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진짜 가게? 그러다 후회한다?”
“괜찮습니다. 저 대신에 많이 벌어두세요. 그래야 도시락에 반찬이라도 하나 더 들어가지요.”
내 대꾸에 아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 한사람, 내 말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공갈빵 아재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공갈빵 아재는 씁쓸한 얼굴로 더는 말을 못하고 그저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돈이 돈을 낳는다.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이고, 푼돈은 모아봐야 푼돈이다. 큰돈은 큰돈으로 끌어 모으는 것이다. 돈 벌거리를 발견한 이 마당에 수당 따위에 매달리는 건 매우 멍청한 짓이다.
나는 서둘러 흙구리치는걸 마무리 짓고나서 각목을 그대로 집어던지고는 작업반장에게 달려갔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에게 ‘와이프가 아파서 오늘은 조퇴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작업반장이 수당을 받아 가야하지 않냐고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내일 와서 받아갈게요.’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사판을 나섰다.
공사판의 가림벽을 나서니 모래를 머금은 바람이 훅하고 끼쳐왔다. 이거 참, 습관이 무섭다더니 라스알게티에서 조금 살았다고 이런 기본적인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잠깐 가림벽으로 돌아와서 주머니를 뒤져 ‘케피에’를 꺼내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이갈’로 마무리를 지었다. 케피에로 얼굴을 가리니 모랫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게 확연이 줄어들었다. 이 고장에 살 때는 이것 없이는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라스알게티에서 고작 몇 년 동안 케피에 없이 살았다고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케피에의 가호아래 모래바람을 뚫고 가다보니 나와 답답이의 안전가옥이 있는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손으로 뺨을 주물 주물 거렸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할 것, 그래야 우리가 뒷말을 듣지 않을거라구요. 라고 답답이가 내게 말을 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와 마주치기 전에 최대한 웃는 연습을 하면서 입과 턱관절을 풀어두었다.
“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파티마가 내게 알은체를 하면서 다가왔다. 내가 알기론 이 아이는 답답이가 가르치는 아이중 하나다. 그 아이들의 동무인 주흐르와 슐라이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파티마 녀석이 학교에서 나머지 공부를 하느라 늦게 온 모양이다.
“어. 그래, 오늘은 혼자 오나보네?”
“네. 나머지 공부를 하느라 좀 늦었어요. 근데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아....... 뭐. 그렇지.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거든.”
“특별한 날이요?”
둘러대려고 한 말의 꼬리를 잡는 이 꼬마의 순진함에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그냥 특별한 날이면 특별한 날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는 굳이 이렇게 말을 붙이는 건 또 뭔가 싶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 한 대 쥐어박고 ‘남의 사생활에 관심가지지 마라.’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러자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할 것.’이라는 녀석과의 다짐이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의 눈은 매우 날카로워서 그걸 피하기란 도통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뭐 그렇지. 오늘 아주 특별한 날이야. 오늘이 나랑 선생님의 결혼기념일이거든.”
“와! 진짜요? 근데.......”
“근데?”
“선물 같은 거 안 사왔어요?”
“선물?”
점점 일이 더 복잡하게 꼬여가는 것이 느껴진다. 문제는 그 첫 단추를 꿰어버린 그 빌어먹을 놈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겠지. 파티마는 내 얼굴에서 모든 걸 읽었는지, 한심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얼굴만 믿고 그렇게 대충하다가는 언젠가 집에서 팬티바람으로 쫓겨날걸요? 이 아저씨 진짜 안 되겠네. 자, 나만 믿고 따라와 봐요.”
“어...... 어 그래.”
파티마의 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꽃집, 그러니까...... 파티마네 가게였다. 프로하기온 놈들은 돌잡이 때 돈만 놓는다더니 이런 코흘리개조차 뼛속까지 장사꾼 기질이 녹아있을 줄이야. 나는 손을 허위허위 저었지만, 파티마의 왼손은 이미 자기집 대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파티마의 모친, 그러니까 이 가게의 주인은 공부하러 갔다가 딴 길로 샌 딸을 혼내려다가 나를 발견하곤 반색을 하며 반겼다. 이 아주머니도 돈 앞에서는 두뇌회전이 팍팍 돌아가는걸 보니 피는 물보다 진한 게 사실인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행주로 다급하게 손을 닦으며 전정가위를 들었다.
“결혼기념일이면 뭐니뭐니해도 장미지. 이걸로 백송이 가져다줘봐. 아마 새댁이 껌뻑 넘어갈껄?”
“이미 넘어갔는걸요.”
“요거요거. 자신감 넘치는거 보소? 하기사 젊음이 깡패지. 나도 결혼하기 전에는 이곳 남자들 여럿 울렸다우.”
아주머니가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어있는 동안, 나는 슬쩍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어쨌거나 꽃을 선물하게 되었다면, 제대로 된 의미를 담는게 맞는 것 같았거든. 어디보자, 장미는 너무 흔한거 같고, 카네이션은...... 뭐 어버이날도 아닌데 유난떠는 것 같고...... 그러다가 내 시선을 멈추게 하는 꽃이 있었다. 바나나 껍질이 뒤집어진 것 같은 모양이었지만, 그편이 매우 신선해보였다.
“아주머니, 저 꽃은 이름이 뭐에요?”
“응? 저거? 저거 참나리라고 하는 꽃인데? 저거 사려고?”
“저거 꽃말이 어떻게 되는데요?”
“음...... 저거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는데......”
“저거 꽃말 깨끗한 마음이에요.”
파티마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 저 꽃이다. 나는 장미를 권하는 아주머니에게 참나리 열 송이를 가져다 줄 것을 말했고, 아주머니는 내가 더 설득해봐야 소용 없을거란 생각했는지 ‘대단한 로맨티스트 나셨네. 근데 미적 감각은 영 엉망이구먼.’이라고 궁시렁 거리면서 꽃을 포장해주었다. 나는 아주머니의 손에 10파운드를 쥐여 주고 가게를 나섰다.
“야 파티마, 잠깐 아저씨가 집가기 전에 뭐 좀 알아보려고 하는데 먼저 갈래?”
“어디로 갈건데요?”
“복덕방 할배네.”
“거긴 왜요?”
“있어.”
Channel 2. 아이리스
제 이야기가 다 끝난 뒤, 파티마는 휴지를 찾아 코를 풀며 볼멘 소리로 한 마디 했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불쌍해요.”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면, 1년에 한번은 만날 수 있잖니. 그 둘은 그걸로 위안을 삼는단다.”
“저는 까마귀와 까치가 왜 그 둘을 위해 희생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둘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고, 1년에 한번 도와준다지만, 새들이 사람 두 명을 받치기란 정말 쉽지 않을텐데 말이죠.”
슐라이만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까마귀와 까치의 걱정을 다 해주었습니다. 각각 방향성은 다르지만, 심성이 곱고 착하다는 점에서는 꼭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두 아이의 모습을 보다가, 찜기에 쪄두었던 얌이 생각나서 저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다행이 얌이 먹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익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얌을 꺼내기 전에, 조미료칸에서 소금과 설탕을 각각 덜어서 얌과 함께 공부방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눈이 새빨개진 상태였어요.
역시 애들 입맛에는 달달한 게 최고인가 봅니다. 아이들은 눈물을 쓱 닦고는 얌을 집어서 설탕에 푹 담가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습니다. 눈시울은 빨간데, 얌을 먹는 입꼬리는 잔뜩 치켜올라간 모습이 퍽 재미있었습니다만, 그런걸 굳이 지적해주면 민망해 할 것 같아, 저는 짐짓 모르는 체 하고 얌을 소금에 찍어먹었습니다. 얌 특유의 식이 섬유 때문인지 베어무는 순간 입안이 쫀득쫀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어요.
“맛있는 걸 먹는 동안, 분위기를 깨는 말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천문학자들이 견우성과 직녀성의 거리를 재어보고 나서 결론을 내렸대, 둘이 서로를 만나려면 실제로는 빛의 속도로 15년 동안 서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하더라구.”
“그러면 사실상 만나는 건 불가능 한 거네요?”
“뭐,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실제로 벌어진 거구요.”
“그것도 맞지.”
“선생님 말대로 드디어 하늘의 왕이 둘을 용서해 준 것 같아요.”
“그러게, 그러면 이제 7월 일곱 번 째 밤에는 비가 내릴 일이 없을 것 같구나.”
저희는 아까의 이야기를 지금 벌어지는 하늘의 사건과 연결지어가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요, 이교도적인 내용이 있지만 그래도 감동을 준다는 것에서는 이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셈인거니까요. 아버님도 이번 한 번 정도는 슬쩍 눈감아 주시지 않을까요?
“다녀왔어.”
얌은 지겹다고 툴툴거릴때는 언제고, 빈 접시를 네미는 주흐르의 요청에 부엌으로 가려던 찰나,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아, 로키군이 돌아왔네요. 어......? 그런데.
“다녀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아아, 오늘 당신......이랑 상의할 것도 있고, 그.......”
“아이 참 이 아저씨 진짜 답답하네. 빨리 선생님한테 드려요!”
언제 그와 함께 왔는지, 파티마가 로키군의 등 뒤에서 빠꼼이 얼굴을 내밀더니 그의 등을 팩하고 떠밀었습니다. 그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그의 등 뒤에 숨겨두었던 무언가가 홱 하고 튀어나왔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다름아닌 꽃이었습니다.
“어......? 이게 뭐에요?”
“그게 말이야. 오늘이....... 우리 결혼 기념일이잖아. 그래서 기념으로 한 다발 사왔어.”
우물쭈물하는 로키군의 모습과, 그런 그를 마뜩찮게 바라보는 파티마를 보니,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네요. 무언가 저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일도 제쳐두고 달려오던 길에 파티마를 만났겠지요. 이 마을은 이웃집 숟가락 개수도 훤이 꿰는 곳이니...... 파티마는 로키군이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다는 걸 몰랐을 리도 없었을거구요. 그래서 로키군은 파티마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결혼기념일이라고 둘러댔을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저 정많고 남의 일엔 발벗고 나서는 저 꼬마가 로키군에게 꽃 한다발을 사라고 자기네 가게로 끌고 들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와! 정말 예쁜 참나리 꽃이네요. 근데 결혼기념일엔 장미 아니에요?”
“그게, 장미는 너무 뻔한 것 같아서, 우리.......여보야 한테 뻔한 선물을 주긴 그렇잖아. 하하. 그래서 좀 특별한 의미가 담긴 꽃으로 준비해본거야.”
로키군은 ‘여보야’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가면서 제게 꽃을 쥐여주었습니다. 아이고, 이젠 그는 숫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네요. 참으로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한 쑥맥’을 연기하겠다고 하더니, 정말 저조차도 그가 쑥쓰러워서 몸을 비비꼬는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그런 점에선 그는 진정 프로가 분명합니다.
“고마워요. 근데 특별한 의미요? 참나리 꽃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어......음. 그게 말이지. 참나리 꽃에....... 야, 파티마 참나리 꽃의 꽃말이 뭐랬지?”
“깨끗한 마음이래요. 아니 아저씨가 이 꽃말 때문에 골라놓고 그걸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래, 깨끗한 마음...... 그거였어.”
똑 부러지는 대답과, 그 뒤를 쫒아 들어오는 지청구에 로키군은 정말로 어버버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하, 연기지만 정말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깨끗한 마음이라....... 이거 감동인걸요?
“얘들아.”
“예. 아저씨.”
“미안한데, 너네도 알게 됬지만, 오늘 아저씨랑 선생님 결혼 기념일이거든. 오늘은...... 일찍 집에 가면 안되겠냐? 아저씨랑 선생님도 오늘은 좀 오붓하게 같이 있고 싶은데.”
“이이가 정말! 아니야 얘들아 아저씨는 우리 공부 끝날 때 까지 방에 혼자 있겠대. 오늘 공부할거는 마저 하고 가자.”
“선생님, 저 얌 하나만 더 주시면 안돼요?”
“야, 진짜 눈치 없이 왜 그러냐? 알았어요. 아저씨. 오늘은 저희 일찍 들어갈게요 선생님.”
“아냐 아냐, 안 그래도 돼! 진짜 당신 애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음...... 난 안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저희가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슐레이만은 제 가방을 후다닥 다 싸고는 동생 주흐르의 몫까지 짐을 다 챙겨주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니....... 얘들아, 정말 안가도 된다니까. 왜들 그러니.......
“그럼 선생님, 저흰 일찍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니 얘들아 그게 아니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오냐.”
Channel 1. 로키
마지막 아이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 이 집에는 나와 답답이 둘만 남았다.
“식사는 맛있게 했어요?”
“응. 맛있게 먹었지. 근데, 그 하트모양은 어떻게 바꿀 수 없을까?”
“왜요? 나름 정성들여서 만든 거였는데.”
“그게...... 그 사람들이......”
답답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씩 하고 웃어보였다.
“놀려요? 그래서 그게 부끄러운거고?”
“뭐...... 내가 부끄러움 같은걸 느낄게 있나.”
“맞네요. 뭘.”
답답이는 내 가방에서 도시락 통을 꺼내 그것을 싱크대에 담갔다. 나는 탁자에 앉아서 녀석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답답이는 자신이 아는 성가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해나갔다.
“그런데 오늘은 일찍 왔네요?”
“응, 오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거든.”
“얼마나 흥미롭길래, 일까지 내팽개치고 일찍 온 거에요?”
“페어게이트 쪽에 재개발이 있을 예정이래. 본사 쪽에서 사업자 계약을 따낸 모양 인가봐.”
“어머, 그러면 그곳의 땅값이 많이 오르겠네요? 그런데, 벌써 그쪽에도 소문 다 난거 아니에요? 그러면 땅 사봐야 별로 소용도 없을 것 같은데.”
“오면서 복덕방을 들렀는데,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더라고. 페어게이트에 대해 물어봤더니, ‘그 다 쓰러져가는 동네는 왜?’라고 되물어보더라. 아직까진 함바집에서만 떠도는 이야기 인가봐.”
설거지 할게 별로 없었는지, 답답이는 생각보다 빨리 설거지를 마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탁자에 앉았다. 녀석의 손에는 얌이 담겨있었다.
“미리 집을 사놓으면 우리 생활도 많이 넉넉해지겠네요.”
답답이의 얼굴을 보다보니, 문득 ‘이거 영락없는 부부잖아?’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다. 여담이지만, 비정한 마음에 금이 가고나선 나도 어느 정도 감정이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에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발현되는 신체적인 반응에 어찌 할 줄을 몰랐지만, 이제는 신체적인 반응에 기저에는 ‘마음’이라는 심리적인 기제가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 답답이의 도움으로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건 좀 그렇군.
답답이는 내 신체적인 변화를 눈치채곤,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 신체적인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에이, 또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서 그래요?”
“아니다.”
답답이는 내게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 땐, 잠깐이라도 멈추는 시간을 갖는게 필요해요.’라면서 헛기침을 하거나,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해보라고 했었다. 물론, 그걸 가르쳐준 사람의 앞에서 그런걸 해보이는 것도 매우 부끄러운 일임은 분명하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 감정의 대상이 바로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라면 더욱......
“말해 봐요.”
“별로 말 안하고 싶은데.”
“왜요? 아 진짜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이러기에요?”
“아니 뭐...... 너랑 이렇게 ‘우리’의 살림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안하고 있어서. 낯설기도 하고......”
“그리고요?”
“여기까지.”
나는 뒷말을 흐렸지만, 답답이는 그 흐린 뒷말 속에 어떤 단어와 감정이 숨어있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땐 몰랐는데 말이지, 녀석은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확실히 정통한 것 같다. 알면 알수록...... 그 끝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여자다.
“저도 그래요. 저도 당신과 이렇게 ‘우리’의 살림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줄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 낯설긴 하지만......”
“그리고?”
“그렇다고요.”
답답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 받고나니, 뭔가 유쾌하진 않지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녀석은 내 얼굴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깔깔 대며 웃었다. 비정한 마음은 깨어졌고, 그 이전까지 흑과 백의 무채색 세계에서만 살던 나는 다채로운 색상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 색상의 향연을, 나만 홀로 경험했다면 아마 나는 혼란속에서 어쩔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으리라. 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색상의 이름을, 그리고 그 면면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만났고, 발을 동동 구르는 대신 그것을 관조하고, 향유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사람은 내가 또 다른 색상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이건 이런 색이에요.’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비록 의도치 않게 내가 살던 터전에서 도망쳐야 했지만, 그것이 내게 ‘슬픔’이나, ‘두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오히려 ‘편안함’과, ‘영속에 대한 기대’를 가진 건 그것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도피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이대로 시간이 흘러 우리를 찾는 사막의 어금니들이 가진 그 섬뜩한 예리함들이 점차 무뎌져가기만을 기다린다.
지금 이대로가 딱 좋다.
“언제 땅 보러 갈까?”
“내일 갈래요?”
“수업은?”
“애들이 오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죠.”
Channel 2. 아이리스
“식사는 맛있게 했어요?”
“응. 맛있게 먹었지. 근데, 그 하트모양은 어떻게 바꿀 수 없을까?”
“왜요? 나름 정성들여서 만든 거였는데.”
“그게...... 그 사람들이......”
이곳에서 로키군과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로키군은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스알게티에서 로키군은 제가 지켜본 것만 놓고 보자면 냉정하고, 인정사정없고, 잔인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피 비릿내가 떠나질 않는’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어요. 너무 안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나? 뭐...... 굳이 변명처럼 좋은 이야길 덧붙인다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건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그런 올곧은 면도 본 것 같아요.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라곤 없다고 하겠지만...... 뭐 저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굳이 폄하할 것 까진 없을 것 같으니까.
“놀려요? 그래서 그게 부끄러운거고?”
“뭐...... 내가 부끄러움 같은걸 느낄게 있나.”
“맞네요. 뭘.”
하지만 프로하기온에서 로키군은 부끄럼이 많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서투른...... 뭔가 ‘내성적인 아이?’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장소의 변화가 한 사람의 극단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건 아니에요. 제가 그의 이런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가 저와 재회하기 직전에 휘말렸던 일련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가슴팍에 박혀있는 ‘비정한 마음’ 저는 로키군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호기심의 손길은 그것에 까지 다다랐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숨겨온 추악한 죄악중 하나였고, 부외자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 조차도 몰라야 했어요. 저는 그들의 금제를 깨트렸고, 그 결과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와 함께 숨어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로키군은 제게 ‘비정한 마음’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알고있는 것에 한정된 내용이라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만 알아도 저는 그 물건이 얼마나 흉한 것인지 짐작하는데는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마약, 쾌락을 통한 인간 감정의 통제...... 어쩌면 그건 고통을 통한 통제보다 더 교묘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듯, 고통이나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만, 쾌락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망가뜨리니까요.
비정한 마음의 실체를 알고 나선, 저는 로키군이 ‘감정’이라는 것에 상당히 생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감정이 매우 낯설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것에 휘둘리는 것에 많은 불안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죠. 저는 로키군에게 감정을 ‘정의’내려 주었고, 그것을 ‘분류’했으며, ‘수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비정한 마음은 ‘금이 간 것’이지 ‘망가진 것’이 아니었던 지라, 그의 감정이 격해지면 그의 혈관으로 ‘해시시’라는 독한 마약을 쏟아내 버리거든요. 그것에 취해 로키군이 몇 번이나 쓰러져 발작을 하던지...... 그럴 때 마다 기도문을 읊어주면서 그의 혈액속의 해시시를 중화시키느라 많이 애를 먹었습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해시시 발작 대신, 잠깐 멍해지는 정도로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로키군은 그동안 마주하지 않았던 자신의 감정이라는 것과 마주하고, 부딪치면서 결국은 그것을 이겨내더군요. 이제 그는 이전에 비해 감정이 많이 풍부해졌습니다. 이젠 제가 실수를 할때면 비꼬기보단, 웃어넘기는 쪽이 많아졌어요.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부끄럼 많은’로키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일찍 왔네요?”
“응, 오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거든.”
“얼마나 흥미롭길래, 일까지 내팽개치고 일찍 온 거에요?”
“페어게이트 쪽에 재개발이 있을 예정이래. 본사 쪽에서 사업자 계약을 따낸 모양 인가봐.”
“어머, 그러면 그곳의 땅값이 많이 오르겠네요? 그런데, 벌써 그쪽에도 소문 다 난거 아니에요? 그러면 땅 사봐야 별로 소용도 없을 것 같은데.”
“오면서 복덕방을 들렀는데,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더라고. 페어게이트에 대해 물어봤더니, ‘그 다 쓰러져가는 동네는 왜?’라고 되물어보더라. 아직까진 함바집에서만 떠도는 이야기 인가봐.”
“미리 집을 사놓으면 우리 생활도 많이 넉넉해지겠네요.”
“......”
“에이, 또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서 그래요?”
“아니다.”
거봐요. 부끄럼이 참 많죠? 로키군이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저는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 해짐을 느낍니다. 이런 모습...... 아마 저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겠지요. 지부장도, 도로시씨도, 그리고 토라도 아마 이 모습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로키군은 저와 함께 ‘지금’, ‘이곳’에서 정착을 했고, 저와 함께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알아가고 있으며, 저와 함께 ‘미래’를 그려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를 찾는 위협을 피해 도피했지만, 도피처는 안락하기 그지없어요. 이대로 시간이 흘러, 암살자들은 물론이고, 세상마저 우리를 잊어버리기를 기다리는 이시간, 저는 이시간이
“언제 땅 보러 갈까?”
“내일 갈래요?”
“수업은?”
“애들이 오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