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5일
답답이는 시종일관
“우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어딜 가나 사람이 빠글거리고, 흥성거리는 느낌을 자아내는 역전의 풍경이 그녀에게는 꽤나 낯설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프로하기온 출신으로서의 ‘자부심’ 대신에 열등감에 기인한 ‘짜증’이 났다. 답답이가 이 풍경에 감탄하는 이유야 뻔했거든 ‘이곳도’ 사람이 많구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몇 년 동안 왕도에 몸을 담다보니, 나는 왕도의 주민들의 심리적 기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도병’에 걸려있었다. ‘왕도’가 아니면 ‘시골’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 그 사고에 따른다면, ‘시골’이라는 곳은 황량하고, 문화적으로 유리되어 사람이 살기에 매우 불편한 곳이다. 나아가 ‘왕도병’말기에 걸린 사람은 ‘그런 곳에도 이런게 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 왕도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생각에 혀를 차곤 한다.
“턱 빠지겠다.”
“진짜 사람 많네요.”
“그럴 수밖에, 이곳은 남부 횡단선과 대륙 중앙선의 합류점인걸.”
“와 그럼 저 많은 짐들이......”
답답이의 손가락은 선적장에 한가득 쌓여있는 화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카브와 라스알하게에서 온 화물들이지. 아마 라스알게티로 진상될 거야.”
“사람만큼이나 물자들도 엄청나게 이동을 하네요.”
“아무래도? 여긴 열찻길이 열리기 전에도 상업루트였으니.......”
나는 답답이가 감탄을 하는 동안, 대합실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라스알하게 행 티켓을 두 장 끊었다. 대합실 옆에는 무료신문이 쌓여있었다.
“흠...... 라스알게티에 연쇄살인마가 출연했다는군.”
“그거, 당신들 소행 아니에요?”
“글쎄, ‘우리’가 한 짓이라면 저런 일관된 시그니처를 남기는 일은 별로 없어. 의뢰인도 그걸 원하는 경우도 거의 없기도 하고...... 저런 경우라면 개인이 직접 움직인 거야.”
더스트 앤 데저트지의 1면에는 축 늘어진 시체가 피 칠갑된 가면을 양손에 가지런히 든 채로 벽에 기대 앉아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열차표를 보니 열차시간까지는 대략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다.
“시간도 넉넉한데 밥 한 끼 먹을까?”
“좋아요.”
“그럼, 저쪽으로 가자고, 선적장 쪽에 밥집거리가 있거든.”
우리 둘은 대합실을 나와 프로하기온 역의 선적장 쪽으로 돌아왔다. 선적장에 걸려있는 화물들 너머로 구수한 음식냄새가 우리의 코를 간질였다. 이곳에 밥집거리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선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하기온 역사에선 선적장 근처 300m에 노점을 여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법이라는 수단으로 수요와 공급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감사철 한철에만 집중적으로 단속을 할 뿐, 그 이외에는 손을 놓아버리니 이곳에는 거의 1년 내내 노점이 바글거렸다. 심지어는 공무수행 완장을 차고서 당당하게 노점에서 한끼를 때우는 공무원도 있는 판이다.
“어떤 거 먹고 싶어?”
“음...... 아무거나요?”
“흠......아주 어려운 답변을 내놓는군. 하지만 나는 프로니까......케밥이 제일 먼저 떠오르긴 한데, 그건 이미 많이 먹어봤잖아?”
“그렇죠.”
“그럼, 라흐마준을 먹어볼래?”
“그건 뭐에요?”
“아나톨리아라고, 프로하기온과 코카브의 접경지대쪽 지방인데, 그곳요리가 프로하기온에선 맛으로는 최고로 치는 곳이거든. 거기 쪽 요리다. 매운 거 잘 먹으면 도전해볼 만 하지.”
“흐음...... 좋아요. 라스알게티도 매운 걸론 지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매운 냄새가 나는 좌판으로 갔다. 역시나 매콤한 냄새와 함께 라흐마준이 뜨끈한 김을 뿜으며 구워져 나오고 있었다.
“어서옵쇼!”
“여기 라흐마준 2인분.”
“네, 감사합니다!”
좌판 주인이 신나게 라흐마준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좌판에 앉아서 음식을 기다렸다. 답답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나는 미처 다 읽지 못한 더스트 앤 데저트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흠...... 라스알게티의 연쇄살인 사건이 꽤나 크게 주목을 받는군, 해당 기사가 1면을 넘어서 2면까지 차지할 정도니 말이다. 대체 얼마나 죽여 댔길래 이렇게 크게 다루는 거지?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5일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느꼈지만, 프로하기온 역은 정말......
“와......”
“조심해, 사람에 치이겠다.”
엄청난 인파와,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양의 화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한 가운데에 서있다 보니 거대한 개미굴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프로하기온의 전통의복을 걸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짐을 들고 동분서주 움직이는 거대한 광장...... 지금 이곳에 서서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아마 사람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다면, 이 거대한 풍경을 보면 하나의 강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저를 붙잡아주는 로키군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저희는 선적장 쪽으로 다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라스알하게 행 열차는 13시 정각에 있더군요. 지금은 12시....... 약 한 시간정도 여유가 있길래, 저희는 선적장 앞 밥집거리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서옵쇼!”
“여기 라흐마준 2인분.”
“감사합니다!”
좌판주인이 신나게 라흐마준이라는 걸 굽는 동안, 점원분이 빠르게 테이블을 세팅해 주셨습니다. 레몬즙과 고춧가루 다대기를 담은 식판, 그리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수북히 쌓인 야채들이 테이블 위로 빠르게 올려졌어요.
“봉께로 손님은 이짝은 처음이지라? 지가 간단하게 알려줄랑께 귓구녁 열고 잘 들으씨요. 라흐마준이 올라오믄, 그짝에다가 푸성귀를 올리고, 그 위에 레몬즙이랑 고칫가루를 섞어가지고 조지면 되브러라.”
“아아, 저렇게 말이죠?”
“잉, 근디 이 동네는 스타일이 후리항께로, 말아서 묵든지, 짤라서 묵든지는 손님 취향껏 하씨요.”
“네네, 감사합니다.”
제가 점원의 도움을 받아서 라흐마준을 먹는 법을 듣는 동안, 로키군은 신문을 펼쳐 읽어 내렸습니다. 신문의 1면에는 ‘가면 살인마, 왕도의 치안에 안대를 씌우다.’라는 자극적인 제목 아래 더욱 더 자극적인 사진이 실려 있었어요. 로키군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지만...... 글쎄요,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저렇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를까 하는 의심이 드는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자, 여그 라흐마준 대령했습니다잉.”
“와 감사합니다.”
“당장 집어블면 허버 뜨거운께 쪼깐 식혀드씨요.”
주인의 친절한 설명을 따라 라흐마준이 식기를 기다리는데, 좌판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셔유. 아니 시방 여서 뭐하는 거래유?”
“아따 죽자고 지랄해쌋는거 봉께로 쩌 가시내가 여그 통인갑네잉? 아야, 이 바닥 상도 모르냐? 우리 패밀리가 쌓아올린 시장 질서를 갔다가 니가 뭐시라고 엎어뜨리고 자빠뜨리는 것이여?”
“시장 질서 말이어유? 거참 말씀하나는 기가 맥히고 코가 맥히게 잘 했구먼유!”
라스알하게 방언과, 프로하기온 방언이 뒤섞여 다투는 소리가 저희가 앉아있는 좌판 너머의 선적장에서 들려왔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건장한 남자 여럿이 여자 한명을 둘러싸고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습니다. 다툼이 일어나기 전에 그곳은 십장의 지시에 따라 인부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물주로 보이는 여자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느 선적장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었는데, 그 풍경을 지금 여자를 둘러싼 이들이 전혀 흔하지 않은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말아버렸지요.
“저...... 저기 로키군. 저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밑도 끝도 없이 험악해지기만 하는 악화일로의 분위기였지만, 로키군은 그쪽을 보기는커녕 신문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라흐마준에 토핑을 올려 한입 크게 베어 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냥 ‘새가 날아가는가 보다.’하는 반응을 보인건 좌판 주인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태연 자약한 얼굴로 화덕에서 라흐마준을 꺼낼 뿐이었죠. 그들만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저를 제외한 밥집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태연한 얼굴로 자기 일만 할 뿐이었죠.
“저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마, 저 여자가 이곳의 관례를 지키지 않은 거겠지.”
“관례요?”
“이곳 선적장을 관리하는 마피아들을 거치지 않고 인부들과 직접 거래를 튼 모양이지 뭐. 걸리지 않았으면 상관이 없겠지만, 저 여자는 운이 더럽게 없는 모양인가보다.”
“마......피아요?”
“물류가 모이는 곳에는 돈이 꼬이기 마련이고, 돈 냄새를 맡는 사람들은 다양하기 마련이지. 그냥 다양한 인간군상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해.”
로키군이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동안, 상황은 더욱 더 최악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물주분이 마피아들의 서슬 퍼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나오자, 마피아들이 약이 올랐는지 물주분의 짐을 멋대로 집어던지기 시작했거든요. 물주는 그들의 패악질을 말리기 위해 짐 위에 몸을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포장이 뜯겨나가면서 각종 재화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안 인부들은 눈치껏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고, 그녀의 옆에 있던 십장마저 떠나버리자 그곳에는 물주 혼자서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버렸어요. 그녀는 울부짖으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키군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앉아. 니가 나설 곳은 없어.”
“그래도......”
“이곳의 생태야. 나름의 룰이 있는 닫힌계라고. 니가 알량한 영웅심으로 나서는 건 자유지만. 결코 물주 외의 사람에게는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거다. 그들 입장에서는 공고화된 질서를 위협하는 튀어나온 못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거거든.”
Channel 1. 로키
말은 잘난 듯이 했지만, 물주의 절규에 발을 동동 구르느라 밥을 먹지 못하고 있는 답답이 녀석을 보노라니 짜증이 났다. 나는 분명 녀석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할 것은 다 했다. 이곳에는 나름의 룰이 있고, 저 여자는 그 룰을 어겼으며,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취학 전 아동도 알아먹을 이 설명에 왜 이 녀석은 수긍을 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슬쩍 라흐마준이 담긴 그릇을 녀석에게 밀어보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라흐마준에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다. 이 자식...... 좌판 사장이 조금 식혀먹으랬지, 차갑게 식어버린걸 먹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왜 저렇게 나오나 싶다.
“야, 더 식기 전에 먹어.”
“......”
“나 진짜로 쿨 한 사람인거 알지? 내가 먹기 전에 얼른 먹어둬라. 나중에 기차에서 배고프다고 찡찡대지 말고.”
“......”
“아오. 정말.”
답답이의 침묵에 정말 짜증이 나서, 나는 후닥닥 라흐마준에 토핑을 얹고 내 식대로 레몬과 고춧가루를 팍팍 뿌렸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이 매워서 정신을 못 차리게 고춧가루를 평소보다 더 넣긴 했다. 일단 한입 가득 베어물어보니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혀가 얼얼해졌다. 나는 라흐마준을 녀석의 입에 물렸다.
“아오 매워! 뭐에요?”
“뭐긴 뭐야, 아나톨리아의 매운 맛이지. 근데, 지금 몇 시냐?”
“12시 40분이에요.”
“열차 출발까지...... 한 20분 남았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녀석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보니, 아까까지 적립된 짜증을 넘어서는 강한 짜증이 확하고 끼쳐왔다. 아니 정의심이 넘치는 건 좋다 이거다. 그런데 왜 자신의 의협심을 남에게 아웃소싱을 하느냔 말이다.
“입가심하게 커피한잔 사오려고.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됐어요.”
내 말에 우거지처럼 구겨진 답답이의 얼굴을 보노라니, 왠지 모르게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은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카페를 향해 가버리고,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피아들이 선적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물주분도 마찬가지여서, 게거품을 문채로 물건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마피아들 사이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대로 방관할 순 없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습니다만, 좌판의 점원과 주인이 동시에 제 어깨를 잡아서 그대로 자리에 앉혀버렸습니다.
“왜 그래요? 사람이 저렇게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왜 말리는 거에요?”
“아까침에 일행분이 말씀하신게 지당하니까 그런거요. 쩌그 처자분은 이 선착장의 질서를 헤집어 놓아븐거요.”
“질서라고요? 저렇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게?”
“쉿.”
주인께서는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고는 선적장 쪽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펴보았습니다. 뭐 그분에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피아들은 짐들을 헤집어 놓는데 정신이 팔려서 제가 지른 소리에는 신경도 쓰이질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아따 앵간이 좀 허씨요! 쩌 작것 들이 들어 불먼 워처케 할라고 그러는 거요. 쩌놈들 눈밖에 나가꼬, 즈그 창시 귀경한 놈들이 한 둘이 아니랑께라.”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야, 제 성질대로 하고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저 야차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근본적으로 저 부조리함을 바꾸지 못한다면....... 결국 고통은 좌판에서 라흐마준을 굽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몫이겠지요.
생각이 그에 이르러, 저도 결국 몸에 힘을 빼고 순순히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에.
“뭐여 디져 블라고 환장했소?”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이, 의외의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어서 옵쇼!”
“여기 모카커피 두 잔.”
“얼음 좀 탈 깝쇼?”
“........”
나를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부가적인 질문을 하는 종업원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질문을 똑같은 사람에게서 라스알게티에서 받았다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라스알게티가 아니라 프로하기온이지...... 안 그래도 물이 귀한 곳인데 얼음이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여행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분에 넘치는 사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리필 되죠?”
“30분 안에 오면 리필 됩니다.”
녀석의 정의의 사도 놀이에 장단을 맞춰주려고 나선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담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내 복잡한 심경을 알 턱이 없는 종업원은 얼음이 든 잔에 커피 원액을 가득 부었다.
나는 얼음이 담긴 모카커피를 부지런히 흔들면서 카페를 나섰다. 2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카페를 갈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가까운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얼음을 탔다지만 커피는 워낙 뜨거웠고...... 내 몸이 상하지 않으려면, 선적장에 도착하기 전까진 지옥에서 꺼내온 이 악마의 음료를 최대한 식혀야 한다.
그래도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었는지, 선적장에 도착했을 시점에는 내 손안에 담겨있는 커피가 적당하게 식어있었다. 그래 이만하면, 커피가 쏟아져도 크게 다칠 일은 없겠지? 그나저나 마피아 놈들도 참 대단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선적장에 단단히 고정된 물품들을 헤집어 놓는 것은 이곳의 기후 상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런데 그 힘든 걸 지치지도 않았는지 성실하게 해내고 있지 않은가? ‘악은 언제나 부지런하다.’라는 격언이 그냥 격언으로 끝나지 않는 순간이다.
어찌 보면 유치하고 허술한 각본일 것이다. 내가 서투른 연기자는 아닐 거라고 자평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울리는 연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정의의 사도 놀음’에 빠져있는 답답한 여자에겐, 시나리오의 치밀함을 살피는 혜안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거 참...... 오랜만에 손이 떨리는구만.
나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한창 재화를 집어던지는데 몰두하고 있는 청년 하나에게 다가갔다. 오른손이 들리며 말린 더덕이 날아가고, 왼손이 들리며 질그릇이 날아갔다....... 음 다행이네 걸음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저거에 맞을 뻔 했잖아? 나는 청년의 손에 무엇이 들릴지 지켜보면서 걸음의 폭을 조정했다. 그리고......
“우왁!”
녀석의 손에 종이 뭉치가 잡힌 걸 발견한 순간,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재빠르게 그쪽으로 달음박질을 했고, 하늘로 날아오른 종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가까스로 그것과 부딪칠 수 있었다. 허술하게 뚜껑을 닫아놓은 덕분에 커피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내 옷으로 튀었다.
“아 뜨거!”
내가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자, 물건을 집어던지던 마피아 단원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 입성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고 그 결과, 그의 기준에서는 내가 ‘별 것 아닌 놈’으로 인식되었는지, 상자에 고개를 박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걸 재개했다.
“이 보쇼. 당신이 던진 물건이 나한테 맞은 것 같은데.”
“........”
“그 덕분에 내 옷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닥쳐라 병신새끼야.”
“......”
착 가라앉은 톤으로 흘러나온 욕설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말았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나는 녀석의 등 뒤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다렸다. 녀석의 손에 들린 상자가 모두 빌 때 까지.
“아따, 징하게 우겨넣어놨구만...... 아오 지기럴! 깜짝이야.”
“.......”
다른 상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던 그는 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걸 깨닫자 화들짝 놀랐다. 나는 말없이, 그를 보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의 단호한 액션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넣었다가......
“아니지 아니야...... 뭐 이 새꺄! 뭐!”
“세탁비랑 커피값, 화상은 다행이 없는 것 같으니까. 치료비는 받지 않는 걸로.”
“왐마. 씨바 맷돌에 손잡이를 분실 해브렀구마잉. 아야, 느 이 바닥은 처음이냐?”
“아니, 여기 토박이야. 5년 동안 왕도엘 다녀오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이 고향인건 변함없는 진실이지.”
“여그 토박이면, 니가 이따구 포지션을 취해블면 곤란하제. 넘 마 샤울라 패밀리 들어봤냐? 안 들어봤냐?”
“아...... 들어봤지. 꽤. 많이.”
“왕도 물 들이켰다고 잰 체는 않하는 것이 느자구는 그럭저럭 갖춰 놨구마잉. 그럼 눈치가 있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제? 지금 엉아가 거시기 하느라 니랑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 난중에 이야기 하자잉.”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이...... 깡패 하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착 가라앉아 시종일관 침착한 로키군과 달리, 깡패 청년은 매우 격양되어 있었고, 그에게 침을 튀겨가며 욕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장판 속에 일어난 작은 소동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결코 작지 않게 느껴졌는지, 제 옆의 주인장도 라흐마준이 타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저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따 저 총각이 대가리에 화살을 맞아 브렀나 대체 뭐땀씨 저런디요?”
“어...... 글쎄요. 제가 알기론 그렇게까지 정의로운 축에 드는 사람은 아닌데......”
“아따, 핑 가서 말려야 하는거 아니요? 저대로 직진해 블면 고대로 황천길 갈 거 같은디......이?”
주인장이 말을 올리는 것도, 라흐마준이 타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는 것도, 그리고 입을 감싸 쥐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깡패 청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땅바닥에 패대기쳐졌거든요. 그 장면이 너무나도 극적이고 아슬아슬하여, 주인장은 물론이고 저 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좌판이 엎어지면서 음식이고 그릇이고 죄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렸지요.
“크아아..... 이 느자구 웂는 새끼가......”
“아직 사태파악이 잘 안되지?”
로키군은 바닥을 기는 청년에게로 다가가 그를 번쩍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곤 그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어요. 청년은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로키군의 손은 억셌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이글거렸어요.
“여기 책임자 누구냐?”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마피아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도 처음에는 멍한 얼굴로 작금의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로키군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었지만, 로키군은 내일 아니라는 듯 침착하게 자신의 손아귀에 들린 인질의 귀에 뭐라고 귀엣말을 했습니다. 청년은 뭐라고 로키군에게 항의를 하다가, 로키군이 옆구리를 푹하고 찌르자 목을 쥐어짜듯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책임자를 찾소. 얼른 나오씨요!”
마피아들보단 늦게 정신 차린 나머지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동안, 그 사이로 붉은 머리칼을 한 청년 하나가 걸어 나왔습니다.
“나가 책임자요. 뭐덜라고 나를 불렀소?”
책임자의 등장에, 로키군은 다시 한 번 인질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고, 마피아 단원은 로키군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진 않지만 ‘진짜 그렇게 말 하라고?’라는 것 같았어요. 로키군은 대답대신에 청년의 무릎 뒤를 걷어찼고 청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습니다.
“쩌그....... 커피 값하고, 세탁 비를........ 달라고 허요!”
인질의 외침에 모두들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건 마피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 그러니까...... 라흐마준 가게 아저씨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어요. 그는 뒤집개를 내려놓고 껄껄 웃다가...... 자신이 너무 크게 웃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로키군의 그 말은 저도 쿡 하고 실소를 흘릴 수 밖에 없긴 했어요.
마피아의 책임자도 ‘아따 저 새끼 대가리에 사진 좀 찍어봐야 쓰것는디?’ 라며 낄낄대며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바닥에 집어던졌습니다. 로키군은 인질에게 뭐라고 했고, 청년은 로키군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로 주섬주섬 돈을 챙겨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야, 돈은 잘 챙긴 거 같긴 한디, 그 거 가지고 세탁소에 갈 수나 있겄냐?”
“그건......”
로키군은 그의 질문에 눈을 치켜뜨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을 꺼냈습니다.
“그건 너 네가 몇 명이냐에 달린 문제 아닐까?”
책임자는 자신의 부관으로 보이는 마피아에게 ‘우리가 오늘 몇 명이 왔는가?’라고 물었고, 그는 ‘한 열 명 되제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로키군은 오늘 해온 말 통산 가장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했습니다.
“아, 그 정도면 좀 힘들겠는데?”
저는 태클을 걸기도 어려운 이 대화에 다리 힘이 풀려버렸지만, 로키군은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 갔습니다.
“괜찮아. 라스알하게에도 세탁소 정도는 있겠지.”
Channel 1. 로키
내가 벌인 촌극에 답답이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 저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어느 정도 내가 의도한 바를 다 이룬 것 같다.
허허실실이라는 옛말이 있다. 라스알하게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인데, 허를 찌르고 실리를 취하는 계책을 뜻한다. 이것의 유래를 이야기하는 고루하고 현학적인 건 그만두자. 상황이 상황이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는 말 할 수 있겠군, 내가 벌인 촌극으로 저 마피아놈들은 나를 그냥 ‘정신나간놈’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가 나의 실체에 대해 완전한 착각을 하는 것, 그것은 나 자신으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여유롭게 만드는 이점이 있다.
나는 인질에게서 돈을 넘겨받은 뒤, 녀석의 목을 탁 쳐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마피아 단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일 대 다수의 상황에서 심리적 우위를 점하려면, 약해보이는 녀석을 고르면 안 된다. 가장 단단하고 만만치 않아 보이는 녀석, 그 녀석을 선택해야 한다. 다수의 상대, 그 중에서도 강자를 먼저 처리한다면, 나머지는 심리적인 안정성이 무너져 ‘머릿수만 차지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 눈에 들어온 그 상대라 함은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는, 전문용어로 ‘근육돼지’타입의 사내였다. 내가 달려들자, 녀석은 자신을 지킬 요량으로 내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나는 몸을 왼쪽으로 움직여 피한다음, 녀석의 디딤 발인 오른발을 걷어차 버렸다.
“으익!”
녀석은 꽤나 볼썽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자빠져버렸다...... 우선 ‘한 놈’ 잡았고, 나는 기세를 몰아쳐 녀석의 등 뒤에 있던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자신의 심리적 안정성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을 앞 다투어 알려주려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나는 말안장에 올라타는 기분으로 여유롭게 한 녀석의 왼쪽 무릎을 타고 올라가, 허벅지로 녀석의 목을 감았다. 그 다음, 세 번째 녀석의 목을 팔꿈치로 걸은 뒤에, 반동을 이용해 둘을 한꺼번에 그 자리에서 내동댕이쳤다....... ‘둘 하고 셋’
사람정도의 높이에서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건 내게도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아픔을 내색 하진 않았다. 아니, 해선 안 된다. 녀석들의 기준에서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로 비쳐보여야 한다. 그것이 녀석들에겐 공포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감은...... 내게 큰 도움이 될 테지.
“뭐여 이 씨벌럼이!”
재빠르게 일어나자, 그나마 그중에서도 정신을 차린 축에 든 조무래기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호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리는 걸 보니 꽤 하는 놈이잖아? 그래도 공포감에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는지, 맞아줄래야 맞아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발차기가 내게 날아왔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녀석을 앉혀놓고 ‘이런 형편없는 공격을 하는 건 상대에 대해 좀 실례가 아닐까?’라고 훈계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허락된건 아니었다. 녀석은 아닐지 몰라도, 난 그랬다.
나는 어쨌거나 그 형편없는 발차기를 막은 다음, 그 발을 잡아 쭉 당겼다. 형편없는 발차기를 만든 형편없는 디딤발은 균형을 잃고 쭉 늘어났고, 나는 녀석의 혁띠를 잡아채 쫙 당겼다. 당황한 녀석의 얼굴이 내게 빠르게 다가왔고, 나는 그 꼴사나운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팔꿈치로 그 못생긴 얼굴을 갈겨버렸다...... 이제 ‘네 놈’째다.
이로서 기세는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왔다. 절반도 잡지 못했지만, 녀석들을 돌아보니, 나머지 여섯 명의 얼굴이 마른 우거지 마냥 팍 구겨진걸 보니 잡지 않아도 잡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려 있었고, 양쪽 다리 중 어느 하나도 탄탄하게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더 덤빌 거야? 비슷한 결말을 보고 싶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다.”
내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녀석들에게 다가가자, 녀석들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바로 이거다. 모든 종류의 싸움에도 예외는 아니겠으나, 일대 다수의 싸움은 항상 이런 식이다. 공포의 헤게모니를 누가 잡는가에 따라 반 이상이 결정되는 심리싸움이 그 본질이다. 나는 녀석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체크하기 위해 찬찬이 돌아보는데......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녀석들 중 하나의 눈이 아직 죽지 않았다. 녀석의 눈은 무언가 빛나고 있었다.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을 본 것 같은 그런 기색...... 무엇일까? 무엇이 녀석에게 쓸모없는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일까?
“조심해요 로키군!”
그 희망의 정체가 궁금하여 녀석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답답이의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먼지가 낀 하늘대신, 갈색의 길쭉한 물체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걸 노린 거였나?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타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파삭!”
도통 기다려도 타격감이 내 이마를 강타하지 않아, 무슨일인가 싶어 눈을 떠보니, 갈색의 몽둥이 대신 먼지 낀 하늘이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뭐......뭐시여 이게?”
상황이 의아한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마피아 단원은 자루만 남은 자신의 몽둥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통수에 두꺼운 책의 모서리가 날아들었다. 기습을 꾀하느라 되레 자신이 기습을 당하리란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 불쌍한 청년은 입에 거품을 문채로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주저앉는 녀석 너머로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답답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렇게 해도 지옥엔 안가겠죠?”
“혼자 갈 생각에 조금은 쓸쓸했는데, 길동무가 생긴 거 같아 다행이군.”
“아 쫌...... 난 죽어도 천국 갈 거 거든요?”
“마음에도 없는 조크긴 해. 근데 기도문에 상처만 회복시켜주는 기능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용도가 있었나봐?”
“기도문에 이런 능력을 가진 거라곤 생각 못했다고요.”
Channel 2. 아이리스
남은 마피아 분들이 다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동안....... 저는 주변을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주변으로부터 낯간지러운 시선의 조각이라도 주워섬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제 기대와는 크게 달라서, 주변에는 저로 하여금 낯간지럽게 하는 ‘감사함’의 마음보다는, ‘괜한 짓을 했구먼’이라는 한심해하는 감정만 맴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 말이 맞지?”
로키군은 어께를 으쓱하더니, 바닥에 떨어진 커피 잔을 집어 들었습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모를 겪은 잔에는 커피대신 모래만 한 가득이었어요. 그는 모래를 툭툭 털더니. ‘이거 리필 되는 거라니까. 다시 받으러 가자.’라고 말하며 제 어께를 잡아끌었습니다. 그에게도...... 이런 상황은 견디기 어려웠던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시선, 그리고 로키군의 태도를 보니 문득 경전에서 보았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아드님’이 산중에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실 때, 그에게서 평화와 안식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그 이야기를 했었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시는데, 그건 오햅니다. 나는 세상에 칼을 주러 왔습니다.’라고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잠깐 의문을 가졌을 뿐, 그 이후에 계속된 ‘아드님’의 메시지에 신경을 쓰느라 잊어버렸다고 해요.
잊혀져 버릴 뻔 했던 그 메시지를, 신학자들이 복원하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어요. 신학자들에 따르자면, ‘아버지’의 아들인 ‘아드님’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파격이었어요. ‘인성을 쓴 신성’, ‘육화된 말씀’이라는 존재는 2천여년에 가까운 신앙을 지켜온 쥬드에게도 낯설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지요. ‘아드님’의 존재를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사람들에겐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그것은 불화와 갈등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신의 아들이냐.’라는 입장과, ‘그가 이룬 기적을 보십쇼. 그게 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 할 겁니까?’라는 입장이 팽팽하게 부딪친 거지요. 요약하자면, ‘아드님’은 그 존재자체로 기존사회의 질서를 뒤흔들었다는 거에요.
저와 로키군의 행동...... 그러니까 마피아들을 퇴치해낸 것은 로키군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행위였어요. 고통스럽지만 그들을 지탱하게 해주던 질서 아래에 있던 이들에게는 저희는 ‘튀어나온 못’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을 겁니다. 하 참..... 이 말들은 로키군이 라흐마준 가게에서도 해준 이야기고, 라흐마준 가게 주인님도 해준 이야기였습니다만, 이렇게 막상 냉대를 받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네요. 참 저도 어리석고 못난 사람인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저희를 냉대한건 아니었어요.
“여기 커피 리필 좀.”
“예, 여그 있습니다.”
“아, 사장님 지두 커피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유?”
“.......?”
어찌나 열심히 달렸던지, 물주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저희의 행동에 유일하게 감사의 말을 건넬 사람이 있긴 있었네요.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 있던 물주 분,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깡패 자석덜이 죽자고 달려 들어가지고, 이걸 워째야 할지 참말로 다가 어떻게 혀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디,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셔가지고 몸이 뿌서지도록 고맙구먼유.”
라스알하게 특유의 길게 늘이는 표현, 그리고 느긋한 말투의 말을 듣노라니, 저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들어 가슴을 탕탕쳤지만, 물주분은 아랑곳 하지않고 감사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로키군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귀를 막고 커피를 들이 키고 있었어요.
“쩌그, 시간이 좀 되시며는 저랑 갔다가 쪼오기 밥간에라도 가서 식사라도 기가 한 술 뜨실래유? 지가 이곳에는 몇 번 내왕을 해가지고 밥간 맛난데는.......”
“아까, 이 녀석과 한 끼 했다. 미안하지만 밥 동무를 하는 건 무리일 것 같군.”
로키군은 조금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칼에 거절을 했지만, 라스알하게 출신인 그녀는, 라스알하게인 특유의 느린 말투와 고집을 끝내 버리질 않고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제안을 우리에게 던졌지만 그때마다 거절을 당했고, 결국 그녀는 최후의 수단을 던졌습니다.
“그럼 듣자하니까네 라스알하게 까지 가신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디...... 기왕 가는거 특실의자에 다가 다리 쭉 뻗고 가고 싶지 않으신가유? 프로하기온에서 라스알하게 꺼지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일곱 시간은 넘게 걸리는디......”
그 말에 로키군도....... 그리고 저도 눈이 번쩍 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곱 시간이나 걸린단......말이죠? 저는 로키군을 바라보았고, 그도 저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사는 분명히 주고 받은 것 같아요.
“뭐...... 그렇게 까지 나오는데,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한 노릇이군. 그럼 신세 좀 질까?”
“은인 분께서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쥬.”
“그럼, 열차표를 환불받고 가자고. 대합실로 가자.”
아아...... 로키군 당신은. 정말 알뜰한 사람이에요.