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4일
“수고하셨습니다.”
“허허, 참 오늘도 야근은 쌩깔 참이여? 오늘까지 풀로 출석했으면, 160파운드는 족히 더 벌었겠다.”
“괜찮아요. 돈도 돈이지만 가정이 우선이라서.”
내 대답을 들은 수염고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다시면서 잘 가라고 배웅을 해주었다. 그에게서 야근 권유를 받은 지도 벌써 3주나 지났다. 처음에는 정말 야근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줄기차게 거절을 하니, 이젠 야근을 권유하는 것도 나에게 ‘조심해서 들어가라’라는 인사 대신으로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말 대신 그의 야근을 거절 하는 것이고.
“오늘도 퇴짜 놓은거여? 아따, 집에 꿀이라도 숨겨놨는 갑소.”
“꿀보다 더 달디단 거이 신혼 생활 아니랑가? 수염성도 이젠 그만 들이댈 때가 됬제.”
“그라제, 이제 수염성도 그만 질척거리씨요. 사람이 늙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제 뭐하는 거여.”
수염고래의 친구들은 수염고래를 보며 낄낄 거렸다. 퇴근시간만 되면 나와 수염고래가 벌이는 실랑이가 그들에게는 시계의 알람처럼 하루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들리는 말로는 내가 언제까지 그의 권유를 거절하는지 내기 판까지 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던데, 아직까지는 내게 은밀하게 로비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긴 하다.
나는 락카에서 옷을 갈아입고 공사장을 나섰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러겠지만, 공사장의 차단막을 벗어나니 모래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든든하게 케피에를 착용했기 때문에 모래바람 같은건 아무래도 좋았다.
로딕피크에 도착해 집으로 가려던 길에, 평상시와는 다른 풍경을 보았다. 다 떨어진 히잡을 걸친 할머니가 비루먹은 낙타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낙타의 뒤에는 리어카가 힘겹게 모래바닥을 기어갔다. 마침 가는 길이기도 하고, 이 낯선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가보니 리어카에는 고철이며 폐지며 각종 잡동사니가 실려 있었다. 아마도 집집마다 돌면서 고물을 수거해가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 인 것 같았다.
“흐미 날씨가 징하구만, 그려도 쪼깐만 심좀 쓰자잉.”
할머니는 께끔발을 들어 낙타의 등을 쓰다듬으며 격려의 말을 했지만, 낙타와 인간 사이에는 종 단위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아보였다. 할머니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낙타는 지쳤는지 짜증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바람에 할머니의 옷에는 낙타의 입에서 나온 게거품이 한가득 쏟아졌다. 솔직히 말해, 그 모습을 그냥 무시하고 가고 싶었다. 수염고래의 야근 권유도 뿌리쳐온 나인데 생판 처음보는 할머니의 딱한 모습쯤이야 무시하는건 일도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는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답답이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좋은 인상을 줘서 나쁠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최대한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는거에요.’
“이 할머니는 이웃이라고 하기엔 생판 처음 본 분인데?”
“....... 아야, 총각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시여?”
내가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지 할머니는 낙타에서 눈을 떼고 나를 빤이 바라보았다. 혼잣말과 같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를 남에게 들켰다는 것이 퍽 부끄러웠다. 거기에 그 혼잣말이 엿들은 이에게 긍정적인 내용도 아니었으니 더욱 더 그런 감정이 컸던건 말할 것도 없고...... 감정이란건 참 웃기는 놈이다. 나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 닥쳤을 때, 내 가슴에는 당혹감이라는 감정이 왈칵 쏟아진다. 그 감정은 꽤나 활동적이라서, 그런 감정에 휘둘릴 때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된다는 일념에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행동을 제 멋대로 하도록 만들어버리곤 했다. 내가 이렇게 밑밥을 까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 ‘당혹감’이라는 감정에 휘둘렸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리어카를 밀고 있었거든.
“아따 총각, 암스롱도 안허니, 질 가씨요.”
“아닙니다. 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가만히 보지 못하는 곱고 바른 심성을 타고났거든요.”
.......세상에, 수염고래가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러 가지 버전이 상상되지만, 아마 제일 설득력 높은 거라면....... 파안대소를 하지 않을까?
“어디까지 가세요?”
“어......어......어? 어 그려, 쩌기 퍼런 지붕 보이제? 쩌그까지 갈것이구마잉.”
퍼런 지붕이라면....... 우리 집이다. 글쎄, 내가 알기로는 우리 집에는 할머니께 드릴만한 고물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답답이를 닦달해서 없는 쓰레기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를 악물면서 리어카를 밀었다. 처음에는 모래밭에서 바퀴를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한번 흐름을 타니 기세를 타기 마련인지라 처음보다는 쉽게 리어카를 옮길수는 있었지만....... 역시 ‘보다는’이라는 비교형은 절대치를 반영하는 건 아니었기에, 이내 내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아따 고맙구먼. 총각 덕분에 일찍 도착해버렸소.”
“하아......하아.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요.”
어찌나 용을 써댔는지, 허리를 펴자마자 머리가 띵해질 정도였다. 이런 걸 기립성 저혈압이라고 하던가? IATP연수의 인체 해부학 소분임 시간에나 배웠던 용어를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총각이 고생이 많았구먼. 내가 줄거는 없고, 이거라도 마실랑가?”
할머니는 낙타 안장을 뒤져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주변이 번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 물주머니인 것 같았다. ‘예의바름’의 끝을 본다면, 이런 것도 거절해야 할 터지만, 워낙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그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에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정말이지 물맛이 문자 그대로 ‘꿀맛’과 같았다.
“그거 아는가 총각?”
“네?”
“옛날에 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우물을 지나는디, 한 가시내가 물을 긷고 있었소, 길손이 가시내에게 ‘물 한잔만 주씨요.’라고 부탁하니 바가지에 물을 거시기해브렀단 말여, 그런디 오매 그 가시내가 물바가지에 나뭇잎을 폭하니 담가브렀다니께, 길손이 ‘이게 뭐시여?’라고 하니, 가시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천천이 불어마시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라제. 그럼 나가 왜 그 말을 총각한테 혔는지는 알겄는가?”
“글쎄요? 저도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는거 아니에요?”
“맞네. 그러니 곧 체하겄구먼.”
“네?”
할머니의 알아듣기 어려운 기묘한 말을 채 곱씹기도 전에, 목 뒤에 강한 충격이 나를 덮쳤고, 내 의식이 순식간에 까무룩한 심연으로 빠져버렸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4일
최근 들어 피부가 너무 상한 것 같아서, 피부 팩을 만들 겸 집 앞의 텃밭에 있는 알로에를 조금 잘랐습니다. 알로에를 자를 때는 조심 해야하는 게, 장갑 없이 무턱대고 줄기를 잡았다가는 가시같은 이파리에 손에 큰 상처가 나곤 한답니다. 그래서 알로에를 채취할 때는 꼭 장갑을 껴야 해요. 물론 시행착오라는 게 있어서, 저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채취하려고 덤벼들었다가 적잖이 손에 피를 묻혀야만 했었지요.
알로에는 참 신기한 식물입니다. 저는 이토록 이파리가 퉁퉁한 식물을 본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이파리를 잘라내면....... 엄청난 양의....... 과즙이 쏟아져 나온답니다. 분명 식물을 자르는데, 느낌은 고기를 자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분명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그런걸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저는 그 끈적거리는 과즙이 땅으로 쏟아지기 전에 재빠르게 바구니를 가져다 대어 그 모든걸 받아냈습니다. 이 과즙은 꽤나 중요해요. 이걸 모아다가 장돌뱅이 약사에게 팔면 꽤나 수익이 쏠쏠하더군요. 들리는 바로는 그 과즙이 강장제나 변비약의 재료가 되는 모양이에요.
저는 알로에를 가지고 간 다음, 찬장을 뒤져서 재료를 준비했습니다. 약품상자에서 거즈를 챙기고 화장대에서는 화장붓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부엌 찬장에서 밀가루와 꿀...... 흠. 꿀은 뺄까요? 기왕 시간이 남아서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꿀이 흔한 것도 아니고..... 이런 귀한 식재료를 마냥 얼굴 바르는데 쓰기는 좀 그렇겠지요? 저는 꿀은 포기하고 대신 쓸 만한 게 없을까 하고 찬장을 뒤져보았습니다. 아아, 저기 있네요. 찬장 구석에 설탕 한 포대가 잠자고 있었습니다. 꿀보다는 덜하겠지만, 얘도 물에 섞으면 제법 끈끈해지니 보습효과가 비슷해지겠죠? 저는 설탕 한 스푼을 퍼서 종지에 담고 물을 섞었습니다. 아쉽긴 하지만, 사치를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니까요.
알로에의 가장자리를 칼로 잘라서 벗긴 뒤에 막자사발에 넣고 막자로 서서히 갈았습니다. 사발이 그닥 크지 않아서, 알로에를 1/3만큼 자른 뒤에 튀지 않게 조심스럽게 두드렸어요. 막자와 사발 사이에 끼인 알로에는 처음에는 사발에서 튀어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제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라고요. 미끌미끌한 알로에의 특성상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코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한참을 끙끙거린 뒤에서야 비로소 사발 속 알로에가 곤죽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곤죽이 된 알로에를 그릇에 따라놓은 뒤에, 알로에에 설탕물을 섞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로에 갈린 물을 거즈에 붓고, 또 다른 거즈를 그 위에 덮고, 거기에 알로에 물을 담는 것을 반복한 뒤에 알로에 팩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참 자기 자신에게 선물하나 주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시계를 보니, 이 난리를 쳐도 아이들이 올 시간까진 약 30여분 정도 남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 것 같네요. 저는 막자를 가는 바람에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팩을 집어 얼굴에 붙여보았습니다. 청량하면서도 촉촉한 감촉이 얼굴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얼굴에 가득히 들었어요. 와...... 이제까지의 고충이 한 번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소파에 누워 팩이 주는 감촉을 천천이 맛보았어요. 그러는 사이 창문너머로 바람이 블라인드를 들치고 들어와 제 얼굴을 간질거리고는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하아..... 이게 여유이고, 이게 안식인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이 고장에 온 지금이 제 길지 않은 삶을 통틀어서 가장 한가한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제 첫 기억이 깃든 고아원부터 학교, 수녀원...... 그리고 ‘우리’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자들의 소굴에 이르기까지 제 기억이 흔적을 남긴 곳곳을 떠올려 보아도, 언제나 저는 시간에 쫒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왔고, 그랬고, 그러리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그건 제게 당연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저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숨어 지내는 이곳에서, 어찌 보면 생명이 위태로울 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저는 제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장미도, 숭고미도 느껴지지 않는 한가함...... 제게 앞으로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보, 거기 있는가?”
온몸에 힘을 가득 싣어 기지개를 쭉 펴려는 차에 문설주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익숙한 목소리...... 최근에 들은 적이 있는...... 아! 복덕방 할아버지 목소리입니다. 저는 알로에 팩을 벗어서 접시위에 올려놓고 얼른 문가로 달려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죠? 제가 알기로 잔금 치르는 날은 12일인데, 아직 일주일이 넘게 남은 상황에서 무슨 일인 걸까요? 문을 여니, 복덕방 할아버지께서 송골송골한 땀이 맺힌 채로 문가에 기대 서 계셨습니다.
“아이고, 껍다구를 거시기 하는 중이었구마잉.”
“아...... 네네! 죄송해요. 모처럼만에 시간이 남아서, 얼른 벗어둘게요,”
“아녀 아녀, 갑작시럽게 찾아온 내가 잘못한것잉께로 암시랑토 안해도 되브러, 잔금 관련해서 잠깐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가지고 내사 들렀구먼.”
“아..... 그럼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시간이......”
저는 탁상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이 올 시간도 넉넉하게 남았고, 이렇게 구트라가 흠뻑 젖을 정도로 급하게 오신데는 뭔가 사유가 있을테니, 안된다고 거절하기도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저는 할아버님께서 들어오시기 편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드렸습니다.
“면구가 없구먼이라, 원참에 느긋하게 볼라고 혔는디 내사 애로사항이 쪼깐 생겼어야.”
“아아, 그래요? 사정이라면 구체적으로.......”
“사정이라면 요런 거제.”
“.......?”
할아버님의 말을 가로막는 낯선 목소리에, 저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으.....응? 언제 들어온 거지요? 부르카로 온 몸을 가린 낯선 이가 꼿꼿이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저는 무슨 일인가 싶어 할아버님을 보는데, 방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님의 구트라는 더욱 더 흥건하게 젖어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리스 테펠리나가...... 맞는가?”
“잉...... 맞는다 안허요.”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 쪼깐 껄쩍지근 하구만.”
낯선 이는 제가 가로막기도 전에 순식간에 다가와 제 멱살을 잡고는 제 얼굴에 붙어있던 알로에 팩을 뜯어내버렸습니다. 주인을 잃은 알로에 팩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아니, 그녀인 걸까요? 목소리마저 중성적이라 성별을 구별할 수는 없었던 그 이는, 제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확실한건....... 제 다리가 균형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후들후들 떨려왔다는 것입니다.
“흑발머리와, 연녹색의 눈....... 나이는?”
“스......스물 넷.....이에요.”
“나이도 맞아불고......”
부르카 너머의 목소리는 자신이 확인할 바를 다 확인했는지 제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아주었습니다.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한 것이겠지만, 안그래도 후들거리던 다리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 할아버님께서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신 ‘미안하구먼.’이라고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그리고 떨어진 알로에 팩에 파리가 꼬이거나 말거나 그런건 부르카 너머의 목소리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인자 너의 신병을 우리 것이여. 반역자 로키도 거시기 혔으닝께 쓰잘데기 없이 지랄해봐야 니만 피본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