저를 보는 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마냥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는건 견디기 힘든 어려움일 것 같습니다. 이거 참...... 찌라시를 찢을 때 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